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4월25일은 김교신(金敎臣)선생이 세상을 떠난 76주기 되는 날이다.
김교신(1901-1945)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44년을 이 땅에 살다 해방 4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난...존경하는 선생을 기억하고자 한다.
선생은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박물학을 전공했다. 1920년 야라이초 홀리네스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후,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게서 7년간 사사받았다. 1927년 귀국한 뒤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될 때까지 발행하는 한편, 함흥영생여고보,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후학들에게 기독교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동인들과 구독자들이 검거되어 함석헌, 류달영 등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 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훗날 손기정은 김교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 같은 분이셨다”
손기정의 ‘비범하셨던 스승님’이었던 김교신은 양정고보에서 그의 교사생활 중 가장 긴 12년을 근무했고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이기도 했던 김교신이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의 요청에 따라 자동차로 앞서 달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손은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뛰겠다”고 했다 한다.
이찬갑 선생과 함께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를 설립한 주옥로 선생은 ‘김교신 선생 20주기 기념강연’에서 이렇게 평했다. “그는 평민적인 진정한 기독자이며 성서 신앙의 확립자요, 진리에 근원한 애국자요, 우리 역사 최초의 참된 한국인이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 (전 동경대 총장)은 “김교신 씨는 참 조선인이었다. 그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조선말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민족애는 고루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온유, 근면 등 조선인으로서의 생래의 도덕이 그에게는 믿음에 의해 한층 순화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애국을 삼았다. 조선인의 영혼을 새롭게 살리고 이를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백성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그 귀한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민경배 교수 (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장)
“그는 선교사 주도의 경건한 피안적 신앙의 보수주의적 본거지인 황평, 영남의 교권자들을 공격하면서 소위 반구미적 기독교의 조선화에 힘썼고 아울러 철저한 애국적 신앙으로 시종 반일의 반골로 남아, 알알이 민족 기독교의 찬란한 이미지를 굳히고 그 수확을 보면서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다들 전향하던 날에도, 영구한 민족의 운명과 거기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 그 소재에 불멸의 희망을 빛나도록 밝히고 떠난 김교신은 민족 교회사의 정상에 서 마땅한 신실한 성도이다.”
김교신 선생은 스스로 노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교신 자체가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고 한다. 양정고보 교사 시절에는 마포에 있던 학교와 정릉 집 사이를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정릉 시냇가의 돌을 주워 직접 자신의 서재 건물을 지었고, 교사생활이나 ‘성서조선’ 편집과 별도로 밭을 경작하고 과수를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했다. 그것이 교신의 신조였다.”라고 니이호리 구니지의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에 기록하고 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한 김교신은, 출옥 후 더는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고향 근처인 함경도 흥남으로 가서 공장에 취업했다. 흥남질소비료공장(일본 해군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후생 관계 업무였다. 당시 이 공장에는 약 5000명의 조선인이 징용돼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근로과 직원이 된 김교신은 후생, 노무, 의료, 주택 등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생활환경 개선에 진력했다. 성서조선 그룹의 핵심이던 노평구를 불러 교육계 업무를 맡기고,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 제자 류달영을 불러 농장을 관리케 해 채소를 노무자들에게 공급했다. 이 시기 김교신을 지켜보던 의사 박춘서는 1945년 3월 30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인들은 김계장을 호주(戶主)로 가장으로 믿고 살아간다.”
강철같던 김교신 선생도 이 엄청난 과로를 이기진 못하고 45년 4월 18일, 자신의 생일에 쓰러져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당시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쓰러진 것이다.
민족의 교사였다고 평가받는 선생을 기념하면서 그를 뵌 적 없는 나는 오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보면서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부끄럽지 않는가를 반성한다.
선생이 살던 때보다 엄청난 지식의 진보와 민주주의 확립, 종교의 자유, 자본축적으로 민족의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도시에 가득한 빨간 십자가 탑을 보면 대한민국은 기독교가 국교라 여길만한 기독교의 세력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선생의 정신은 승계되지 못한다.
대립과 갈등으로 사분오열된 모습을 치유하고자 동지들과 시작한 ‘성서부산’은 출범한지 10년도 넘었지만 지금은 해체되었다. 이제는 시민사회속으로 깊이 뿌리내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이 땅에 평화를 심는 일, 창조세계를 지켜내는 과업을 포기하지 않고 가열차게 전진할 일이다. 영웅들이 지배하던 시대가 아닌 위대한 평민들이 우리 사회를 산상수훈 공동체로 가꾸어야 한다.
오 주여, 이 열정에 다시금 당신의 기름부으심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