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열심히 쓴 원고인데, 어디에도 실리지 못한 불쌍한 원고입니다. 재미는 없지만 봄철 이야기이니 읽어주세요.
4월 식탁으로의 초대: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던 나물의 역사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산과 들에 이름 모를 풀들이 과연 먹을 만하고 영양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그 독성을 직접 먹어보면서 시험해보았다.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나물들은 거의 다가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거쳐 맛과 안전성이 보증되었다.
유월절 저녁에 유대인들은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일할 때 흘렸던 눈물을 상징하는 쓴 나물을 먹는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쓰디 쓴 나물을 골라 씹어온 것이다.
우리도 먹을 것 귀하던 옛날, 봄을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한국음식에서 특히 나물이 발달한 이유는 이 춘궁기와 관련이 깊다. 나물은 곡식이 부족할 때와 흉년이 들었을 때 구황식품으로 다양한 조리법으로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순무처럼 봄에 싹을 먹고, 여름에 잎을, 가을에는 줄기를, 겨울에는 뿌리를 먹을 수 있는 사철 채소로 흉년을 대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살생이 금지되어 육식을 멀리하게 됨에 따라 나물요리가 발달되기도 하였다.
국어사전에서 나물을 찾아보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의 총칭. 또 그것을 조미해 무친 반찬’이라 하였다. 즉 나물이란 채(菜)와 반찬 의 뜻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최세진(1473~1542)의 <훈몽자회 訓蒙字會>(1527)에 ‘채(菜)는 풀로 서 먹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채(菜)라 한다.’는 해석과 동일하다. 여기서 채(菜)는 ‘나물채’이다.
나물은 크게 산채 나물, 들나물, 재배나물로 나눌 수 있다. 산채나물로는 도라지 • 고사리 • 두릅 • 고비 • 산개 • 버섯 등이 있으며, 들나물로는 고들빼기 • 씀바귀 • 냉이 • 달래 • 물쑥 등이 있고, 재배나물로는 오이 • 아욱 • 가지 • 토란 • 고구마잎 • 상치 • 부추 •호박 • 풋고추 • 박• 무• 고추잎 • 파 • 마늘• 미나리 • 신감채 등이 있다.
요즘에는 비닐하우스 재배로 추운 겨울에도 봄나물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들도 겨울에 나물을 재배하는 지혜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마구간 앞에 움을 파고 거름과 흙을 깔고 신감채 • 산개(산갓) • 파 • 마늘 등을 심고 그 움 위에 거름을 더 퍼부으면 움 안이 더워서 그 속의 나물이 겨울에도 싹이 나서 자랄 수 있었다.
나물 없인 넘을 수 없었던 보릿고개
그렇다면 옛날에 나물도 다른 곡식이나 과일처럼 특산지가 따로 있었을까? 이것은 궁중 진상(進上)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조선조 전반기인 선조 이전까지 궁중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식품들은 모두 궁 밖에서 조달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의 각 고을의 특산물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물(소채류)는 예외였다. 워낙 지천에 널린 것이 나물이었고, 신선도 때문에 경기도를 벗어난 곳에서 진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이, 순채,동아, 가지,마 외에 조미료에 쓰이는 부추, 파, 마늘, 생강 등은 경기도에서 진상하였다. 다만 전라도에서 생강과 죽순을 특산물로 올렸고, 경상도에서도 죽순을 올렸을 뿐이다. 경기도에서 진상한 나물로는 고사리,승검초, 냉이, 두릅, 콩나물, 무순, 녹두나물,해흥채 등이 있었다.
