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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스크랩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황지우
소리울림 (서랑화) 추천 0 조회 70 18.07.05 0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황지우


#1.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정수가아아-- 목놓아 울어 버린다.

#2. 부산 스튜디오의 그 40대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까무라쳐 버렸다.

#3. 서울 스튜디오의 그 40대 남자는, 마치 미아가 된 열살짜리 아이가 길바닥에서 울듯, 이젠 얼굴을 들고 입을 벌린 채 엉엉 운다. 정숙이를 부르며.

#4. 아나운서가 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의 全身에는 지금 어마어마한 海溢이, 거대한 경련이 지나가고 있다.

#5. 각자 피케트를 들고 방영 차례를 기다리던 방청석의 이산가족들이 피케트를 놓고 박수를 쳐 준다.

#6. 카메라는 다시, 가슴 앞에 피케트를 내밀고 일렬횡대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지고--- 만오천이백삼번, 만오천이백사번...황해도 연백군, 함경북도 청진...형님, 누님, 여동생, 삼춘, 아버지, 어머니...

#7. 체구가 작은, 한복 입은 할머니 한 사람이 피케트를 들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 카메라는, '원산서 폭격 속에서 헤어짐'을 짧게 핥고 지나 버린다.

#8. 다시 화면은 가운데로 짤려서 한쪽은 서울스튜디오, 다른 한쪽은 대구스튜디오를 연결하고--- 여보세요. 성함이 김재섭씨 맞아요? 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맞아요. 맞어. 재서바아, 응. 그래. 어머니는 그때 정미소에 갔다오던 길이었지요? 미군들이 그때 폭격했잖아. 맞어, 할머니랑 큰형님이랑 그때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방안에 총알다섯 개가 들어왔다는 말 들었어. 맞어. 둘째 삼춘이 인민군으로 끌려가 반공포로로석방됐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맞지요? 맞어. 맞아요. 맞어, 재서바아. 어머니 살아계시니? 어머니이이---

#9. 화면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기 가슴을 치며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중계홀 중앙으로 뛰어나간 김형섭씨를 쫓아간다. 그는 조명등이 눈부시게 내려쬐는 천정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대한민국만세를 서너 번씩 부르고 있다.

#10. 남자 아나운서와 여자 아나운서가 그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끌고 왔을 때 그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계속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케이에스 감싸함다, 정말 감싸함다, 이 은혜 죽어도 안 잊겠음다, 한다.

#11. 남자 아나운서는, 아까 김씨 입에서 얼결에 튀어나온, 방안에 총알이 다섯 개 들어온 대목이 캥기었던지, 그에게 그때의 정황설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네 네, 그때 전 적지가 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올려고 했지요. 그런데, 중공군이 내려오고, 또, 이북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고 해서, 부랴부랴

#12. 화면은 이제 춘천 방송국으로 가 있다. 그리고 사리원 역전에서 이발소를 했다는 사람, 문천에서 철공소를 했다는 사람, 평양서 중학교 다녔다는 사람, 아버지가 빨갱이에게 총살 당했다는 사람, 일본명이 가네다마찌꼬였다는 사람, 내려오다 군산서 쌀장수에게 수양딸을 줬다는 사람, 대구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사람, 부산서 행상했다는 사람.

#13. 엄마아 왜 날 버렸어요? 왜 날 버려!

#14. 내가 죽일 년이다. 세째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15. 아냐, 이모는 널 버린 게 아니었어. 나중에 그곳에 널 찾으러 갔더니 네가 없드라구.

#16. 누나야 너 살아 있었구나!

#17. 언니야 왜 이렇게 늙어 버렸냐, 응? 그 이쁜 얼굴이, 응?

#18. 얼마나 고생했니?


- 시집『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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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 전 1983년 6월30일 시작된 KBS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장장 5개월간 이어졌다. 처음엔 TV로만 내보내다가 7월 6일부터는 라디오로도 동시 방송하여 당시 KBS의 모든 공간과 자원은 오로지 이 방송을 위해서만 기능했다. 황지우 시인의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그 재회의 현장을 방영한 TV 화면을 그대로 포착해 옮겨 놓은 것이다. 장면을 18개로 나눈 것 말고는 별도의 공정 없이 곧장 시가 되었다. 사실 이 극적 장면들은 달리 수식이나 가공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절경은 그 자체로 이미 시를 압도할 것이므로. 이 장면들 하나하나가 한국 현대사의 명장면들이고 국민 모두가 그들과 함께 통곡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어디 그뿐이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패티김의 애잔한 목소리는 그 여름 내내 국민의 귀를 맴돌았고, 전쟁으로 33년간 헤어진 가족을 찾아 KBS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이들의 모습은 전부 우리들의 눈과 가슴에 박혔었다. 단일주제의 깨지지 않을 최장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78%란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 그해 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이 ‘특별생방송’은 실로 거대 담론이며 일대 사건이었다. 다른 노림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두환이 잘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이 사태를 방치한 거였다. 더러는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고 선정일 때가 있다. 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본관 벽과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수도 없이 펄럭였다. 나붙은 벽보의 행진은 피와 눈물로 그린 집단 초상화였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퍼즐을 맞추고서는 "맞다, 맞아" 소리치고 통곡했던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다시 35년이 흘렸다. 남북이산가족 최종 상봉 대상자 100명을 추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헤어진 가족과 만나려면 지금도 570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95세 박성은 할아버지는 지난 2000년 이후 상봉신청을 수없이 했지만 올해도 추첨에서 떨어졌다. 이젠 영영 글렀다며 탄식하는 할아버지에게 적십자사측은 다음 기회에 꼭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했지만 기약도 시간도 없다. 이런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보면 어떨까. 다 때려치우고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조선중앙방송과 KBS가 이원으로 한 3개월 생방송하는 것으로.


 이춘희 아나운서와 김동건 아나운서를 메인 진행자로 내세우는 것은 자연스럽다. 간간이 현송월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불러주어도 좋겠다. ‘마침내, 그 80대 남자도 정수가아아-- 목놓아 울어 버린다.’ ‘평양 스튜디오의 그 80대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까무라쳐 버렸다’ 35년 전 우리가 흘렸던 눈물이 100드럼이었다면 500드럼쯤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될 것이다. 그 눈물의 적분으로 당연히 통일도 앞당기리라. 일이 잘 성사된다면 노벨평화상은 트럼프가 타기 전에 양 방송사가 먼저 탈 게 분명하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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