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은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지파들의 족보이고, 6장은 레위 지파의 족보입니다. 5장의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르우벤(5:1~10), 갓(5:11~22)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반입니다(5:23~26). 6장의 레위 지파는 먼저 대제사장의 족보가 아론에서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까지 나오고(6:1~15), 그리고 레위의 아들들의 계보가 나옵니다(6:16~19, 참조 신6:16~19; 민3:17~20). 이어서 찬양을 맡은 레위인들(6:31~53), 레위 지파의 성읍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6:54~81).
이 기사에서 주목할 점들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야곱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의 장자권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설명됩니다(5:1~2).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를 범함으로써(창35:22) 장자권을 잃게 되었습니다(창49:4). 장자권은 지도력(주권자)과 유산을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게 되는 상속권으로 구성되는데, 특별히 유산 상속권은 요셉의 지파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주권자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것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장자 지파로 인정받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두 지파로 계수되었습니다. 또한 주권자가 유다 지파에서 나오기에 유다 지파에서 다윗과 메시야가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역대기 기자는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둘째, 요단 동편에 속한 두 지파와 반 지파의 전쟁기록(5:18~22)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승리를 하였습니다. 셋째, 승리 뒤의 타락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5:25~26).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이’ 섬김으로써 결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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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는 가나안 정복 이후 요단강 동편에 정착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계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1절에서 10절은 야곱의 첫째 아들이었던 르우벤이 장자권을 박탈당하게 된 원인과 르우벤 지파의 주요 계보와 그들이 머물렀던 거주지역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가 하나님의 회복을 소망하도록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2절입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1-2)
(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일반적으로 족보에 서열을 기록할 때 형이 동생 보다 앞서 기록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순서를 따른다면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계보의 가장 앞에 소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의 계보에는 웬일인지 첫째 르우벤이 아닌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가 제일 먼저 소개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시므온이 소개되고, 이후 르우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르우벤 지파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더럽힌 일과 이 사건으로 인해 그가 장자의 명분을 잃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했습니다. 이 행위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아버지 야곱을 욕보인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르우벤의 행위는 율법에서도 금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율법대로라면 르우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르우벤은 끓어오르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야곱의 아들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야곱의 첫째 아들임에도 계보의 첫 부분에 소개되지 못하는 불명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르우벤의 후손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존재감 없는 미약한 존재로 쇠락해 가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잘못된 행위에 대한 쓴 열매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순간의 욕망에 파묻혀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삶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상실한 장자권은 요셉의 아들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장자의 권리로 여겨지는 두 몫의 유산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해 상속받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한편, 르우벤의 장자권 상실로 인한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유다는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네 번째 아들입니다. 본문은 유다가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형제보다 뛰어나다”라는 말의 의미는 유다 지파의 수적 번성과 강성함을 나타내는 말이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라는 말에서 주권자는 다윗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셨고, 이 다윗 왕조는 유다 지파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유다 지파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본문은 유다 지파의 강성함과 뛰어남을 언급하고 있지만 장자의 명분만은 요셉,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있음을 언급했고,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주권과 뛰어남을 강조한 것은 포로 귀환 후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새롭게 세워갈 공동체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북쪽 지역에 위치한 지파의 사람들도 수용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음을 밝히고 북쪽을 대표하는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를 끌어안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 10절은 르우벤 지파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르우벤 지파가 쇠락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계보와 이와는 상반된 번성하던 시기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계보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르우벤 지파가 쇠락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계보를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서 6절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족보(3-10)
(3-6)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요엘의 아들은 스마야요 그의 아들은 곡이요 그의 아들은 시므이요 그의 아들은 미가요 그의 아들은 르아야요 그의 아들은 바알이요 그의 아들은 브에라이니 그는 르우벤 자손의 지도자로서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로잡힌 자라
르우벤의 네 아들과 그의 직계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입니다. 이어서 요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엘은 르우벤의 네 아들 중 누구의 혈통을 계승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족보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족보를 통해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가 확인되고, 이를 통해 가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 족보를 통해서는 요엘이 누구의 자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그 의도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3절에 기록된 르우벤의 네 아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6절의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 브에라이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로잡혔다는 내용을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3절에서 6절까지의 기록 사이에는 약 1200년 정도의 오랜 시간적 간격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적 간격이 존재함에도 계보에는 단지 8세대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기간 르우벤 지파의 계보에는 다수의 세대가 기록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이기는 했지만 장자권을 상실하였고, 그의 가문에는 주요한 인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때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 브에라이는 앗수르 왕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르우벤 지파는 앗수르의 민족 혼혈 정책에 의해 쇠락과 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직계 가족에 대한 계보는 장자권을 빼앗기고 쇠락과 소멸로 향한 르우벤 지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7절과 8절의 계보는 사울 시대를 배경으로 르우벤 지파가 번성하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에서 10절입니다.
