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통해(꼭 그럴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만^^)무협소설의 지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무협지는 많이 읽히는 장르의 문학이다. 내 또래의 젊은이들 중에서 김용의 {영웅문英雄門}에 한번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며 용대운이나 사마달의 신작 같은 경우는 초판만 10만부 정도를 찍는다니 그 성가를 알 만하다. 요근래 환타지 소설의 진군이 무협지의 대중소설 분야 독과점에 그림자를 드리우긴 했지만 아직도 무협지는 우리가 펄프 픽션이라 부를 수 있을 대중소설에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무협지는 우리의 옆에 숨쉬고 있다. 고수들은 폐관에 들어 움직이지 않을 뿐 또다른 혈겁은 다가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협지는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최근 비슷한 대중예술 장르인 영화나 만화가 누리고 있는 인문학적이며 사회학적인 관심에 비교할 때 의아할 정도로 무협을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몇년 전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출간을 계기로 그 역사가 일천한 환타지 문학이 문학논쟁의 전면에 떠오른 상황과 비교하면 그 무관심은 신기할 정도이다. 물론 무협과 환타지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특히 {폴라리스 랩소디}의 경우 작자가 순수문학적인 질문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데 그 의의가 남다르다. 하지만 이 질적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무협의 걸작들에 대한 무관심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 지금 대만이나 미국 중문학계에서 진행되는 무협소설에 진지한 논쟁들을 보면 이 무관심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아마 이 무관심의 기저에는 산업적 고려가 있을 것이다. 영화나 에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커다란 사업이고 출판만화와 환타지는 에니메이션, 게임, 케릭터사업의 기반이 된다. 최근 가장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 두 가지, "리니지"와 "디아블로 II"가 모두 환타지적인 배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이런 산업적 연관을 증명한다. 순수하게 출판의 관점에서 봐도 환타지 문학은 또 {드래곤 라자}나 {바람의 마도사}등의 성공을 통해 확실한 판매위주의 소비자 계층을 확보했다. 일류의 출판사들이 자회사 형태로 속속 환타지 출간에 나서는 데에는 이런 산업적인 가능성에 대한 샘빠른 눈썰미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산업적인 활용성과 좀더 가치있는 독자층은 무협지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이 시대에 만들어진 무협영화가 {비천무}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왜 검궁인의 역작 {월락검극천미명}이나 용대운의 걸작 {태극문}, 하다못해 사마달의 {절대지존}이 아니란 말인가? 단순히 영화적 기법의 문제인가? 이 "무협"영화는 무협지의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화와 환타지의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무협지라면 설리(김희선)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무협지가 그 사회적 지점의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는 그 유통의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신문의 책광고에서 특별한 예-김용이나 그 레벨의 몇몇 중국 작가들이나 요즘 무협의 탈을 쓰고 나오는 환타지들-를 제하고 무협지의 광고를 본 적이 없다. 무협지의 선전은 기본적으로 만화방이나 대본소 아주머니들이라는 인적 네트워크만을 이용한다. 당연히 독자층은 보던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다. 누군가 나에게 무협지를 어디서 사느냐고 묻는다면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의 후미진 구석을 제외하고는 잘 모르겠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 무협지는 판매가 아니라 대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무협지의 유통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거대 자본이 아니라 만화방 소자본이다. 산업적인 매력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무협지에 대한 지적 무관심의 밑바닥에는 무협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의미가 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무협지의 세계는 일면 권선징악적이며 봉건적이다. 선인, 아니 주인공이 죽는 무협지를 본 기억은 가물가물하며 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아니면 민족적인 대의에 충실하지 않은 주인공은 더더욱 본 적 없다[검궁인의 숨겨진 걸작인 {절대마조}는 주인공이 철저한 악당이라는 면에서 특이하긴 하지만 결국 익숙한 내러티브를 반복한다. 아마 이런 공식의 행복한 예외는 하성민의 {악인지로}일 것이다.]. 더구나 그 숙명성. 무림의 현자는 천년후의 혈겁을 예견하고 그를 막을 방법을 일(一) 초(招)의 검법에 남겼으니 열 몇 살 주인공의 손에 수백년 음지에서 무공을 닦은 불쌍한 마두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져 간다. 그래서 무협지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순명(順命)적이다. 고귀한 혈통의 주인공은 언제나 일순의 영락을 딛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야 만다. 천하제일인의 아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그 아버지의 이름(nom de pere)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그의 복귀는 기이한 혈통의 대의명분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주인공을 지배하는 가치는 이 개인적인 원한을 덧칠한 피가름의 대의명분이거나 그 사적 원한의 확장인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적 펄프 픽션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의 펄프 픽션은 누아르(Noir)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경계의 미학으로 우리 무의식의 죽음충동(tanastos)를 충족시키지만, 우리의 무협지는 에고의 영역에서 올곧게 충과 효와 철지난 의를 전파한다.
