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4주년을 맞은 경상일보가 창간특집 기획물로 "집성촌(集姓村)을 찾아서"란 새로운 연재물을 시작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집성촌의 과거를 되짚어 보고 오늘의 모습을 투영시켜 내일을 설계해보기 위함이다.
성(姓)이란 테두리로 형성된 집성촌은 부모의 양성을 넘어 무성(無姓) 운동마저 일고 있는 오늘, 잠시나마 과거로의 여행에 독자들과 함께 떠나고자 한다.
집성촌을 통해 점차 사라져 가는 공동체적 사고를 되찾아 보는 것도 후세의 작은 노력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집성을 이루며 살던 당시와는 달리 삶의 정체성이 급속히 변화된 지금 그 모습을 찾기는 그리 쉽지많은 않을 듯 싶다. (편집자 주)
(1)들어가면서
영도 하씨, 성남 신씨 등 외국인들의 귀화로 새로운 성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지난 85년에 실시된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274개 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대략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300개 안팎의 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가운데 김(金), 이(李), 박(朴) 등 3성이 전체의 절반을 넘어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들 서울에서 돌을 던지면 김서방, 이서방, 박서방 중에 한명이 맞는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1962년 울산시 승격 이후 산업화의 요람으로, 산업수도로서, 또 광역시로 41년동안 급성장해버린 울산광역시. 마을단위의 삶에서 대도시의 삶으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많이 변했다.
또 굳이 따지자면 농사가 전부였던 시절이 현대화를 거치면서 다양한 직종으로 다분화되면서 자연 마을단위의 삶이 도시로 옮겨갔다.
집안 개념의 가족이 이제는 부부와 자녀만을 중심으로 한 핵가족으로 자리를 옮겼다. 8촌간은 한솥밥을 먹는 관계라는 말은 이제는 새삼스럽다.
마을 이름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말해주던 시절에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곳에 집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울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10여개가 되는 것으로 기록 속에 남아 있다. 또 다른 곳에서 유입된 뒤 울산에서 터를 잡음으로써 집성을 이룬 성씨도 울주군 지역의 읍·면마다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마을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같은 성의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마을을 떠나버려 이제는 과거에서만 그 흔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곳도 적지 않다.
임진왜란(1592~98년), 병자호란(1636년), 그리고 민적법 시행(1903년), 창씨개명(1939년), 조선성명복구령(1945년) 등은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씨족 개념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요인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규모 외침을 당하면서 본관을 중심으로 지근의 거리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피난지에 안주, 새로운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식읍을 받아 새로운 본관을 가지기도 했다.울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만도 여러 개가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울산 김씨, 울산 오씨, 울산 박씨, 울산 이씨, 학성 이씨 등등.
울산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아홉째 아들이자 마의태자의 동생 김덕지를 시조로, 14세손인 김환을 중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 조선시대에는 본관인 울산보다 호남에서 4대 명족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또 중국의 소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소주 가씨는 시조 가유약의 묘소를 울주군 서생면에 두고 있기도 하다.
학성 이씨는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답게 공강파, 농소파, 봉사공파, 월진파, 현령공파 등으로 나뉘어 농소 달천, 웅촌 석천, 남구 신정동 등 울산 곳곳에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학성 이씨 시조 이예가 고려말~조선초 불사이군을 내세워 울산으로 낙향, 일찌감치 터를 잡았다. 또 이휴정, 석천리 이씨고가 등은 부장품 등 우리에게 귀중한 민속자료와 문화유산을 남겼다.
이와 앞서 울산 이씨는 고려 고종때 현재의 울산인 학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울산으로 정해 교위공파, 승훈공파, 첨정공파, 참봉공파, 군수공파 등으로 번창했다.
이같이 울산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와 함께 울산에 입향조들이 터를 잡아 집성촌을 형성하며 울산의 곳곳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성씨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 때 울주군 삼동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분포를 보이며 번성한 영산 신씨를 비롯해 단양 우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경주 김씨, 광주 노씨, 보성 선씨 등이 삼동지역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또 진주 강씨, 경주 김씨, 김녕 김씨, 고령 김씨, 광주 노씨, 울산 박씨, 밀양 박씨, 해주 오씨, 강릉 유씨, 동래 정씨 등도 웅촌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밖에 평해 황씨, 남양 홍씨, 광주 이씨, 광산 김씨, 재령 이씨 등은 서생 등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경주 김씨는 명촌리와 천전리에, 동래 정씨와 문화 류씨는 상북면 지내리를 중심으로 대표적 집성마을을 형성했다.
또 두서를 중심으로 경주 최씨, 중구 다전을 대표하는 달성 서씨 등도 집성촌을 이룬 대표적 성씨들이다.
이밖에 많은 성씨들이 골마다 들마다 집성을 이뤄 제실을 중심으로 공동체 삶을 영위해오고 있다.
반구대와 천전리 각석의 역사가 말해주듯 울산의 역사적 유래가 깊은 만큼 많은 성씨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기에 이들이 이룬 집성촌도 성마다 골마다 산재해 이를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2)청량면 수문마을 남평문씨
문다성 38대손 정호 300여년전 입향 고려말 충신충선공 문익점이 중시조며 정호는 문익점의 15대손 !
무거동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부산쪽으로 얼마 가지 않으면 문수산의 동쪽 입구인 울주군 웅촌면 율리를 만난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오른 쪽에 문수분교 안내 입간판이 보이고 신호등을 만난다. 1차선에서 신호를 받아 왼쪽에 나 있는 샛길로 접어들면 남평문씨(南平文氏)들이 모여 살고 있는 수문(殊門)마을을 찾아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군 지역 여느마을의 진입로와는 달리 시멘트 포장에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어서 제대로 찾아왔나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입구를 제대로 찾았기에 곶장 길따라 가면 된다.
문수산(門殊山)의 문수를 뒤집어 마을이름을 딴 수문마을은 마을 이름답게 문수산을 뒤로 하고 있다.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금새 만나는 경사가 가파른 꼬불꼬불한 고갯길만 넘으면 좌우로 길게 늘어선 낮은 산들 사이로 좁고 긴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띠엄띠엄 낮은 집들도 보인다. 바로 수문마을이다. 수문마을은 이곳에서부터 청량면 개곡리까지다.
마을의 처음과 끝이 10리 4㎞에 이르러 문죽리 자연마을 가운데 가장 긴 수문마을에는 현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둘레둘레 모여산다는 의미가 무색한 마을이다. 약 4㎞에 이르는 좁은 골에 집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래서 마을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다. 울산~부산간 고속도로 공사가 마을입구에서 한창이지만 주민들로서는 남의 일이다. 집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아마 산들 사이의 좁은 골을 따라 농사를 짓고 옛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논과 가까이 집을 마련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수문에 남평문씨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부터다. 청도에 살던 시조 문다성의 38대손인 모당(慕堂) 문정호(文貞好) 할아버지가 이 곳으로 터를 잡으면서부터로 지금은 울산지역에서 남평문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됐다.
수문마을의 남평문씨들은 여안공파에 속한다. 수문마을은 남평문씨 여안공파의 울산 최대 집성촌인 셈이다. 수문문중은 마을 회관 북쪽에 모당재(慕堂齋)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시조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인 472년 남평현(현재 전남 나주군 남평면) 군주가 장자지라는 연못가 바위 옆에서 놀고 있을 때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돌로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 아이가 있어 성을 문이라하고 이름을 다성이라고 해 키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m쯤 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놓고 있어 문씨 시조의 탄생지임을 알리고 있다.
이후 고려공민왕때 충신으로 원나라에서 붓뚜껑에 목화씨를 몰래들여와 우리나라 의류역사에 혁명적인
큰일을 한 문익점이 중시조이다.
입향조의 10대손인 문경탁(78·전 종친회장)씨는 "예전에는 한 20여집이 있었는데 요즘은 14집만 남았지만 그래도 울산에서는 문가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입향조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병자호란이후 환란을 피해 경북 청도에서 운문산 가지산을 지나 피난골인 수문으로 입향한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이후 12대를 이어오며 이 수문마을에 문씨들이 살고 있으며 300여 가구가 울산과 부산, 서울 등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게 경탁씨의 설명이다.
마을 초입의 유료낚시터는 수문못으로 일제시대 대단위로 보강된 것이다. 논농사가 전부였던 수문마을 주민들은 해방 이후 배나무를 들여와 경작하기 시작해 마을의 언덕배기에는 배과수원이 아니면 얼마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감나무밭들이다.
범서정수장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문동현씨와 국세청과장으로 재직하다가 울산세무서 앞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열고 있는 문규호씨가 이 마을 출신이다.
문경학 화봉중학교 교감, 문경기 전 애경유화 중대장, 문성현 해운대구청 세무과장 전 서울문화방송 프로듀서 문희연씨가 수문마을에서 자랐다. 문규진 부산교육대학 교수, 문정환 변호사도 수문문중이며 덕하로 나가 배과수원을 하는 문기현씨의 아들들인 진웅 진봉 지업 경업씨 4형제도 수문 문중이다
(3)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율림마을 여양 진씨(驪陽 陳氏)
이자겸의 난 평정 "무인의 후예"
범서 입암에서 지장고개를 넘어 두동방면으로 가다 오른쪽 새로 포장된 길로 들어가면 만나는 마을이 율림마을이다.
지장고개를 넘어갈 때면 마을 앞의 언덕 때문에 마을이 잘 보이지 않지만 두동에서 범서로 들어오는 길로는 은편쯤에서 왼쪽을 쳐다보면 얕은 구릉 아래 가지런히 남쪽을 보고 담을 잇고 있는 집들이 50여호나 된다.
이곳이 여양 진씨(驪陽 陳氏)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여양 진씨 마을로는 울산에서 가장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율림마을의 진씨들은 파보도(派譜圖)상으로는 상계오파(上係五派)로는 매호공파(梅湖公派), 중계십삼파(中係十三派)로는 학생공파(學生公派), 하계사십칠파(下係四十七派)로는 송계공파(松溪公派)에 속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이지만 우리나라의 시조로는 고려 예종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상장군 겸 신호위대장군 총후(寵厚)이다.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여양군(지금의 충남 홍성군)을 봉읍받았기에 여양군(驪陽君)으로 불린다. 이 때부터 여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인 "무인시대"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는 장군 진준이 바로 총후의 아들이다.
그러나 송나라 북주에서 우윤을 지낸 진수가 난을 피해 지금의 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인 여양군 덕양산에 자리를 잡은 것이 동방 진씨 선계로 보고 있다.
중국의 선계는 요순시절 순임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순임금의 34세손인 호공이 진(陳)이란 땅을 식읍받았다
이들은 대대로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주인이었으나 호공의 54세손 민공월이 초나라 혜왕에게 망하자 제나라로 가면서 나라이름을 따 진(陳)을 성(姓)으로 한 것이다.
율림마을에 터를 잡고 이른 바 두동계보를 이룬 입향조는 명용(命龍)으로 시조 총후의 22세손. 난수(蘭秀)의 둘째아들로 경남 진해에서 1763년에 태어난 명용이 두동면 만화리에 터를 잡은 뒤 그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율림마을을 고향으로 하고 있다.
입향조 이후 한동안 손이 귀했으나 입향조의 5세손들인 27세부터 마을이 크게 번성했다.
그 때가 1850년 안팎으로 50여가구에 달했다. 율림마을의 50여가구 가운데 타성받이로는 3~4가구에 불과해 그야말로 전형적인 집성촌을 이뤘다.
앞 뒷집이 아저씨고 할아버지였으며 또 조카, 손자였다. 어느 한 집이 큰 일을 당하면 마을 전체가 상복차림이었으며, 경사에는 마을 전체가 화복차림은 당연한 모습이었다.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한구(漢久)씨는 "마을 전체가 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었기에 모두가 집안이었지만 해방 이후부터 한 두 집씩 밖으로 나가면서 조금씩 옅어져 지금은 20가구 정도가 남아있다"며 "매년 한 차례씩 제실에 모여 파보도 강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지라고 해도 울산시내와 양산, 부산 등이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차종손 원우(遠遇)씨는 "앞으로 연화산 뒤로는 국수봉과 은월암 치술산을 사이에 자리한 마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며 단지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기와집이 슬라브집으로 변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구 종친회장은 마을 앞의 넓은 논이 펼쳐져 있어 대대로 농사만을 지었기에 마을에 변화가 없었지만 대곡댐 건설로 수자원보호구역 지정을 둘러싸고 마을이 들썩이고 있다고 말했다.마을회관은 물론 집집이 담벽에 적혀있는 "결사반대"의 구호로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종친회원은 현재 98명. 율림마을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이 400명 가까이 된다는 설명이다.
율림마을 진씨들의 중심은 현재 시조로부터 30세손들로 항렬자로는 호(昊) 환(奐) 규(奎) 곤(坤)이지만 세손으로는 32세손까지 내려갔다.
율림마을 여양 진씨출신으로 한상씨가 두동면장을 13년간 지냈으며, 동생인 종친회장 한구씨는 울산중앙농협 전무를, 한준씨는 울주군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또 같은 항렬인 장출씨는 부산시청 과장으로 공직에서 퇴임했다. 두원건축설계사무소장인 철수씨도 이 마을출신으로 29세손이다.
울산요식업협회장인 철호씨, 삼성의료원 핵의학실장인 광호씨, 군무관으로 근무중인 정호씨, 울산시청 행정부시장 비서실의 부호씨, 위니아 울산영업소장 동호씨, 옥동의 마하수학전문학원장 해호씨 등이 30세손이다.또 부산수산청에 근무하는 양호씨, 쌍용정유에 다니고 있는 의호씨와 한전에서 일하고 있는 구호씨도 30세손들이다.
시교육청 학교운영지원과 장학관인 원우씨와 민주시민회 의장인 영우씨, 중구새마을지회 전 사무국장인 윤식씨도 31세손으로 한 집안이다.
(3)북구 강동동 죽전마을 울산김씨
울산 북부순환도로를 타고 북구 강동동 정자방향으로 가는 고개를 넘어 평탄한 길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논밭이 펼쳐지고 신전마을, 명촌마을, 주렴마을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정자사거리를 조금 못가서 왼편에 위치한 강동중학교 왼쪽 비탈길을 50m정도 올라가면 보이는 것이 죽전마을이다.
깊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오른쪽 편에 슬라브를 얹은 집들이 몇 채 눈에 띈다.
하지만 폐허로 변한 기와집과 공터도 몇 군데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에는 10여개의 가지가 잘려나간 소나무가 위태롭게 서 있는 등 곳곳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곳이 바로 70년대까지만 해도 13가구가 이마를 맞대고 오손도손 모여 살던 울산김씨(蔚山金氏) 학암공파(鶴庵公派)의 집성촌.인근 명촌마을, 달곡마을, 주렴마을에도 울산김씨들이 살고 있다.울산김씨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두번째 아들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를 넘기려 해 이를 거세게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인 일(鎰:마의태자)을 따라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이름)으로 들어갔다.
이후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하지만 후세에 자세히 전해진 바가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울산김씨족보(蔚山金氏族譜)"에는 김덕지가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후 덕지의 14세손인 환(環)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광록대부(三重大匡光祿大夫)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학성이라는 지명이 울산에 있는 것을 보고 본관을 울산(蔚山)으로 하게 됐다.
17세손 비(秘)는 조선초기 왕위계승을 둘러싼 태조 이성계의 왕자들 사이의 분쟁인 "왕자의 난"을 피해 1404년(갑신년)에 울산 강동의 피란골로 들어와 국가의 식읍을 받으며 살게 됐는데, 그가 바로 강동 일대에 터를 잡고 있는 김씨들의 입향조인 셈이다.
한편 비의 형인 온(穩)이 조선 태종때 부인 민씨의 사촌처남들에 연루돼 죽게되자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 마을로 피하게 됐는데 그 후손들은 온의 호(號)인 학천(鶴川)따르게 됐다.
따라서 울산김씨는 전라도 장성을 중심으로 학천공파(鶴川公派), 울산 강동을 중심으로 학암공파(鶴庵公派)로 나뉘어 세를 이어오게 된 것.
울산 중구 다운동에 살고 있는 37세손 김형순씨는 문중들 자랑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흐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14일 일본의 칸파쿠, 토요토미가 육군 14만명, 수군 8천명을 이끌고 부산포와 서생포를 공격하는 왜란을 일으키면서 울산김씨 문중들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는 것.
김형순씨는 "당시 만호(萬戶)진이 있던 서생이 초토화되면서 이곳을 주거지로 하던 많은 문중들도 죽었다"며 "왜 하필이면 왜군이 서생으로 들어왔는지" 라고 말하고는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제실(帝室) 안 대들보 위로 온전히 보존된 태극문양을 설명하면서 형순씨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일본인들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태극문양이 보이는대로 깨부숴버렸는데 죽림마을의 제실은 당시 유림들이 지키고 있어서 이를 겁낸 일본인들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린시절 뛰어놀던 낮은 구릉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형순씨는 "주렴마을에 30여호, 명촌마을에 20여호, 죽전마을에는 3가구만이 남아 있으며 이곳 강동에는 현재 70여호만이 띄엄띄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는 170여 가구가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살았지만 70년대 이후 급속한 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하나 둘 타지역으로 이전했다는 설명이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짓거나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있다.
형순씨가 자란 피란골 우측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펼쳐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가지가 많이 잘려나가 있고 이마저도 비탈면에 철골 지지대로 받쳐져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와 보였다.
형순씨와 함께 죽전마을에서 자란 형조씨는 "이 소나무는 1404년 입향조 비(秘)가 이곳에 정착해서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울산 김씨 세전송(世傳松)"으로 지정해 보호한 것으로 수령이 600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 안다"며 음력정월과 10월에 소나무 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하지만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과 함께 수령 600년 된 이 소나무가 문화재 등록은 커녕 제대로 관리도 안되고 있어 안타깝다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한편 울산시는 지난 3월4일 동구 일산동의 풍어제인 "당제(堂祭)"를 무형문화재로, 북구 달천동의 "달천철장" 등 4개소를 기념물로, 강동 하암 주상절리를 문화재 자료로 지정했으나 이 소나무는 향토성이 부족하고 학술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현재 "활만송"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는 남정자마을의 보호 아래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노년을 외롭게 보내고 있다.
울산지역에는 모두 361가구 1천여명의 울산김씨가 흩어져 살고 있다.
학암공파로 이 마을 출신인 36세손 호식씨는 학성고 초대교장을 지냈고 같은 36세손인 인달씨는 병영농협장을 지냈으나 지금은 모두 공직에서 퇴임했다.
36세손인 판조씨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에서 개인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37세손 정환씨는 서울 경희대학교에서, 37세손 경민씨는 경기 아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37세손 형구씨는 울산 중앙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등 문관의 후예답게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문중들이 많이 있다.농소1동 동장을 맡고 있는 경재씨도 38세손으로 한 집안이다.
(4)범서읍 망성리 광주안씨
범서 입암리 선바위를 지나 망성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은 대숲이 길게 늘어서 있고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포구나무들이 멀리는 입암들을, 가까이로는 태화강을 앞두고 50m 가량 도열해 있다.
하늘을 가릴 듯이 서 있는 포구나무 뒤로 옹기종기 집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별을 바라보는 마을 즉, 울주군 범서읍 망성리 큰마을이다.
30여 채의 집들이 포구나무들로 숨어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곳이 광주 안씨들이 모여 산 곳으로 그야 말로 집성촌이다. 또 망성리는 이곳 큰마을을 중심으로 왼쪽의 욱천마을과 북쪽의 등넘마을 등 3개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큰마을은 물론 욱천마을과 등넘마을 모두 광주 안씨들이 유독 많이 살았다. 지금도 80여 가구 가운데 절반가량인 35가구가 안씨들이다.
큰마을의 안용원(81)씨는 "안가들이 아직도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며 집성촌으로서의 명맥을 현재까지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뒤로는 선산인 동산과 더까비탈이 북풍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태화강이 흐르고 있어 이 곳 안씨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생활을 즐겼다.
용원씨는 예전엔 큰마을 30여 집 가운데 두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씨들이어서 망성리는 안씨들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망성리 큰마을에 안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몽현(夢賢) 할아버지가 중구 반구동에서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부터다. 용원씨에게는 8대조가 되며 망성 입향조가 되는 셈이다.
광주 안씨가 울산에서 가장 먼저 살기 시작한 곳이 바로 중구 반구동이다. 반구동은 임란공신으로 선무관 훈련원 판관(宣武官 訓"院 泮官)이자 가선대부 동지중추 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 府事) 신명(信命)이 임란이 끝난 뒤 울산에서 터를 잡은 곳이다.
신명이 광주 안씨의 울산 입향조가 되며 망성 입향조 몽현의 증조부가 된다. 매죽헌(梅竹軒) 신명은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망성을 중심으로 울산과 양산 등에 있는 광주 안씨들은 대부분 매죽헌 신명의 후손으로 정확히는 광주 안씨(廣州 安氏) 판사공파(判事公派)에 속한다.
입향조 몽현의 손자인 경기(景沂) 할아버지가 마을이 안정을 잡아가자 후손들의 학업을 위해 서당인 이락당(二樂堂)을 지어 망성은 물론 입암의 아이들에게도 글공부를 시켰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1938년에 지은 완계정(玩溪亭)이 마을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같은 영향이 후대에 까지 미쳐 이곳 광주 안씨 판사공파 망성문회에는 교직활동을 하는 후손들이 많다.광주 안씨들이 망성 안씨(望星 安氏)로 울산지역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계기는 입향조의 8대손인 효식(孝式)씨가 크게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용원씨는 설명했다.
일제 식민시대 서울에서 의대를 나와 의사로서 또 도의원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효식은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실력자 이관술과 동문으로 절친한 교분을 가진 것으로 문중들은 전했다.종손인 종렬씨가 부산에서 교직활동을 한 것을 비롯해 종렬씨의 아들 원하씨도 현재 부산대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 (사)울산임란공신숭모회 초대 이사장으로 충렬사 건립에 앞장선 용원씨는 교직에 오래 몸담다 지금은 없어진 온양 삼광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용원씨의 막내동생인 길원씨는 현재 울산교육청 강남교육장으로 재직중이다.또 용원씨의 매부인 박근철씨도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용원씨의 장남인 종목씨가 울산동여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사위인 박석종씨는 울산시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으로 재직하고 있다.이밖에 망성 큰마을 출신으로 안종백 서울증권부장, 안종한(울산대 서무과)씨 등이 있다.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종석씨와 수관씨도 같은 집안으로 망성 큰마을 출신이다.이들 망성 큰마을 출신 광주 안씨들은 매년 5월이면 마을앞 완계정에 모여 과거 집성촌시절의 향수를 달래며 선조들을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
(5)400년전 태화동 명정터 태화동 울산박씨(=흥려박씨)
울산시 중구 태화동. 울산이 시로 승격된 뒤 한참동안 군데군데 자연마을 단위로 인가가 있었을 뿐 들판과 구릉이 전부였던 이곳은 지금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언덕받이에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로 너울처럼 이어져 가던 산자락이 끊어져 간간히 그 형상만 보여주고 있다. 그린벨트라는 인위적 제한이 없었더라면 아마 오래전에 강언저리까지 집들이 점령했을 듯 싶다.