오히려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의 <도문대작>(1611)에서 나물과 채소에 해당하는 소채류 음식과 그 명산지가 더 자세하게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동아는 충주 것이 좋다, 죽순은 전라 장성 이남에서 나며, 황화채는 의주사람이 중국 사람에 배워서 잘 만든다. 순채는 전라도에서 생산된 것이 가장 좋고 황해도의 것이 그 다음이며, 석채는 돌에서 돋는 순채로서 강원도 영동에서 많이 생산되고 가장 좋다. 그리고 무는 전라도 나주에서 나는 것이 지극히 좋고 맛이 배와 같고 물이 많다. 거여목은 원주에서 나는 것이 맛이 달아서 지극히 좋다. 표고는 제주에서 생산된 것이 아름답고 오대산과 태백산에도 있다, 토란은 전라와 경상도의 것이 좋아서 크고 서울 것은 맛은 좋으나 작다. 파는 함경의 삭령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외에 달래, 고수, 머위가 모두 좋다. 마늘은 영월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어린 시절에는 고위직책에 있던 아버지 덕에, 나이 들어서는 잘사는 집에 장가든 덕으로 산해진미를 맛보았으며, 임진왜란 때 전쟁을 피해 지내던 외가 강릉에서는 각종 기이한 해산물을, 벼슬길에 나선 뒤에는 전국 팔도를 돌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맛볼 수 있었던 허균은 유배지에서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각종 진미와 식재료 등을 기록할 수 있었다.
조카와 조카사위를 과거에서 부정 합격시켜려다 탄핵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자 그동안 먹어 본 일이 있는 산해진미들을 떠올리며 <도문대작>을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조 판서를 상대로 맛있는 음식이 많은 남원이나 가림(공주)의 수령으로 보내 달라고 수차례 관직 로비를 벌였으며, 심지어 귀양을 가면서도 새우와 게가 좋은 함열로 보내 달라고 로비를 벌일 정도로 식을 탐하였다.
한편 허균에 못지 않게 제주도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아내에게 음식물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탐식가였던 추사 김정희도 있다. 그런데 그가 꼽은 최고의 음식은 다소 의외였다. 충남 예산 추사의 고택기둥에 죽음을 앞둔 해에 직접 썼다는 글귀를 보자.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위대한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가장 즐거운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주를 만나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평생 맛을 탐하면서 얻은 결론이 바로 맛이 거친 나물에 대한 찬사였다.
나물의 맛은 손맛과 양념을 곁들여야 완성된다. 나물은 채소를 데치거나 기름에 볶아서 간장, 깨소금, 파, 마늘 등으로 양념한다. 이를 ‘숙채’라고도 한다.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은 각각 ‘3색 나물’이라 하여 한 접시에 담아서 잔칫상 혹은 젯상에 올랐다.
보통 콩나물이나 숙주나물 등은 데쳐서 무치고, 도라지나 우엉 등은 기름에 볶아서 양념하며, 더덕은 양념하여 석쇠에서 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데친다는 것과 삶는 다는 것은 다 같이 물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데친다는 것은 요리의 준비 작업이고, 삶는다는 것은 요리를 마무리하는 작업인 경우가 많다.
나물무침은 손으로 주물러 무치니 이 속에 손맛이 깃들인다. 나물을 무칠 때는 주로 사용하는 참기름은 비타민A의 공급원인 카로틴 색소의 흡수를 돕는다.
제철의 채소를 뽑아 깨끗이 씻어 날로 먹는 것을 생채 또는 생채나물이라 하는데, 이것은 소금에 약간 절인 것이나 날 것을 썰어서 초장 • 초고추장 • 겨자 등에 무쳐서 먹는다.
그런데 조선시대 요리에 생채요리가 매우 많을 것 같은데, 당대 요리서에 나오는 빈도는 매우 적다. 그것은 생채요리가 너무 간단하여 요리서는 일부러 소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배나물도 품질이 야생에 가까워서 쓴맛 • 떫은 맛 • 아린 맛의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대로 먹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월대보름날은 진채식(陣菜食)이라 하여 아홉 가지 이상의 나물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렇게 묵은 나물을 해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 풍습은 정월대보름이 지나고 이제 봄나물이 나올 터이니, 겨울을 나기 위해 말려두었던 마른 나물들을 맘 놓고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도 싶다.