(7-10) 그의 형제가 종족과 계보대로 우두머리 된 자는 여이엘과 스가랴와 벨라니 벨라는 아사스의 아들이요 세마의 손자요 요엘의 증손이라 그가 아로엘에 살면서 느보와 바알므온까지 다다랐고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사울 왕 때에 그들이 하갈 사람과 더불어 싸워 손으로 쳐죽이고 길르앗 동쪽 온 땅에서 장막에 거주하였더라
르우벤 지파의 종족별 족장, 여이엘과 스가랴, 벨라 세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의 족장 중 벨라의 계보에 집중합니다. 특히, 거주지를 중심으로 벨라를 소개합니다. 그는 아로엘에서 느보, 바알므온으로 거주지를 이동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거주지 이동이 아니라 기업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이후에도 그의 기업은 동방지역까지 확대되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특히,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다는 것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의 최대치까지 확장했다는 의미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거주지가 이렇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길르앗 땅에서 행하던 목축업이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축의 번식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르우벤 지파가 그들의 근거지인 길르앗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도 기록되어 있는데 사울 왕의 통치 시절에 르우벤 지파와 하갈 사람과의 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르우벤 지파가 승리함으로 길르앗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 르우벤 지파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점점 하나님의 성전과 멀어져 갔으며,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25절의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우상을 간음하듯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르우벤 지파의 쇠락과 소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계보와 이후 소개된 르우벤 지파의 번성을 담고 있는 상반된 두 계보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이 르우벤 지파의 상반된 두 계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당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로 귀환한 공동체에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삶의 터전을 새롭게 세워야 하는 막막한 상황일지라도 소망과 회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큰 번성을 누릴지라도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쇠락과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세워지게 될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바른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속적 가치와 욕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한다면 우리는 쇠락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우리 인생의 자양분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뿌리내리고 살아간다면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소망과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자리를 생명의 터전으로 일구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의 삶을 살아가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갓의 자손(11-17)
앞선 1-10절 단락은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지파의 주요 족장과 거주지에 대해 기록되었습니다. 이어지는 11절에서 17절까지는 갓 지파의 주요 거주지와 주요 족장들이 소개됩니다. 먼저 11절입니다.
(11) 갓 자손은 르우벤 사람을 마주 대하여 바산 땅에 거주하면서 살르가까지 다다랐으니
갓은 ‘복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갓지파의 시작인 ‘갓’은 레아의 시녀 실바가 낳은 야곱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 본문 11절은 갓 지파의 사람들이 르우벤 사람들 마주 대하여 거주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르우벤 지파와 이웃하여 그 북쪽에 거하였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갓 지파는 므낫세 반 지파의 남쪽에 거주하였습니다. 모압 왕 메사의 비문에 나오는 갓 지파에 대한 언급은 갓 지파가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지파들 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갓 지파는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 갓 지파가 거주한 성읍으로 기술된 ‘바산’은 ‘비옥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요단강 상부 동편, 곧 갈릴리 바다에 인접해 있는 비옥하고 광활한 지역을 지칭합니다. 이곳은 해발 533-770m를 전후하는 고원 지대로 북쪽으로는 헤르몬산, 동쪽으로는 살르가, 서쪽으로는 그술과 마아가, 남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명기 3장을 보면, 본래 이곳은 르바임 족속의 왕 옥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모세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과거 지파별로 거주지를 분할 때 이곳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지역이 갓 지파의 거주지로 기술된 것은 갓 지파의 강성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11절 마지막에 나타나는 ‘살르가’는 ‘이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산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곳은 다메섹의 동남쪽 120Km 지점의 땅으로 이곳에까지 갓 지파가 거주하였다는 것 역시 갓 지파의 강성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12) 우두머리는 요엘이요 다음은 사밤이요 또 야내와 바산에 산 사밧이요