동부아파트 뒤 울산시 중구 태화동 산 36-6. 울산박씨가 관장하고 있는 흥례서원(興禮書院)이 산 허리에 자리잡고 명정들과 오산,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 옆으로는 수관재와 말응정, 재실과 정자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 도시화된 이 곳이 울산 박씨의 집성촌임을 그나마 알려주고 있다. 이곳 울산 박씨는 문중 전체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는 말응파(應派)들이다
울산 박씨는 최근의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흥려 박씨(興麗 朴氏)로 불렸다.
흥려는 울산의 옛 지명이다. 오늘날 울산이 있게 한 이 지역 최초의 통합명칭임 셈이다.
흥려는 울산 박씨의 시조인 흥려백 장무공 박윤웅(興麗伯 莊武公 朴允雄)에서 시작된다.
흥려(興麗)는 한자 뜻 그대로 려(麗)(고려를 뜻함)를 일어나게 한 곳이다.
신라 경명왕의 후손인 장무공은 신라 효공왕 5년(901년)에 지금의 학성(하곡현 신두산)에 정착,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으로 지역을 통치했다.호족장으로 소국왕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고려에 귀부했다.고려 태조가 개국시 보좌한 장무공을 개국공신 흥려백으로 삼고 동진, 동안, 우풍현을 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켜 장무공에 사채지로 하사했다.
그 당시 사채지 일부가 미역바위로 불리는 북구 강동동 판지마을앞 곽암(藿巖)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태화동으로 자리를 옮긴 때는 임진왜란 이후로 대종회 재유사를 맡고 있는 인우씨의 13대조 할아버지인 학수당(鶴睡堂) 홍춘(弘春) 할아버지 때부터로 400여년전이다.
임란때 창의해 공을 세운 학수당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돼 기강현감을 제수받는 한편으로 남산 12봉과 태화강 30리를 사채지로 받았기 때문이다흥례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 모두 예전에 문중들의 소유였다. 학수당의 고택은 지금 태화사의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300년동안 지속됐다.
인우씨는 "정자 명칭이었던 말응정이 지금은 명정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물론 태화동 지역의 상당부분 지명이 모두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하마비가 있는 곳인 지금의 희마아파트 뒷쪽을 하말이라고 불리는 것 등이다.
인우씨는 "광복 이전인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문중의 가세가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쇠해 선대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며 "장무공과 학수당 할아버지 등 4위를 모시기 위한 재실공사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본채를 흥례서원이 있는 이곳으로 옮긴 것은 100여년 전 인우씨의 조부때로 새로운 기운을 얻어 문중의 번창을 기원해서 였다. 신기마을로 불리는 이곳은 골짜기 너머 태화사부지에서 새롭게 자리잡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재 후손들은 외지로 나가 이곳에 적을 두고 있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인우씨는 현재 본적을 신정동에 두고 있다. 선조들이 말응에서 집을 옮길 때면 강건너 신정으로 하라는 말을 지금에야 이행한 셈이다.
울산박씨는 그 오랜 기원과 명성만큼이나 많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의 송경파를 비롯해 용당종파, 대흥종파 등 28개파가 있다.
또 고려와 조선시대 문무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노명, 문희, 원호, 성로, 형관, 윤환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배출했다.
현대에서는 서울마포로 이주한 박기만씨는 4남을 두었는데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장남 남수씨 차남은 흥국생명 본사 상무로 재직중인 박진수씨가 있다.
전 울산읍의원을 지낸 상용씨, 울산향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주복씨, 현재 대종회 종유사를 맡고 있는 한학자 주엽씨, 울주군청 전 농정과장 주호씨, 울산상공회의소 2대 회장인 진연씨, 울산고 교장 영호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공업씨와 시인인 영식씨 등이 있다.
또 중구의회 의원인 태완씨, 남구의회 의원인 복일씨, 중앙농협조합장 인혁씨, 울산대 교수 주철·경삼씨, 그리고 울산시청 서기관 인필씨 등도 집안이다.
현재 대종회를 이끌고 있는 명순씨는 울주군의회 초대 의장을 지냈고, 청년회장 수복씨는 대륙금속을 운영하고 있으며, 청년회 사무국장 원양씨는 울산대 홍보팀장을 맡고 있다.
(6)울주군 삼동면 출강 연안 차씨(延安 車氏)
태화강으로 물줄기를 내려보내는 울주군 삼동면 출강리. 좀더 골짜기 길을 따라 들어가며 지량과 보은, 조일리로 이어진다. 골의 초입에 있는게 출강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부산으로 가다 대복에서 오른쪽 대암댐으로 꺾어 작동을 지나 삼거리에서 삼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출강천 왼쪽에 하출강이 자리하고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
대암댐을 앞에 두고 골 입구에 버티고 선 마을모습은 보슬비라도 올라치면 한 폭의 수채화다. 군데 군데 그리 많지 않은 집들이 푸른 나무들에 가려 빼꼼히 지붕만 내놓고 손님을 맞는다. 그 가운데 새로 슬라브로 단장을 한 집이 출강리 113번지. 조선 숙종 중엽에 용양위 부호군(龍"" 副護軍)을 지낸 차여로(車汝魯) 할아버지가 1700년대 처음 청량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잡은 집터이다.
여로 할아버지가 이 곳 출강의 연안 차씨(延安 車氏) 입향조(入鄕祖)로 이곳이 차무일(車無一)할아버지를 시조로 하는 연안 차씨(延安 車氏) 가운데 강렬공파(剛烈公派) 출강 집성촌의 시발점이다.
여로 할아버지가 처음 터를 잡은 출강리 113번지에는 할아버지의 9대 손부인 曺원이(82·택호 둥글댁) 할머니가 아들 재용씨와 함게 집을 지키고 있어 300여년간 변함없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종택 조금 위쪽인 122번지가 여로 할아버지를 모신 재실인 청강재(淸崗齋)다. 연안 차씨들은 하출강을 시작으로 중출강마을 등으로 넓혀 갔다.
입향조의 종손부 조원이 할머니는 "연안 차씨가 출강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기에 출강의 산신령"이라며 "연안 차씨가 이곳에 정착한 뒤 50여년 뒤 달성 서씨(達城 徐氏) 등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문회 총무를 맞고 있는 상일씨는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40여 가구가 모여살며 집성을 이뤘으나 이제는 10여집만 친척이다. 그러나 음력 10월 둘째 주 묘제때면 이곳에서 멀리 나가 있는 친척들도 모두 모여 옛날을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종손부는 묘제때 입향조를 중심으로 모시는 신위만 80여위로 오전 10시에 시작한 제사가 끝날 쯤이면 오후 3시는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안 차씨가 울산에 처음 정착한 곳은 청량면 신전마을로 여로 할아버지에게는 조부가 되는 복(輻) 할아버지가 울산의 입향조이다. 회야댐의 건설로 신전마을의 친척들은 외지로 흩어지고 복 할아버지를 모신 재실인 금천재(金川齋)는 댐 윗쪽에 새로이 마련해 음력 10월 첫째 주에 묘제를 지낸다. 통천에는 서원인 자암서원(紫巖書院)이 남아있다.
상일씨는 조선 숙종 당시 당파싸움이 치열한 때 였음을 감안할 때 당파싸움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 같다고 출강 입향내력을 전했다.
이곳 출강은 오랜동안 출강천을 따라 늘어선 좌우의 논을 이용해 논농사와 메밀 등 밭농사를 지었으나 그나마 물걱정을 던 것은 울산이 시로 승격된 뒤인 1964년 당시 울산시장인 신선열씨의 도움으로 산영곡저수지를 막고부터였다.
논농사의 비중을 줄이고 특용작물로 소출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74년 표고버섯 시범단지가 조성돼 한 10년간 시범단지에서 일한 마을 주민들이 자연스레 경험을 얻어 독자적으로 표고버섯을 재배하면서부터였다. 상일씨는 시범단지시절에는 표고버섯이 너무 비싸 마을사람들은 재배만 했지 맛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의 출강은 사슴농장이 7군데나 있다. 이 사슴농장들은 10년전 외지인이 엘크 등 사슴들을 키우다 마을 주민들에게 분양하면서 점차 한 집 두 집 늘어나 이제는 7군데로 늘어났다.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열씨는 여로 할아버지의 7대 손으로 공병 준장으로 예편해 현대건설 전무를 지냈다. 동열씨의 동생 동석씨도 형에 이어 육사에 진학, 중령으로 예편한 뒤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정환씨도 이 곳이 고향이며 정환씨의 차남은 MBC 차경호 기자이며 차기자의 4촌으로 부산은행 임원인 차재주씨가있다.
교육공무원을 지내다 정년퇴임해 지금은 부산에 살고 있는 용락씨도 출강의 연안 차씨 출신이다.
개인택시를 하면서 문중회 회장에다 마을 이장도 맡아 마을 대소사를 돌보고 있는 문환씨와 삼동면장을 맡고 있는 문환씨, 그리고 울산구치소 앞에서 오리고기 음식점을 하고 있는 문환씨 등 이름이 똑같은 이들 동명3인도 모두 출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총무 상일씨와 사촌인 재원씨는 현재 국제신문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온양면 외고산 차영민씨의 장남으로 前삼보지질 사장 차 수환씨 형제가 있으며 신정동 갑산한의원 차창호원장이 있다.
또 삼성의료원에 근무하는 의학박사 동석씨와 교통전문가로 영천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 동득씨도 여로 할아버지를 함께 모시는 후손들이다.
(8)남목동 언양 김씨
성내를 지나 남목고개를 넘어 동구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이 남목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목 1, 2, 3동까지 나눠져 있지만 법정동으로는 동부동에 속한다.
좌우에 동축산과 봉대산을 끼고 있고 앞에는 염포산이 버티고 있다. 한적했던 논농사와 고기잡이가 전부였던 이곳 남목은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이후 크게 변했다. 산과 들이 만나는 곳에 흩어져 있던 집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삐쭉한 아파트 건물들 천지가 됐다.
남목에서 주전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언양 김씨 회관 겸 재실이 자리잡고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고색창연한 재실과는 달리 현대식 회관 겸용 재실이다. 재실에는 중시조인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장군을 모셔두고 있다.
위열공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인 언양군(彦陽君) 선(鐥)의 7세손이다. 언양 김씨들은 언양군(彦陽君)을 시조로 모시고 있어 결국 김알지(金閼智)계 김씨이다.
선이 고려 태조인 왕건으로부터 언양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언양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 후손들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벼슬을 한 뒤 고향인 언양에 낙향했다.
위열공도 무신정권기에 끊임없이 침입해온 거란군을 격퇴하고 "1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인 문화시중을 지낸 뒤 언양으로 돌아와 숨을 거뒀다.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 15번지 화장산 기슭에 자라잡은 위열공의 묘는 울산시 기념물 35호로 지정돼 있다.
언양 김씨는 위열공 이후 또 한명의 걸출한 무인을 배출한다. 임진왜란때 대표적 의병장인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한성부 서윤과 수원부사를 지낸 뒤 나주에 낙향했다 거병해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왜군의 2차 진주성 공략에 맞서 싸우다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진주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했다.
언양을 식읍으로 받아 누대로 뿌리를 둔 언양 김씨의 찰방공파(察訪公派)가 남목에 터를 잡은 것은 병자호란 등 끊임없는 외침 때문. 고려왕실의 외척으로서 울산지역의 대표적 토성이었던 언양 김씨는 310여년전 외침을 피해 집안 전체가 언양을 떠나 굴하, 병영을 거쳐 남목에 이른 것.
족보위원장을 지낸 32세손 병식(82) 옹은 "9대조인 종택(宗澤) 할아버지가 어릴 때 등에 업혀 이 곳으로 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집을 얻어 산 게 남목에 언양 김씨들이 집성을 이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뒤 세상이 조용해 지자 집안의 일부는 언양으로 돌아갔다.
"입향조가 남목으로 이주할 당시에는 남목에는 청주 한씨와 월성 이씨(越城 李氏·지금은 경주 이씨(慶州 李氏)라고도 함) 몇몇 집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병식씨는 전했다.
병식씨는 "예전에는 남목에만 문중들이 70여집이나 있어 둘레둘레가 다 집안이었는 데 지금은 20여 집이 남았지만 전국적으로는 2만5천여세대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울산시로 승격되고 동구 미포만에 현대중공업이 자리잡으면서 현대중공업의 성장에 따라 언양 김씨의 집성촌으로서 남목은 점점 좁아져 간 셈이다. 그래도 아파트촌 길목 도로가에 재실이라도 있어 그나마 집성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울산의 대표적 토성으로서 고려 왕실의 외척이었던 언양 김씨는 위열공과 문열공 등을 비롯해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 등 고려와 조선조에 문무에 많은 선조들을 뒀다.
또 현대에는 남목 출신으로 외무장관을 지낸 김동조(86) 전 장관이 있다. 김동조 전 장관은 수협중앙회를 거쳐 공화당 조직부장을 지낸 병식씨와는 열촌간이며 족보에는 병(昞)자 항렬이다.
지난 대선에 출마한 정몽준(국민통합21·울산동) 의원 부인인 김영명씨가 김동조 전 장관의 둘째 딸이다. 또 김종호 전 동래고 교장을 비롯해 김지호, 김정호 전 교장들과 함께 정년퇴임한 울산시 김종휘 전 사무관도 다 같은 언양 김씨들이다. 이밖에 울산지검 검사를 지낸 김낙구 변호사와 동서식품 김재명 전 고문, 그리고 도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한 김병수씨도 언양 김씨 문중 출신들이다.
이밖에 현재 중구문화원 김철 원장과 동생인 울산시의회 김철욱 의장도 고향은 남목이 아니지만 언양 김씨로 취려 할아버지들의 후손들이다.
(9)물욕떠나 대이은 "선비의 가문" 웅촌 검단(은진 송씨)
검단(檢丹)마을은 검단리의 중심으로 멀리 운암산을 두고 뒤로는 사장봉, 왼쪽으로 비스듬히 고야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리 높지 않아 볕이 많은 드는 곳이다. 검단의 집 대다수가 사장봉과 북녁들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아 멀리 대륙에서 시작된 세찬 바람을 자연스레 피하면서 동과 남이 확 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늘에서 검단을 볼 때 생명의 근원지인 여성의 자궁과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곳은 일찍부터 사람이 찾기 마련이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환호가 발견된 유적(사적 33호)과 지석묘군 등이 그 것을 증명하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인 셈이다.
이곳에서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은진송씨(恩津宋氏) 시부공파(時夫公派) 문중들이 가장 많다. 지난 2002년 면사무소 조사결과 검단리 전체에 30가구가 살고 있어 은진송씨 시부공파의 집성촌으로 보고 있다.
검단마을에는 은진송씨와 함께 밀양박씨와 고령김씨 등도 많이 살고 있다.은진송씨들은 부산 동래에서 이곳으로 처음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은진송씨 1세인 대원(大原)의 20세인 기여공(機汝公) 추흥(樞興). 은진송씨의 시조는 천익(天益)으로 당나라 호부상서 주은(柱殷)의 후예인 백영(白英)의 둘째아들이다.
형 유익(惟翊)은 여산송씨, 동생 문익(文翊)은 서산송씨의 시조이다.
기여공이 이곳 검단으로 온 시기는 공이 20대 후반인 1780년께로 보여지지만 동래에서 검단으로 이주한 연유에 대해서는 후손들도 다만 살기좋은 곳을 찾아 왔을 것이란 추측 뿐이다.
기여공은 마을 입구의 양지바른 곳에서 후손들의 삶을 보살피고 있으며 후손들은 입향조의 묘소 앞에서 경선재(景先齋)를 세워 매년 10월 셋째주 일요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입향조 묘 오른쪽에 선대인 후태(厚泰)의 설단을 지난 1958년에 세웠으며 98년 경선재를 중수했다.
입향조의 6세손인 재성(在星·88)옹은 "입향조와 그의 아들인 치오(致五) 할아버지가 통정대부를 지내는 등 대대로 사인(士人)으로 지내왔다"며 "1908년 가구조사에서 이곳 송씨들 8할 이상이 사인으로 구분, 기록됐었다"고 설명했다.
조선말 검단지역의 학교격인 단구서옥(丹邱書屋)도 은진송씨가 세웠다. 재성옹은 "입향조에게는 증손자가, 자신에게는 조부가 되는 병원(秉媛) 할아버지가 단구서옥을 세워 후손들과 아이들을 가르쳤다"며 부친 직환(悳煥)이 천자문을 적고 조부의 세필로 뜻을 적어놓은 고서를 내놓았다.
검단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최근 조사에서 검단 전체 173가구 가운데 106가구가 농업, 22가구가 회사원, 32가구가 노동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요즘 보기드물게 정규교육기관을 다니지 않아 무학으로 학력이 구분된 사람이 31명이나 됐다.
대졸자는 30명에 한 명꼴인 15명에 불과했다. 인근 곡천 서중의 9명에 한 명꼴로 대학을 졸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미취학이 4명중 1명으로 100명을 넘고 있어 다른 어느 마을보다 젊어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재성옹은 "집안에 이름을 알린 선비가 과거에는 많이 계셨지만 현대에는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인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는 후손들이 많아 다음 세대에는 관계와 학계, 재계 등 여러분야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단의 은진송씨 문중으로는 송재홍 대령이 장군 진급을 앞두고 지난해 갑자기 숨져 마을 문중들을 아타깝게 했다. 또 검단의 초대 새마을 지도자를 지낸 고 송원호씨는 마을 발전의 유공자로 받들어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마을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워 후세에 남겼다. 또 고인이 된 새마을지도자 송경진씨도 기여공의 후손이다.
현재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송근수씨도 같은 문중으로 재성옹의 조카뻘이다. 또 울산시내에서 산사춘 주류도매업을 하고 있는 송민록씨도 검단의 은진송씨로 26세손이다.
서울 성수염주식회사 송인호 이사와 효성 울산공장 과장으로 있다 몇해전 서울 본사로 자리를 옮긴 송치호씨는 형제지간이며, 교직에 몸담아 부산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송정익씨도 검단출신이다.
(10)화봉동 사청마을 파평윤씨
7번 국도를 타고 효문사거리를 지나 경주쪽으로 가다보면 북구청을 지나 옛 동울산세무서를 알리는 간판을 만난다. 화봉동 초입으로 예전엔 사청(泗淸)마을로 더 많이 불렸던 곳이다. 더 먼 옛날에는 사청(射廳)으로 불렸던 점을 볼 때 이곳은 아마 활터였던 모양이다.
근대화 이전까지 이곳은 동쪽 산밑의 화산(化山)마을과 합쳐 파평윤씨 60여 가구를 포함해 120여 가구가 있었으나 지난 92년 구획정리가 이뤄지면서 지금은 셀 수도 없다.
아파트가 가로수처럼 늘어선 것은 물론 구청과 학교 은행 등이 들어서 이제는 도심과 다를 바 없다. 이곳이 파평윤씨 영은공파(永隱公派) 사청문중(泗淸門中)의 집성촌이다.
파평윤씨는 고려건국에 한 축을 담당한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로부터 시작된다. 태사공이 파평윤씨의 시조이다. 태사공의 탄생은 마치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에 못지 않다. 경기 파평(지금의 파주) 파평산 기슭의 용연(龍淵)에 난데없이 사흘 밤낮을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천둥과 번개가 쳤다.
이를 이상히 여긴 마을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비니 연못 한 가운데 금궤짝이 있어 건져보니 양쪽 겨드랑이에 81개의 잉어비늘이 난 어린 태사공이 금빛 광체속에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청의 윤씨들은 봄 가을 경북 안강의 묘소와 이곳을 찾는다.
시조인 태사공을 비롯해 척지진국(拓地鎭國)의 위업을 달성한 5세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조선조에 들어서는 파평군(坡平君)의 봉작을 받은 15세 소정공 윤곤(尹坤)(16파로 분류될 때 사청문중은 소정공파에 속한다), 성종때 영의정을 지낸 18세 영은공(永隱公) 윤흥상(尹興商) 등이 사청문중의 대표적 선조들이다.
고려와 조선조에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문세가로 손꼽히던 파평윤씨들은 국모를 가장 많이 배출한 문중일 뿐 아니라 공이 커 문종, 성종, 선조, 숙종, 영조 등 다섯 국왕이 문숙공의 후예에게는 군역과 천역을 사면하도록 한 전교(傳敎)를 내렸다.
문중 회장을 맡고 있는 입향조의 16세손 윤좌상(尹佐相·81)옹은 "어느 문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다섯 국왕의 전교를 받았다는 것을 파평윤문들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파평윤씨들이 500년전 이곳 사청에 온 것은 연산군때 갑자사화(1504년)의 난을 피해서이다.
연산군이 생모인 윤비의 폐위당시 이를 막지 못한 당시 영의정 영은공을 추죄(追罪), 멸문지화의 위기를 당하자 영은공의 12조카 가운데 여섯째인 윤명이 화를 피해 이곳에 정착,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선무랑공(宣務郞公) 명 할아버지가 사청문중의 입향조가 된다. 명 할아버지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가 전남 나주로 가 나주문중을 이뤘다.
함께 난을 피해 영남지역으로 피한 명 할아버지 바로 위 형인 혁 할아버지는 지금의 울산 남구 신정동에, 둘째 동생인 신(信)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각각 자리를 잡았다.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온 지 2년만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복작이 이뤄졌다.
그후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 겸 진주판관을 역임한 입향조의 고손자인 23세 윤홍명(尹弘鳴), 형제가 나란히 진사와 성균관 생원을 지낸 30세 윤병호·병이 형제도 다 사천마을 윤씨들의 선조들이다.
지난 92년 토지구획정리 당시 입향조 명 할아버지와 선조들을 모신 재실이 구획정리지구에 편입되면서 헐려 지금은 옛 동울산세무서 뒤로 옮겨와 회관을 겸하고 있다. 사청문중은 또 문중 부인회가 구성돼 있어 문중의 행사를 도맡아 할 뿐 아니라 고부간, 동서간 정이 두텁다. 사청문중은 울주의 온산 덕신, 경북의 외동 석계, 용강 등지에 집성촌을 이뤄고 있다.
사청문중의 종손인 34세 윤승한(尹承漢)씨가 세거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차종손 주상(周相·44·울산향교 전의)씨가 문중의 총무로 대소사 일을 돕고 있다.