밥이 곧 보약이라는 오묘한 진리
우리 조상들은 음식을 ‘약식동원(藥食同源)’, 즉 음식이 곧 보약이라고 생각하였다. 병을 가지고 신을 들먹이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음과 양의 두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 탓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음양의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질병도 치료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조는 <의약론>에 이렇게 적었다.
“식의(食醫)는 입으로 달게 음식을 먹도록 해주는 사람이다. 입이 달면 기운이 편안하고, 입이 쓰면 몸이 괴로워진다. 또한 음식에는 차갑고 더운 것이 있어서 그에 맞게 처방하고, 치료할 수가 있다. 그렇게 보면 입에 맞지 않는 쓰고 신 먹을거리나 마른 풀,썩은 뿌리라도 때로는 먹도록 도와줘야 한다. 즐겁게 먹는 것이 좋다 해서 지나치게 자유롭게 하여 음식을 절제하지 않도록 하는 자가 있는데 그는 식의라고 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음식은 약에 다름 아니다.
빙허각 이씨가 엮은 <규합총서>(1809)도 “봄에는 신 것이 많고, 여름에는 쓴 것이 많고, 가을에는 매운 것이 많고, 겨울에는 짠 것이 많으니, 이 네 가지 맛이 그 때의 맛으로 기운을 기르는 것이니, 네 계절을 다 고르게 하면 비위를 열게 한다.”고 하였다.
음양사상이 바탕이 된 식단으로 서민 밥상이 아닌 조선시대 왕의 밥상에도 채소와 나물이 많이 오를 수 있었다. 성종 12년(1481 년) 12월에 성종이 명나라에 다녀온 한치형에게 그곳 사정을 묻다가 중국 황제가 채식을 하느라 고생한다는 말에 “그곳은 맛이 좋은 소찬이 없는 모양인가?”라고 물었다는 대목이 <실록>에 나온다.
생채와 숙채는 조선말에도 이른바 12첩 찬품의 하나로 수라상마다 빠지지 않았는데, 박고지, 미나리, 도라지, 무, 오이 등이 쓰였고 잔칫상에도 도라지, 고들빼기, 배추, 녹두, 죽순 등으로 만든 생채가 올랐다.
채식의 중요성을 통찰한 기록은 또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기름진 육식만 배부르게 먹는 사람은 이레 동안만 먹지 않아도 죽는데, 겨와 찌꺼기를 먹는 백성이나 가난한 선비는 나물만 먹어도 스무날 동안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같은 조선시대 절대 군주의 균형 잡힌 식단은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당대의 영국 왕실 식단과도 비교된다.
1989년에 영국의 <오늘의 역사>라는 잡지에 실은 글은 헨리 8세의 다리와 발에 생긴 염증, 혈액순환이 안 되고,얼굴과 몸이 붓는 증상, 충치와 잇몸에서 피가 나고 고약한 입 냄새가 나는 증상, 코가 일그러지는 증상을 심한 괴혈병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6세기 영국 왕실에서도 채소가 풍부한 계절에도 채소를 많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채소는 농부나 가축들이 먹는 음식이므로 지체 높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반 서민들이 먹은 나물류는 현재 우리가 먹는 것들과 매우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산해진미 가득한 왕의 밥상이라고 해도 나물만큼은 조리에 기울이는 정성과 프로 궁중 요리사들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 가짓수만 많았을 뿐 별반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는 정조에게 올렸던 나물을 보면, 박고지, 미나리, 도라지, 무순, 죽순,,움파, 오이, 물쑥, 거여목, 신감초, 숙주나물, 겨자순, 파, 동아, 잡채, 도라지숙채, 도라지잡채, 육채, 도라지생채, 고들빼기, 애개생채, 생강순, 미나리생채, 무숙채 등이다.