이제 12절에서는 갓 지파의 우두머리, 즉 초기 족장들을 소개합니다. 초기 족장은 요엘이었고, 본문이 말하는 다음은 부족장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이 시기의 부족장은 사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은 계속해서 갓 지파에 속한 족장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야내’와 ‘사밧’이 족장이었는지 부족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들의 이름에 ‘판단하다’와 ‘재판관’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재판관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여, 공동번역성경은 이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바산에서 살던 그들의 추장은 요엘이었고 부추장은 사밤, 재판관은 야아내였다.’ 지도자 그룹의 이러한 역할의 분배는 갓 지파가 가지고 있었던 율법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보여주며, 이러한 부분이 갓 지파를 더욱 강한 지파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3) 그 조상의 가문의 형제들은 미가엘과 므술람과 세바와 요래와 야간과 시아와 에벨 일곱 명이니
‘그 조상 가문의 형제들은’ 여기서 형제들은 이라는 표현은 보다 정확하게 ‘인척’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13절에 나타나는 일곱 명이 모두 앞선 12절에 기록된 인물들과 혈연관계에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갓 지파의 주요 인물들로 갓 지파에 속한 각 씨족의 족장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14) 이는 다 아비하일의 아들들이라 아비하일은 후리의 아들이요 야로아의 손자요 길르앗의 증손이요 미가엘의 현손이요 여시새의 오대 손이요 야도의 육대 손이요 부스의 칠대 손이며
14절에서는 앞선 13절에 나타난 일곱 명의 족장들의 아버지인 ‘아비하일’의 상향식 족보를 소개합니다. 아비하일은 ‘나의 아버지는 전능하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갓 지파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랐던 사람들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5) 또 구니의 손자 압디엘의 아들 아히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15절을 다시 번역하면, ‘아히는 그들의 아버지의 집의 족장이 되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히’가 한 씨족의 족장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아히’가 갓 지파 전체의 대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히’는 ‘나의 형제’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아히의 아버지 ‘압디엘’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이 정체정을 보여주는 것을 보아, 갓 지파가 대표로 내세운 ‘아히’의 가문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종과 같이 좋은 믿음의 가문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증거 하나, 하나가 갓 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이유로 설명됩니다.
(16) 그들이 바산 길르앗과 그 마을과 사론의 모든 들에 거주하여 그 사방 변두리에 다다랐더라
16절은 갓 지파의 거주지를 나타냅니다. 16절 초반의 ‘바산 길르앗’은 마치 한 지역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해당하는 원어를 살펴보면 이 지역은 바산과 길르앗을 각각 지칭하는 두 개의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본래 길르앗이라는 지역은 앞선 9절에서 르우벤 지파의 거주지로 기록된 지역이며, 바산 역시 므낫세에게 할당되었던 땅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의 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길르앗과 바산이라는 넓은 지역을 복수의 지파들이 부분적으로 공유하여 사용했을 수도 있으나, 16절에 마지막에 표현된 ‘그 사방 변두리에 다다랐더라’라는 표현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갓 지파가 지속적으로 번성하여 다른 지파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경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17) 이상은 유다 왕 요담 때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때에 족보에 기록되었더라
갓 지파의 기록의 마지막인 17절은 11-16절에 기술된 갓 지파의 족보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 시켜주는 부분입니다. 해당 본문은 자칫 요담의 시대와 여로보암의 시대를 묶어놓은 것처럼 이해될 수 있으나 원문은 이 둘의 시대를 분리하여 기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역대상을 기록한 기자는 두 개의 자료 즉 요담의 때의 자료와 여로보암의 때의 자료를 참고하여 갓 지파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이 반복해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갓 지파가 이렇게 강성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담대한 신앙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하던 여정 속에서 모세는 갓 지파의 사람들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되면 이스라엘의 진영의 선봉에 서서 싸울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요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갓 지파에게 담대한 신앙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장을 보면 갓 지파는 모세의 요청대로 가나안을 향한 전쟁이 시작되자 실제로 맨 앞에 나서서 싸웠습니다.