현재 입향조의 16~17세손이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울산 북구 윤두환(尹斗煥) 의원이 사청문중이다. 또 국민은행 지점장을 지낸 환구(煥久)씨도 집안이다.
사천군 전 건설과장 문석(雯錫)씨는 큰 아들 승용(承容·철학박사·서울대학원 출강), 둘째아들 인태(寅台·울산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셋째 아들 인발(서울 천호중 교사) 등 3형제를 모두 서울대에 진학시켰다.
복산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장호씨의 장남 태홍(한국감정원 감사실장) 차남 태수 삼남 태진도 사청문중이다.
조선일보 기자와 경상일보 편집국장 직무대행을 지낸 윤현걸(尹玄杰)씨도 사청문중이며, 울산시 건축사협회장을 지낸 윤승록씨와 승훈(承勳), 승문(承文)씨, 올해 초 작고한 승보(承保)씨 등은 건축사로 활동중이거나 활동했다.
문중회장인 좌상옹은 동장을 지냈으며, 큰 아들 병두(炳斗)씨는 육군중령으로 예편했고 작은 아들 병년(炳年)씨가 중구청 자치행정과장을 맡고 있다. 농소면장과 울주군 산림과장을 지낸 윤월석(尹月錫)씨와 부산시의원인 윤승민씨도 사청문중이다.
윤부남(尹富男)씨의 아들 병국(炳局)씨는 한의학박사로 현재 삼산동에 한의원을 운영중이며, 윤복상(尹福相)씨의 장남 병훈(炳勛)씨는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 또 경주 외동읍장과 한나라당 경주지구당 사무국장을 지낸 윤인호(尹仁浩)씨와 경주시의원으로 활동한 윤의홍(尹儀洪)씨, 그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윤종수씨, 대구대 윤무홍 교수, 해운대 그랜드호텔 윤병인 사장도 문중의 일원이다.
(11)단종에 충절지킨 불사이군 문중 온산읍 화산리 산성마을 영월엄씨
현대 한국과 울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산성(山城)마을. 산성마을은 마치 돗대처럼 고사된 채 서 있는 당수나무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가는 나룻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 당수나무에서 바라보면 온산국가산업단지의 즐비한 공장건물들 사이로 멀리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들어선다. 덕하시장을 지나 온산공단을 거쳐 덕신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LG화학 온산공장으로 가는 공단 이면도로가 나온다.
이 사잇길로 약 500여m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산기슭과 논이 만나는 곳에 옛 원강서원(圓岡書院)이 나타나지만 미리 찾을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30여m를 더 내려가면 오른쪽에 중기대여 홍보판과 산성마을을 알리는 간판이 나온다.
겨우 승용차 한대가 다닐 정도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게 고사한 당수나무(해송)이다. 당수나무부터 시작되는 이곳 산성마을이 영월 엄씨(寧越嚴氏) 충의공파(忠毅公派) 울산문중(蔚山門中)의 가장 큰 집성촌이다.
산성 엄씨라고 불리는 영월 엄씨의 울산문중은 불사이군과 충(忠)의 대표적 문중이다. 충으로 인해 엄청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울산문중은 영월 엄씨 시조 엄임의(嚴林義)의 12세손인 단종 충신 충의공 엄흥도(嚴興道)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원강서원도 충의공을 모신 곳이다. 충의공은 서슬퍼린 세조초기 시해돼 영월 청룡포에 부유하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장본인이다.
당시 영월의 호장으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뒤 화를 피해 멀리 영남의 한 귀퉁이인 울산(당시 언양현)에 자리를 잡고 몸을 낮췄다. 충의공은 울산으로 오기전 인근 두동면 봉계의 지근거리인 경북 경주에 잠시 거처를 정하기도 했다.
충의공의 16세손인 울산문중 엄완영(71) 회장은 "복원되기 전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곧 멸문지화를 의미하는 것어서 신분을 속이고, 또 한 곳에 오래 자리를 잡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완영옹은 "지금부터 200년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하작에 묘를 쓰던 중 충의공의 5세손인 선(善) 할아버지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400년전 삼동 둔기에 사신 것이 확인돼 충의공이 울산문중의 중시조이자 입향조"라고 설명했다.
언양 금곡을 거쳐 중시조의 5세손인 선 할아버지가 삼동 둔기에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6세손인 입(立) 할아버지때 이곳 산성으로 옮겨와 산성마을의 입향조가 됐다.
400년전 불사이군의 충을 위해 거처를 누차 옮긴 선조들 못잖게 오늘의 후손들도 나라를 위해 정든 삶의 터전을 두고 떠났다. 일가들이 함께 모여살았던 온산읍 대정리는 물론 화산리 4개 마을 가운데 3개 마을이 온산공단에 편입, 70년대부터 지난 82년까지 근 10년동안 여러차례 이주를 당했다. 그나마 공단부지로 편입이 되지 않은 산성마을 일부가 남아있어 집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공단 개발 이전까지만 해도 80가구를 훨씬 넘겼는데 지금은 40가구 정도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공단에 땅을 내준 30여가구의 일가들은 인근 덕신에, 나머지는 울산시내로 옮겨갔다. 이주역사와 함께 1799년(정조 23년)에 대정리에 세워진 원강서원은 화산리 산성마을로, 다시 지난 98년에 삼동면 둔기리 하작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지금은 매년 음력 9월18일 충의공의 제사는 삼동면 둔기리 서원에서 지내고 있다.
산성이란 마을 이름은 지금은 많은 부분이 공단개발도 헐려 없어졌지만 토성이 있었기 때문. 충의공의 17세손 엄주순씨는 "공단개발당시 토성이 헐리면서 조선시대 포알들이 많이 나왔다"며 "문화재를 중히 여기는 요즘 같았으면 문화재 출토에 따라 공단으로 개발되지 않고 일가들이 그대로 함께 살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주일대사를 지낸 뒤 외무부장관을 두번이나 지낸 엄민영(嚴敏永·작고·16세손) 전 장관을 비롯해 조달청장과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지낸 엄일영(嚴鎰永) 전 청장, 엄구영(嚴九永·작고) 전 경남도의원, 엄신영(嚴愼永) 전 온양면장도 이 곳 산성마을 출신이다.
특히 근대사에 들어와서 정계과 관계, 재계, 교계에서 영월엄씨 울산문중은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울산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뒤 현재 울주군정을 맡고 있는 엄창섭(嚴昌燮) 군수도 산성마을에서 자랐다. 부산시공무원연수원의 엄윤섭 원장,
해군대령으로 진해해군본부에 근무중인 엄상섭, 새마을문고 이사장을 지내며 막사이사이상 수상자인 엄대섭(작고), 의학박사로 개업의로 활동중인 대섭씨의 두 동생 봉섭, 용섭씨 등도 다 영월엄씨 울산문중의 일원들로 중시조인 충의공의 18세손들이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엄장섭씨,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엄현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엄섭일씨도 마찬가지다.
17세손들인 주(柱)자 항렬에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엄주탁씨와 미생물 농학박사인 경북대 엄재열 교수, 울산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엄주대씨, 육군 소령으로 공학박사인 엄동환, 온산부면장을 지낸 엄주린씨, 울산시청의 엄주호(서기관), 엄주량, 엄주권(사무관), 엄재영, 엄주복씨 등 엄씨 성을 가진 울산시공무원 가운데 열에 아홉은 충의공의 후손들들이다.
또 북구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건설한 아진건설의 엄재목, 재석씨는 경북대 교수로 있는 재열씨의 동생들이다.
(12)대리마을로 동래정씨(東來鄭氏)
병자호란 의병장 정대업 "양명"
언양에서 석남사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향산초등학교를 지나자 마자 오른쪽 사잇길이 보인다. 길의 초입부터 그리 넓지 않은 데다 마치 뱀이 누워 있는 것처럼 굽은 길이 연속이다. 사람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다.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향산지석묘 안내판이 이정표 역할을 대신해 준다. 향산지석묘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울산에서 밀양 가는 도로가 한창 공사중인 것이 눈에 들어 온다.
도로너머 언덕배기 아래에 가지런히 집들이 늘어서 도로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도 마을회관과 그 뒤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눈에 띈다.
이 곳이 바로 대리마을로 동래정씨(東來鄭氏)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뱀의 등처럼 휜 고갯길을 따라 온 것과는 달리 마을 앞쪽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데다 비 그친 틈을 타 몇몇 마을 사람들이 개울가를 훑고 있다. 전형적인 여름 시골마을 풍경이다. 울산에서 밀양가는 길이 마을 들판을 질러 마을입구의 언덕을 뚫고 시원스레 지나가지만 마을 입구에 진출입로가 완성될 경우 사람들의 방문길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전망이다.
지내리 대리마을을 중심으로 지내리의 신리 등에 동래정씨들이 지금도 80여 가구가 담을 잇고 살고 있다. 동래정씨의 대표적 집성촌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또 동래정씨 회은공파(淮隱公派)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83년전 울산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 뒤 반세기동안 지내 대리를 중심으로 산전리, 등억리, 길천리, 궁근정리 등 상북면 지역 곳곳에 세거하게 됐다. 최근 발간된 울주군지에 지내리에만 동래정씨가 97가구가 모여 사는 것은 물론 산전 54, 등억 29, 길천 23, 궁근정 32가구가 각각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 상북면 지내의 동래정씨는 2개 대파로 구분할 경우에는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輔派), 24개파로 구분할 경우에는 회은공파에 속한다.
그래서 지내마을은 동래정씨 교서랑공보파 회은공파의 집성촌이다. 파선조인 회은공 정조(鄭조)는 시조인 정회문(鄭繪文)의 11세이며, 입향조인 남은(南隱) 정택(鄭擇)에게는 5대조이다. 회은공은 고려때 진사를 지냈다. 지내마을 정씨들은 지난 2000년 파선조 회은공의 재실(회은재 淮隱齋)을 짓고 입향조의 선대인 15세 인손으로부터 8대인 창(昌) 할아버지까지 남은공 성역에 설단했다.
회은재는 마을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쉽게 찾을 수 있다. 입향조인 남은공을 모신 재실인 남은재는 회은재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다.
동래정씨가 이곳 상북에 처음 온 것은 1519년 16세손 남은(南隱) 정택(鄭擇). 남은은 1519년 기묘사화를 만나자 아버지 인손(仁孫)을 등에 업고 남으로 내려와 경주 삼정동(현재 울주군 두동면)에 잠시 은거하다 상북 지내로 와 자리를 잡았다. 그 뒤 남은의 후손들은 지내 대리마을을 중심으로 상북과 전국으로 퍼졌다. 현재 남은공의 후손은 결혼한 성인만도 1천800가구에 달한다.
남은의 현손으로 동래정씨 20세손인 정대업(鄭大業년)은 1594년 언양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관북(關北)의 백성들을 외복(畏服)시켰으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언양에서 의병장이 되어 유서를 써 두고 북상해 이천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 1637년 순국했다.
1866년 영조때 호조좌랑으로 승직됐으며 순절록(殉節錄)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서문을 쓰고 1865년 발간됐다.
입향조 남은의 15세손이며 시조로부터는 31세손인 종손 정진구(鄭鎭九)씨는 매년 음력 10월3일에 전구에 흩어져 있는 문중들이 이곳 대리 재실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양력 3월1일에는 정기문회를 갖고 문중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고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내력들을 들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는 한 마을에 100가구가량의 일가들이 모여 있어 다른 성씨들이 마을에 자리잡기 힘들었다. 입향조의 13세손인 정인택(鄭寅澤) 문중회장은 이곳은 몰정가였기에 다른 성씨들이 이곳에 이주를 하더라도 정씨들에 끼여 못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고 설명했다.
종손인 진구씨와 같은 항렬인 정진만(鄭鎭萬) 화수회장은 지금은 모(謨)자 항렬인 입향조의 14세손들이 문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문중의 전체 촌수가 28촌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손인 진구씨가 부산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문중회장인 인택씨는 동래정씨종약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진만 화수회장도 종약소일을 맡고 있다. 정임성(鄭壬成) 전 양상읍장은 정인태(鄭寅泰)씨와 함께 종친회 감사를 맡고 있으며, 정인주(鄭寅注)씨는 종친회 유사로, 이름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정인주(鄭寅柱)씨는 종친회 총무로 각각 활동중이다.
또 기초의원으로 활동했던 정인조 전 울주군의회 의원과 정순모(鄭舜謨) 전 울주군의회 의원은 나란히 종친회 상임고문이다. 범서농협 이사인 정준석(鄭俊錫)씨는 화수회 부회장으로 정태우(鄭泰佑), 정만수(鄭萬洙)씨와 함께 하고 있다.
상북부면장으로 퇴임한 정진호(鄭鎭浩)씨는 자영업을 하고 있는 정진학(鄭鎭學)씨와 화수회 감사를 맡고 있다. 언양에서 대일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진섭(鄭鎭燮) 원장은 화수회 총무로, 유사인 정성모(鄭成謨)씨는 길천리 지화이장으로 활동중이다.
(13)울주군 두서면 복안리 신기마을(경주 이씨)
고려말 학자 이제현선생의 후손
울산시 울주군 봉계버스터미널에서 언양방면으로 250여m를 가다 "황우쌀마을, 인빌(정보화마을)"이라는 입간판 오른쪽으로 나 있는 활천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 아래로 난 작은 굴다리가 나온다. 조금 더 올라가서 복안천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즈막한 배나무가 줄지어 있는 배밭과 함께 잘 정리된 논들이 이어진다.
배밭을 지나 처음 나오는 버스승강장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인 외길을 따라가면 마을경로당을 비롯해 기와를 그대로 얹은 채 집을 개조한 농가 20여 채가 보인다. 경주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신기마을이다.
신기마을을 비롯해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음지, 양지, 활천, 복안, 미호, 내와, 차리, 구량 등 두서면 일대에는 경주이씨가 170여가구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신기마을에는 17가구가 살고 있다.
울산에 경주이씨가 터를 잡게 된 것은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4대손으로 한성판윤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지대(之帶·중시조 거명(居明)의 21세)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두서면 구량리로 내려와 은행나무를 심었다.이 은행나무가 두서면 은행나무로 현재 천연기념물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이어 지대의 후손인 태천공 경호(26세)의 셋째아들 상겸이 복안리에 자리를 잡은데 이어 32세인 흥만이 5촌 당숙인 동택을 따라 신기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신기마을은 복안리 4개마을 중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새로운 터라는 의미의 "신기"마을이다. 중시조는 원시조 알평(謁平)의 36세손인 거명이다.
계파로는 울산의 입향조인 판윤공파에 속하고, 신기마을의 입향조는 흥만이 된다. 현재 복안리 미호산 1번지에 입향조인 흥만의 산소가 자리하고 있다.
경주이씨가 살고 있는 집의 안방에는 모두 익재공의 초상화와 원시조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의 재실인 표암재(瓢巖齋·경주시 동천동) 사진이 걸려있다.
신기마을에서 두서면 일대 문중일을 맡아보고 있는 이정우씨는 "경주이씨 화수회를 열 때 집집마다 초상화와 재실사진을 나눠줘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음력 3월 중정일이면 경주 표암재에서 제를 지내고, 매년 3월에는 종하체육관에서 경주이씨 한마음 단합대회를 갖습니다.
종하체육관이 37세손인 이종하가 울산시에 기증한 것이거든요. 또 매년 4월에는 두서면지역을 3개구역으로 나눠 돌아가면서 화수회를 열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신기마을에 가서 "우야"를 찾으면 웬만한 이름은 다 있다. 광우, 명우, 장우, 건우, 천우, 현우, 춘우, 상우, 성우, 혁우, 택우, 환우, 관우, 채우, 창우, 용우, 동우, 만우 등 중시조 거명(居明)으로부터 38세손의 돌림자인 "우"에 붙을만한 이름은 거의 다 붙여졌기 때문이다.
이정우씨는 "경주이씨는 항렬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이름만 들으면 누구인지 알 정도"라며 "35세손부터 41세손까지 돌림자가 영, 규, 종, 우, 상, 형·희, 재"라고 설명했다.
또 신기마을에는 명절이 되면 올해 여든 셋인 규탁(36세손) 옹과 서울에 살고 있는 세살 난 준형(40세손)군이 다같이 모여 4대가 한 자리를 이루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가 열여섯 가구, 경주최씨가 3가구, 한씨와 권씨가 각각 1가구씩 살고 있는데 경주이씨와 경주최씨는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
입향조인 흥만의 고손자 규삼의 누나 신리가 경주최씨의 병수와 결혼하면서 사돈지간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몰된 대곡댐 일대 잠방골이라는 곳으로 시집을 간 규삼의 누나가 병수와 함께 신기마을로 오면서 경주이씨와 경주최씨가 한동네 살게 된 것이다. 게다가 35년여 전에 이학이씨가 같은 동네에 사는 최석환씨와 결혼하면서 두 집안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지역의 특산물인 봉계황우쌀 마을로 불리는 두서면 복안리, 활천리를 비롯해 음지, 양지, 활천마을은 지난해 6월부터 행정자치부로부터 2차 정보화마을로 선정돼 모두 100여대의 컴퓨터가 보급돼 있다.
이 때문에 농사철이 아니면 마을 경로당에서 밥을 해먹거나 장기를 두던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인터넷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여름방학철인 요즘은 춘해대학 멀티미디어학과에서 컴퓨터 관련 자원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두북농협 조합장으로 있는 장우씨와 두북농협 직원 건우씨, 동구청 지역경제과에 근무하고 있는 광우씨도 신기마을 출신이다.
또한 신기마을 출신으로 부친대에 부산을 거쳐 서울에 정착한 정림스틸 대표로 왕성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이 용준씨가 있다.
유난히 의사가 많은 것도 눈에 띈다. 울산시 중앙외과 원장인 명우씨, 또 명우씨의 아들 상문씨도 현재 서울대학교 의대에 재학중이다.
혁우, 상호, 상훈씨도 각각 서울, 청주, 수원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경주이씨와 사돈지간인 경주최씨 중에서는 북한 동포돕기와 인도 등지의 봉사활동으로 평화 및 국제이해 부문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법륜 스님(속명 최석호)이 신기마을에서 자랐다. 또 경상일보 최석복 기자가 최병수의 손자다.
(14)남구 야음동 송호마을 청송심씨(靑松沈氏)
예문관 학사지낸 학사공이 입향조
삼산에서 여천천을 지나 여천고개를 오르다 정상에서 왼쪽에 화성건업 간판이 보인다. 화성건업을 알리는 간판의 반대쪽으로 난 길을 찾아 들어가면 송호(松湖)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 남쪽에는 사방으로 큰 길이 새로 생겼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이곳이 가장 좋다.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좁은 길을 따라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왜 마을 이름을 송호(松湖)라 붙였는가 쉽게 짐작이 간다. 수령이 몇 백년은 족히 됨직한 소나무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배수장이 자리한 삿갓산을 뒤로 하고 마치 호수처럼 움푹 패인 곳에 집들이 앉아 있다. 소나무 호수라는 뜻의 송호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싸인 20가구 안팎의 송호마을 풍경은 지척인 울산도심과는 너무도 다르다. 삿갓봉 너머로 보이는 롯데호텔 등 빌딩숲과 아파트 단지, 마을 앞 4차선 대로와 공장 모습과는 달리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마을의 집과 집을 연결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 집들 또한 2층구조는 찾아보기 힘들고 시멘트기와를 덮은 오래된 집들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오래전 공원지구로 개발이 제한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송호마을이 청송심씨 인수부윤공파 내금위공파(內禁"公派) 후손들이 500년을 넘게 살아온 곳으로 청송심씨의 집성촌이다.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삼산동 현대백화점 맞은 편 건물 이름도 송호빌딩이다. 흔히 울산사람들은 이 곳 청송심씨들을 야음심씨라고도 부른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송심씨들이 이 곳에 터를 잡은 것은 연산 4년 1498년 조의제문으로 인한 무오사화때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10세손인 심광형(沈光衡)과 장자인 황(滉) 부자가 울산의 을숙도란 곳에 귀향을 온 뒤이다. 후손들은 을숙도를 지금의 돗질산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 4품의 예문관(한림원) 학사를 지낸 학사공 광형 할아버지가 울산의 입향조이다.
조선조를 통들어 3집밖에 없는 3대정승 집안의 한 집인 명문세족으로 훈구파에 속한 학사공 부자가 귀향을 오게 된 것은 학사공이 연산임금에게 사초의 열람과 사관을 벌함은 가당치 않은 것이라고 강력 주청했기 때문이다.
학사공과 장자인 내금위장 황은 훈구파이면서도 원칙론을 들어 연산의 잘못을 꼬집는 바람에 귀향살이의 고초를 겪은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복작됐다. 그러나 귀경하지 않고 송호마을에 정착했다. 지금으로부터 505년전 일이다. 입향조와 그의 아들인 내금위공의 묘소는 남구 신정동 시리봉에 있으며 묘소아래에 재실인 갈현재(葛峴齋)가 있다. 신원복작뒤 입향조인 학사공의 차남인 훈도공 광(洸)도 울산으로 옮겨왔다.
입향조의 증손인 심환(沈渙)은 울산교수로서 임진왜란때 창의해 많은 전공을 세워 울산충의사에 임란공신으로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교수공의 묘소는 송호마을 앞 야음동산에 있으며 재각으로 여천당(麗泉堂)이 있다. 여천당의 건물은 과거 병영 청사의 일부였던 것을 70년전 문중에서 사들여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입향조의 후손 가운데 장자인 내금위장 황의 후손들이 야음동 송호마을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후손들은 인근인 선암동 부곡동과 태화강을 건너 중구 유곡동, 농소면 호계 송정, 청량면 하정, 삼동면 금곡, 밀양군 삼랑진, 양산군 하북면, 기장군 그리고 경기도 동두천으로 세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울산시승격이전인 1960년에만 해도 야음동에 100가구, 선암동에 80여 가구가 집단으로 살았다. 현재 전국적으로 1천200여명이 내금위공파 종회의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송호마을의 심씨들은 학문중시라는 선조의 유훈에 따라 중앙관직에 진출하기 보다 교수, 촬방, 좌사 등 지방관직에 머물렀다. 1930년대 신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해 작고한 심근식(沈根植)과 진주사범을 나온 심휴구(沈烋求), 그리고 현재 문중회장인 심경식(沈炅植) 회장의 부친인 심준구(沈準九)씨 등 9명이 진학계를 만들기도 했다.
