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송동현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말이 있다.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사자성어로 소유하는 삶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소유하는 삶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기 쉽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은 불쌍해 보인다. 이게 과연 절대적인 진실일까?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이에 대해 에리히프롬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나는 현재 행복한 사람인지 알아보자.
1. 내가 행복한 이유
소제목부터 알 수 있듯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지금 왜 행복한 것일까? 내가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깨어나라, 물질의 소유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미망에서 벗어나라!”라고. 이 책을 보기 전까지의 나는 가진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선 절대적으로 더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에 가까워지고, 더 적게 가진 사람이 행복에서 멀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을 달랐다.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 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타고난 욕구가 하나 더 있었다. 생각해보니, 군대에 있었을 때 난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마음가짐을 가졌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1년 반 있을 거 죽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보자, 뭐라도 얻겠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졌었다. 군생활에서 ‘나’라는 존재를 없앴다. 정체성까지 없애진 않았지만, 나의 모든 자존심과 모든 이기심을 내려놓았다. 잘못한 게 있으면 내가 먼저 사과하고,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수용하려 노력했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를 뽐내기 보다 상대방의 말에 집중했고, 정말 하기 싫어도, 정말 부당하다 느껴도 일단 하고 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을 하면 할수록 적응이 되었다. 처음에는 힘들어도 나중에는 사과하는 것도, 말을 잘 듣는 것도, 작업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주변에서 나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처음에 나는 실수투성이에 말귀 못 알아듣는 신병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스(ACE)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내가 내려놓지 않았다면, 내가 사회에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자존심과 습관들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군대에서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을 태어나서 처음 배웠고,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적으로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고, 전역한 지금도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과 연락을 하곤 한다. 그 당시에는 정확한 이유를 몰랐지만 소유적인 모습의 나를 잊어버렸기에 행복한 군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군 전역 이후, 복학한 학기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책 읽기’이다. 나는 학창시절 책을 읽은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책에 무지 했는데, 심각성을 깨달아 마음을 정한 것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책 읽는 시간에 재밌는 유튜브 영상이나 SNS 활동을 하지, 재미없고 지루한 책 읽기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군대에서 성공을 맛본 사람이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힘들지만 책을 읽을 것이란 확신. 이게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전자책 어플을 받아 정기 결제를 하고 읽기 시작한지 어언 1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전자책을 5권이나 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별한 습관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내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통학시간, 수업이 끝나고 남는 시간, 자기 전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읽기 시작했고 5권의 전자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반드시 SNS에 독후감을 작성하는데, 쌓여가는 게시물을 보는 재미에 나는 요즘 행복하다. 나는 이것 역시 나의 쉬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소유적인 삶) 나의 관심이 향하는 곳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인 덕분(존재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2. 소유적인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한 일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적인 삶을 살고 있던 것에 대해 놀라움을 경험했었다. 물론 아직 많이 성장할 부분이 남아있지만 적어도 내 선택이 비합리적인 선택 혹은 비논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나도 확실히 느끼는 건, 나를 버리기 전과 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과거에 정말 소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심적으로 불안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봤을 때 정말 후회한 일들이 많았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려한다.
첫 번째는 중학생 때 친구들을‘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었을 때가 있었다. 그렇다. 나는 친구를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이기적이지만, 그 당시에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명목 하에 불화를 발생시키기 싫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집안이 나에게 엄하기도 했고, 자존감도 낮아 소심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고 내 신발을 밟고, 나를 빼고 놀러가고,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나에 대한 험담을 했다. 거기서 나는 그냥 웃어넘기거나 모르는 척을 했다.
이런 불안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나는 무리에서 제외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더니 오히려 친구들이 떠나갔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내 생각에 당시 나는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을 잘못해석한 것이라 생각한다. 고립을 벗어나려는 타고난 욕구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선택한 것이 내가 친구들에게 만만하게 보인 주된 요인인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중학생 시절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군대가기 전, 친구와 나 자신을 계속 비교하면서 친구가 잘난 것에 항상 우울했던 것이다. 누구나 남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그것은 소유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할 때 소유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인 사람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고 한다.
나는 당시 ‘나에게만’온 신경을 썼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면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보여지는 나를 생각했고, 친구들과 놀러갈 때면 친구들 사이에 섞여있는 나만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집중할 수 없었고, 그것은 곧 나를 깎아 먹는 행동이었다. 내가 만약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변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너무 후회되는 일 중 하나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후회되는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너무 후회했다. 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더라도 정말 좋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게 너무 후회가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지식에 대한 소유개념을 ‘보다 많이 아는 것’으로 정의했다. 존재개념은 ‘보다 깊이 아는 것’으로 정의했다. 나는 정해진 교육과정 틀 안에서 공부를 하여 아는 것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해 어떤 분야에 깊이 뿌리를 내린 분야가 없다. 다행히도 나는 대학교에 합격해 지금 전공이라는 심화공부를 하고 있지만, 내가 만약 존재개념을 빨리 알아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았다면 좋았을 것이기에 후회하는 일중 하나이다.
3. 존재적인 삶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
이전까지는 내가 행복한 이유와 나의 삶을 돌아보며 소유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소유개념은 없어져야 하는 개념인 것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음의 효과만 주는 개념인 것인가?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말하고 있다. “이 고찰들은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 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의 결정은 그 어느 한쪽 성향으로의 해결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 부분 달려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 말에서 알 수 있듯 우리의 결정은 사회경제적 구조에 따라 하나의 성향을 선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결정이 어느 한쪽 성향에 치우쳐 있다면 극단적으로 갈 수 있다. 극단적으로 가게 된다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대부분 존재개념보다 소유개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존재개념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나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이유로 존재개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능동적인 행동을 실천할 수 있다.
2. 실패에 두려워하지 않고 배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3. 상대방에게 무한정으로 베푸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존재개념을 가져야 하고, 이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책을 읽게 되어 매우 만족스럽다.
대오각성(大悟覺醒)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크게 깨닫는 것과 깨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자성어이다. 나는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대오각성을 얻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유개념과 존재개념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소유개념만 알고 있던 나는 너무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러나, 존재개념을 알고 있는 나는, 현재 행복하다. 내가 존재하는 것,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연락할 가족들이 있는 것이 만족스럽다. 우리들은 자본주의사회개념인 소유개념에서 약간은 벗어나 존재개념을 익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삶이 우울한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걱정은 넣어두고 잠시만 현실과 떨어져서 자신이 존재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소유개념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 과정 속에 분명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