갓 지파가 용감한 지파가 될 것이라는 점은 야곱도 창세기 49장에서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갓 지파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이렇게 용감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갓 자손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따라 담대히 약속의 땅을 얻기를 원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군대의 선봉에 서서 싸움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말씀을 근거로 한 용감한 도전을 감행해야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적 담대함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담대하고 적극적인 신앙은 하늘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3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세상이 크게 보이고,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큰 상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커지는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함을 버리지 않은 신앙의 모범은 다니엘입니다. 그는 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자와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담대함을 버리지 않고,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큰 상과 같은 능력과 은혜, 그리고 하늘의 평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같이 신앙적 담대함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가나안 정복 초기에 신앙적으로 담대했던 갓 자손들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타락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될 당시 다윗의 남유다가 아닌 북왕국 여로보암에게 속하여 우상을 섬기도 온갖 부도덕한 죄로 물들어 갔습니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바산 땅에서 편안하고 풍족하게 지내다 보니 마음이 교만해졌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등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갓 지파뿐만 아니라 함께 믿음의 용기를 내서 요단 동편의 땅을 받았던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번영을 누리게 될 때 신명기 6장12-13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6:12-13)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그러나 갓 지파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 대신 풍성한 환경과 물질을 더 귀하게 여겼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주장하는 모습을 가졌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추악한 욕망과 죄와 사망의 종이 됩니다. 추악한 죄의 모습으로 종과 같이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이것을 그림 언어로 보여주신 것이 갓 지파가 속하였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입니다. 갓 지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인생의 주도권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주장한 결과는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비로소 참된 자유와 평안, 참된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부여받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주시기 위해 참 생명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함께 처음 갓 지파의 사람들과 같이 믿음의 담대함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된 생명의 복, 큰 상을 받고 누리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되는 역대기는 이스라엘 역사 중 남 왕국 중심으로 서술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기자는 선지자 에스라로 여겨지지만 이를 근거할 자료는 명확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역대기의 기록 시점에 대한 의견도 다양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역대기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다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들을 위해 기록됐다는 사실입니다.
짧게 봐도 70년 이상을 바벨론에서 살다 귀향한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성벽도 왕궁도 성전도 다 사라진 채 없고, 황량해져 버린 옛터만 이들을 반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펜을 들었습니다. 자칫 낙심을 넘어 좌절과 포기로 치달을 귀향민들 마음에 소망을 불어넣으려고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역대기 기자가 쓴 첫 단어는 ‘아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긴 지면을 할애해 ‘족보’를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름 하나하나를 훑어가며 읽을 독자들 마음에 점점 새날 새 생명 새 영광에 대한 불씨를 지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랜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이, 황량한 빈들 같고 무덤 더미와 같은 이 땅에 다시 새 역사를 써 내려가실 것이란 확신을 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흐름 속 오늘 본문이 속한 역대상 5장에는 요단강 동편 지파들 계보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지역의 두 지파 반은 북 왕국 영향권에 속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도 엄연한 한 뿌리, 아브라함의 자손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이들 계보도 잊지 않고 역대기 한 면에 담습니다. 이들도 열두 지파가 다 모인 온전한 왕국 회복의 꿈속 없어선 안 될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난 두 번의 새벽에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계보를 훑었습니다. 이제 오늘 역대상 5장을 마무리할 우리 손에 들릴 건 나머지 반 지파. 요단 동쪽 땅 북쪽에 거주한 므낫세 반 지파의 계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역대기 기자는 이 흐름을 깹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온 독자들이 접한 적 없던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 일은 이렇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전쟁(18-22절)
(18)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서 나가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는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이라
므낫세 반 지파 계보가 나올 시점에 역대기 기자는 갑자기 요단 동편 두 지파 반 연합군 규모를 기술합니다. 그 숫자는 4만 4,760명이며, 이들은 능히 칼과 방패만 드는 게 아니라 활도 다룰 수 있는 강한 용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성경 역사를 잘 안다면 이 규모가 민수기에 기록된, 오래전 출애굽 직후 인구 조사 때보다 줄었고(13만 6,930명, 민26:7, 18, 34) 이후 다윗의 인구 조사 때보다(12만여 명)도 적다는 걸 압니다. 그렇다면 이 군대가 소집되어 계수된 시기는 분열 왕국 시기 중 한 때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 용사들이 모인 목적에 전쟁 말고 다른 건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완벽하게 정복하려고 말입니다. 이때 이들이 마주한 대상과 전쟁의 결과가 이렇습니다.