입향조의 13세손인 상·종자 항렬과 19세손인 녕자 항렬이 함께 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학문중시에 따라 많은 인물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회의원과 울산광역시장을 지낸 심완구(沈完求) 전 시장을 비롯해 심춘보(沈春輔)전 안기부관리관, 심부용(沈富龍) 전 울주부군수, 심수식(沈守植) 울산동부경찰서장을 비롯해 심봉구(沈奉求) 전 경남도의원, 심화보(沈和輔) 전 경남도의원(밀양)과 심규화(沈揆華) 울산시의원이 내금위공파 출신이다. 부산MBC 前보도본부장 심상집씨 세방전지 대표 심상호씨가 있다
또 법조계에서는 작고한 심영식(沈永植) 전 부장판사와 심규명(沈揆明) 변호사와 심규찬(沈揆贊) 군법무관이 있다.
교육계에는 심진구(沈璡求) 전 인천교육위의장과 심원오(沈元五) 전 울산교육위 부의장이 있으며 작고한 심용식(沈鏞植) 전 교육장과 심정구(沈正求), 심칠구(沈七求·작고), 심보구(沈甫求) 전 교장은 초등출신이며 심종성(沈鍾聲), 심우형(沈愚亨·작고) 심손(沈遜·작고) 전 교장과 심대식(沈大植) 홍명고 교장은 중등출신이다.
이와 함께 심순식(沈舜植·경상대), 심경보(沈敬輔·서울교대) 전 교수와 심경구(沈慶求·성균관대), 심인보(沈仁輔·부산대), 심걸보(沈杰輔·천안대), 심규박(沈揆博·동국대), 심재용(沈宰用·상명대) 교수도 문중회원이다. 심현식(沈賢植), 심정칠(沈正七), 심상완(沈相完), 심성규(沈聖揆), 심창용(沈昌用), 심재정(沈哉廷) 박사도 있다.
의료계에는 심원보(沈元輔), 심성보 심우성(沈愚星), 심규목(沈揆穆), 심규빈(沈揆斌), 심기용씨가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으며, 심우빈(沈愚斌·작고) 전 농협 군조합장, 심덕구(沈德求) 전 조흥은행 상무, 심규보(沈圭輔) 전 농협중앙회 이사, 심경보(沈炅輔·경남은행), 심정보(沈正輔·부산은행), 심윤보(沈允輔·서울은행), 심규동(沈揆東·감정원) 전 지점장이 금용계에서 활동했다.
심완조(沈完祚) 덕원그룹회장, 심규수(沈揆秀) 한진그룹 이사와 더불어 심화(沈和) 공인회계사, 부산시청에 있는 심규락(沈揆洛) 건축기술사 등도 문중이며, 군에서는 심홍보(沈弘輔), 심덕보(沈德輔) 해군대령이 장군진급을 앞두고 있다.
(15)울주군 상북면 향산리 진주강씨
언양에서 석남사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울산자동차면허시험장이 보인다. 여기서 100m 정도를 더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향산초등학교와 학교 앞 왕복 1차선 도로를 지나는 육교가 나온다. 인근에 육교는 이곳 한 곳 뿐이다. 육교 오른쪽의 나즈막한 자약봉 아래 자리한 동네가 울주군 상북면 향산리 향산마을. 400여년 전부터 진주강씨가 자리를 잡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뒷산인 자약봉에서 약 향기가 그윽하게 풍긴다고 해서 향산리(香山里)로 불리는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능산마을의 능산리와 합쳐졌다.
향산리는 달리 효자리(孝子里)라고도 불린다. 효자가 났기 때문이다. 향산마을 입구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에는 향산마을 입석이, 다른 한 곳에는 효자리 입석과 바로 옆에 효열비(孝烈碑)가 세워져 있다. 효자리 입석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명치 43년) 강상황(울산 입향조 강이인의 9세손)의 효행을 기념해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자연석에 "효자리"라는 글자를 세겨둔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로 부터 받은 효열상 상금은 10원.
이후 99년 향산마을 진주강씨 후손들은 효자리 입석 옆에 효열비를 세웠다. 효자비가 아니라 효열비(효자+열녀)를 세운 것은 강상황의 효행과 더불어 아내 최씨가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섬긴 것을 기념한 것이다.
향산문중 회장 강장회(75)옹은 "괴질에 걸린 어른을 낫게 하려고 의원을 찾았는데 의원이 인육(사람고기)을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상황 어른이 자신의 허벅다리를 제 손으로 베내 국을 끓여줬습니다. 그래도 어른의 병이 낫지를 않아 다시 의원을 찾았는데 인육이 적다고 해서 다른 한쪽 허벅다리를 베냈답니다"며 상황의 효행을 설명했다.
문중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강영모(52)씨는 "최씨 부인은 남편 상황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 먹여 훗날 열녀로 선정됐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효자·효부가 난 마을을 대변하듯 향산마을에는 일흔살 된 며느리 최차선 할머니가 아흔살 먹은 시어머니 박화순 할머니를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다. 강장회옹은 "강씨 집안에 시집 온 최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을 잃고 딸만 하나 낳았는데 나이 70이 되도록 시어머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평생가도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고 대문 밖으로 고함소리 한번 나온 적 없을 정도로 사이좋게 지냅니다"며 "신혼여행가서도 이혼하는 세태에 동네에서 얼마나 큰 미담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고 말했다.
강영모씨는 최근 문중에서 보관중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울산의 입향조인 강이인(姜里仁·1580~1606)에게 보낸 자필 답신-고서 간찰첩"으로 옛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TV프로그램에 출현, 감정위원 감정가로 1천만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강이인의 후손과 이항복의 후손이 주고받은 편지는 감정가 50만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향산마을 강씨문중에서 이 편지를 보관해 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강이인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왜적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자로 "너의 머리"라고 답했다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8년동안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알려진 오성인 백사 이항복은 일본으로 가는 사신에게 "나의 문하생 희주의 아들 이인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살아있거든 본국으로 데려오라"는 서신을 줬다.
그 사신이 일본에 가서 이인을 찾아 조선으로 데려왔다.
청년 이인이 귀국길에 처음 조국땅을 밟은 곳이 지금의 학성공원 앞 포구였다. 마침 강씨 성의 병마절도사가 이인을 맞아 한양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인은 가족이 없는 한양으로 가지않고 훈련원정 고처겸(제주고씨)의 딸과 혼인해 아들 계현을 낳고 27세에 병사했다.
이어 아들 계현이 향산리의 기계유씨 집안 딸과 혼인해 어머니 고씨와 함께 향산리로 들어와 살면서 향산마을에 진주강씨가 번창하게 된다. 따라서 울산의 입향조는 강이인이고, 향산마을의 입향조는 이인의 아들 계현이 된다.
초기에는 기계유씨와 진주강씨가 한 동네에 살았으나 차츰차츰 기계유씨가 떠나고 진주강씨만 마을에 남아 모두 220호를 번창시켰다. 약 40여년 전부터는 타성이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은 전체 40가구 중 22가구가 강씨다.
법정리명으로는 향산리에 속하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능산리인 능산마을에도 진주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나 향산마을과 능산마을의 가장 가까운 촌수가 36촌이다. 능산마을은 향산마을보다 약 10년 앞서 강이성(姜以成)이 들어오면서 진주강씨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향산마을 출신으로는 강인수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강대철 송원산업 이사, 강걸수 울산시 문화체육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명수씨가 있다. 또 강영선 전 울산상호신용금고 이사장, 강방회 전 부산우체국장, 강인수 전 경남도의원, 강석회 전 한국전력공사 경남지점 관리실장, 강성덕 전 대전철도청 국장도 향산마을에서 자랐다. 또 강대윤, 강대호씨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강대관씨가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6)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송정마을 초계 변씨
대부 지낸 승정 울산에 처음 터잡아.
삼동면사무소에서 양산 신평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보은천을 앞에 두고 그림같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집들 뒤로 대나무들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송정마을이다. 예부터 송정마을을 봉좌송정(鳳坐松亭)이라 불렀을 만큼 경치가 뛰어나다. 송정마을을 딱히 구분한다면 상송정과 하송정으로 나누는데 보은으로 쓰여진 버스정류장에서 들어가는 곳이 하송정마을이다. 이 곳이 울산 곳곳에 퍼져있는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草溪卞氏 參判公派 蔚山門中)의 대표적 집성촌이다.
송정마을은 양산과 언양, 웅촌으로 사통팔달의 길목에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어 전형적인 도시근교의 시골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재실인 일송재(一松齋)가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외지로 많이 떠났지만 아직도 집 주인을 알리는 문패들 가운데 상당수가 변씨 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이 노나라의 변읍(卞邑)에 봉해지면서 변씨의 성을 얻었다. 변씨의 비조라 할 수 있다. 그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당나라 때 예부상서로 8학사 중 한 자리를 차지했고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가 사신으로 오면서 효경 한 질을 갖고 오자 경덕왕이 그의 학식에 감동해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 신라에 남아있게 했다.
그리고 그 사신의 후손인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이 고려 성종 때 1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인 문하시중으로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초계변씨들은 문열공을 수관시조(受貫始祖)로 섬기고 있다.
멀리 중국의 주문왕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초계변씨가 울산에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예전엔 울산이었던 양산시 웅상읍 백동리다.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지낸 성천(誠泉) 변승정(卞承貞)이 약 400년전 경기 안성에서 옮겨왔다. 시조인 문열공의 16세손으로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파의 입향조이다. 울산 입향조 문열공의 묘소는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에 있으며 후손들은 지난 97년 중구 성안동에 입향조를 모신 성모재(誠慕齋)를 지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양산 웅상의 편들이란 지명은 예전에 변씨들의 논이 하도 많았기에 변씨의 들에서 변들로 다시 편들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입향조의 아들로 가선대부 병조참의를 지낸 현동(玄東) 할아버지 때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교육청사 인근인 지금의 유곡동 지역으로 옮겨왔다. 태화동 동강병원 뒤와 유곡동, 성안동 곳곳에 전답을 가졌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변철종 종친회장은 "지금의 우정선경1·2차 아파트단지는 예전에 초계변씨들의 선산이었으며 1960년대 선경직물에 자리를 내주면서 인근의 태화공원으로 모두 이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초계변씨 울산파들이 본격적으로 울산의 곳곳으로 확산된 것은 입향조의 손자인 기복 할아버지가 상북의 명촌으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종택은 큰 변화없이 예전의 그 자리에 있다. 종손인 태수(泰守)씨가 입향조의 16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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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할아버지는 11남2녀를 두었다. 그 아들들이 울주군의 상북, 삼남, 삼동, 언양, 중구 성안, 북구 호계 등으로 흩어져 또 다시 일가를 이룬 뒤 경북 경주, 양남, 양북, 부산, 서울, 안성 등까지 그 세를 넓혔다. 울산파의 회원으로 약 700여명이 등록돼 있다. 그 가운데 삼동 보은의 송정마을이 아직까지 집성촌으로 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종친회 총무를 맡고 있는 변동선씨는 "열한분이나 된 입향조의 손자들께서 울산의 곳곳으로 흩어져 일가를 이뤘으나 도시화가 되면서 이제는 그래도 집성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송정마을로 재실과 문중선산이 있는 중구 태화동과 성안동, 그리고 종가가 있는 명촌 이 세곳이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문중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울산종친회의 회기에도 천성산과 태화산, 함월산의 세봉우리를 형상화해 두고 있다. 종친회 변철종 회장 등이 매년 8월 여름방학 때 성모재에서 아이들을 모아 조상들의 내력과 함께 집안의 예절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고한 변동수 전 언양향교 전교와 변재선·변만선씨가 초계변씨 울산문중 출신이다. 이와 함께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변조웅 장군과 변철종 울산시 국장, 변재근씨, 변창섭 총경, 변성관씨 등이 군과 교육계, 관계, 경찰에서 활동하다 퇴임했다. 변상백 전 면장과 변기찬 전 출장소장도 같은 집안이다.
현직에서 활동중인 문중들로는 변양섭 울주군의회 의장이 선출직으로 눈에 띈다. 공무원 가운데 시 사무관으로 변동주·변정복씨가, 군 사무관으로는 변동구씨가 있으며 중구청에 근무중인 변건수씨가 있다.
교육계에서는 변철만 부산여대 교수와 변정용 동국대 교수, 변영대 영천고 교장, 변동섭 언양중 교감을 비롯해 변재철·변강섭씨가 고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변태곤 강북교육청 감리관도 초계변씨 참판공파 울산종친회 회원이다.
또 변경민 공학박사와 변달석 공학석사도 집안이다. 변재국 대우자동차 부장도 마찬가지이며, 농협이사로 변춘호·변윤백씨가 활동하고 있다. 농협이사와 울산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하고 농협이사로 활동중인 변정의씨도 울산문중의 일원이다
(17)울주군 삼남면 조일리 지랑마을 영산 신씨
칼등.왕마등.산세영향 무인조상 많아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은 전체 500여 가구 가운데 영산신씨(靈山辛氏)가 약 100가구에 이른다.
인구 수로는 삼동면 인구의 약 17%를 차지한다. 1969년 울산공단 공업용수 공급원인 대암댐에 영산신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하잠, 둔기마을이 수몰되기 전에는 400여가구에 달했다. 대암댐 수몰과 산업발달로 잇따라 시골마을을 뜨면서 지금은 100여 가구만 남아 하잠, 둔기, 지랑, 방기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조일리 지랑마을은 30여 가구 가운데 20여 가구가 신씨로, 남아있는 신씨 집성촌 가운데 가장 번성한 마을이다.
울산에서 부산 방면 국도를 타고가다 울산예술고등학교가 보이는 대복 삼거리에서 오른쪽(통도사 가는 길)으로 꺾으면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도로가 이어진다. 첫번째 갈래길에서 왼쪽(반천 반대방향)으로 꺾어 하잠마을, 삼동면소재지인 사촌마을, 금곡마을, 보은마을을 지나 오른쪽 도로가에 버스정류장 표지판과 큰 나무 두 그루가 있는 마을이 지랑마을이다.
언뜻 보기에는 두 그루의 나무 중에 보다 늙어보이는 팽나무가 당수나무 같지만 당수나무는 느티나무다. 원래는 장정 8~9명이 둘러싸야 할 정도의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당수나무가 있었지만 해방전해인 1944년 가을 정부에서 배를 만들 목적으로 나무를 베어버린 이후 두번에 걸쳐 심은 나무다.
삼동면 신씨 가운데 최고령인 신병호(87)옹은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는데도 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며 "그 나무로 배도 못만들고 이듬해 해방이 돼 버렸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도로 양쪽으로 난 마을의 가운데 있는 당수나무는 옛부터 지랑마을 사랑방 역할을 해 왔다. 여름철에는 밤낮으로 더위를 피해 멍석을 매거나 새끼를 꼬는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뙤약볕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늙은 당수나무 아래서 보낸 젊은 시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신병호옹은 "옛날에는 마을을 잡으면 제일 먼저 나무를 심고 당수나무로 섬겼으니 이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 수 있겠지요"라며 배를 만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잘려나간 "역사의 당수나무"를 강조한다.
영산신씨가 울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4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래 수군절도사를 지낸 신을화(1384~1450)는 언양을 지나다가 우연히 상북면 지내리 제궁곡을 보고 살기 좋을 것 같아 자리를 잡았다. 이어 3대까지 지내리에 살다가 삼동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을화의 증손자인 축(1506~1577)이 1545년 벼슬을 그만두고 하잠마을에 내려온 뒤부터다.
축의 아들 광윤(1549~1617)이 낳은 세 형제 가운데 장남인 전은 계속해서 하잠에 뿌리를 내렸고, 둘째 훤은 방기마을, 막내 진은 조일·지랑마을에 각각 정착했다. 둔기마을은 전의 증손자가 뻗어져 나와 세를 형성한 마을이다.
그래서 하잠마을이 가장 큰집이고, 방기마을이 작은집이다. 조일·지랑마을은 막내다. 지랑마을은 달리 말랑(末郞)마을이라고 불렸다. 광윤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의 후손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산이 길게 등성이가 진 마루를 뜻하는 지랑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고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방기, 하잠, 둔기, 말랑 등 마을이름에 모두 풀초(艸)자를 붙여 표기하기도 했다. 이는 신(辛)씨의 원래 성이 "莘"이라서 마을 이름에도 풀초(艸)자를 붙이면 잘산다는 말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랑마을 출신인 신상섭 울주군청 건축허가과장은 "광윤의 손자가 12명이었는데 모조리 벼슬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은 달라도 한 집안이라는 의미에서 "삼동(三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고 설명했다.
당수나무 아래에서 도로 건너 맞은편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나즈막한 산이 보인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산은 등성이가 칼자루처럼 길어 칼등이라고 불린다. 뒤로 용마의 안장처럼 생긴 용마등과 무관의 투구와 흡사한 모양의 투구등이 차례로 있지만 최근 골프장 공사로 산 곳곳이 깎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문중 총무일을 맡아보고 있는 신석균(72)씨는 "광윤 할아버지와 광윤의 아들 전이 임진왜란 때 스스로 호를 의용장이라고 부르며 난에 참여하는 등 후세에 무과급제를 한 조상이 많은데 아마도 산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전했다.
신상섭씨는 "제가 어릴적에만 해도 동네 전체에 신씨가 아닌 성은 딱 한 집 밖에 없었어요. 바로 지랑문중 봉양재를 관리하는 재실지기였습니다. 60년대 초에는 개방물결에 따라 어른들이 재실지기 제도를 없앴습니다"고 말했다.
지랑마을에 있는 "김해김씨 열녀각"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30리 길을 걸어다니며 번 품삯으로 시부모를 공양한 배내골(양산시 원동면) 출신의 김씨여인을 기리는 것이다. 1748년에 세워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이후 1960년대에 다시 복원됐다.
지랑마을 출신 가운데 교육계에는 신상전(덕성여대 총장), 신기석(동아대학 교수), 신태용(울산과학대학 교수), 신기봉(신라대학 전임강사)씨가 활동하고 있다. 신두환, 신상기씨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신필열 삼성야구단장도 지랑마을에서 자랐다.
공무원은 신형강 현 국방부 육군대령, 신상섭 울주군 허가과장이 있다. 신기열 전 삼동출장소장, 신인환 초대 군의원, 신기홍 경남 종축장장, 신기성 삼남면장, 신상현 초대 삼동면장이 지랑마을 출신이다.
이밖에 삼동면 출신 가운데 신격호 롯데그룹회장, 신춘호 농심사장, 신원호 경상일보 사장, 신동림 울산시남구 새마을협의회 회장(문중 회장), 신기운 울산수퍼마켓협동조합장, 신동두 울주군의원이 둔기마을에서 자랐다. 신상주 삼동초등학교 총 동창회장은 왕방마을에서 자랐고, 신기태 메가마트 울산점장은 금곡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다운동 다전마을 달성서씨
시조 서진의 7대손인 건손이 울산입향조
태화동에서 태화강을 따라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신삼호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다운(茶雲)동에 들어서게 되고 이곳이 바로 달성서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집성촌이다.
울산사람들은 흔히 달성서씨를 다전서씨라 부른다. 400여년 전부터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다운동은 원래 울주군 범서면 지역으로 정조 때에는 다전이라 했다. 고종 31년(1894년)에 다전과 운곡 두 마을로 나뉘어 졌다가 1914년 다전과 운곡, 인근 서사리에 속했던 신안동 일부를 합해 다운리가 됐다. 다운(茶雲)은 다전(茶田)의 "다(茶)"와 운곡(雲谷)의 "운(雲)"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운동의 옛 이름이 다전인 까닭은 옛부터 이곳에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운동은 태화강 중류 굴화천과 국수봉에서 흘러내리는 척과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토질이 두텁고 사시사철 양지 발라 삼동 추위에도 땅이 얼지 않는다. 또한 기후가 고온다습해 차나무가 식생하기 좋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의 차를 왕에게 토공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다운동에서 다전서씨 집성촌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1991년 도시계획이 실시되면서 급속도로 도시화됐기 때문이다. 집성촌을 이루면서 한 때 40~50가구를 헤아렸던 것이 지금은 15가구 정도 남아 현대화된 주택과 아파트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을 모시던 사당 "다산사(茶山祠)" 터가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나마 이것도 도시계획 와중에 사라졌다. 다만 망조당의 네 아들 관(寬), 용(容), 정(定), 안(安)이 말에서 내릴 때 디뎠다는 하마석(下馬石)만이 외롭게 옛 추억을 곱씹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다전서씨 집성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울주군 범서면 사연리 뿐이다. 이곳도 한 때는 다전서씨 50여가구가 모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지만 젊은이들이 객지로 나가면서 지금은 25가구 정도만이 남아있다. 그래도 서씨고가를 비롯해 전형적인 집성촌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달성서씨 감찰공파 후손들은 약 1508년(중종 1년) 감찰공 서근중(徐近中)의 아들 건손(乾孫)이 울산 남목에 종7품 주부(主簿)로 벼슬살러 왔을 때부터 울산에 터를 잡았다. 건손은 달성서씨 시조 서진(徐晋)의 7대손으로 울산 다전서씨의 입향조가 된다.
다전서씨의 가세는 건손의 증손 인충이 임진왜란 때 활약하면서 일어선다. 인충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방보(邦輔)이며 호는 망조당이다. 1591년(선조 24년) 무과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종(再從) 몽호(夢虎)와 함께 가군수(假郡守) 김태허(金太虛)를 도와 왜적을 토벌해 불과 1개월이 못돼 적병 3천명을 사살했다.
그 뒤 대구 팔공산 전투와 창녕 화왕산성 전투 등에서 참전, 뛰어난 공을 세워 선조는 남옥(현재 울산의 남목)을 식읍채지로 하사한다는 교지를 망조당에게 내렸다. 다대포첨사를 거쳐 부산첨사을 지낸 망조당은 사후 정조로부터 병조참판(兵曹參判)의 관직을 받고 다산사에 모셔졌다.
그 뒤 대원군이 사원 철폐(撤廢)를 명하기 전까지 매년 다산사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만조당을 기리는 제사가 올려졌다. 국가가 지내는 제사는 울산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로 다산사는 다전서씨 일가에게는 큰 자랑거리다.
망조당의 사망 연대는 확실치 않다. 자손들에게 재산을 나눠준다는 기록을 담은 망조당의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추측해 볼 때 약 1610년(광해군 2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관, 용, 안, 정 등 인충의 아들 4형제는 3년상을 지낸 뒤 약 1612년(광해군 4년) 남목에서 다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관의 후손들은 다운동 남쪽(운곡으로 추정), 정의 후손들은 명정과 사일(사연), 안의 후손들은 다전 북쪽(다전으로 추정)에서 가세를 확장했다. 불행히도 용은 후사가 없었다.