그런데 이 당시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와 해삼 • 전복 등을 채로 썰어 볶아 겨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었으며, 당면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당면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된 것은 1912년 평양에서 일본인이 당면공장을 운영하던 중국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워 생산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 먹는 당면이 들어간 잡채는 1912년 이후 보급된 일종의 중국식 잡채이지 조선식 잡채는 아니다.
봄에 꽃놀이 가서 꽃을 먹다
봄이 되면 사람들의 몸은 원활한 활동을 위해서 특히 많은 비타민을 필요로 한다. 봄나물은 비타민이 풍부하다. 비타민C가 많이 들어 있는 냉이와 달래를 비롯하여 입맛을 돋우는 미나리, 두릅, 상추 등이 몸에 피로가 쌓이는 것을 막아 준다.
주먹같은 고사리요 향기로운 곰취로다
빛좋은 고비 나물 맛좋은 어아리다
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순 연한 것을
낱낱이 케어 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 한 쌈 입에 넣고 국 한 번 마시니
입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
우리 조상들은 1년을 24절기로 나눴다. 이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농업의 갖가지 풍속들이 이어진다. 이것을 세시, 월령, 시령 등으로 불렀다. 각 절기에는 맛있는 음식을 차려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가족과 이웃이 서로 나누어 먹었다.
그 절기 중 음력 3월의 중삼(重三, 3월 3일)은 원일(元日, 1월 1일), 단오(5 월 5일), 칠석(7월 7일), 중구(9월 9일)와 더불어 다섯 중절의 하나로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명절이다. 이때 봄 향기 감도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산과 들로 화전(花煎)놀이를 나가서 하루를 맘껏 즐겼다. 진달래꽃을 찹쌀에 섞어 기름에 지진 것이 진달래 화전이다.
이것을 ‘꽃다림’이라고도 한다. 옛날 서울 사람들의 꽃다림 장소로는 살구꽃이 피는 필운대(지금의 배화여고 뒤편)이나 복숭아꽃이 피는 북둔(지금의 성북동), 그리고 흥인문(동대문) 밖의 산들이 인기가 있었다.
봄바람은 조선시대의 여성들을 설레게 하였다. 상류층 여성들은 날을 잡아서 ‘화전(花煎)놀이’를 하였는데, 진달래꽃이 피는 봄에 부녀자들이 모여 진달래 화전을 지져 먹으면서 꽃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조선조 말기 궁중에서도 비원(창덕궁 후원) 옥류천에 나가서 궁녀들이 진달래꽃을 따서 그 자리에서 화전을 부치고 즐겼다고 한다. 이 화전놀이는 지금도 안동 하회마을의 유성룡 종가 댁에서 행해지고 있다.
화전(花煎)이란 찹쌀가루에 진달래꽃을 많이 섞어 반죽한 다음 둥그렇게 빚어내어 참기름에 지져서 꿀을 바른 음식을 말한다.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기슭의 경치 좋은 곳으로 양반 여성들은 솔거노비들의 도움을 받아 경쟁적으로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어갔다. 그곳에서 화전과 준비해간 음식을 자랑하면서 나누어 먹으며,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내외법으로 양반 부녀자들의 거리 나들이가 금지되면서 화전놀이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당시의 화전 음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화전은 찹쌀가루를 반죽해 동글납작하게 빚은 다음 진달래꽃잎(음력 3월)이나 국화꽃잎(음력 9월)을 얹어 지지는 꽃지짐으로, 봄에는 진달래꽃, 복숭아꽃, 배꽃을, 여름에는 장미꽃, 맨드라미꽃을, 가을에는 국화를 이용하여 지짐 외에도 떡이나 술을 만들어 그 꽃의 향기로 계절을 만끽하였다.
