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를 읽고(다빈치0)
몇 해 전인가 “I am Sam"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숀팬이 정신지체자로, 우리가 믿어왔고 지키려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해체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애 그리고 특히 부성을 보여줬던 영화였던 걸로 기억된다. <<각주 -일반인 정상인이라는 표현은 장애인들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인거 같다. 인구통계학적으로 정규분포에 해당하는 개체를 정상인(정규분포)이라 하고 표준편차를 벗어나는 개체(오차)를 장애인이라 하기 名하는 것으로 인간을 구분하게 된 거 같다. 이름짓기(名 )를 통해 개념 혹은 정의가 성립되고 그로 인해 구분되고 분류되는 것인 거 같다. 그래서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만나는 다수를 정상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여기서 각주를 다는 이유는 “미운오리새끼”의 이야기도 사회와 자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다 더 따뜻하고 진실한 부성애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감동적이였다. 그런데 왜 굳이 영화의 제목을 "I am Sam"이라고 했을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6세의 지능을 가진 정신지체자 그리고 홀아비..... 비틀즈를 좋아하는 순수한 영혼...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Sam은 우리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지만 영화는 제목에서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그저 Sam일 뿐이라고.
미운 오리새끼는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동화이다. 미운오리새끼에서 아름다운 백조가 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고 있던 정체성을, 자아 본질을 찾는 이야기인 것이다. 결코 오리는 백조가 될 수 없고 백조 또한 오리가 될 수 없다. Sam이 그냥 Sam이 듯이 오리는 오리이고 백조는 백조일 뿐이다. 미운오리새끼가 “다른 것을 다르게 같은 것을 같게”라고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자신을 괴롭혔던 속박이나 굴레를 벗어나 “오리이기”를 그만둘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냥 오롯이 백조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오리형제와 고양이, 개, 토끼들이 보여주는 자기들과 다르기 때문에 가해지는 차별과 미움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어설픈 분별은 미망(迷妄)만을 쌓고 그릇된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이 독선을 낳아 차별을 가져온다. 아니 차라리 차별이라면 좋다. 인류사에 그릇된 믿음이 가져온 불행은 너무나 큰 재앙이 되어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다. 더나가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좀 못사는 나라 사람이라고, 혹은 출신 지역이 어디라고 차별하고 “패거리”를 짓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차이”일 뿐이다. 다름이 미움으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사자와 사슴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미운오리새끼”가 동화라는 점을 볼 때 아이들은 몇 가지 궁금함을 가지게 될 거 같다. 오리와 백조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혹은 오리와 백조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고귀한 존재인가?를 아이들 식으로 묻는다면?) 그럼 왜 백조가 더 우월한 존재인가?(동화에선 아름답고 날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된다)
미추(美醜)라는 극단이 있듯이 동양에서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들녘에 그을린 농부의 주름진 얼굴에서도 슈퍼모텔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반드시 백조가 오리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고귀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동화라는 장르의 속성상 아이들에게 인간이 만들어온 상징 속에 백조란 우아하고 고귀한 새로 그려져 왔다는 정도의 학습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과연 미운오리새끼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흥부놀부를 읽고 착하게 살라든지, 효녀 심청이를 읽으면 효도하라 든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우리 전래동화 중에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쥐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을 찾아 여행을 떠나 태양, 구름, 바람, 망부석 만나 겪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태양은 구름이 가리면 빛을 발하지 못하고 구름은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바람은 망부석을 쓰러트리지 못하고 망부석은 쥐의 이빨을 무서워함으로 결국 겁쟁이 쥐가 “쥐”로서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안데르센 동화인 미운오리새끼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백조인 자신을 발견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내용이다. 이제 막 갈매기 조나단 시걸처럼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더 높은 무엇가를 추구하거나 혹은 선재동자처럼 구도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선(禪)의 십우도(十牛圖)에서 소를 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키워준 오리 엄마와 오리 형제에게로 돌아오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리 문화는 가족의 단위를 혈연으로 한정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내다보며 “적어도 아시아에선 우리가...”라는 자긍심을 가진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영아수출국이라는 불명예를 지닌 나라인 것도 사실이다. 서양에서 다같은 하느님이 자녀이기 때문에 입양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교적 가족관이 해체되는 지금 결손가정, 핵가족화, 미혼모 등으로 발생하는 아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낳은 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른 정”의 의식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