진욱(鎭昱)(65·울산대 사회교육원 주임교수)씨는 "망조당의 후손들은 태화강을 따라 각 마을에 400여년 동안 뿌리내리면서 10년 전 통계치로 모두 1천470가구가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고 서상연 경상일보 논설실장이 장손인 사일마을 큰집은 특이한 전통이 있는데 절손으로 인한 양자계승 없이 결혼하면 첫아들을 낳아 10대째 자계승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라며 "이는 조상의 산소와 거주하고 있는 집터(서씨고가)와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전서씨는 각 마을별로 학자와 효자를 많이 배출했다. 다전에서는 학자들이 많다. 진욱 할아버지는 다전서당과 다산사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다전 출신 인물로는 고 서대규(大圭) 전 대구사범대 교수, 서진환(鎭煥) 전 교통부기감, 서진길(鎭吉) 전 울산문화원장이 있다.
운곡마을 출신으로는 서진관(鎭寬) 전 경남재향군인회장과 서진상(鎭尙) 전 양산군수가 있다. 서석수(碩洙) 부산대 약학대학 교수, 서천수(千洙) 부산대 영문학과 교수도 각각 운곡과 난곡마을 출신이다. 부산대에서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서근태(根泰) 울산발전원 초대 원장도 난곡 마을에서 자랐다.
명정마을은 효자로 유명하다. 망조당의 증손 필형(必逈)의 효행은 〈울산읍지〉에도 전한다.〈울산읍지〉에 따르면 필형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묘를 섰다가 9살 때 철이 들어 다시 장사를 지내고 3년동안 상복을 입었다.
이후 30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필형은 명정마을에서 10리나 떨어진 어머니 산소를 매일 곡을 하며 찾았다. 이에 발이 불어터졌다. 필형이 세상을 뜬 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울산부사 유담후는 그를 기려 매년 제사를 지냈다.
사일마을은 서석인(碩寅) 전 해운대 구청장과 해운대구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아들 서병수(柄洙)씨의 고향이다. 이밖에 고 서상연(相演) 경상일보 논설실장과 서상용(相瑢) 울산MBC 보도부국장 등이 사일마을 출신이다.
(19)북구 송정동 지당마을 밀양박씨
곳곳 학문정진 "터" 학자 후손들 많아
울산역에서 경주방면 국도 7호선을 타고 가다가 울산공항을 조금 더 지나면 오른쪽으로 "고헌 박상진의사 생가"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띈다. 90도로 꺾어 안내판을 따라가다 철길을 넘으면 바로 작은 구멍가게가 보인다.
철길과 나란히 난 작은 시멘트 포장길 왼편으로 집 사이 사이에 논밭이 펼쳐진 동네가 나온다. 이곳이 밀양박씨 밀직부원군 중미(중시조)의 고손자인 청풍당 영손의 후손들이 3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울산시 북구 송정동 지당마을, 큰마을, 작은마을, 골마을이다.
해방 이후 직장과 신학문 열풍으로 하나 둘 동네를 뜨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 전체가 박씨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이곳 박씨들을 흔히 "송정박씨"라고 부른다. 소지명을 딴 것이다.
박씨가 울산 송정에 온 것은 현종5년인 1664년. 괴천공 박창우와 이휴정 이동영(학성이씨)은 조선 후기의 문신 허미수(1595~1682)의 제자로 인연을 맺어 호형호재하며 지낸 사이로, 창우는 이휴정의 초청으로 울산의 예문을 가르치는 예사로 초빙돼 왔다.
박주동(63) 송정문중 괴하장학회 총무는 "전해오는 얘기로 원래 송정에는 학성이씨가 살았는데 박씨가 세를 확장하면서 이씨가 떠났다. 당시에는 고을현감이 새로 부임해 오면 예사의 후손인 송정문중 사랑채를 찾아가 인사를 할 정도로 문중에서 벼슬을 한 조상이 많았다"고 전했다.
학자의 후손이라서인지 송정동 출신의 박씨 가운데는 유난히 학자가 많다. 박종해 시인(대구 동부여고 교장)이 송정동 출신으로 박 시인의 아버지 고 박용진은 안동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교수로는 박경동(부경대), 박대환(대구가톨릭대), 박철환(울산대), 박진형(부산외대), 박준협(동명정보대), 박동호씨가 있다. 박호동씨가 대구에서 고교 교사로 있고 고 박정수 부산지법 판사, 박기완 신학박사, 박천동 시의원도 이곳 출신이다. 고 박동훈 울산MBC 보도국장, 고 박영환 부산대 교수, 고 박정수 부산지법 판사도 송정에서 자랐다.
박해수(81) 문중회장은 "옛부터 학자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을에 서당, 봉산정, 괴천정 등 학문을 연마하고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학문에 정진하던 장소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당은 300여년 전부터 농소초등학교 설립 이전까지 일대 학생의 교육을 맡아왔다. 지금은 관리는 커녕 사람이 아무도 살지않아 폐허로 변했다.
밀양박씨 송정문중에서는 현재 남구 신정2동에 지하2층 지상12층짜리 괴하빌딩(92년 준공)을 운영하면서 장학회를 운영, 해마다 60명의 문중 후손들에게 장학혜택을 주고 있다. 이 빌딩은 울산 입향조 창우의 9대손인 송호공 박증동(초대 장학회장)이 40억을 문중에 기증한 것으로 지은 것이다.
박봉수(63) 송정문중 장학회장은 "조상들이 1828년 송애정사라는 배움터를 짓고, 장학회와 비슷한 서당계를 조직해 인재양성에 힘쓴 것에 이어 박증동 어른이 자산을 내놓게 됐습니다. 옛날 서당계가 현재 장학회의 뿌리가 됐습니다"며 송정문중에서 학자가 많이 탄생한 배경을 설명했다.
송정동 큰마을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지낸 고헌 박상진(1884~1915) 의사 생가 있다. 1997년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고헌 생가는 전체 4개 동에 "ㅂ"자 모양의 목조 기와집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계층의 가옥양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얼마전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곳곳의 기왓장이 날아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박상진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박대환(60)씨는 "태풍이 아니더라도 보수가 필요해 안채 보수를 마친 상탭니다. 빠른 시일내에 기왓장 등을 수리를 하지 않으면 비가 새 생가 전체가 엉망이 되고, 2~3년 후면 지금 수리비의 갑절이 들텐데 시와 북구청이 서로 관리를 미루고 있어 안타깝습니다"고 말했다.
송정동에 살고 있는 연수(75) 병수(76) 재수(69) 준환(75) 병환(68) 건동(65)씨 등은 "판사자리까지 마다하고 독립운동을 한 박상진 의사가 총사령관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사령관을 지낸 김좌진 장군보다 이름이 덜 알려진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독립군의 후손들이 알게 모르게 정부의 박해를 받아 중앙계 진출이 어려웠다. 아무래도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박씨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마을이 산 속에 움푹 패인 곳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반면 송정마을은 뒷편에 나즈막한 산을 두고 있긴 하지만 동네 앞에는 산이 없다.
마을에서 보면 철길을 막아놓은 철조망과 울산~경주방면 국도를 넘어 공항 뒷편까지 쭉 논들이 펼쳐져 있고 끝에 산이 보인다. 앞산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이래저래 떠나고 30여가구만 남은 박씨의 후손들은 해질녘 멀리 앞산으로 넘어가는 긴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20)온산읍 대정리 광주노씨
울산 입향조 청덕비만 옛 도심 지켜
"우리는 실향민입니다.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땅을 밟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고향을 지척 두고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노진술(73) 광주노씨(光州盧氏) 종친회장이 그리워 하는 고향은 온산공업단지에 삼켜진 울산시 온산읍 대정리 대안마을. 다만 공단 중간에 위치해 있는 안산에서 동네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동네 앞산이었던 안산은 봉우리가 3분의 2 이상이 잘려나가 평평하고 나즈막한 산이 됐다. 정부에서 산을 깎던 도중 환경오염이 더 심해지는 것을 우려해 중간에 작업을 멈췄기 때문이다.
노진상(59)씨는 "젊었을 때 높다란 안산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안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소쿠리처럼 동그란 동네가 얼마나 정겨웠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공단이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주노씨 50여가구가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던 대안마을 터에는 현재 (주)풍산(옛 풍산금속) 온산공장이 들어서 있다. 당시에는 노씨들이 사는 동네에 노씨들이 면장을 지내고 노씨가 학교장으로 있다며 "노가면"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비라도 내리면 마당 곳곳에 널린 곡식들을 치울 때도 우리 집, 남의 집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광주노씨들이 대안을 떠난 것은 온산이 1973년 비철금속 제련기지(1972~1981·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대 전략산업의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온산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1975년 덕신이주단지가 조성되고 1985년 환경오염 이주사업으로 공단조성지역 거주민 이주가 시작되면서 덕신, 울산, 서울, 부산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웃동네 산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영월(산성)엄씨도 비슷한 시기에 흩어졌다.
노씨들이 대안을 떠나면서 문중 재실 이의재와 울산 입향조 준명의 부인 청주지씨와 후손 등 묘소 9기를 삼평마을로 옮겼다 87년에 옮긴 재실은 300여년된 옛날 건축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광주노씨가 울산에 온 것은 효종 즉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진술 회장은 "정확하게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중구 우정동에 세워져 있는 노준명 할아버지의 청덕비(淸德碑)가 효종1년(1650년)으로 기록돼 있음을 미뤄볼 때 350여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울산군민이 청덕비를 세운 것으로 봐 군수자격으로 울산에 와서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 말했다.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의 대안(大安)에는 준명의 큰아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씨들의 집성촌이 유지됐다. 현재 10여가구가 살고 있는 울주군 삼동면 작동리에는 준명의 둘째아들 진귀(進龜)가 터를 잡았다. 준명의 셋째아들이 정착한 온산읍 돌당마을은 대안리와 함께 공업단지에 들어가 버렸다.
전국에 9개의 본관을 가진 노씨의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는 중국 범양 출신이다.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신라 헌강왕 3년·877년)을 피해 아들 9형제를 이끌고 한국으로 이주해 와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했다가 용강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9형제가 각각 광주, 교하, 풍천, 장연, 안동, 안강, 연일, 평양, 곡산에 분파했다. 그리고 다시 교하에서 신창, 광주에서 해주, 안강에서 경주, 평양에서 만경으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대안리에서 자란 노관택씨는 서울대학병원장을 지냈고 그의 동생 노재택씨는 한국은행 감독원을 지냈다. 노용택씨는 전 울산상호신용협동조합 상무로 재직했으며, 노진상씨는 울산역 부역장, 노영구씨는 덕하역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 울산시의원으로 있는 노진달씨는 성균관 유도회 울산시 본부 총무국장으로 있는 노진술 문중회장의 동생이다. 노명택씨는 울산시청 공보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노진락(6급)씨는 회야정수사업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노진국씨와 노직수씨는 육군 대령·중령으로 예편했다. 노정수씨는 온산면 부면장, 노석채씨는 온양면장, 노진일씨는 웅촌면장을 지냈다.
(21)청량면 문죽리 밀양박씨
집성도 높아 "죽전 박씨"로 불리기도
대나무로 둘러싸인 마을, 죽전(竹田)마을은 두현저수지의 물길을 따라 동남쪽에 있다. 문수축구경기장에서 덕하시장으로 가는 군도를 따라 가면 교도소와 두현저수지, 그리고 울산시농업기술센터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논가에 큰 이팝나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죽전마을이다.
마을 이름에서 죽전(竹田)의 어원을 알려주듯 마을입구는 대나무로 둘러쳐져 있을 뿐 아니라 마을 건너 개울가에서 대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길눈 어두운 손님들을 위해 죽전마을임을 안내하는 입석이 도로길 건너에 자리잡고 있고 경로당 겸 회관인 2층 건물이 마을 입구에 떡하니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을은 대부분 기와집으로 49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여느 시골마을의 풍경과 별반 차이가 없다. 대나무 사이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낮은 지붕들이 외지 방문객에게는 시골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러나 마을 입구 두 곳에 음식점을 알리는 큰 입간판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 도심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죽전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 죽전문중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집성도가 워낙 높고 오래돼 인근 지역 성씨들이 이곳의 밀양박씨들을 죽전박씨라고도 불렀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년 전 선조들에 심은 이팝나무와 느티나무가 울산의 노거수로 손꼽히고 있다.
죽전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이는 밀양박씨의 시조인 밀성대군(박언침) 32대손인 박청입(朴淸立). 죽전마을 밀양박씨의 입향조로 오늘의 죽전마을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밀성대군은 신라54대 경명왕의 장자였기에 경명왕이 입향조의 32대조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초대왕 박혁거세가 있다.
입향조 청입 할아버지는 원래 경북 구미시 선산면 신기리에서 출생했다. 입향조의 10대손으로 문중 고문인 박진원(80)씨는 "입향조의 이주 내력에 대해 특별히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아마 결혼하면서 이곳에 정착한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파계보 제작을 맡고 있는 문중의 박용준 회장은 "파계보를 제작하면서 입향의 내력을 여러 갈래로 조사를 해봤으나 뚜렷히 드러나는 게 없다"며 후손들이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입향조는 죽전마을 뒤 묘소에서 300여 성상동안 후손들의 안녕을 지켜보고 있다. 입향조의 12대손인 차형(27)씨가 문중의 종손이다. 후손들은 해마다 음력 10월10일이면 모두 죽전마을 뒤 재실에 모여 입향조에게 새로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 데 올해는 태풍 매미로 재실문이 훼손돼 정비중에 있다.
입향조는 창원 황씨 할머니와의 사이에 홍적(弘積), 덕창(德昌)과 척과쪽에 자리를 잡은 수하(守夏) 등 3형제를 뒀다. 그리고 300여년이 흐른 지금은 그 후손들이 350여 가구 1천600여명에 이른다.
밀양박씨 죽전문중의 350여 가구 가운데 지금 죽전마을에는 30가구 가량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60년대 중반 불이 나 마을의 절반가량을 태웠다. 전체 마을 49가구 가운데 비교적 많은 수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60년대 까지만해도 죽전마을에는 박씨문중을 제외하고는 고씨, 이씨, 변씨, 양씨, 차씨가 각 한 집씩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외손들이어서 일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논농사의 비중이 적어지고 울산이 공업도시로 발전하면서 자식들이 외지로 나가기 시작,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 줄어든 비중 만큼 타성들이 마을에 늘어나고 있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죽전문중의 일원으로 사회활동이 가장 왕성한 후손으로는 박맹우 울산시장이 대표적이다. 문중 고문인 진원씨가 박시장에게는 숙부가 된다. 그리고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총선에 출마하기도 한 박정근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현재 (주)풍산 기획이사로 근무중인 박정국씨와 동남유화 노조위원장 박중하씨, 그리고 전 육군중령 박중하도 죽전문중이다.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뒤 고인이 된 박일훈씨도 문중의 일원이었으며, 제주대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재우씨, 부산 부곡중 교감으로 정년퇴임한 박정훈씨, 부산시교육청에서 근무한 박봉훈씨도 죽전박씨 문중이다.
동구청에서 사무관으로 재직중인 박효성씨와 남구청 토목담당 계장을 맡고 있는 박장호씨도 문중회원이며, 청량농협 지점장을 맡고 있는 박경훈(덕하지점장·종친회 총무), 박영효(율리지점장)씨도 죽전마을 사람이다.
국회의원을 지낸 차화준씨는 밀양박씨 죽전문중의 외손으로 아직 죽전마을에 터를 잡고 있다.
(22)북구 농소 달천, 학성 이씨(鶴城 李氏)
울산시 북구 농소동 달천마을.
지난해 개통한 중구 서동과 북구 쌍용아파트간 시원스런 강변도로를 따라 북으로 달리다 달천농공단지란 안내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 농서초등학교를 지나면 달천농공단지가 나타난다.
농공단지를 지나 조금만 더 길을 따라 가면 바로 옆이 달천마을이다
달천마을은 개울가 마을회관 뒤로 산구릉에 맞춰 낮은 집들이 가지런하고도 자유스럽게 흩어져 있다. 부지런한 아낙네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밭들이 집과 집사이에 자리잡아 두엄냄새가 물씬하다.
회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도 왠만큼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여느 시골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을 달천마을도 갖고 있다. 달천농공단지는 물론 울산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데도 마을 분위기는 완전히 시골이다.
마을 뒤쪽으로 들어가는 도중 점정 문패 맨 앞자리에 이(李)자로 시작하는 문패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주민들은 이곳에 거주하는 이씨 성을 가진 주민 대부분이 학성 이씨 농소파의 갈래들이라고 한다.
학성 이씨 20세손으로 이 곳에 살며 제실을 지키고 있는 이채형씨는 "지금은 달천마을에 학성 이가가 한 20가구쯤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구한 말이던 1900년대 전후에는 100가구 정도의 마을 가운데 학성 이씨가 60가구에 이를 정도로 집성(集姓)을 이루고 산 곳이 이 곳 달천마을이라고 설명했다.
번성할 때 60가구 정도의 규모를 이룬 이 곳에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나마 20여가구가 남아있는 것도 도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않은 지리적 이점 때문인 듯 싶다.
학성 이씨 농소파들이 살며 집성을 이루기 시작한 뿌리는 학성 이씨 시조인 예(藝)의 5세손인 곤(")으로 알려져 있다.
이채형씨는 "곤 할아버지가 달천에 자리를 잡은 것을 계기로 이 곳 달천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으며 인근 가대, 그리고 멀리로는 발리 등에 까지 집성을 이뤘다"고 전했다.
지금도 가대와 발리에는 곤 할아버지가 중심인 학성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송재제와 경사제 등 제실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학성 이씨 시조의 5세손인 곤이 달천마을 학성 이씨들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는 셈이다.
입향조 곤이 삼포왜란에서 공을 세운 점을 미뤄 학성 이씨가 이 곳 달천마을에 처음 자리한 것이 약 1천500년 전후로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학성 이씨의 집성촌 답게 이 곳 학성 이씨들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제실인 달천제에 곤 할아버지를 모시고 또 달천제 뒤 설단을 세워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이 곳은 학성 이씨들도 입향조가 왜 이 곳에 터를 잡게 됐는 지는 세월이 너무도 오래돼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채형씨는 "매년 음력 3월10일에는 울산에 있는 후손들은 물론 멀리 떠나 있던 후손들까지 참석해 향제를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뒤 임진왜란(1592~98년) 당시에는 입향조의 증손인 인상(仁常)이 크게 활약, 선무원종 3등공신에 봉해지면서 정5품인 정랑(正郞)벼슬을 받기도 했다.
또 입향조의 7세손인 준민도 성균관 진사를 지내기도 했다.이 때가 마을어른 즉 집안의 어른을 중심으로 마을의 공동체적 삶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때 달천마을 주민의 60% 이상을 차지했던 학성 이씨들도 1945년 광복과 6·25사변 등을 거치면서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씩 얕아졌다고 한다.
특히 62년 울산이 공업도시로서 시로 승격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전했다.
그러나 공업도시로서의 울산이 팽창하면서 공장부지가 모자라 마을 인근의 구릉은 100개 가까운 공장들이 터를 잡은 농공단지로 변했다.하천을 따라 호계로 향하는 길과 중구 성안동으로 가는 길은 어느새 왕복 2차선으로 넓어져 아스팔트로 포장돼 말끔하게 변했다.
길이 변한 것과 함께 집들도 이제는 기와 대신 슬라브를 이은 현대식 주택들이 마을 곳곳에 터를 잡아 깨끗한 인상을 방문자에게 주고 있다.
또 마을회관과 교회를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들에 둥글게 싸여 있는 달천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단층구조로 옹기종기 모여 있어 한층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 달천마을 앞에 농공단지가 들어서고 또 현재 대규모 아파트가 공사중이어서 조만간 달천마을의 모습도 많이 바뀌게 될 것으로 보인다.달천마을은 도심에서 교통이 어렵지 않을 뿐더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그리 험하지 않아 전원을 꿈꾸는 도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학성이씨대문회장, 북구향토문화연구회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중인 이채형씨는 "제실을 중심으로 성씨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어렵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가꿔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문중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23)삼동면 금곡리 보성 선씨
통수(統首)" 입향조 삶터 오롯이 보존
보성선씨(寶城宣氏). 주변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성인 선씨가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금곡마을 전체 40가구 중 14가구에 이른다. 선씨들이 살고 있는 집 주소도 20 21 22번지, 53 54 55번지로 한동네 옹기종기 붙어 세를 이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산~부산 방면 국도를 타고가다가 울산예술고등학교가 보이는 대복 삼거리에서 미터기를 "0"으로 누른 뒤 오른쪽(통도사 방)으로 꺾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다가 10.9㎞가 되는 시점에서 멈추면 바로 금곡마을이 나온다.
삼동초등학교와 삼동면사무소, 치매전문요양원인 울산노인의 집, 금곡농장이 차례로 보이고 금곡교를 지나기 직전 금곡산장, 은어골, 전인계발원이라는 세로간판이 보이면 왼쪽으로 90도 꺾어서 들어가면 된다.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서너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는 손두부 판매소로 유명하다. 2002년 11월에는 "6시 내고향"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생활개선 손두부"라고 적힌 컨테이너 박스는 하금곡마을에 살고 있는 옹티댁(선종윤씨)과 문봉댁(선종대씨), 고성댁(선종찬씨)이 직접 만든 손두부와 찹쌀동동주를 판다.
하금곡, 중금곡, 상금곡으로 나눠져 있는 금곡리는 일명 쇠골로 새각단에서 유래했다. 새각단은 쇠각단의 전음. 약 1세기 전후 철기시대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금곡리는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이를 운반하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새각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금곡 마을에서 400m 올라가면 신기리 새각단으로 불리는 옛 집터가 있다. 이곳이 가장 최초로 형성된 금곡마을로 전해진다.
현재 하금곡 마을에는 보성선씨가 10가구 살고 있다. 약 145년 전 통수(현재 통장)로 처음 금곡마을을 찾은 철원(1837~1891)의 고손인 선종렬(77)씨를 비롯해, 종찬, 종윤, 종만, 종대, 종홍, 찬원, 대성씨가 살고 있다.
부산 수성구에서 3선 구의원을 지낸 종한씨, 김해 대저중고등학교 이사장인 장원씨는 한달에 3~4번 금곡 집을 찾는다. 중금곡 마을에는 문주, 동종, 종수, 종렬씨가 살고 있다. 상금곡 마을에는 7가구가 살고 있지만 선씨는 없다.
문중 종손인 종렬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철원 할아버지가 지은 집인데 100여년 된 집입니다. 중간에 불이나서 새로 짓기는 했지만 그래도 100년이나 됐습니다"고 전했다. 수년 전에 마루에 섀시를 설치하는 등 개조를 했다. 하지만 마당에서 높이 쌓아올린 축대와 툇마루 사이가 비어있는 등 옛날 전통 한옥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여년간 군에서 복무하다 50사단 379대대장으로 퇴임했다는 종목(72)씨는 "이 집에서 어느 방향을 가리키더라도 다 선가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집과 붙어있는 집은 모조리 선갑니다. 옛날에는 담장도 필요없이 집 사이로 난 사잇길로 마실을 다니곤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금곡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선용규(88)옹네 집이다. 4대가 한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용규 옹은 아내 김선주(83) 할머니, 아들 종대(63)씨와 며느리 성영자(58)씨와 함께 살고 있다. 손자 태원(38)씨는 금곡농장에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인 쌍둥이 딸 홍이, 영아와 함께 산다.