이밖에도 봄꽃을 이용한 요리로는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화면(花麵)이 있었다. 이때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에 섞어 반죽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꽃을 이용한 떡류는 대부분 찹쌀이 주재료였다. 조선 후기 안동 장씨 부인인 쓴 <음식디미방>의 꽃을 이용한 요리법을 보면, “메밀가루와 찹쌀가루의 비율을 2 대 1의 비율로 하며, 버석 버석하며 누릇하게 지져 더울 때 꿀물에 재웠다 꺼낸다. 진달래 꽃잎을 많이 섞어야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꽃을 먹을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꽃은 전, 떡, 화채, 술 등 다양한 방법으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해서 모두 먹을 수는 없다. 꽃가루 등이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암술, 수술, 꽃받침은 제거하고 사용해야 한다. 특히 화전이나 술로 담가 먹었던 진달래의 수술에는 약한 독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제거하고 꽃잎만 물에 씻은 후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한식에 먹는 그 나물의 그 밥
음력 3월, 중삼 다음 절기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한식이다. 한식은 설, 추석, 단오와 함께 4대 명절로 꼽힌다.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고 절기상으로는 청명 무렵이다. 또 식목일과도 종종 겹친다. 예부터 한식날을 기준으로 파종하고 한식날의 날씨로 한 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으니 농업으로 기반으로 한 우리 조상들에게 한식은 참으로 귀한 명절이었다.
한식(寒食)에는 한자의 뜻 그대로 찬 음식을 먹는 날이다. 물론 이때의 찬 음식의 주재료는 나물이다. 음력 3월의 식탁은 그야말로 나물의 향연이다. 찬 음식의 유래는 중국의 개자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춘추시대에 개자추라는 신하가 진나라 문공이 망명 생활을 할 때 19년 동안을 모셨지만, 문공이 귀국 후 봉록은 커녕 간신으로 몰려 노모와 함께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문공이 뒤늦게나마 잘못을 뉘 우치고 산에서 나오기를 아무리 권하여도 나오지 않자, 그를 불러낼 심산으로 산에 불을 질렀다. 그는 그래도 나오지 않고 늙은 홀어머니와 함께 껴안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타 죽었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개자추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기일엔 하루 동안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기>에 나오는 한식(寒食)의 기원이다.
하지만 한식의 기원에 대한 다른 근거도 있다. 주나라 때 봄이 되면 왕실에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새 불을 만들어 각 관청에서 나누어주는 ‘개화(改火)’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를 기해 백성들에게 묵은 불을 모두 끄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는 것이 정사(正史)이다.
이날 개자추를 기리기 위한 찬 음식과 한식을 기점으로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쑥을 이용한 나물음식을 주로 먹었다.
옛날 서울의 떡집에서는 맵쌀가루로 방울모양의 작은 떡을 이어 만드는 산병(傲供, 꼽장떡)이라 하고, 쑥을 넣어 둥글게 한 환병(環拼))을 만들었다.
한방에서는 들판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쑥이 겨우내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맛이 쓴 씀바귀는 쓴맛으로 식욕을 돋우는데 성질이 좀 찬 편이어서 몸속 열기를 식혀주는 작용이 있다. 특히 졸음을 쫓아내는 효과가 있어 춘곤증을 물리치기에는 제격인 나물이다.