(19-20) 그들이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요단 동편 지파들이 싸운 대상은 하갈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으로서 이스마엘을 낳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 하갈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후예로 여겨지지만 이를 근거할 자료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만 명확한 건, 이들이 모압, 에돔 등과 함께 요단 동편 지파들의 오랜 원수였다는 사실입니다(시 83:5-6)
두 지파 반 연합군은 하갈 사람들을 위시한 적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이때 성경은 이 전쟁에 어떤 군사전략이나 병기들이 활용되었다고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의 승리 비책으로 딱 하나를 꼽습니다. 바로 ‘부르짖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곧바로 살피겠지만, 이 전쟁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연합군을 도우셨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건 공공연한 진리입니다(삼상 17:47). 그러니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승리는 당연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들을 그냥 도우신 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었기에,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즉, 요단 강 동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손에 든 칼과 창으로 적들을 찌르기 전 더 열심을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마음의 소원, 눈앞에 마주한 원수들로부터의 승리만 아니라 허락받은 땅의 정복과 그곳에서의 정착 나아가 평온 삶이라는 바람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손에 든 진정한 무기였고, 이들이 선택한 가장 강한 연합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눈을 뜨고 해가 뜨면, 기다리고 있는 문제를 마주할 교우님들 계십니까. 상황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데 문제에 가로막혀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아 숨이 턱 막히십니까. 기쁨의 함성보다 탄식의 한숨이 더 크게 나오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으십니다. 높으신 하나님께 과연 이런 걸 아뢰도 되나 고민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내 체면을 생각하는 어리석음보다, 마음의 소원을 상세히 다 말하는, 마땅히 자녀로서 보일 수 있는 어리광을 부리십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예수님이 이 사실을 이렇게 확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어지는 말씀은 승리로 마무리된 이 전쟁의 결과입니다.
(21-22)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그들이 그들의 땅에 거주하여 사로잡힐 때까지 이르렀더라
승전국은 전리품을 얻습니다. 각종 군수품과 양식 그리고 노예로 부릴 포로들이 그것입니다. 이때 연합군이 얻은 노획물 규모가 상당합니다. 낙타 오만, 양 이십오만, 나귀 이천. 그리고 포로 십만입니다. 또한 생포하지 않고 죽인 자가 이보다 더 많았다고 하니 적어도 적군이 연합군 수보다 많았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은 이 큰 승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이처럼 실로 전쟁은 하나님께 있고, 승리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우리 앞의 전쟁 같은 상황과 문제, 해결할 과업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아뢸 수 있게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열라는 영적 과제이자 도약 발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연합하십시다. 그렇게 문제해결과 승리의 보증 수표를 거머쥐는 교우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역대기 기자는 다시 본래 문맥으로 돌아와 요단 동편 남은 지파의 계보를 선보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 중 므낫세 반 지파(23-24절)
(23-24)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그들이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다다랐으며 그들의 족장은 에벨과 이시와 엘리엘과 아스리엘과 예레미야와 호다위야와 야디엘이며 다 용감하고 유명한 족장이었더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거주한 곳은 갓 지파 북쪽 경계인 비옥한 땅 바산에서 시작해 계속 북으로 향해 바알헤르몬과 스닐을 지나 헤르몬산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바알헤르몬은 신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석과 같은 신앙고백을 한 장소인 빌립보 가이사랴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말 성경엔 나오진 않지만, 70인역 성경은 므낫세 반 지파 북쪽 경계에 레바논까지 포함된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므낫세 반 지파는 실로 넓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혹자는 이 일이, 오래전 야곱이 요셉에게 한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었다(창 49:22)’는 예언의 성취로 보기도 합니다.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4절에는 므낫세 반 지파 족장 일곱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이 지파 계보에 속한 이가 여기에 그치지는 않겠지만, 이미 앞서 살핀 역대기 족보들에 상당한 축약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면 이는 그리 어색한 계보가 아닙니다. 또 역대기 기자는 이 일곱 족장이 다 용감하고 유명했다며 준비해 두었던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 다른 곳에서 이들 배경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여기까지 역대기를 읽어온 독자들 마음엔 어느새 작은 꿈이 무르익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미 요단 서편에 본토 땅을 주시고 영광의 날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동편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선조들에게 풍성한 유업을 주신 사실을 마주했으니 말입니다.
