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한 장 넘어간다
화단의 녹보수가 시름거리기 시작할 때
나는 얇은 녹색 셔츠를 다려 입고
개미 떼를 피해 걸어다녔다
집처럼 드나들던 삼성동 역사(驛舍)에
어느 하루는 거기에 네가 있었다
사랍 천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산과 새가 그려진 앙상한 팔을 늘어뜨린 채로
식물보다 진한 녹색으로
백 년 묵은 나무처럼
최후로 최초의 우리가 공생한 도시에서
서로의 손금을 읽고 함부로 점지했던 나날
인간의 회귀 본능을 곧잘 믿었던
그해 유월 어딘가
일념(一念), 곧 차라(叉拏) 혹은 찰나(刹那)
그래 우리의 두 발이란 얼마나 무용한 기관이었는지······
나는 방랑을 타고난 죄
너는 사랑을 타고난 죄
태생적 우연으로 뿌리 한 줄기 얽고 살았을 뿐이라는 걸
훗날 근방을 파헤치기 전까지 영영 알 수 없었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