전통 음식의 효용성이 현대과학으로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에는 쑥의 성분이 의학적으로 말라리아의 새로운 치료효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말라리아는 고대부터 인류의 큰 골칫거리였다.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말라리아는 열대 지방은 물론 아열대 지방에서도 발생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퀴닌-키나나무 껍질을 달여 만들었던 당시 말라리아의 유일한 치료제-을 대량으로 생산하던 지역은 인도네시아 자바뿐이었다.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넘어가자 미국은 급히 말라리아에 대한 인공 해독제를 만드는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클로로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약물들에 내성을 띤 더욱 치명적인 맹독성 말라리아가 등장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도 매년 3억 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되고 있으며 이 중 270만 명이 죽는다. 퀴닌을 대체할 새로운 약물의 필요성이 점차 커짐에 따라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 요법을 찾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찾아낸 약초 중 하나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로 사용하던 쑥이다. 쑥의 활성 성분인 아르테메테르에는 퀴닌 못지않은 말라리아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 음력 3월의 봄나물이 들어간 음식으로는 청포 • 돼지고기 • 미나리 • 김을 섞어 초에 무쳐 먹는 탕평채(蕩平菜)를 빼놓을 수 없다. 탕평이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인데, 영조는 당파의 탕평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듯 탕평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서남북 4색 당파를 각각 푸른색-흰색-붉은색-검은색으로 나타내고, 그런 색깔을 가진 재료(푸른색-미나리, 흰색-청포묵, 붉은색-고기볶음, 검은색-버섯)를 섞어 이처럼 여러 성향이 화합하니 그 맛이 묘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라는 교훈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
조선말기의 저자 미상의 조시서인 <시의전서>에 나오는 탕평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면, “묵을 가늘게 치고 숙주 • 미나리는 데쳐서 잘라 양념해 같이 무치고, 정육은 다져서 볶고, 수육도 채 쳐서 넣고, 김도 부셔 넣는다. 깨소금 • 고추 가루 • 기름을 섞어서 간장에 간 맞추어 묵과 함께 무쳐 담는다. 그 위에 김을 부셔 얹고 깨소금 • 고추 가루를 뿌린다.”라고 하였다.
대표적인 봄나물들
냉이
냉이는 봄나물이라 하지만 싹이 올라오는 11월부터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냉이를 봄 식물로 여기게 된 것은 봄에 꽃이 피며, 춘궁기를 버티게 해주었던 구황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냉이의 이름은 지역마다 나시, 나이, 나싱이, 나생이, 나싱구, 나싱개, 나승개 등으로 다양하다. 나물과 나무는 그 어원이 나마새로 같다. 식물 중에 먹을 수 없는 목질의 것은 나무, 먹을 수 있는 풀과 나뭇잎 등은 나물이 되었다. 따라서 냉이가 나시, 나이, 나싱이, 나생이, 나싱구, 나싱개, 나승개로 불리운 것은 그만큼 옛날부터 냉이가 나물의 '대표'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냉이는 낮은 기온에서도 잘 견디는 식물이므로 온실을 만들 것도 없이 비닐만 덮어도 수확 시기를 당길 수 있다.
냉이는 <동의보감>에서 제채(薺菜)라고 하며 간을 튼튼하게 해주고, 오장육부를 조화롭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봄나물 중에서 비타민C와 비타민B1이 가장 풍부해 나른함과 피로를 없애주고 눈을 맑게 해준다. 이외에도 이뇨작용이 뛰어나 소변 배출을 원활하게 해주고 장 기능을 도와 변비를 없애주는 효과도 있다.
곤드레
곤드레의 국명은 고려엉겅퀴이다. 최근 강원도의 건강식으로 유행하고 있는 곤드레밥으로 유명해졌다. 향이 은근하여 밥과 잘 어울린다. 곤드레는 ‘술에 취해 정신을 놓은 상태’를 이르는 곤드레만드레와 관련이 있는 단어로 흔히 오해하지만, 민들레, 둥굴레와 같은 계열의 식물 이름이다. 곤드레는 보통의 산나물과 달라 맵거나 톡 쏘는 휘발성의 향이 없어 삼시세끼 몇 달을 먹어도 탈나거나 질리는 일이 없다.
곤드레는 겨울을 난 땅 속의 뿌리에서 이른 봄 잎을 올린다. 6월이 넘어가면 질긴 섬유질이 들어 있는 이때의 곤드레 줄기와 잎은 먹지 못한다. 그러니 4월에서 6월까지 곤드레를 먹을 수 있다.
정선에서는 고랭지 배추를 심던 땅에 곤드레 나물을 심고 있다. 곤드레밥이 유행하면서 그 수요가 점점 늘어나서다. 곤드레 역시 따로 비료나 농약을 치는 일이 없다.