이제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만 한다면, 옛 영광의 재현까진 아니어도 죽음의 흔적 가득한 이 땅을 새 삶의 터전으로 재건하는 것도 그리 먼일은 아니리란 생각이 피어오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기대감을 한껏 고양하는 이 장 마지막 내용은 다소 예상 밖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추방(25-26절)
(25)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비옥하고 넓은 땅을 차지한 요단 동편 지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그 내용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의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다른 말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 말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이 승리를 안겨주신 분, 신들 위의 신인 하나님께 등 돌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좀 배부르고 살만하니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문제 앞에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이들이 문제가 없자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의 범죄 결과는 이렇습니다.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하나님은 간음한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앗수르 왕의 마음을 일으키셔서 이들을 치셨습니다. 여기서 앗수르 왕 불과 디글랏빌레셀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은 앗수르 왕 불, 곧 디글랏빌레셀을 통해 요단 동편 지파를 징계하셨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모든 영토를 빼앗긴 것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고 맙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늘’은 역대기가 기록된 시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끝내 이 두 지파 반은 귀향하지 못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생사도 확인할 수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실로 비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역대상 5장이 끝납니다. 이때 이 마지막 절을 읽는 독자들은 호흡을 고르고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껏 고취되고 뜨거워진 마음을 일 순 식힐 뿐 아니라 등골 서늘해질 정도로 날 선 하나님 심판이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두고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사야 64: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 돌리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 하나님도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십니다. 아니 아예 숨기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멸망하게 두십니다. 부르짖을 땐 응답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땐 이토록 가차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에게도 섬뜩한 건 죄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우리 본성이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등 돌렸던 두 지파 반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찜찜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역대기를 처음 읽은 독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망과 경고를 동시에 받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잠시 마음을 재정비하며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대각성 집회까지 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들은 다시 포로가 되고 맙니다. 이토록 생생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되짚어 본 이들이, 다시 하나님께 등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역대기가 빛바랜 책으로 남지 않고 오늘 우리 손에까지 들린 건 이 책이 끝내는 소망의 책으로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속 긴 족보가 역대기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 첫 페이지까지 계속 이어진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는 역대기가 소망의 책일 수밖에 없는 단서를 오늘 본문에서 이미 만났습니다.
(20b)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부르짖는 백성에게 응답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은 응답받고 나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더는 찾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토록 못난 우릴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바로 우릴 위해 온 우주에서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싸움을 앞두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한 이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심으로 말입니다.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역대기의 족보가 향하는 신약 속 한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를 버리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를 버려야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등 돌린 이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세대만 아니라 다가올 모든 세대, 오늘 우리까지 말입니다.
본문 속 요단 동편 지파들 자취가 담긴 역대기는 우리에게 여기까지 보여줍니다. 아들을 버리면서 우릴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동참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을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오래전 기록을 곱씹는 우리는 그때 그 귀향민들처럼, 아니 그들이 받은 것 보다 더 큰 소망과 확신을 얻습니다. 때론 폐허와 무덤더미 같은 우리의 자리, 가정, 직장, 사회, 이 나라가 끝내는 하나님 나라로 일궈질 것이란 소망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때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란 응답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든 걸음에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께 낙심한 채 등을 돌리고 엠마오로 향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진정한 왕이신 우리 주님 예수님과 함께 왕의 연대기에 기록될 한 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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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5장은 르우벤의 자손, 갓의 자손,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의 자손들의 족보에 대해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민수기 32장을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많은 가축 떼를 가졌기에 요단 동쪽의 야셀과 길르앗 땅을 요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경고했고, 이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여 가나안 정복전쟁에 함께합니다. 내 땅이 아니지만, 우리의 땅이기에 함께 전쟁한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 그리고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요단 동편의 땅을 배정합니다.
가나안 정복에서도 가장 먼저 땅을 분배 받았던 두 지파 반입니다. 시간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다 르우벤은 첫째 아들입니다. 여러 이유에서 르우벤의 자손에 대해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한데, 5장이 되어서야 다룹니다. 그 이유를 묵상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르우벤은 태어난 것은 먼저였지만, 자기 권리를 버렸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부인 빌하와 동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아들의 신분을 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부인과 동침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우습게 알고,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는 그 결과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상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인류의 구원자는 자신이 아닌 유다의 후손에서 나옵니다. 장자이기에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아야 했지만, 그것은 형제로부터 버림당했지만 하나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의 후손이 물려받습니다. 성경은 르우벤이 ‘어떤 이유’에서 아버지의 여인과 동침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떤지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은 비단 르우벤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요단 동편에 있던 백성들은 26절에서 앗수르에게 잡혀 땅을 잃고 노예로 끌려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땅을 취할 때의 정신을 잃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서 나가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는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 이었다고 18절은 기록합니다. 그들이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 과 싸우고 난 후 얻게 된 것을 21절과 22절 상반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21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 22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사만 사천칠백육십명이 포로만 십만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음에도 십만 명의 포로가 남았습니다.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결과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20절은 분명하게 이유를 밝힙니다.
