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와 속건제.
1. 속죄제에 대한 말씀은 5:13까지 계속됩니다. 14절 이후부터는 속건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2. 여기서 속죄제는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고 남겨진 죄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1~4). 이것들은 주로 우리 시대에는 거의 무시되고 있는 태만의 죄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증인으로서 증언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타 이유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유죄입니다(1). 부정한 것(혹은 사람)을 만졌다면 비록 그것을 깨닫지 못해도 그것은 유죄입니다(2~3). 부주의한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은 것도 유죄입니다(4).
3. 본문에서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구절은 5절인데, 죄를 깨달았을 때에 그 사람은 죄를 지었다고 자백(자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고백을 죄를 자백하는 것과(요일 1:9)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롬 10:9~10)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진리를 인식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4. 그러므로 회개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예배자가 예배(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참회의 기도)은 절대로 중요합니다. 이런 속죄제는 누구라도 드릴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드릴 짐승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두 마리 새를 드리거나 이것도 안 된다면, 이삭 줍기를 통해서라도 얻을 수 있는 분량인 밀 1/10 에바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5. 또한 죄를 깨닫게 된다는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3,4).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과거의 묵혀진 죄가 떠오르게 됩니다. 가령, 사소하게 여기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해야 하는 옳은 일을 하지 않은 것, 혹 더럽혀진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적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지 않고 행한 죄들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들은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사죄와 용서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6. [속건제] 14절부터 속건제에 대한 새로운 규례를 전해줍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나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이익을 구하거나, 이웃에게 거짓 증거함으로써 범한 죄를 다룹니다. 이런 죄들을 속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상이 요구되었습니다. 속건제가 다루는 위반들은 거짓으로 속여서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의 적법한 소유를 취함으로써 손해를 끼친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보상을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증거임을 속건제 규정은 가르쳐줍니다(출 22).
7. 특별히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서는 십일조와 관련하여 언급하는 구체적 언급이 있고(말 3:8),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더러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고 언급합니다(딤전 3:8; 딛 1:7,11; 벧전 5:2; 벧후 2:10). 신앙은 언제나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존 웨슬리의 말대로, “주머니가 회개해야 참 회개”인 것입니다.
8. 당신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을 간과하고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가지고 나오고 있습니까? 속죄제에 관한 본문의 규정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행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믿음이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보상해야만 하는 것들이 당신 마음에 생각나고 깨달아진다면, 성경의 방식을 따라서 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죄인을 향한 치료책입니다. 할 수 있었는데도 바르게 행하지 않았을 때, 양심의 가책과 평안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정직하게 살면서도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그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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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5장 1-13절은 속죄제에 대한 세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6절은 부지 중에 범죄하였을 때 죄를 처리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7-13절은 속죄 제물을 드리기에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 4장이 신분에 따른 속죄제를 안내하고 있다면 레위기 5장은 사람들이 부지중에 짓는 죄의 사례를 정리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죄를 허용하거나 죄와 타협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으며 개인이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누구든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속죄제의 세부 내용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1-6)
(1)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는 마땅히 해야 할 증언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5장 1-6절이 다루고 있는 ‘부지 중에 지은 죄’는 이처럼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마땅히 증언을 해야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죄가 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증언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부지 중에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알고 범사에 죄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는 순간 죄는 아주 작은 균열로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할 것입니다.
(2-3)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된 동물이 특별히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건강을 해치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였습니다. 부정한 동물로 구별된 것들의 사체를 부지중에 접촉하게 되면 부지중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부정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부정한 상태로 규정하신 몇 가지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시체(레11:24)와 출산(레12:2-5) 직후 얼마간 그리고 한센병과 피부병(레13,14)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진행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부지중에 사람의 시체와 접촉하거나 피부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허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였음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허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죄악‘(사30:13)으로 번역 되기도 하고 ’형벌‘(욥19:30)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죄와 죄의 대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처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허물’이 죄와 책임을 동시에 의미하기에 부지중이라도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람에게는 죄가 있으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범죄하였더라도 그것이 발각되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자수를 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발각되지 않는 죄, 은밀히 숨길 수 있는 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4)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대화 중에 함부로 말하게 되는 경우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쳐 말하는 경우입니다. 경솔한 말은 그 자체로 죄를 범할 위험이 있으며 자신의 경솔한 말로 맹세를하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분명한 허물이 되었습니다. 맹세는 주로 더 높은 권위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레19:12). 따라서 맹세를 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연약함을 간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경솔한 언행을 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인지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태도로 입술을 지켜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로 범죄하지 않고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5-6)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경솔한 언행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은 죄를 용서하실 수도 있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부지중에 지은 죄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 제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모르고 지은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드리고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달았거나 알고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속죄제를 위한 필수 절차인 죄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속죄제를 드리기 전 죄를 고백하는 절차를 통해 배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감추거나 사소해 보이는 죄는 슬그머니 넘어가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어린 암양 또는 암염소였으나 그것들을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의 제물을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7-13)