김선주 할머니는 "자식이 일곱인데다 손자들과 증손자까지 있으니 얼굴을 안보고 이름만 얘기하다가는 누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래도 환갑이 다가오는 며느리 이름은 안 잊어버린다"며 허허 웃어보였다
.
이 마을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도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성방송 안테나다. 마을 입구에 있는 "금곡체험 학습장"을 운영하고 있는 찬원(45)씨는 "벌써 3~4년 전에 달았어요. 동네 반수 이상은 달았을 걸요? 이 동네는 난시청 지역이라서 이것이 없으면 방송이 아예 안나와요. 한달에 9천원 가까이 나갑니다"고 전했다.
마을 입구에 금곡마을 회관 옆에는 종렬씨의 아버지인 선명규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선명규는 한학에 능통해 여성은 큰방에서, 남성은 행랑방에서 천자문과 사서오경 등을 가르쳤는데 훗날 동문수학한 제자들이 지난 94년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약 300년 전 김해에 살던 성징이 둔기리로 와 그 후손들이 금곡 일대에 130세대, 500여명의 자손을 번창시켰다. 금곡마을에 터를 잡은 철원의 후손은 모두 57세대다. 울산시 농축산과에 근무하고 있는 선광원씨와 경찰공무원 선종학씨, 문학박사 선효원씨가 금곡마을에서 자랐다. 선종석씨와 선종헌, 선우원씨가 부산에서 교직·행정 공무원을 지내고 있다.
선종출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몸담고 있다. 고 선인주, 선병윤이 삼동면장을 지냈고, 고 고병희씨는 언양면장을 지냈다.
(24)북구 가대(加大)마을 제주고씨(濟州高氏)
함월산을 뒤로 한 채 중구 성안동 성동마을을 끼고 달천쪽으로 길을 잡으면 가대(加大)마을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중구쪽인 성안구획정리지구 끝에서부터 북구까지 가파른 내리막길은 시멘트포장이지만 곧 아스팔트로 포장된 편도 1차선길이 이어진다.
길 옆 양지바른 곳에 군데군데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스팔트길 초입부터 달천마을 앞까지를 가대마을로 부른다. 개울을 따라 달천을 지나 국도 7호선과 만나는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이씨들이, 동쪽은 고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경로당 겸 마을회관을 지나면 "가대"라 적힌 시내버스 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경로당에서 차로 가면 금방이라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지나치기가 쉽다. 문패에서 고씨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제주고씨(濟州高氏) 문충공파(文忠公派) 울산집성촌이다. 소파로는 판윤공 직계다. 가대의 중심이지만 집은 스무여 채로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길을 따라 달천으로 가면 오른쪽에 군데군데 보이는 집들도 모두 가대마을에 속한다.
가대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입향조는 시조 고을라(高乙那)의 61대손으로 고려말 선절장군(宣節將軍) 겸 왕어사(王御使)를 지낸 고사윤(高斯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의 뜻으로 동생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동생은 경주에, 자신은 지금의 중구 병영에 터를 잡았으나 후에 가대로 옮겨왔다.
종문회 감사를 맡고 있는 입향조의 17대손 고경택씨는 "처음 입향조께서 울산에 와 지금의 병영초등학교에 터를 잡았으나 태종 17년(1417년) 경상좌병영이 옮겨오면서 수용령이 내려짐에 따라 가대로 이주했다"고 말했다.
경택씨는 ""옛날 할아버지들이 가대로 옮겨갈 때 산림이 우거진 지역의 나무를 베고 마을을 일궜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제주(탐라)의 지배씨족 가운데 하나로 시조로 부터 45대손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를 세습해왔던 고씨가 뭍으로 진출한 것은 시조의 46대손이자 자견왕의 아들인 고말로(高末老)가 고려에 입조하면서 부터다. 가대마을을 이루고 있는 문충공파의 파조인 문충공 경할아버지는 말로할아버지의 11대손이다.
함월산 자락의 골을 따라 물이 나오는 곳에 집을 짓고 농사와 나무를 주업으로 한 입향조 후손들은 세월이 600년에 가까운 세월속에 달천으로 약수마을로, 또 중구 태화동 난곡마을로 그 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가대마을에는 30여집 가량이 남아 있다.
약 200년전 입향조의 8대손인 고응두(高應斗) 할아버지의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지금의 달천농공단지 내를 작업을 하던 중 입향조의 지석이 발견돼 최근 재단장됐다. 약수마을의 이사정(二思亭)이 재실이다.
입향조의 후손들로 제주고씨 문충공파 판윤공직계종친회(회장 고원준)는 오는 11월3일(음력 10월10일)로 예정된 종친회 정기총회 겸 묘제준비로 한창이다.
입향조의 17대손으로 종친회 고문인 고원우씨는 "옛날에는 난곡의 친척들이 묘제를 지내기 위해 전날 출발해 성동마을의 친척집에서 하루밤을 묵은 뒤 다음날 아침 가대에서 모여 이곳 달천의 산소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말했다.
원우씨는 "현재 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고원준 회장의 할아버지인 고기업씨와 부친인 고태진씨 등이 울산에서 많이 알려지면서 고가하면 가대를 떠올리지만 난곡이 엄연히 큰집"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회원만 500여명이 넘는 종친회는 남구 달동에 빌딩을 마련, 고씨빌딩으로 이름지어 종친회 사무실 겸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택씨는 "달천과 가대지역에 많은 산을 선조들이 선산으로 물려줘 종친회 재정은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불사이군에 따라 입향조가 울산에 정착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4인이 임란공신으로 충의사에 봉양된 것을 비롯해 현대에는 관계와 정계, 재계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울산시민들이면 한 번을 들어봤을 고기업씨가 울산읍장을 지냈으며, 조흥은행장과 대한축구협회장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친 뒤 올해 2월1일 82세로 별세한 고태진씨가 기업씨의 아들로 제주고씨 종친회의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태진씨는 69년 재경울산향우회를 조직, 초대회장을 맡아 후학 지원 등 남다른 고향 사랑을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30대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현재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고원준 종친회 회장이 태진씨의 아들로 입향조의 17대손이 된다.
울산시 국장을 지낸 고해용씨와 검찰청 국장을 역임한 고대원씨도 종친회회원이었다. 또 울산대학교에서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다 정년퇴임한 고문덕씨, 그리고 범서중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은 고택운씨도 사윤할아버지의 후손들이다.
로타리클럽 지역총재를 지낸 고필용씨도 제주고씨 울산종친회 회원이었으며, 고일성 전몰군경유족회 울산시지부장은 현재 봉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종친회 감사 고경택씨는 한울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한의학 박사로 한의원 원장인 고원도씨는 청년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가대에서 부산서면으로 이주한 고천수씨의 삼남 국태씨는 부산은행지점장을 역임했고 4남 경태씨는 상성증권 지점장이다.
(24)울주군 청량면 중리 신리마을(남원양씨)
물에 잠긴 400년 고향땅...이주 20년 마음은 그대로
울산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6년 5월 물을 채운 회야댐은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중리, 신전, 신리와 웅촌면 통천리 등 4개 자연마을을 삼키고 있다.
11월2일 오전, 신리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남원양씨 가족 50여명이 회야댐 인근에 있는 재실을 찾았다. 매년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로 정해진 묘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부산에 살고 있는 양승국(61)씨는 "댐에 마을이 잠기지 전까지만 해도 남원양가가 80여호 모여 살던 동네지만 오늘처럼 묘사를 지내거나 음력 7월 넷째주 일요일 벌초할 때, 집안 어른이 죽거나 자식이 결혼할 때가 아니면 친인척이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다"며 고향을 잃은 아쉬움을 전했다.
1610년 시조의 19세손인 양응진이 경기도 김포에서 신리마을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이후 390여년 동안 청량면 신리마을을 지켜온 남원양씨들은 회야댐의 대부분을 차지한 중리마을(연안차씨 집성촌), 신전, 통천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동안 댐건설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평생을 농사만 지어온 농민들에게 논과 밭을 잃는 것은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청와대 상경투쟁을 위해 개개인이 정부의 눈을 피해 부산역까지 이동, 집결했다가 경찰에 이끌려 되돌아 오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정부 보상금은 논 1평당 7천~8천원. 현재 남구 옥동에 택지를 분양받기는 했으나 평생 일터였던 논밭을 잃고 옥동으로 이주할 형편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남에게 택지분양권을 팔고 가까운 청량면, 양산, 웅상, 무거동, 부산 등지로 이사를 떠났다.
양승만 동덕여대 교수는 "정부 보상금이 현실에 맞게 지급된 것은 불과 수년 전으로 당시 보상금은 형편 없었다"며 당시 어려움을 회고했다.
이날 묘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은 양씨들은 모두 회야강 징검다리를 건너고 험한 골짜리와 고개를 지나야 하는 청량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적령보다 한 살이 적거나 많은 아이들을 10여명 모아 한꺼번에 입학을 시켰다. 그래야 보다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2년에 청량초등학교를 졸업한 23회 동기들 가운데는 양씨가 11명이나 된다.
웅촌에 살고 있는 양근석씨는 "비가 와서 큰물이 지면 학교에 못갔으며, 학교에 있을 때 홍수가 나면 선생님이 우리 마을 학생들을 제일 먼저 보내줬으나 그래도 안되면 신전마을에서 자야 했다"며 "지각대장도 많았는데 또래들이 우루루 학교에 가다보면 겨울에는 얼음을 타야 하고, 여름에는 물놀이 하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1980년에는 회야강 징검다리 위로 신리마을과 신전마을을 잇는 철석교(너비 5m, 길이 96m)가 생겼다. 신리 출신 재일교포 양철석(1920~1992)씨가 지역 주민을 위해 사재(당시 4천만원)를 털어 지은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웅촌면에 속했다가 청량면으로 편입된 신리마을은 다리가 생긴 이후 본격적으로 청량면을 생활권으로 하게 됐다. 지금은 회야댐에 잠기고 없는 철석교 근처에는 1979년 청량면장이 세운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92년 작고한 양철석씨는 철석교 이외에도 1972년 마을회관, 1984년 청량면사무소를 지어 기증하기도 했다. 문중측에서는 또 1965년에는 울산시청 본관에 대형 시계탑을 기증했다고도 전했다.
현재 남원양씨들이 해마다 조상에게 묘사를 지내는 재실 옆에는 효자묘와 쌍효각 1동이 있다. 효자묘와 쌍효각은 효자 양한신과 그의 동생 익신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1920년 후손들이 축조한 것이다.
울산 신리마을에 처음 발을 디딘 양응진의 후손은 전국에 약 300여세대. 현재 옥동에는 양반석(73)씨를 비롯해 약 10여가구가 동사무소 부근에 살고 있다.
9회 행정고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하고 부산·경남본부세관장을 거쳐 현재 한국관세협회 고문과 동덕여대 교수로 있는 승만씨와 양승태 SK증권 울산지점 차장, 양형모 공인회계사(삼일회계법인), 청량농협에 근무하는 승용씨, 재한통운 부산지사에 있는 정모씨, 의학박사 두호(부산 당감동 양두호 내과)씨,
서울 건축설계사무소 대표로 있는 원석씨도 신리마을 출신이다. 양승룡 국가정보원 부이사관, 양승렬 전주 청수병원 부원장, 양승완 삼성항공연구실과장(창원), 양재목 부산동의공업고등학교 교사, 양은정 부산배정여자중학교 교사, 현대미포조선의 양현모씨와 양승렬 울산대학교 중앙도서관장등이 있다
(25)울주군 삼동면 보은리 원보은마을(단양우씨)
지극한 효심 상소만 100여장 "호자가문"
울산~부산 방면 국도를 타고 가다 울산예술고등학교가 보이는 대복삼거리에서 통도사 방향으로 꺾어 삼동면사무소, 금곡마을, 경양식집 나마스테를 차례로 지나면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송정, 원보은)가 나온다.
보은리에서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꺾어 2차선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1차선 너비의 시멘트 포장길이 나온다. 원보은마을 입구다.
원보은마을에는 16가구 가운데 15가구가 단양우씨(丹陽禹氏) 문패를 달고 있다. 단 한집 뿐인 송씨가 이사온 것도 3~4년 전에 불과하다. 약 700여년 전 경주에 살던 우인경(禹仁鏡)이 보은에 자리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단양우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다. 당시 우인경은 목사(牧使·조선 때 정3품의 외직 문관 벼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우진구(81) 옹은 "시조의 19대인 4형제 가운데 첫째는 경주, 둘째 인경 할아버지는 보은, 셋째는 기장, 넷째는 온양 발리에 각각 자리를 잡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한 때는 30여가구에 이르렀지만 젊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지금은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아스팔트 길에서 시멘트 포장길로 접어들자 마자 오른쪽 언덕에는 작은 규모의 효자각(孝子閣)이 있다. 동몽교관조봉대부 우사곤(禹師鯤)의 효자각이다. 효자각에는 임진년(1592)에 유림에서 하사받은 증표(간판모양)가 걸려있다. 또다른 증표(사진)는 지방공무원으로 퇴직한 우영구(70·전 울주군의원)씨가 집에 보관하고 있다.
우영구씨는 "상소문과 증표에 새겨진 내용들을 보면 "11세의 사곤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20리길(언양)을 걸어 산나물을 판 뒤 고기를 사다가 모친을 봉양하고, 모친의 몸에 난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 종기를 낫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당시 동네 사람들이 100여차례에 걸쳐 나라에 상소문을 올리고 수많은 검증을 거쳐 효자로 인정하는 증표를 내려받은 것을 보면 당시에는 효자로 인정받는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이라며 집에서 보관중인 상소문을 내놨다.
상소문은 우사곤의 효행과 함께 우씨, 강씨, 이씨, 신씨 등 수십명의 일대 주민 이름이 적혀있고 현장 검증을 다녀간 듯한 암행어사의 싸인과 함께 마패가 곳곳에 찍혀 있다. 2절지 크기의 한지로 된 상소문은 100여장에 달한다. 어떤 상소문에는 임금의 옥쇄가 찍혀 있다.
우영구씨는 "상소문마다 갑인년, 을축년, 경진년 등으로만 적혀있어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증표에 임진년이라고 새겨진 것으로 봐서 상소문들은 임진년 이전의 것으로 추측된다"며 "상소문의 글씨는 꽤 조예가 깊다는 서예가들도 놀랄 정도인데 우리가 어렸을 때는 상소문이 소중한 줄도 모르고 연을 만들어 날려버리기도 했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후손들은 고향을 찾을 때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각을 향해 절을 하면서 조상의 효성을 되새기고 있다.
또 큰 길에서 보은마을로 꺾기 직전 길가에 보이는 비(碑)는 우진구 옹의 큰 형인 고 우통구 송공비다. 이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우통구씨는 40여년 전 원보은마을 일대의 농로를 개설하고 학교에 교재를 기증했다.
우진구 옹은 "40여년 전 초가지붕을 기와로 교체할 때 큰 길까지 실어온 기와를 마을 입구까지 2~3일씩 지게로 져 나르는 것을 보고 큰형님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사비를 털어 농로를 개설했다"며 "리어카도 없던 시절에 농로를 닦고 처음으로 리어카 2대를 맞춰 농사에 사용했다"고 전했다.
보은(寶隱) 마을은 "보배가 숨어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원보은 마을에는 먹으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석유(石乳·돌에서 나오는 젖)가 나오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를 서로 먹으려고 싸움이 잦자 한 도인(道人)이 석유가 나오는 구멍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원보은 마을 앞에는 논과 함께 나즈막한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는 신라 왕자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고 해서 태봉(胎峰)이라 불린다. 우진구 옹은 "봉우리를 둘러싸고 둥글게 길이 나 있는데 태봉 인근 곳곳에서는 금반지 등이 자주 나온다"며 "수년전까지 도굴꾼들이 자주 찾았는데 고려장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지금 이 마을에는 문중 종손인 우병길씨와 군의원을 지낸 우영구씨, 경로, 병수, 병열, 병윤, 병철, 종구, 주석, 진구, 진숙씨 등이 살고 있다. 문패만 달려있고 비어있는 집도 서너집 있다. 우정길씨는 울주군 총무과장으로 퇴직했다. 우하영(울주군 총무계장), 우병관(울산시 여성정책과), 우정욱(남구청 녹지과)씨가 원보은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주왕씨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직에서 대위로 있고 경구씨가 서울 설계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병용 병수 병덕씨, 경수(SK(주)) 인철(울산화학) 병조(전하카센터) 병헌(온산보람병원) 정용(금강고려화학) 영근((주)효성) 원주(삼성SDI) 승부(KT) 종호(부산우체국) 병석(범서바다회센터)씨 등이 원보은마을 출신이다.
(25)울주군 범서읍 서사리 내사마을 창원황씨
은둔 입향조 학구열...후순들 교육계 많아
범서읍 서사리 내사마을은 창원황씨 양은공파의 집성촌이다. 다운동에서 척과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다 서사교에서 좌회전 해 중리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바로 내사마을이다.
현재 내사마을에는 창원을 본(本)으로 하는 황씨 일가들이 10여 집 살고 있다. 황씨는 지금도 이 마을에서 수가 많지만 옛날에는 40여 집이 이 마을에 살았다. 담 넘어 일가 친척들에게 아침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던 전형적인 집성촌이었다.
내사마을은 급격한 도시화로 옛 시골풍경을 찾아보기 힘든 다운동과 인접해 있지만 여전히 옛 시골의 정취가 살아있다. 마을의 뒤로는 국수봉과 옥녀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척과천이 흐른다.
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호젓한 산길이 나온다. 산에서 흐르는 물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한다. 물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고 맑다.
마을 언덕에서 동네를 바라다보면 나지막한 기와집이 두 서너집 단위로 정겹게 모여있고, 최소 80~90년은 됐을 거목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특히 옛날 시골학교에서 담 대신 둘렀던 탱자나무 담이 눈길을 끈다.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초겨울, 서서히 여물어 가는 탱자나무의 날카로운 가시는 아직도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꼬장꼬장한 내사마을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창원황씨의 울산 입향조는 양은공(楊隱公)이다. 휘호는 봉하(奉河)고 자는 덕보(德甫)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忠俊)의 13세손으로 300여년 전 울산의 양정동에 처음 정착했다.
양은공의 아버지는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흠(欽)이다. 양은공은 흠의 여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숙종 계해년(1683년) 한양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해 12세에 모든 문자에 능통했고 약관에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은공의 아버지 흠은 공이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오르는 것을 엄하게 경계했다. 그 자신이 조정 내의 시기와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월성 최현필이 쓴 "양은공비명"에 따르면 양은공은 경술년(1730년)에 아버지 흠이 돌아가시고 어머니 최씨마저 세상을 뜨자 세상에 대한 원망과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산천을 해맸다. 그리고 울주 양정리에 이르러 몸 숨겨 마음편히 지낼 곳이라며 가솔들과 함께 정착했다.
양은공은 양정리에 몸을 숨긴 채 "안빈낙도"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양은"이라 짓고 사는 집을 "청양정"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는 세상과의 소통을 애써 피했다.
황지순(64)씨는 "아침 저녁으로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만나주지 않아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베옷과 성긴밥만이 자신의 분수에 맞다고 여기며 평생을 사신 분이 양은공"이라고 말했다.
영조 을유년(1766년)에 양은공이 세상을 뜬 뒤 양은공의 손자 인희(仁熙)는 거처를 해안가인 양정에서 서사리 내사 쟁골로 옮긴다. 쟁골의 공식 명칭은 재앙골(齋內谷)로 재 안쪽 깊숙이 외떨어져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양은공의 손자 인희가 거처를 옮긴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양은공의 후손들은 아마도 해안가는 양반이 살기에 적합치 않은 곳이라는 유교적 인식 때문인 듯 하다며 추측할 뿐이다.
양은공의 후손들은 내사마을 쟁골에서 대대로 세상과 등진 채 농사를 지으며 300여년을 지낸다. 하지만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질곡을 지나오면서 집성촌의 와해는 가속화된다.
지금 내사마을에 형성된 집성촌은 한국전쟁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공비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독가촌 일소방침)로 주민들을 산 아래 마을에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황씨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 집성촌을 형성해 살고 있지만 마을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며 "젊은이들은 제 살길 찾아 모두 외지로 떠나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이곳에 남아 농사를 짓고 사는 형편"이라고 아쉬워했다.
내사마을 출신 인물 가운데는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세상을 등진 채 숨어살며 학문 정진에만 몰두했던 입향조 양은공의 피가 지금까지 흐르기 때문은 아닐까.황치홍 전 울산시교육위원회 부의장과 황치위 부산시교육위원이 내사마을 출신이다. 황윤구씨는 교직에서 퇴직한 뒤 범서읍지편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그 아들 기태씨는 대를 이어 경남 산청읍 산청종합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이밖에 삼흥건설 대표 황선송씨가 이 마을 출신이며 부산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황영순씨도 이 마을에서 자랐다. 과거에는 공무원으로도 많이 진출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작고해 살아남은 후손들의 기억에서 흐릿하다.
(26)농소2동 약수마을 학성이씨
권토중래 "꿈".용연서원 창건에 "만족"
울산에서 경주쪽으로 국도 7호선을 따라가면 울산공항에서 약 7㎞쯤에서 동해남부선 철도를 만난다. 철도 밑 굴다리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약수마을로 가는 입구다.
굴다리 입구에 약수마을이라는 안내판도 볼 수 있다. 도로 왼쪽 굴다리 반대쪽은 약수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오래전부터 피부병에 효험이 좋은 약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해 마을이름이 약수마을이 됐다. 동천강과 삼태봉 사이 넓은 들이 형성돼 있어 예부터 부농이 많고, 60~70년대에는 마을 산에서 생산되던 자연산 송이 판매 수익금으로 새마을 사업을 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던 마을이 바로 약수마을이다.
최근 마을 주민들이 공동재산을 대학설립을 원하는 사람에게 기부한다는 약정서를 북구청과 맺은 곳이 바로 약수마을이기도 하다.
약수마을은 이제 단층 기와집으로 이뤄진 예전의 마을을 둘러싸고 남쪽과 동쪽으로 빌라와 아파트들이 곳곳에 들어서 전형적인 근교마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예부터 지키고 있는 마을 집도 벼를 말리던 마당이 잔디밭으로, 기와집은 콘크리트슬라브 집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40여 가구 남짓 했으나 지금은 아파트와 빌라 등으로 인해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농사대신 직장을 다니면서 많이들 떠났지만 아직도 열 집에 가까운 집들은 이씨의 문패를 달고 있다. 이 곳이 학성이씨(鶴城李氏) 월진파(越津派) 약수문회의 집성촌이다.