두릅
두릅나무의 새순을 두릅이라 한다. 예부터 농가 주변에 두릅나무를 심어서 가지 끝에 새순이 나오면 이를 따서 먹었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쳐야 색깔이 좋아진다.
요즘에는 재배 두릅이 흔해지면서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두릅을 구별하기 위해 나무두릅 또는 참두릅이라고도 부른다. 숲이 울창한 곳에는 두릅나무가 없고 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바위산에 두릅나무가 많은데 강원 철원의 산들이 대체로 이렇다.
두릅에는 칼슘이 특히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이 고루 들어 있다. 피를 맑게 하고 대하중 에 효과가 있다고 하며, 줄기에서 나오는 즙은 화상을 입었거나 벌레에 물렸을 때 약재로 쓰인다.
달래
달래는 매운맛이 나는 상큼한 봄나물의 대표 주자이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동굴에서 삼칠일 동안 먹은 음식은 쑥과 마늘인 것으로 흔히 알고 있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 쑥과 마늘이 나온다. 〈고조선조〉에 나오는 마늘은 지금의 큰 마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산마늘, 산부 추. 달래에 가깝다.
달래는 섭씨 25도 이상 되면 잎줄기가 시들어 여름 이외의 계절에는 온도 조절만 적절히 하면 한 해에 3~4회 연이어 지을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 소산(小蒜)이라고 부르는 달래는 비장과 신장 기능을 원활하게 하여 기혈순환을 촉진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비타민C와 칼슘이 풍부해서 감기와 빈혈 예방에 좋으며, 음식의 소화를 돕고 노화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익혀 먹는 것보다 생으로 먹는 것이 주요 영양소를 효과적으로 섭취하는 방법이다.
현재 서산의 달래가 생산량이 많고 유명하다. 서산은 마늘, 파, 쪽파, 백합 등 백합과 식물 재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곰취나물
곰취는 해발 5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주로 자라며, 잎사귀가 넓어 산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산나물이다. 4월부터 6월까지의 여린 잎을 생으로 먹는다. 독특한 향 덕분에 돼지고기구이를 싸 먹으면 좋다. 대표적인 곳으로 강원 인제군의 점봉산, 방태산, 가칠봉 구역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근래 도시민들이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면서 야생 곰취가 급격하게 사라졌다. 한 포기에 잎사귀 몇 장은 남겨두고 뜯어야 곰취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거나 욕심 많은 도시민들이 포기째 뽑아 그렇게 된 것이다. 포기째 뽑지만 않으면 그 자리에서 계속 자란다. 곰취는 간장에 설탕과 식초로 담가두고 1년 내내 먹을 수 있다.
쑥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각지의 들에 난다. 식용하는 부분은 잎으로서 독특한 향기가 있고, 잎의 뒷면에는 우윳빛 솜털이 돋아나 있다.
단군신화에 곰이 이 쑥을 먹고 환웅의 아내가 되어 단군을 낳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은 쑥을 단순한 식품이 아닌 신성한 채소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단옷날 이른 아침에 쑥을 뜯어다가 세워 두는 풍속을 볼 수 있다.
쑥은 단백질과 필수지방산 함량이 많아서 영양적으로 매우 우수한 식품이다. 쑥은 또한 비타민 A와 C, 칼슘, 철분이 풍부하며, 쑥떡이나 쑥국 등으로 봄철의 미각을 돋우어 주는 좋은 식품이다. 한방에 서는 위장병, 변비 •신경통, 냉병, 부인병 및 천식 등에 효과가 있는 한방 약재로도 이용되었다.