무협지의 봉건성은 그 안의 여성에게서 더욱 가열차게 드러난다. 무협지의 여성들은 탈봉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봉건의 여인상에서 자유로운 그들은 프리 섹스를 즐기기도 하고 남장을 하고 남자의 자리를 노리기도 하고, 무림 제패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자유로운 여성들이 송옥(松玉)과 반안(潘安)-중국사 오천년에 미남이 이 둘 밖에 없는지 항상 이 둘이다. 이 가공할 무협지의 자기복제성-을 닮은 주인공을 만나기만 하면 그들 시대의 봉건적인 여인상으로 다소곳이 돌아간다. 주인공은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것은 예사지만-내가 세어본 바로는 와룡강의 {화룡왕}이 처첩의 수에서는 가히 추종을 불허한다. 가공스럽게도 천 이백명 하고도 우수리-, 이 여인들은 일부종사(一夫從祀)의 원칙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말로 들어와도, 지킨다. 하지만 무협지에서 음모의 주체인 마두가 살아남는 경우는 있어도 회개하지 않은 음녀(淫女)가 살아남는 걸 본 사람이 있는가!
이 봉건성이 암시하는 무협지의 의미는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함의를 가진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쪼갤만 한 고수들마저도 국가권력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는 내러티브가 얼마나 역대의 통치자들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였을까? 권위주의 정권 시절 무협지가 비록 2차적인 유통망을 통하긴 했지만 한 번도 진정한 의미의 규제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박영창의 {무림파천황}의 필화건은 예외-은 무협지의 이데올로기적 순응성(順應性)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무협지에 대해 상용되는 분석, 즉 무협지의 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림으로 해서 현실에서의 도피를 조장하고 현실적인 억압을 잊게하는 기제라는 분석도 분명 무협지의 이데롤로기적 순응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만한 주제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분석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분석은 엄밀한 사회과학적 분석, 즉 유통경로의 경험적 확인이나 당통(Robert Darnton)류의 지식사회학적 분석과 독자층(readership)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하는 데 나는 그게 귀찮다. 더구나 이런 분석은 무협지를 지나치게 수동적인 기제로 파악하여 그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무협지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분석보다는 훨씬 다층적이며 그 의미는 억압적이기도 하고 해방적이기도 하다.
그럼 무협지가 가져오는 심층적인 억압에 관해 살펴보자. 무협지의 여인상은 두 가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먼저 무협지는 여인을 철저히 객체(客體)화 한다. 무협지의 주인공이 여자인 법은 없고 모든 여인은 주인공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음녀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일부 다처제의 환상은 무협지가 우리 현실에서 일종의 대체(代替) 도색소설로 기능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거의 모든 무협지를 읽지만 와룡강의 것만은 읽지 않는데 그의 소설은 소설 내용의 절반 이상이 상투적이어서 전혀 관능적이지 못한 정사장면의 묘사로 채워져 있다[여담이지만 진정한 정사장면 묘사의 고수는 천중행이다]. 하지만 그-혹은 집단창작체제의 그들-의 소설이 줄기차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소설이 분명 대체기능을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하다.
