라일락꽃
덕풍동 그녀
라일락이 골목을 환하게 쓸고 간 후였다. 길가 집 열린 창틈으로 식탁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던 날이었다. 삼십 도를 웃도는 여름 밤, 그녀를 처음 본 날이었다.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땅을 내려다보며 발로 문지르고 있었다. 지워도 다 지워지지 않은 듯 일어서서 문지르다가 앉아서 무언가 다시 쓰고 있었다. 지우고 쓰는 반복, 블랙홀을 찾는 것일까? 어둠이 그녀를 삼킬 때까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구부린 등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불에 탄 잿더미 같았다. 조금이라도 손이 닿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국적인 모습. 나는 아마 베트남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걸음을 향해 침묵으로 소리쳤다. 가던 길을 돌아보게 하는 그녀는 나의 한 걸음 밖에서 만나는 느린 속도였다. 건조한 날씨였다. 그녀는 등에 슬픔을 가득지고 목을 움츠린 달팽이 같았다. 그녀는 흑색으로 이루어진 슬픔 같았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영혼같았다.
어느 날은 그녀로 인해 얼음장 깨지듯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어둠 속에 있는 그녀를 갑자기 발견하게 되는, 그믐 같이 웅크린 그녀는 숨을 들이쉬듯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베트남 노래 같았다. 그녀는 온통 땅을 낙서로 채우겠다는 듯 조금씩 몸을 움직여가며 여전히 무언가를 적거나 그리고 있었다. 작별 의식을 치루는 검은 색깔 같았다. 한 번은 새벽 2시가 한참 지났는데도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 세운 무릎위로 얼굴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녀만의 이야기들을 상상하였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과의 삶과 겉돌고 있었다. 더위가 들어왔다 빠져나가지 못하는 골목에서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없어도 되는데 있어야 할 사람 같았다. 어둠 속에 몸을 구겨 넣고 있는 그녀는 대부분 아홉시가 지나면 나타났다가 12시가 지나도록 어둠 속에서 까매지고 있었다.
이 어둔 시간이 그녀에게는 평화일까? 민들레 홀씨가 날고 찔레꽃과 넝쿨 장미, 여름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다닥다닥 붙은 주택단지 골목에서 낡고 낯선 풍경으로 나와 마주쳤다. 내게는 땅이 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목소리와 향수, 휴식, 결심일지 몰랐다. 정물처럼 쪼그리고 앉은 그녀는 이방인이었다. 경계에서 빈 껍질만 남은, 생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어둠을 배회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사근사근한 날이 언제일까?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외국인들이 사는 지하방과 옥탑에서 낯선 음식 냄새들이 번지고 있었다.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흑인 남자가 인사를 했다. 두어 명의 동남아시아 여자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자 골목이 텅 빈 것 같았다. 한동안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녀는 결말에 대한 막연한 암시만 던져주고 수수께끼 같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어디에 삶을 두고 왔던 것일까? 무엇을 바라고 부정하였던 것일까?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가 떠난 골목의 달빛이 무심하게 창백하였다.
어둠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던 생, 나는 가끔씩 삶을 앓을 때는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가 버린 그 자리에 앉아 내려놓은 나를 솔직하게 만나고 싶다.
계간 『시에』 2022년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