최씨들이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이 약수마을에 학성이씨 월진파가 처음 온 것은 약 200여년 전이다. 시조인 충숙공 이예(李藝)의 15세손인 지회(志晦)가 월평이라 불리던 지금의 신정동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 지회 할아버지가 학성이씨 월진파 약수문회의 입향조가 된다.
입향조의 7세손인 이정호 삼평초등학교 교감은 "남산 은월봉 아래 팔등에서 7대로 만석을 누리며 구강서원과 시조 사당인 용연사 등을 설립하고 창건하며 살았으나 18세기 후반 가세가 기울면서 세거지를 떠나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입향조께서 약수에 터를 잡게 된 것 같다"고 입향내력을 설명했다.
이 교감은 당시 이곳 약수를 비롯해 가까운 옥동, 온양 귀지(삼광리), 고산, 망양 신밤(덕신리), 상북 궁근정, 농소 신답(상안리), 경주 방어리 등으로 흩어졌다고 덧붙였다.
가세가 기울어 세거지를 떠난 이 곳 학성이씨들은 가세를 중흥시켜 세거지였던 팔등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다. 입향조의 손자인 경복(敬復) 할아버지는 전답만 500여 두락을 가질 만큼 가세를 일으켰고, 동생인 경조(敬朝) 할아버지, 조카손자인 민수(敏樹) 할아버지는 농소면장을 지냈고, 사촌동생인 경권(敬權) 할아버지는 향중 반수(班首)를 지내기도 했다.
입향조의 7세손 이수호 울산대 교학부장은 "종가의 호구단자가 1810년부터 100년동안 3년간격으로 빠짐없이 보관돼 호적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흥걸(60·해성수산 대표) 약수문회장은 "호적단자는 물론 직계 조상들의 혼인관계, 토지 매매 서류, 소작농들의 세수목록, 서찰, 노비관계 등이 보존돼 있는 것은 종가가 곤궁에 처할 때도 있었으나 근본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유훈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거목이 된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종가에는 종부인 김명옥(80) 할머니가 사촌동서인 이한호 공군참모총장의 어머니 이임술 할머니와 노년을 함께 하고 있다.
팔등 세거지로의 권토중래를 꿈꾸던 약수문회는 세거지의 도시화 등으로 집안 대대로 또하나의 염원이었던 용연서원의 창건으로 만족하고 있다.
약수문회는 최근 경사를 맞았다. 입향조의 7세손으로 이 마을 출신인 이한호씨가 지난 10월11일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한 것이다. 이정호 교감은 "총장 취임식에 공군에서 보내준 버스를 타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해 찍은 기념사진은 새로 지은 마을 회관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이진걸, 교통부 육운국장을 역임한 이용걸, 코오롱고속 소장을 지낸 이함걸씨도 약수문회출신으로 모두 작고했다. 입향조의 5세손으로 월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장걸씨와 대한항공 부장으로 퇴임한 이생걸씨도 약수마을 출신이다.
문회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채만씨와 김천교통 이채윤 전무이사, 신용보증기금 이채복 지점장, 서호조경 이채흥 대표, 한올약품 이채훈 부장, LG증권 울산지점 이채우 차장과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채헌씨, 부산에서 치과의사로 활동중인 이채경씨 등은 입향조의 6대손으로 약수문회 문중들이다.
동일제강 이창호 전무이사, 우주해운 이경호 대표, 동아닷컴 이문호 부장, 홍명고 이영호 교사, 스틸드림 이성호 부장 등도 문중이며, 입향조의 8세손인 이원빈씨가 삼아약품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27)상북면 거리 간창마을 문화류씨
울산 언양에서 석남사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가 상북농협을 지나면 곧바로 등억온천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좌회전해서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세화수련장이 있다. 세화수련장 왼쪽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길, 아스팔트 포장길을 차례로 따라 올라가면 버스정류장, 상점과 거리새마을회관이 있는 2층 건물이 보인다.
하동, 간창, 대문각단, 지곡 등의 자연마을로 이뤄진 울주군 상북면 거리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마을을 지나는 천을 하나 지나면 28가구가 살고 있는 간창("倉)마을이 나온다.
마을 뒤에 있는 응봉산 두응산 고헌산을 비롯해 신불산과 간월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간창마을은 사창(社倉)이 있었던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사창은 조선시대 각 고을의 환곡을 저장해 두던 창고를 말한다. 〈언양읍지〉(1916, 1919)에 따르면 간창마을은 옛 언양현시대 4개 사창 가운데 상남면의 사창이 있었던 곳이다. 한 때 문화류씨(文化柳氏)가 40여 가구가 세를 이뤄 살던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28가구 중에 10가구가 류씨 문패를 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태종 10년(1410년) 경북 영천시의 신녕현 현감을 지낸 류혜지(柳惠至)가 간창에 자리를 잡은 이후 후손들이 19대 160호가 번창했다. 류혜지가 간창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류씨 재실 영사재(永思齋)에는 처음 간창마을에 뿌리를 내린 류혜지와 후손 류영록(군자감정), 류연창(증공조참판), 류철주(증한성좌윤), 류만욱(수호군) 등 5세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재실은 일본에 건너갔던 류제철씨가 1960년대 초반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로 정해진 묘사 때 5일에 걸쳐 100여곳의 묘를 다니며 묘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안을 내 재실을 지었다.
입향조 류혜지의 17세 주손(종손)인 류제한(73)씨는 "재실이 지어진 이후로 전국 각지로 흩어진 후손들의 결집력이 더욱 좋아져 묘사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100여명이 재실로 모인다"며 "입향조 때부터 잃어버린 묘가 하나도 없어 묘사를 지내려면 5일씩 걸렸는데 재실을 짓고 난 뒤로는 하루만에 지낸다"고 말했다.
간창마을은 유난히 따뜻하다. 거리새마을회관이 있는 하동마을에서 간창마을에 들어올 때 건너는 간창천만 지나면 한겨울 목을 둘렀던 목도리를 풀고 싶을 정도로 인근 자연마을에 비해 기온이 따뜻하다.
기나긴 동지섣달에도 혹한을 느끼지는 않는다. 류제한씨는 "아마도 입향조인 류혜지 할아버지가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내(간창천)가 옆에 있는데다 날씨도 따뜻해 간창에다 터를 잡지 않았나 짐작된다"며 "전해지는 얘기로 류씨 외에 김녕김씨, 능선구씨, 해주오씨도 간창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가 타지역으로 나간 것을 보면 간창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이 아니었나 싶다"고 전했다.
상북지역 식수검사에서 거리 물이 1급수를 차지해서인지 유난히 장수하는 노인이 많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울산자동차면허시험장에서 공장지대를 지나 간창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는데 면허시험장 인근에서 볼 수 있는 "효열비각"은 문화류씨 입향조의 부인 동래정씨의 정려각이다. 정려각 옆에는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에 남편의 무덤 곁에서 3년간 시묘살이 한 부인을 보호하며 함께 시묘살이를 한 범을 기린 "영호영세불망비"가 있다.
시묘살이 직후 부인이 갈라진 무덤으로 들어가 합장되고 사흘 이후 식음을 전폐한 호랑이가 따라죽었다는 이야기는 언양읍 고 류덕조의 구술로 전해져 내려오다 지난 1963년 경상남도지에 수록돼 전해지고 있다.
"길천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전 학급의 급장(반장)이 모두 문화류씨일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는 류제한씨의 전언처럼 간창마을 출신 류씨 가운데는 학계에 진출한 후손들이 많다.
입향조 류혜지의 15대손 가운데 김해 서여중 교장을 지내다 퇴임한 고 류진선씨를 비롯해 하선씨가 신정초등 교장을 지냈고, 영선씨는 시청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16대손 제한씨는 학교법인인 상북학원에서 근무했고 의학박사 제계씨는 부산에서 류소아과를 운영하고 있다.
제형씨는 한국수자원공사 과장, 제청씨는 서울에서 차량부속품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17대손 준걸씨는 현재 평창종합건설 회장으로 있고 그의 동생 진걸씨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류종식씨는 울산중앙여중 교사를 지냈고 영환씨는 창원특수강 부장, 성환씨는 양산여중 교사, 상환씨는 상북면 상광레미콘 영업이사, 동환씨는 주택공사 택지개발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8대손인 문학박사 영달씨는 한국전산원에 근무하고 있고, 공학박사 영석씨는 인천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영규씨는 울산상수도사업본부 계장으로 있다.
(28)울주군 범서읍 척과 고령박씨
교육감.대학총장.학계진출 두드러져
다운동에서 들꽃학습원을 지나 경주 외동으로 이어지는 잘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 척과와 구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만난다. 오른쪽 오르막 입구에 주유소가 있어 초행이라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왼쪽의 척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범서농협 척과지소와 농협창고, 척과새마을회관, 척과초등학교, 척과교회 등이 차례로 반긴다. 교회에서 200여m 더 올라가면 반용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반용못과 비홍산방까지 잘 지은 집들이 양지바른 곳에 나지막이 자리를 잡고 있어 평화로움을 안겨준다.
마을 길을 사이에 두고 멀리 산자락 아래까지 과수원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 마을 이름이 왜 척과(尺果)인가를 알려준다.
높은 산과 따스한 햇볕으로 과실이 풍부하고 맛이 유난히 좋은 곳이라는 게 주민들의 이야기다. 예전에는 밤나무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단감나무로 바뀌었다. 그리고 울산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한 사과과수원 몇 집도 이 곳에 있다.
척과리는 척과(尺果)와 반용(盤龍) 두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다. 예전에는 그저 척과라고 불렀으나 인구가 늘면서 자연스레 구분됐다. 척과교회를 중심으로 아래마을은 척과, 윗마을이 반용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구분없이 그저 척과라 부른다.
척과와 반용은 고령박씨들이 예부터 많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고령박씨 가운데 척과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우윤공(右尹公) 박상빈(朴尙彬)의 후손들로 고령박씨(高靈朴氏) 우윤공파(右尹公派)로 불린다. 우윤공의 부친은 훈련원정을 지낸 진남(震男), 조부는 통훈대부 수영(壽永)으로 부자 모두 임란공신이다.
우윤공은 어릴 때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경북 청도에서 울산으로 옮겨와 지금의 북구 지당(池塘)에 터를 잡았다. 상빈 할아버지는 우윤공파의 파조이자 울산의 입향조가 된다.
다운동에서 서사로 나가기 직전 도로가 좁아지는 왼쪽 갓골의 재실 자열당(慈悅堂)에 모셔져 있다. 자열당 인근에 입향조 후손들이 입향조의 외할아버지(한양 조홍업·漢陽 趙弘業)의 묘소를 중구 우정동에서 옮겨 모셨다. 입향조 외할아버지가 입향조 후손들에게 오늘날까지 많은 재물을 남겨 큰 덕을 입고 있다고 종친회 박좌열(朴佐烈) 회장이 전했다.
척과에 고령박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때는 300여년전으로 시재(始栽) 할아버지가 지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부터다.
고령박씨 25세손인 시재 할아버지가 척과의 입향조가 되는 셈이다. 시재 할아버지는 우윤공의 고손자이다. 또한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추모계가 이어져 오는 일한헌(一閑軒) 민덕(敏德) 할아버지의 손자가 된다.
시재 할아버지의 6세손 경희(79)씨는 "30여년 전만하더라도 척과와 반용에 고령박씨들이 100여집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30여집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항열인 주열는 "반용의 2개 반 가운데 한 반의 반상회에 가면 이제는 절반 이상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라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는 곳이 이 곳"이라고 덧붙였다.
후학들에 대한 많은 지도로 추앙받고 있는 일한헌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척과에 자리를 잡은 지 10세손에 이르고 있는 후손들이 학계 등에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민선 1~3대 울산교육감을 지내다 작고한 박성렬 전교육감, 박재선, 박정호, 박재홍 전교장을 비롯해 박재영 교장과 박재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관, 박성열 작가 등이 우윤공파에 속한다. 또 박재걸 부산대 교수, 박조열 부산대 의대학장, 박재욱 정치학박사, 박재민 공학박사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박재윤 부산대 총장이 지당출신으로 우윤공파의 일원이다.
이와 함께 박재언 동진석유(주) 대표이사이자 한국석유유통 서울·인천·경기도지회장, 박재철 광주맥주판매(주) 대표이사, 울산건축사협회장을 지낸 박재욱 성림건축대표, 박재수(주)부산신신펌프 대표이사, 울산체조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재줄 경남유통 대표이사, 박재춘 동우해운 상임이사 등은 재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 문중들이다.
또 작고한 박규열 전 조병창장, 제2대 범서면의원을 지낸 박인옥 전의원 등도 반용마을 출신이며, 북구 농소 신천에 보한당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종흠 원장은 척과출신이다. 박성흠 병영농협조합장, 박재원 신라보존회장도 우윤공파 사람들이다.
(28)언양읍 다개리 청주한씨
언양현감들도 인증한 "공신의 후손"
언양에서 봉계방면으로 난 국도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멀리 반곡초등학교가 보일 때쯤 왼쪽으로 평화약방, 평화교회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평리마을회관을 지나 언양읍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나온다. 언양읍의 15개 법정리 가운데 대곡리 다음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다개리(茶開里)다.
굼다개, 신리, 고래샘, 갈전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약 330년 전 성균관 진사 한귀생(韓貴生)이 굼다개에 처음 터를 잡은 뒤 청주한씨(淸州韓氏) 후손들이 300여년간 집성촌을 이뤄 살아온 마을이다.
다개리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신리(새말)를 중심으로 북쪽은 고래샘, 동북쪽은 갈전(갈밭), 서남쪽은 굼다개와 접하고 있다. 굼다개는 다개리 서남쪽의 가장 후미진 마을로 위쪽에 있다고 상리라고도 불린다.
움푹 꺼진 곳을 뜻하는 굼이 깊은 다개라서 굼다개 마을이다. 마을 뒷산 아래 높은 곳에서 움푹 패인 낮은 곳까지 집과 밭들이 자리잡은 것이 이름값을 하게 생긴 마을이다. 굼이 깊어서인지 동짓달 정오무렵 내리쬐는 햇살이 온 동네를 감싸안아 따뜻해 보인다.
다개리 입향조인 귀생은 문정공(文靖公) 좌찬성 한계희(韓繼禧 1423∼1482·중시조)의 후손으로 1673년(현종1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두고 남인과 서인이 정권다툼을 한 2차 예송(禮訟)에 연루돼 충남 천안시 목천면으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다개리의 굼다개 마을로 피난 온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언양읍 다개리 입향조인 귀생으로부터 8대~12대까지 호수로는 350여호가 전국에 흩어져 있다. 지금 다개리에는 약 20여세대가 살고 있다. 다개리 중에서도 굼다개 마을이 가장 많은 7세대가 살고 있다. 나머지 13가구는 갈전마을과 고래샘, 신리마을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친회 감사로 갈전마을에 살고 있는 한영곤(68)씨는 "많이 살 때는 다개리 전체에 100여세대까지 살았지만 지금은 다들 전국으로 흩어졌다"며 "청주한씨 재실 숭모재(崇慕齋)가 있는 굼다개 마을에는 한 때 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집성촌이었다"고 전했다.
영곤씨는 또 148년~217년 전(1786년~1855년) 언양현에 부임해 온 현감들이 다개리 청주한씨 문정공파 문중을 찾아와 공신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공증서를 써놓은 자료 6점을 보여줬다. 1780년 충훈부 관인을 찍어 공신의 후손을 공증한 사목(事目·조정의 명령을 조목조목 나열한 것) 한 권도 함께 내놨다.
한계희의 후손으로 당시 현존한 조상들로 추측되는 이들의 명단을 나열하고 당시 현감의 관인과 수결(사인) 등도 들어 있다. "한명회와 6촌간이기도 한 문정공 어른은 당시 좌찬성을 지내면서도 누추한 생활을 할 정도로 청백리로 전해집니다.
문중에서 위치를 생각하라며 준 전답에 농사를 지어 인근의 가난한 사람을 도와줘서 현재 서울의 안암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큰 바위가 있던 마을이 편안해졌다는 뜻이지요"
현재 귀생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7월 말 다개리 일대에 모셔져 있는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한다. 또 음력 10월 중순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는 지난 91년에 지은 재실 숭모재에서 묘사를 지낸다. 벌초와 묘사 때는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귀생의 후손 150여명이 재실을 찾는다
청주한씨 문정공파의 후손 가운데 다개리 출신으로는 동우(신한은행 부행장) 동룡(김천전문훈련원장) 동욱(울주군청 의회사무과 전문위원) 영호(삼남면사무소 계장)
동환(울산지방법원 계장) 상균(경북교육청 근무) 삼건(울산대학교 교수) 상용(경북 봉화고등학교 교사) 윤갑(부산 연미초등학교 교사) 동호(한국토지공사 과장) 동찬(국민연금관리공단 울산지사 대리) 동원(농협중앙회 언양지점 차장)씨 등이 있다. 입향조의 8대손인 영재씨는 재울 청주한씨 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고 한장덕 경북 안동대 부총장도 같은 문중이다.
(29)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고령김씨
영남거류" 단산 김상우 배출한 집안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환호유적지가 발견돼 널리 알려진 동네이기도 하다.
구릉 중심부에 세워진 마을 전체가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인 청동기시대의 집단 마을터다. 그래서 김규식(60)씨는 검단리를 "유서깊은 마을"이라고 설명했다. 또 "옛부터 검단(檢丹)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는 사찰터"라고도 덧붙였다.
웅촌면 소재지에서 춘해대학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주)국일 간판과 함께 검단 버스정류장이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조금만 따라올라가면 마을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은진송씨, 밀양박씨와 함께 고령김씨(高靈金氏) 등 세 성씨가 모여서 살고 있는 검단(檢丹)마을이다. 검단마을에는 현재 주민 150여 가구가 살고 있어 웅촌면 단일마을 가운데는 가장 큰 마을이기도 하다.
경순왕의 11세손 김석의 장손인 김남득(金南得)을 시조로 하는 고령김씨가 검단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약 210년 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송호(松湖) 김연(金演)이 임진왜란 직후 청량면 진곡으로 피난 온 뒤 그의 후손인 도련(1777~1841)이 모친 청주한씨와 함께 검단마을로 옮겨와 살게 됐다. 한 때는 30~40여가구에 이르던 고령김씨가 지금은 열다섯집 정도 남아있다.
신라시대 절로 추정되는 검단사(檢丹寺)가 있었던 곳이어서 검단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는 큰 산 이외에 작은 숲이 여러곳 있다. 옛부터 마을의 정기가 사방으로 빠져나간다고 해서 이를 막기 위해 세 곳에는 서나무, 동네입구인 남쪽 탑거리에는 탑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입구에 있던 기존의 석탑은 지난 1989년 3월 도굴꾼에게 도난당했다. 통일신라 중엽의 탑으로 추정되는 단아한 탑은 울산읍지(1934년)에 "범오층(凡五層)"이라 기록돼 있다. 현재의 탑은 1990년 5월에 복원한 석탑이다.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이장을 중심으로 검단마을 당수나무인 소나무와 마을 서쪽의 서나무에서 동제를 지낸다.
고령김씨 종손인 김관(70)씨는 "옛부터 동제를 아무렇게나 지내면 마을에 안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레 동제를 지내왔다"며 "마을입구 탑을 도난당했을 때는 성씨를 불문하고 외지에 나가있는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허전함을 느껴서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90년 당시 750만원이라는 큰 돈을 모아 탑을 다시 세웠다"고 말했다.
유난히 민간신앙이 두터운 이 마을 사람들은 또 음력 9월9일이면 마을 뒤 사또봉에서 활연습을 하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는 제를 지내기도 한다.
검단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령김씨 후손들은 매년 입춘, 동지, 설, 추석, 기일, 묘사 등 1년에 여섯차례 마을회관 앞에 있는 옥오정(玉五停) 뒤편 가묘(사당)에서 제를 지낸다. 옥오정은 김연의 9대손인 유학자 김양호(金養浩, 1857~1898)의 정자로 팔각형식의 골기와 지붕, 정면 3칸의 목조건물이다.
김양호의 아들인 단산(丹山) 김상우(金相宇, 1888~1962)는 한시에 능해 영남거류라 불렸다.
당대 석학으로 칭송받았던 그의 시판(詩板)이 언양 작천정에 현존하고 있고 작천적 반석에는 그의 〈작천정중수기〉 글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가 1920~1945년에 운영해 온 서당인 단산정사가 검단리 690번지에 현존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이 마을 김씨들이 수리를 계획하고 있다.
김상우의 손자인 김규식씨는 "문집으로 발간된 응제집은 전국 대학 도서관에 있을 정도로 상우 할아버지는 영남 최고의 선비로 불렸다"며 "옛부터 이 마을에는 선비가 끊이지 않아 "검단가서 글(文)자랑 말라"는 말도 있다"고 설명했다.
유학자와 문인의 후손으로 김창현 현 울산지방법원 판사를 내기도 했다.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 김형도씨는 현재 외국으로 이민을 갔고 웅촌면 농협조합장과 울산향교 전교를 역임한 김위도(80)씨가 아직 검단마을에 살고 있다.
서울 (주)해동산업 회장으로 있는 김이도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고 김두열 전 합천군수와 김규인 울산시 건축설계협회장도 검단에서 자랐다. 김규식씨는 전 성균관 청년유도회 울산광역시 본부장을 지냈다. 박
(30)울주군 범서읍 굴화리 굴화마을 은진 송씨
우암 송시열 손자 용징이 입향조
울산에서 언양으로 넘어가는 24호 국도의 초입에 있는 마을이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다. 굴화(屈火)는 굴아불(屈阿火)의 줄임말로 "굴아"는 내(川)의 흐름이 굽었다는 뜻이고 "불"은 성읍이나 도시를 뜻한다.
즉 굴화는 "굽은 냇가의 나라"다. 삼한시대 진한에 "굴아불"이라는 성읍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에 따른다면 마을 주민들의 주장대로 울산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 될 것이다.
굴화는 옛부터 울산과 경주 사이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역촌(驛村)으로 불렸으며 원(阮·여행자들의 편의시설)과 지금의 우체국과 같은 역할을 하는 우역(郵驛)도 들어서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10여년 전만해도 태화강을 끼고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지만 근래에 택지가 조성되고 고층 아파트가 세워져 신주거지로 탈바꿈하면서 옛 농촌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다만 무거동 신복로터리에서 백천 방향으로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논과 배·감 과수원이 이어진 시골 풍경을 그나마 느껴볼 수 있기 때문에 인근 무거동 주민들의 산책로로 인기가 높다.