이런 도색적 요소는 일부일처제를 위한, 더구나 성적으로 억압된 우리 사회에서, 이념적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무협지는 우리의, 남자들의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 우리를 열광케 한다. 김영민의 영민한 분석처럼 '황비홍'이 왜소한 현대의 남성에게 가지는 의미를 무협지는 끝없이 재생산한다. 강하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며, 가지고 싶은 여자는 누구나 가지는. 하지만 이런 욕망의 드러내기 뒤에는 교묘한 감추기의 기제가 작동한다. 우리는 무협지를 더더욱 황당한 것으로 만듦으로써(예를 들어 {영웅문}의 희대의 장법 '강룡십팔장'은 나무를 간신히 부러트리지만 우리의 무협지 주인공은 산 하나는 예사로 날린다) 우리의 욕망이 비현실적이라고 강변한다. 처첩의 수가 두 셋이라면 우리는 분개하지만, 아니 분개하는 척 하지만, 처첩의 수가 열 명이라면 웃고 만다. 이런 감추기-드러내기의 사회적 의미는 더더욱 다층적이다. 우리는 감추기를 통해 우리 안의 욕망과 가부장적 권력을 숨기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한 숨김은 현재의 억압을 강화한다. 반면 드러내기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 효과를 가져와 숨김을 더욱 효율적으로 하면서도 우리의 내밀한 욕망들을 잠재적으로 교육하고 끝내는 재생산한다.
하지만 무협지가 이런 억압의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무협지 속에는 깊이 숨겨진 해방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의 분석을 위해서 우리는 무협지라는 장르의 내러티브가 가지는 특성을 살펴 보아야 한다. 무협지의 대표성 있는 내러티브는 몇 가지 요소들을 시간적인 순서에 맞춰 따른다; 1) 비범한 출생 : 주인공은 고수의 아들이다. 2) 버려짐(원한의 계기) : 그는 정상적인 성장의 환경을 가지 못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3) 기연(奇緣) : 전대 고수의 비급이나 그를 위해 준비된 세력이 있다. 4) 출도 : 1차적인 수련을 마친 주인공은 출도한다. 5) 활약 : 그는 기존의 무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6) 좌절 : 음모의 주체나 마두를 만나지만 패배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7) 결정적인 기연 : 그를 위해 예비 되어있던 마지막 기연을 만나 의심할 바 없는 최강이 된다. 8) 음모의 주체와 결정적인 검결을 벌인다. 9)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 이런 이야기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 무협지는 극소수이며[예를 들면 좌백이나 백상의 작품. 하지만 나는 백상의 경우는 전형의 파괴가 아니라 비틀린 정형의 자기복제라고 본다], 그들도 이들 중 몇 가지 요소들을 가감할 뿐 전체적인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협지가 봉건성의 굴레를 넘어 다른 의미, 심지어 해방성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바로 결정적인 검결이 갈등의 해소로 이어지는 국면이다.
무협지에서 이 검결은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절정이다. {마검패검}이나 {독보강호}같이 일반적인 무협지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되는 신무협 계통의 용대운의 작품이나 {대붕이월령}이나 {추룡기행}같은 한국 무협지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이 특이한 운중행의 작품들도 이 최후의 검결이란 도식을 빗겨 가지는 못한다. 무협지를 무협지답게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폭력일 수밖에 없는 무공이기 때문에 이런 폭력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라 할 것이다. 만약 이 구도를 벗어난 무협지가 있다면-비근한 예로 최근의 영화 {와호잠룡}은 무협영화가 결코 아니다-그건 무협지의 언어를 이용한 다른 무엇일 뿐이다.
