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아 지
권 원 선
이랴!
소장수가 고성과 함께 엉덩이를 털썩 친다.
한가로이 누워 새김질하던 소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맴돈다.
소장수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인다.
목측계량이 어느 정도 끝날 즈음 이내 흠잡이가 시작된다.
“목사래가 시원찮아 일은 잘못하겠고 엉덩판이 영 부실해”
“뱃가죽도 쥐어보곤 생각보다 부실쿠먼”
-온통 흠투성이다-
이내 흥정이 부쳐지고 거간꾼의 조정으로 빳빳한 새 지폐뭉치가
손사래 치는 아버지께 쥐여진다.
“올여름 더 먹여봤자 별 큰 소득 없을거 같소”
내 그래도 개똥 아범 각별한 사이라 잘 쳐준 값이라며
연방 서운해하시는 아버지를 달래셨다.
내 아무렴 소 장수 편이겠수? 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그러나 항시 거간꾼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소 장수 편이었다.
이 소는 “의리 소”였다.
의리 소란 원주인이 돈을 대어 송아지를 사주면 이 송아지를 기르는
사람이 원금의 송아지 값을 제하고 나머지를 반분하는 것으로서,
그 당시 아궁이에 나무를 때어 취사, 난방하는 시절, 불도 때고 또한 외양간에서
나오는 두엄(소똥과 깔아놓았던 짚이나 풀)은 좋은 비료이었으며,
힘은 들지만 그래도 농촌에서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때 시골에서의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이렇게 해서 쥐어진 돈은 곧장 원주인에게 돌려지고 아버지 몫으로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아버지는 세고 또 세셨다.
“내 이번 수원장날 소장에 간다”
하시며 거간꾼과 함께한 막걸리에 상기한 듯 벌건 얼굴로 팔린소를
아쉬워하며 내내 잠 못 이루셨다.
텅 빈 외양간이 왜 그리도 허전했던지---
일을가르쳐 놓은 소 였기에 농번기를 맞으며 떠나는 소에 대한 미련 때문에
아파하시는 아버지 마음에 나 또한 아파했다
(이후로 우리 집은 의리 소는 매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장에 가시던날
우리 식구는 모두 아버지를 배웅했고 새로 올 송아지를 기다렸다
서너 시경에 마중 나오라시며 떠나신 아버지, 해가 넘어 어둑해질 무렵이나돼서 야 수풍넘어 동네어귀로 아버지께 억지로 끌려오는 송아지,
한달음에 달려가 고삐를 넘겨잡고보니 그 송아지는 내 기대와는 사뭇다른
볼품없는 삐쩍마른 송아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돈에 목살 좋은 송아지는 엄두도 못 냈고 파장에 이르러서
겨우 산 송아지임에랴---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성은 지극하셨고
나 또한 진짜 우리 송아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이른봄 새싹의 풀들을 나물 채취하듯 꼴망태에 가득 채워 날랐으며
그 여린 풀도 아버지는 작두에 잘게 잘게 썰 것을 주문하시면서
소죽 또한 푹익혀야 한다시며 불을 때고 또 때었다
난 부모님의 일 시키는것 중 소죽쑤기를 가장 싫어했었다
시계 하나 없던 우리집에 시간가늠하기는 불가능했고 무척오랜시간을
불을 때야만 겨우 솥뚜껑 사이로 눈물이 나오는데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러나 그로부터도 한참을 뜸들이며 더 때야 했었는데 아버진 더 익히라신다
쌀겨에, 콩깍지하며 때로는 콩 도 함께 여물에 넣어 소죽을 쑤곤 했는데 어쩜
사람보다 더 호강하듯 보였다
나는 이른 봄 송아지를 끌고 풀을 뜯기려 집을 나서곤 했는데
이럴땐 으레히 책을 들곤 했다
(지금 소작이나마 글을 옮길 수 있는건 아마 이때부터의 습작습관이라 보며
부모님의 채근 덕이라 감히 칭송한다.)
송아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돼갔고 소잔등은 반들반들 윤이 돌았다.
초여름을 맞을 즈음 여느 때와 같이 송아지를 몰고 풀을 뜯기며 책을 보느라
남의집 콩밭으로 들어가는 송아지를 보지 못했다.
아이쿠 저걸 어째?
깜짝놀라 허겁지겁 고삐를 당겼지만 도저히 내 힘으로 당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송아지가 이만큼 커져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끌어내어 집에 몰고 와서는
“이젠 안 되겠어 오늘 저녁에 코를 뚫어야겠다” 하시곤 이것저것
준비하시면서( 난 그때 애벌 코뚜레를 처음 보았다)
따라나서려는 나를 마다하시며 혼자 가셨다.
얼마후 돌아온 송아지의 코는 코뚜레가 끼워져 있었으며
연신 흐르는 피를 훌쩍이며 꼼짝도 못하였다.
난 한편 꼼짝못하는게 통쾌하면서도 측은해 하였고 상스러움을
내게 보이지않으려 하셨던 아버님의 배려에 지금도 감사한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그 송아지는 일터로 향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어린소를? 하며 비웃었지만 소 품하나가 인품 두몫이다보니
아버지는 홀앗이로서 감당키 어려웠고 너무 억울해서였으리라.
나와 내동생은 매번 밭갈이에 코뚜레를 쥐고 앞장섰으며 좀 익숙해질 무렵
쌍 고삐를 매고 혼자 쟁기질하시는 아버님의 솜씨에 마을 사람들은 감탄했다.
이 소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황소가 되었으며 잘 조련된 일소는 마을 일을 도맡
았다. 또한 이 소는 일 잘하는 소로 인정되어 부농가로 팔려가고 그 돈이 종잣돈
되어 동네 문전 답을 사는 근원이 되었다.
지금도 우린 이 밭을 보존하매 분명 그때 그 송아지는 우리 집의 커다란 희망과 행운의 송아지였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그 “애벌 코뚜레”를 우리는 간직한다.
이사할때마다 챙기시던 부모님의 정성에 사모하며,
마치 보물처럼...
우리의 가보처럼...
우리집 안방의 고상과 함께 나란히
교만해 지려는 나를 채찍질 한다
끝
*필자註 <개똥이>: 필자 어렸을적 아호
수풍: <쇳골> 마을 입구 병풍처럼 둘려처진 큰 나무 숲
첫댓글 그 송아지 참 고맙고 기특했네요.
가세를 일으켰으니 말이예요.
영화 '원앙소리' 후편같기도 합니다.
아버님의 지혜로우심, 책 들고 소 먹이는 목동, 코뚜래를 체찍으로,
서정적인 수필 잘 보고 갑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소 팔러 장에 가시는데 울고 가던 소가 엊그제 처럼 생각납니다.
왜 그렇게 그 울고 가던 소가 잊혀지지 않던지...
추억을 되 살리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공감과 감동이 울컥 밀려오는 글입니다.
저도 소꼴먹이러 다녔었지요~ ' 의리 소' 라는 말 처음 들어봅니다만
가슴이 시립니다.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선배님.
앗~~~!!
숨겨진 명 문장이 여기 계셨습니다.
감칠맛나는,
어젯일 같은 느낌이 절로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새해에도 행복하세요.
회장님의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졸업전에 한자리 같이 했으면해요 감사합니다
어릴 적 동네 개똥이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내려오질 못했다는 ...
우리 어릴 적 순박한 이야기가 보따리를 플었네요
집집에 보물이었던 누렁소 외양간 음메소리가 정겹던 시절
글 속에서 향수를 느낍니다 건필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