굴화정미소 옆 굴화노인회관 주변도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등 옛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이 모습도 올 연말이면 볼 수 없을 듯하다. 노인회관 뒤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계획으로 있기 때문이다.
"개발이냐 보존이냐"라는 논의 이전에 주민들이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경제적 소외감은 예상 외로 컸으며 주민 대다수는 빠른 시일 안에 개발을 원하고 있었다.
굴화리는 은진 송씨 주부공파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2002년 편찬된 〈범서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굴화에는 은진·여산 송씨가 20여세대 살고 있는 송씨 집성촌이다.
이 가운데 은진 송씨가 15세대로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여산 송씨(5세대)와 김해 김씨(8세대), 진주 강씨(5세대), 경주 이씨(10세대) 등도 굴화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씨다.
굴화 은진 송씨의 어른인 송진용(70)씨는 "1960년만 해도 굴화에는 100여세대에 이르는 은진 송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고 말해, 도시화에 따른 인구 이동이 굴화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실감케 했다.
은진 송씨의 굴화 입향조는 은진 송씨 시조 송대원(大原)의 16세손인 용징(龍徵)이다. 고향이 대전 대덕인 용징이 언제, 어떤 이유로 굴화에 정착하게 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진용씨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의 손자되는 용징은 350여년 전 우암이 정쟁에 휘말려 귀향을 떠나게 되자 벼슬에 회의를 품고 고향을 떠나 굴화에 정착했다고 한다. 마을 앞 구영산성 인근에 입향조의 묘가 있다.
굴화에 정착한 은진 송씨들은 그들의 재력과 학문으로 굴화와 구영동 원 주민들의 신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입향조의 4세손인 환우(煥祐)는 군수품의 출납을 맡아보는 "군자감정"으로 재임시 구영동 "새못(구영제)"을 축조했다.
이를 보답하는 뜻에서 구영동 사람들은 굴화의 은진 송씨 자손들이 새못 인근에 논을 사도 "신참주"를 면해주었다고 한다. 신참주는 논을 구입했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내는 술로 쌀이 귀한 시절에는 꽤 감당하기 힘든 신고식이었다.
이후 입향조 용징의 5세손 민규(旻圭)가 "공조참의" 벼슬을 지냈으며, 6세손 병진(秉鎭)이 무과에, 7세손 상헌(祥憲)이 사마시에 합격하는 등 관직 진출이 활발해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굴화에 거주하고 있는 은진 송씨 일가는 입향조의 10세손 진용(70), 태천(60), 양현(56), 태식(55), 11세손 한출(67), 태군(52), 정규(48), 정문(46), 정호(44), 12세손 성구(46), 성우(39), 민준(44), 광식(39), 성호(37), 성환(24)씨 등이다.
진용씨는 울주군의회 전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태천씨는 울산시 동구청 총무국장으로 재직중이다. 굴화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는 양현씨는 굴화리 이장으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노인회관을 찾아 노인들의 말벗이 돼준다.
한출씨는 순박한 농촌 할아버지로 웃음이 넉넉했고, 태군씨는 신정1동사무소 공무원, 정규씨는 울산의 작은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정문씨는 울주군의회 의원으로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이밖에 송병철 울산경제인협회 회장과 송태일 (주)울산종합건설기계 대표이사도 굴화 출신의 은진 송씨다. 입향조의 11세손 준형씨는 울산에서 병원(연세내과)을 운영하고 있다.
(31)울주군 두동면 월평마을 용궁전씨
360여년 지킨 순박함 최대 자랑거리
두동면사무소에서 생고기로 유명한 봉계를 이어주는 군도 31호선을 따라가면 치술령 북쪽 들판에 떡 하니 자리잡은 마을이 월평(月坪)마을이다.
못안과 봉계 사이에 있는 월평마을은 상월평과 하월평 두 마을이 남북으로 나눠져 있다. 이곳 월평은 경주 외남면시절 먹을 만드는 먹점이 있어 묵장(墨匠)으로 불렸을 정도였으나 먹점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20세기 초에만 해도 이곳은 쇠불이 터가 곳곳에 남았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곳 들판이 산에 둘러싸여 흡사 한문의 "월(月)"자 처럼 생겼다 해 마을 이름도 월평이 됐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 외남에서 울산에 속하게 됐다.
치술령과 먹장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들판은 두동면 가운데 가장 넓다. 그래서 상·하월평 마을에는 200집 가까이가 들판 한 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치술령 골짜기의 백양곡 물줄기는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내달린 뒤 동해의 푸른물과 섞인다. 월평이 바로 형산강의 발원지이다.
월평마을은 90년전에 교회가 세워질 정도였으나 바로 윗마을로 불고기 촌이 형성된 봉계와는 달리 새집이 드물다. 굳이 자식들이 들어와 살 것이 아니면 집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기에 그렇다.
순박한 마을 월평에도 몇해 전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닥쳐 마을간 불화도 없지 않았다. 바로 마을 북쪽 입구에 "화약저장고" 설치 여부를 두고 찬반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많이 봉합됐다.
용궁전씨(龍宮全氏)들이 이곳 월평에 가장 먼저 와 터를 잡았다.
처음 월평에 정착한 어른은 도시조 전섭 할아버지의 43세손으로 시조인 문정공 전방숙(全邦淑)의 28세손인 통덕랑(通德郞) 종구(從耉) 할아버지다. 통덕랑 할아버지는 고향인 경북 예천 용궁에서 이곳으로 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360여년 전의 일이다.
입향조의 11세손인 전병화(全炳和·82)씨는 "입향조께서 어떤 연유로 고향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며 "다만 혼자 오신 것으로 후손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왼쪽 낮게 북으로 뻗어내린 산이 용궁전씨들의 선산으로 이곳에 입향조 종구 할아버지 등 선대들의 묘소가 있다.
입향조가 처음 자리한 곳은 월평마을 가운데 상월평이었다. 그 뒤 입향조의 외아들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오주(五柱) 할아버지의 두 아들 근택(近宅) 근환(近環) 가운데 근환 할아버지가 하월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화씨는 "마을의 위치가 산골이어서 관직에 나선 선대가 없을 정도로 그저 농사짓는 평범한 생활로 지내온 지가 입향조 이후 13대째다"며 "마을사람들의 순박함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종손으로 용궁전씨 월평리종친회장인 종윤(鍾允·53)씨는 문중들이 울산과 경주, 대구, 서울 등 외지로 많이 나가 이제는 상·하월평에 20여집만이 전씨 문패를 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전씨가 가장 많다"고 설명했다.
병화씨는 "월평마을의 토박이 성씨로는 전씨, 단양우씨, 월성이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지만 지금은 박씨, 공씨, 조씨, 김씨, 고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말했다.
종윤씨는 "멀리들 나가 있지만 음력 10월10일 입향조 등을 모시는 묘제 때에는 잊지 않고 문중들이 마을을 찾는다"고 덧붙였다.
후손들 가운데 공학박사로 진주 경상대 정보통신공학과 전성근 교수가 이곳 월평리종친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입향조의 12대손인 대우중공업 전재국 부장과 부산시 기장군의 예일산교회 전재전 목사는 형제간으로 상월평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이밖에 월평리 용궁전씨 출신으로 종식씨가 대구에서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재용씨는 두동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32)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석천마을 학성 이씨
66칸의 고택 온전히 지킨 울산의 세도가
울산에서 부산방면으로 난 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울산예술고등학교를 지나면 울주군 웅촌면 오복리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왼쪽으로 난 길 따라 1.4㎞정도를 더 따라가면 울산시 문화재자료 3호인 "석천리 이씨고가"가 있는 웅촌면 석천리 석천(일명 돌내)마을이 나온다.
석천리 이씨고가는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 사당 등 모두 13동에 66칸의 고가는 누가 보더라도 세도가의 집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집이다.
약 240여년 전에 지어진 이씨고가는 학성이씨 서면파로 임란공신 겸익(謙益)의 고손인 의창(宜昌, 1725~1781)이 웅촌 대대리에 살다가 석천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지은 집이다.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의 3.1운동을 주도한 재락(在洛)도 이 집에서 살았다.
대대에 살던 이씨가 석천으로 오게 된 이야기는 "국풍(國風)"에 얽힌 전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어려움에 처한 유명 풍수가 국풍을 도와줬더니 현 이씨고가 터가 명당임을 알려줘 그가 알려주는 대로 집을 지은 것이 바로 이 집이다.
이 마을 출신 이동호씨는 "마을이 마치 둥근 소쿠리처럼 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을 동산 동뫼는 소쿠리 안에 든 붕어모양으로 회야강 쪽으로 헤쳐나갈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씨고가는 붕어 꼬리 위치에 있지요. 힘이 모여있는 꼬리에 이씨가 터를 잡고, 붕어 머리부분 앞에는 연못을 파서 더이상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형상"이라고 설명했다.
의창의 둘째아들인 죽오공 근오(竹塢公 覲五)와 5세손 석진(錫縉)은 대과에 급제했고, 증손자 장찬(璋燦)과 4세손 규노(奎魯)와 규용(奎龍)이 진사를 지냈다.
또 "근오 할아버지는 대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나 낙향해 1792년 재천정(在川亭)을 건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장찬 할아버지는 시조인 예(藝)의 일대기와 문장을 모아 임신년에 개간한 책 "학파실기"의 목판 43판을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목판 43판은 현재 이휴정에 보관중이다.
동호씨는 이처럼 유명 풍수가의 조언대로 붕어의 힘찬 꼬리질과 함께 집안에 벼슬을 지내는 인물이 배출되는 등 좋은 일이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고 덧붙였다.
묘사 이외에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에는 시조인 예를 모시고 있는 석계서원에 모여 봉향하고, 음력 9월9일 시조 향사를 지낸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마을전체 80집 가운데 60집이 이씨문패를 달 정도로 집성을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12집에 불과하다.
전체 200여호까지 번창한 의창의 후손들은 울산,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로 흩어져 각 계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석천마을 출신 가운데 정계에는 이후락(81) 전 대통령 비서실장, 동석(56) 전 울산시의원, 복(64) 현 열린우리당 울주군 국회의원 경선후보와 고 윤락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이 있다.
관계에는 이 거락(80) 전 경찰종합학교장, 설(74) 국가안보회의이사관, 정희(47) 울산시 사회복지과 노인복지담당 사무관과 고 동립 충남도 문교사회국장, 고 동윤 울산경찰서장, 고 탁 농수산부 부이사관, 고 동만 울산시 부시장이 있다.
학계에는 동순(59·신라대학교 미술과 교수), 동덕(46·공학박사), 병호(57·경상대 건축공학과 교수), 수원(54·농학박사), 용환(46·서울대 전자공학과 교수), 강환(45·인제대 의대 교수), 관수(64·동의대 경제학과 교수), 동하(57·동의공업대학 사무국장)씨 등이 활동하고 있다.
산업계에서 활동중인 식환(69·강남고속관광(주) 회장), 동호(62·태정개발 대표이사), 중걸(51·(주)우주전기 대표이사 )씨가 의창의 후손이다.
금융계에는 일환(59·외환은행지점장), 동훈(57·제일화재보험(주) 회장)씨가 이 마을 출신이고 동권(63)씨가 전 부산은행 지점장을 지냈다. 의료계에는 동구(69·산부인과 의사), 태걸(48·외과의원장)이 있다. 경상일보 문화교육부장으로 있는 상환씨도 같은 갈래다.
한편 석천마을 맞은편 도로변에는 석계서원(石溪書院) 복원이 한창 진행중이다. 1737년에 지어진 석계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됐다가 지난 2000년부터 복원을 시작, 오는 3월21일 복원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석계서원 앞에는 반계 이양오(李養五·1737~1811년)의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반계 이양오는 석계서원에서 근오를 비롯해 후학지도에 힘써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한 조선 영조 때 학자했다.
(33)울주군 두서면 차리마을 경주김씨
성균관 진사 지낸 "종우"의 후손
울주군 언양읍에서 봉계·경주로 가는 국도 35호선을 따라 가다가 반구대 암각화 진입로를 지나 언양읍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멀리 반곡초등학교가 보인다.
왼쪽으로 보이는 다개리 입구를 지나면 두남학교를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두남학교를 지나면 송정공동목욕탕, 구량보건소가 차례로 보이고 잠시 후면 멀리서 보더라도 장고한 세월만큼이나 우람한 체구를 가진 두서은행나무도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계속 올라가면 100여집 규모의 울주군 두서면 차리마을이 나온다. 차리마을회관과 차리예배당이 있는 하차리, 중차리 회관이 있는 중차리다. 중차리를 지나서 고헌산으로 막혀있는 막다른 지점까지 강을 따라 나있는 마을이 경주김씨 집성촌인 상차리다.
하다. 상차리 마을은 고헌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다른 마을보다 춥다.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키가 큰 소나무 두 그루와 잘 지어진 재실이 나온다. 40여집이 살고있는 상차리 마을에서 30집을 차지하는 경주김씨 재실 감은정(感恩亭)이다.
경주에서 처음 이곳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린 이는 조선조 단종 계유(1453)에 성균관 진사를 지낸 종우(從禹)의 13세손 명우(命禹)로 가선대부를 지냈다. 당시 두서면 인보리 선필마을에 자리를 잡은 명우의 세 아들 가운데 셋째아들인 규한(奎漢)이 약 200여년 전 차리로 옮겨 왔다.
김종식(79·언양향교 성균관 유도회 회장)씨는 "명우 할아버지의 세 아들이 각각 선필마을과 소호마을, 차리로 이주했는데 차리에 온 명우의 손자 규한 할아버지만 차리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타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나에게 6대 할아버지인 규한 할아버지는 당시 절충장군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차리마을 김씨 문중에서는 1850년 전후의 규한 할아버지의 호적 약 30부와 교지 소량이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 3년 전까지만 해도 규한이 차고 다녔다던 호패(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자가 차고 다니던 것)도 함께 보관돼 있었지만 면지편찬 과정에서 분실했다.
종식씨는 "문중에서는 가보나 다름없던 것을 잃어버린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면지편찬위원회가 위로의 표시로 만들어준 "경주감씨가문 호패증" 액자만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30집이 12촌 이내의 일가친척이지만 이 가운데 김씨 어른이 살아있는 집은 10집 뿐이다. 살아있는 김씨 가운데 최고령자는 종식씨와 영수씨로 79세다. 나머지 지상, 지춘, 기식, 지승씨 모두 70을 바라보고 있다.
명우로 부터 뻗어나온 후손은 현재 울산, 부산, 창원 등 전국에 170여집 정도가 퍼져 살고 있다. 명우 이후 조상을 모시고 있는 감은정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매년 11월 셋째주 일요일 합동묘제를 올리고 있다. 재실에는 또 성균관 진사를 지낸 종우의 후손임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20년 전 문중에서 뜻을 모아 "김종우 세적비"를 세웠다.
이 마을 출신으로 기훈씨가 울산시의회사무처(6급)에 근무하고 있고 진원씨가 창원에서 금강설비, 지영씨가 마산에서 한국판넬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34)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남명마을 진주강씨
천석꾼 날 터"..극춘이 합천서 이주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봉계전통한우불고기단지에서 생고기를 그대로 참숯불에 얹어 왕소금을 뿌려 먹어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입 속에서 살살 녹는다"고 표현한다.
봉계 불고기 맛이 좋은 이유는 냉장육이 아닌 생고기를 사용해 신선하고 영양가가 높고, 참숯불의 열이 고기 속까지 열을 전달해 골고루 익혀줘 고기가 부드럽고 참숯 특유의 향이 배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양념 대신 오로지 왕소금 만으로 간을 맞추기 때문에 맛이 거의 자연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계전통한우불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바로 한우의 주식이 볏집과 잡초이기 때문이다. 울주군 봉계리 남명마을에 사는 강옥수씨는 "두동면과 두서면 일대 주민들이 직접 키우는 한우는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나오는 볏짚과 농민들이 베어다 말린 소풀(잡초)을 먹는다"며 "옛날 전통방식 그대로 키운 진짜 한우"라고 설명했다.
봉계전통한우불고기단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남명마을. 46집 가운데 15집을 차지하는 진주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 계용(啓庸)의 후손들 중에서도 10여집이 대규모로 소를 키우고 있다.
진주강씨가 경주시 내남면과 인접한 봉계리 남명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약 3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입향조의 11대 종손인 강순도(79)씨는 "공조참의를 지낸 극춘 할아버지가 경남 합천에 살다가 우연히 이 동네에 왔다가 천석꾼이 날 터라고 부모님 묘까지 이전해 왔다"며 "현재 넓게 펼쳐져 경지정리가 잘 돼 있는 논에서 나오는 쌀과 짚으로 수익을 얻고 있으니 입향조의 말대로 천석꾼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옛 신라시대부터 봉계리라고 불리는 명칭 또한 이 일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길하다는 뜻의 봉(鳳)에 강태공이 위수에 낚시를 드리운 옛일을 연상해 계(溪)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 효심이 지극한 아들 내외와 손자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치술령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남명마을을 지나서 일까. 강순도씨는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효자다. 지난 1976년 강씨의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왼손 약손가락을 잘라 모친의 입에 드리웠는데 모친은 그대로 돌아가셨다. 이후 부친이 위독할 때 또다시 같은 손가락을 잘랐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는 이 일로 동민과 경남 노인회장이 주는 효자상을 받았다.
"내 몸을 준 부모님께 내 몸을 주는 것이 뭐가 아깝겠느냐"는 강씨 옆에서 부인 설복출(72)씨는 "갑자기 부엌칼을 들고 오라고 소리를 질러 가져다 줬더니 어느새 어머니 입에 손가락을 물리고 있는데" 시묘살이는 또 어떻고.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도 산에는 가야한다고 올라가는데, 강씨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라며 당시 일을 회상했다.
모두 20촌 내의 집안이 살고 있는 남명마을 중심에는 입향조로부터 10대 할아버지까지를 모시고 있는 정자 남명정(南明亭)과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진주강씨 봉계문중 종택과 연결돼 있는 남명정은 1976년에 지어진 것이다. 남명정 옆에는 또 수령이 약 250년으로 봉계의 역사를 말해주는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경주시 내남면과 인접한 두동면 일대에서는 요즘도 두광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경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많이 진학한다. 울산시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거리로는 경주가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입향조 극춘으로부터 뻗어나온 후손들은 전국에 200여집에 이른다. 강어순 농소농협 전무, 강지순 공군 중령, 강순태 전 양산여중 교장, 강호두·강호주 전 금성고 교감이 봉계문중 출신이다. 또 강병국씨가 부산법원, 강영길씨가 부산 검찰청에 근무하고 있다. 강순도씨는 초대·2대 면의원을 지냈다.
집성촌을 찾아서 연재를 마치며(에필로그)
"고향이 이북인 사람은 "통일"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더이상 고향을 되찾을 희망조차 잃은 실향민입니다"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 "광주노씨"와 "영월엄씨"는 온산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략사업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수백년 동안 살아 온 고향을 떠나야 했다. 또 청량면 중리에서 400여년을 살아 온 "남원양씨"와 "연안차씨"도 80년대 회야댐 건설과 함께 고향땅을 등졌다. 이밖에도 도시의 확대로 토지구획정리사업, 도로확장사업 등에 떠밀려 고향땅을 떠난 성씨도 만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물리적 요인보다 반세기 전부터 불기 시작한 산업화와 현대화의 물결을 따라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마을마다 부지기수였다. 울산의 집성촌 그 어느 곳을 찾아도 결국 남아있는 사람보다는 떠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 가운데 "울산박씨", "학성이씨", "울산김씨", "언양김씨" 등은 그 뿌리를 굳건히 갖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울산오씨"는 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의 울산오씨 종친회로 부터 취재도중 울산오씨를 찾게되면 꼭 알려달라는 부탁만 받아뒀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조상 대대로 수백년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넋두리는 저녁 설겆이 통에 밥그릇 둘, 수저 두벌 뿐인 시골마을 삶보다도 더 쓸쓸해 보였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 집성촌. 예전에는 "천석꾼"이 날만한 터를 찾아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이룬 마을이지만, 지금은 땅을 파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젊은 이들이 도심지의 학교로 진학을 하고 자연스럽게 도시에 정착하면서 집성촌 의미는 퇴색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집성촌의 명맥을 이어 온 곳에는 어디나 그들과 같이 기나긴 시간을 함께 걸어 온 역사가 함께 하고 있었다. 울주군 웅촌면 돌내마을에는 24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학성이씨" 서면파 고가(울산시 문화재자료 제3호)가 있고, "경주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상북면 명촌리에는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만정헌(萬定軒·울산시지정 문화재자료 제2호)이 남아 있었다.
또 수령 500년이 넘어선 두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 또한 550여년 전 두서면 구량리 일대에서 마을을 이룬 "경주이씨"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나무다.
현재 불리고 있는 지명 또한 집성촌을 이룬 사람들에게서 유래되기도 했다. 삼동면은 "영산신씨"의 세 형제가 하잠, 방기, 조랑마을에 각각 흩어져 살면서 마을은 달라도 집안은 하나라는 의미를 담아 삼동(三同)으로 불려오고 있다.
본지에 소개된 40여곳의 집성촌 가운데 대부분이 울주군 지역임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울산 토박이는 울주군 사람 뿐"이라는 말 처럼 언양을 중심으로 울산 시가지보다 먼저 형성된 울주군에서 집성촌의 흔적을 찾는 것은 당연했다.
간혹 도시 생활을 접고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려는 사람들이 집성촌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눈에 띄는 집을 짓고 사는 일이 늘면서 소박한 시골마을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는 마을도 많았다.
그래도 마을 경로당 만큼은 아직 8촌 내의 친척, 먼 집안 사람들끼리 집안 수저가 몇 벌인지, 누구네 집에서 암송아지를 낳았는지 수송아지를 낳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유일한 안식처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 이 동네에 ○○ ○씨가 몇 집이나 살고 있어요?" "많지~"
"그럼 할아버지,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다는 ○○는 어디쯤에 있어요?"
"저~쪽에 안 있나. 금방 가"
"몇 년 전"이라는 질문에는 "오래됐지", "몇 집"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냥 "많이 살지"라고 말하는 통에 취재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풋풋한 사람내음 만큼은 잊혀지지 않았다. 비록 차를 타고 10여분 가야 하는 길 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저~기"라는 어른의 말만 믿고 추운 겨울날 헛걸음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지구촌 시대에 왠 집성촌이라는 악평과 퇴색돼가는 집성촌의 의미를 되짚어 주고 사람사는 이야기가 배어있는 기획물이라는 비교적 호평이 글을 실기시작한 지난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공존했다.
집성촌이 갖는 의미를 대변한 듯 싶다.
울산사람이라면 울산의 역사를 함께 해 온 마을과 그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의미깊은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