문제는 이 검결이 폭력적이고 필연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검결이 보지하는 의미이다. 무림의 세계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회적인 갈등의 우의적인 표현이다. 한 쪽의 정도는 모든 정의를 독점한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회적 기득권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중원의 중심에서, 한족(漢族)으로서, 토지자본에 기대어(그 많은 무림세가(武林世家)들이 백도라는 사실), 이데올로기를 독점하고(유·불·선의 정통 종파들은 모두 백도에 포함된다), 사회적인 질서를 재생산한다. 이에 비해 마도는 중원의 변방에서(주로 마교의 본부는 곤륜산맥, 지금의 서장지방이며, 무협지의 또다른 악역들인 묘족은 운남에, 원의 잔당들은 고비사막과 내몽고에 위치한다), 상업자본을 중심으로, 대항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마교 / 백련교라는 이름은 명말 청초를 거치며 미륵불(彌勒佛) 하생(下生)신앙과 결합한다), 끝없이 사회질서를 전복하려 한다. 즉 무협지의 갈등양상은 우리가 생각하듯 간단한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며 무협지의 작자들도 더 이상 그런 이원론에 기대지 않는다. 무협지의 대사 중에 아마 가장 빈번하게 나올 말은 "백도의 위선"일 것이며 주인공은 언제나 정·사의 중간에 선 자이거나 진정한 백도를 세워 정·사를 회통(回通)하길 꿈꾼다.
그런 주인공이 회통을 이루는 방식은 바로 일 대 일의 검결이다. 주인공과 마두의 검결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런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생각은 일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인다. 무협지의 갈등이 그렇게 복합적인 것이라면 그 해소의 과정 역시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 정파 제일인의 아들과 마도 일인자 사이의 간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갈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그 갈등을 한 판의 검결로 승화시켜 해소해 버린다. 천하를 혈세(血洗)하고도 남을 힘을 지닌 제마(諸魔)들도 그들 우두머리의 패배를 곱게 수락한다. 여기에서 이 결정적인 검결의 사건으로써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사(正邪)간의 복합적인 갈등의 구조가 심층에 위치하고 있다면 무협지의 공간은 그 심층의 표면에서 벌어진다. 무협지의 작가들은 굳이 그 심층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표면의 사건들이며 그들이 가져오는 결과이다. 이 표면의 사건은 심층의 대립을 일순간에 해소시키며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꿈을 실현시킨다.
여기에 무협지의 인기의 비결이 있고 이들이 가지는 해방의 의미가 있다. 물론 그 순진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무협지가 꾸는 꿈은 사건을 통한 문제에서의 해방이라기 보다는 문제 자체의 엄폐에 가깝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언제나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성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만약 이런 식의 사건이 우리의 유일한 출구라면 나는 차라리 근대의 감옥에 머무르리라. 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협지가 제시하는 방식이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다. 결정적인 검결의 순간에. 정·사간의 이해관계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대결에 어떤 공통된 합의를 이룬다. 분열된 백도도,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사도의 거장들도. 이러한 순간적인 합의는, 아니 합의의 순간은, 무협지적 공간과 시간을 창출해 검결이라는 사건으로 구조의 전복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런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역사의 많은 중요한 변화는 이런 순간적인 합의에 의해 방향지워져 왔다.
나는 무협지의 문제해결 방식을 우리의 사회문제에 대입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에게는 무협지의 영웅과 마두처럼 대표성을 가진 인물도 없고 그런 인물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다. 상징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이런 전부-혹은-무(all or nothing)식의 검결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런 정치의식은 어쩌면 우리에게 무협지적 사유가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에 불과하다. 더구나 한국 정치의 상당한 문제점들이 이런 사유의 과잉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태껏 무협지적 사유의 나쁜 면만을 개발시켜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협지의 의미가 그렇게 고착된 채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협지적 순간의 역동성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순간적으로 봉합되고 초월되는 순간. 역사는 이 순간 움직이고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