“20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마주한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고백하며(22절)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이 요단 동편 땅을 얻을 수 있던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25절에서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겼다’ 고 합니다. 성경은 요단 동편에 있던 두 지파 반이 ‘어떤 이유’에서 영적인 간음을 저질렀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떤지 보여줄 뿐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신분을 망각하고 영적 육체적 간음에 몸을 던지는 존재라고 말씀을 경고합니다. 장자의 권리를 줘도 발로 차고, 땅을 줘도 집어 던집니다. 다른 권리와 축복을 바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고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버림받아 마땅한 이들을 계속해서 불러주시고, 경고해주시고, 달래주시며, 삼 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연약함의 수치스러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이미 주신 것을 소중히 지키는 하루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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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은 요단강 동편에 살고 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말씀입니다.
3가지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르우벤에 관한 것으로 1-2절입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느니라." 르우벤은 야곱의 12아들 중에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가문과 가정을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적 유산을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임과 모범을 다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장자에게는 다른 형제보다 유산을 2배를 줍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는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거룩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거룩하게 살도록 율법과 계명을 주셨고 그 말씀에 따라 살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자로서 르우벤은 거룩함으로 가정을 지키거나 본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힘으로 마땅히 지켜져야 할 거룩과 순결 대신에 가정에 불신과 갈등을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자의 명분은 요셉의 자손에게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탄생하시는 축복은 유다 자손에게로 넘어가 버리게 됩니다.
둘째는 요단 동편의 세 지파들은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으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20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낙타 5만 마리, 양 25만 마리,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고 10만 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숫자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하나님께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러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어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함, 무능함을 아시면서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을 때에는 들어주시며, 함께해 주십니다. 승리의 비결은 “이 싸움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이라” 22절에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들도, 우리의 앞에 놓은 선한 싸움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얻어야하겠습니다.
셋째는 이방신들을 간음하듯 섬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그 지파들은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파들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는 이미 그 땅에 기거하려고 할 때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 40년에 걸친 광야 생활 끝에 이제 요단강 가까지 오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무장을 하고 대열을 지어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지도자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을 찾아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그 땅에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민수기 32장 2-5절입니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이 두 지파에게는 가축이 많이 있어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 전쟁을 하러 가려는 동족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 길에 자신의 재산과 부를 생각하고 있는 이들의 동기가 선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대노하였습니다. 7절입니다."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전쟁에 동참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모세의 허락을 받아 요단 동편에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민수기32장 33절입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주되 곧 그 땅과 그 경내의 성읍들과 그 성읍의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 여기에서 모세는 갓 자손이나 르우벤 자손과는 달리 전혀 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던 므낫세 자손의 절반도 동편에 남을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대로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요단강을 다시 건너 모세로부터 허락을 받은 동편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볼 때 풍요로운 땅, 가축들의 넓은 목초지에서 크게 번성해 보려고 그곳에 정착했지만 그의 자손들은 다른 지파에 비해서도 번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앞장서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기는커녕 도리어 들어가기도 전에 자신이 소유한 가축들에게 좋은 목초지라는 이기적인 이유로 동편에 남은 것은 장자로서는 물론이고 한 형제로서도 하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400년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이면서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영적인 의미를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경배하는 중요한 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을 떠나서 이방신의 제단으로 가득한 땅에 기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안일하고 불신앙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요단강가에 ‘엣’제단을 만들고 요단 서편의 백성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인 것을 증거 삼으려 했지만 결국 형식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 자손은 장자로서 그러한 삶을 살지도 모범을 보이지도 못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활과 영성관리일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신앙인이나 사역자라도 자기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관리해 줄 수 있는 구조나 공동체 속에 들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기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지키며 일하는 것이나 자신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 등을 점검받는 것들은 자기관리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예배하라고 하신 율법과 제사의 규례를 소홀히 하고, 자기들이 사는 땅의 편리한 대로 이방신의 제단을 가져다가, 안일하고 비신앙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25절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 불과 디글랏빌레셀에 의해 사로 잡혀 포로가 되었고, 그들의 지경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셨습니다. 26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셋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 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江)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이들이 분배 받은 땅은 아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적들의 마음을 일으키셔서 옮기실 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칫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며, 하나님을 의뢰하고 섬길 때에만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우리의 삶이 평안하며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