논두렁이나 냇가의 습한 곳에서 자라는 물쑥은 아주 이른 봄부터 나오는데 온실에서 재배하지는 못한다. 쑥 종류이지만 잎 모양이 전혀 달라서 잡초로 생각하기 쉽다. 이른 봄에 뿌리째 뽑아서 줄기와 잎은 버리고 뿌리만 먹는데 진한 향이 난다.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는 서울에서 봄날에 즐겨먹던 음식으로 쑥굴리를 들었다. 쑥굴리에 넣는 소는 매우 다양하였다. 서울 맹현의 쑥굴리 만드는 방법은 먼저 쑥을 데쳐 찹쌀가루와 섞어 절구에 넣고 찧은 후 도넛 모양으로 만들어 끓는 물에 삶아서 방망이로 친다. 그리고 대추를 깨끗이 씻어 술과 설탕에 버무려서 하룻밤 불린 대추소를 준비한다. 이 대추 살을 잘게 다져 꿀을 조금 넣고 반죽하여 쪄서 만든다. 쑥굴리는 맛과 향기가 좋아서 봄날에 별식으로 뿐 아니라 잔치음식에도 올랐다. 쑥은 맵쌀가루와 버무려 쪄서 ‘쑥버무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고사리
산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나물로는 고사리를 꼽을 수 있다. 예부터 잔칫상이나 제사상에는 반드시 삼색 나물을 갖추는데 갈색 나물로 반드시 올라간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고사리를 독이 있는 풀로 분류한다. 300년 전에 영국의 식물학자 글레퍼는 “고사리 줄기를 삶아 먹으면 기생충을 박멸 할 수 있으나 임산부가 고사리 순을 먹으면 태아가 죽는다.”고 하였다. 중국의 <본초강목>에도 “고사리는 유독하며, 오래 먹으면 눈이 어두워 지고 코가 막히며 머리가 빠진다. 많이 먹으면 발이 약해져 잘 걷지 못하게 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고사리를 즐겨 먹어 왔다. 날것에는 비록 유독한 성분이 있지만 끓는 물에 삶거나 우려내고 물에 충분히 씻으며 다시 볶아서 나물을 만들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미나리
미나리는 줄기와 잎을 식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줄기만 먹는다. 한방에서는 혈압 강하,해열,일사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무기질 중에 칼륨이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을 고루 함유한 알칼리성 식품이다. 미나리를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혈액도 깨끗해진다고 하는데 특수한 정유 성분과 무기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언양 미나리가 궁중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는데, 이곳의 미나리광은 땅이 모래가 많은 사양토이고 가지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려 미나리를 잘 자라게 한다. 얼음이 녹은 후 연한 싹이 봄볕을 받고 쑥쑥 올라와서 3~4월이면 봄미나리가 제 맛이 난다. 음력 2월 말부터 한 달에 한 번 정 도로 대여섯 번 수확한다. 35cm 정도 자라면 잘라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썩어 버리기도 한다.
살짝 데쳐서 나물을 하거나 미나리강회를 만들면 특유의 상큼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미나리강회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상투모양으로 도르르 감고 그 속에 잣을 박아 넣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봄철의 상큼 한 맛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참고 서적>
피터 하우젠,<왕실 미스터리 세계사』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제임스 콜만, <내추럴리 데인저러스>
경향신문사, <한국의 맛>
한복진,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2>
이귀주, <서울의 전통음식>
황교익, <맛있는 여행>
이성우, <한국식품문화사>
이성우, <한국요리문화사>
이성우, <고대 한국식생활사 연구>
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한복진,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문화>
함규진, <왕의 밥상>
첫댓글 단시간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나물에 관해 훌륭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읽다보니 쑥굴리가 넘 먹고 싶네요~^^
제철나물 많이 먹고 기운내서 열심히 달려야겠죠?!!
허균 아저씨도 김정희 아저씨도 나물 무칠지 모를거예요. 그렇다고 식탐을 포기 할 수는 없겠지요? 저도 봄이 좋은 이유중 하나가 봄나물을 먹을 수 있어서 이기도 합니다.ㅎㅎ
나물에 대한 훌륭한 논문에 감복합니다.
특히 나물과 관련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은 추사고택에서 보았습니다.
추사선생은 출세보다는 가족과 함께 나물을 먹으며 사는
소박한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여긴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