(7-10)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 4장이 신분에 따른 속죄제의 제물을 구별하고 있다면 레위기 5장 7절 이하는 경제적 형편에 따른 제물의 구별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물 보다 더 비싼 제물을 드리거나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제물을 생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준을 따라 자신의 형편에 맞게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암양과 암염소를 대신해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두 마리의 새 중에 하나는 속죄제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번제로 바쳐야했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에서 나온 피는 제단 곁에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려야 했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되는 동물의 죽음은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즉, 속죄제는 하나님께 얼마의 제물을 드리면 죄에 대한 면책권을 얻는 개념이 아니라 죄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자신의 죄를 얼마의 물질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난한 자라고 해서 부족한 경제력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속죄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에 대한 경각심을 마음에 새겨야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소한 죄와 심각한 죄의 구별이 무의함을 기억해야했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에서 판매 되었던 면죄부는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통해 주신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속죄제의 교훈을 놓친 채 하나님께 적당한 제물을 드림으로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중세시대의 착각을 오늘날 우리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신을 만드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우리 마음대로 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셨지만, 헌금을 통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신앙생활했던 중세시대의 성도들처럼 우리가 믿고 싶은대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받은 죄의 형벌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나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결코 가볍거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11-13)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앞서 속죄제의 제물과 속죄제를 드리는 방식을 소개하며 죄의 대가가 생명인 것을 강조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의 방편으로 고운 가루를 요청하셨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속죄제 제물로 요청하신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는 약 2.1리터의 양입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이나 유향을 섞지 말고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한 손 가득 그것을 취하여 제단 위에서 태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어졌습니다.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형편이라도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그 사람에게는 당장 오늘 끼니를 해결할 고운 가루가 목숨 같은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17:12)고 고백했던 사르밧 과부처럼 누군가에게는 고운 가루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고운 가루의 속죄제가 결코 암양의 속죄제 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는 죄라도 간과할 수 없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으로 죄를 정당화하거나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자연스레 죄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삼고 살기 보다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목적삼고 살았으며 자신의 도덕 기준으로 타인을 정죄하거나 자기의에 빠져 살았고 이웃의 눈을 피해 적당히 죄를 짓거나 죄와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속죄의 기회가 있고 가능성이 있지만, 속죄를 이루기 위해 도덕적인 삶을 살거나 나름의 종교적 열심과 결단만으로는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헌금과 사회 구제 및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을 통해서도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죄제의 제물과 방법을 교훈하셨고 그것을 따라 속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이루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대용품이나 우리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종교생활에서 돌이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목적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길 소원합니다.
·속건제의 뜻은 ‘배상’을 뜻하며 한자로는 속죄할 속에, 허물 건입니다. 속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물과 계명에 대해 부지중에 범죄하였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범죄(14-16절)
(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속건제를 드리는 이유 중 첫 번째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부지중에 범하였을 경우입니다. 비록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범죄하였을지라도 속죄가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성물이 무엇인지 레위기 27장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항목은 하나님께 봉헌된 모든 물건들, 동물, 집, 밭, 십일조 등이 모두 ‘성물’에 해당합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범죄는 하나님의 전에 들여 놓아야 할 물건을 훔쳤던 아간의 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지중에 여호와의 성물에 범죄한다면 그는 숫양을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야 합니다.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속건제는 신분의 귀천 및 경제적 여건에 상관 없이 오직 숫양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또한 보상에 대한 정확한 수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할 때는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성물을 침해하였다면 그것에 대한 배상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기에 제사장을 통하여 성소에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물에 대한 피해를 배상하고, 그 죄에 대해 속건제물 숫양을 바침으로 속죄가 이루어지고 그는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계명에 대한 범죄(17-19절)
속건제를 드리는 두 번째 이유는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였을 경우입니다.
(17-18)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앞서 성물을 범했을 때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여도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였다면 앞서 여호와의 성물을 범했을 때와 동일하게 속건제로 흠 없는 숫양을 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가 사함을 받게 됩니다. 다만 성물의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 드리는 요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앞서 성물을 훼손한 것은 명확히 배상할 물건이 있지만 계명에 대한 범죄는 하나님께만 속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4장에 이어 속죄제에 관한 규례입니다. 4장은 어제 살펴보았지만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4부류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제사장의 죄, 둘째가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 즉 공동체의 죄, 셋째는 족장의 죄, 넷째는 평민의 죄, 즉 일반 백성 개인의 죄입니다. 5장 앞부분인 속죄제에 관한 규례는 4장의 넷째 일반 백성 개인의 죄의 연속으로 좀 더 구체적인 죄의 세 가지 예에 관한 규례입니다. 세 가지 예의 첫 번째는 1절에 누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 보고도 그것을 고지(告知)하고 증언해야 할 의무를 불이행했을 때에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속죄제 규례입니다. 두 번째는 2절, 3절에 부정(不淨)한 것을 만졌거나 부지중에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에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규례이며, 세 번째는 4절에 함부로 맹세하는 죄를 범했을 때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규례입니다.
속죄제는 원어적 의미로 보면 과녁에서 벗어난 죄를 바로잡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누구를 저주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심한 욕을 했다거나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함으로 상대에게 마음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현장에서 듣고 보았다면 피해자를 위해 제3자의 입장에서 고발해야 하며, 피해자의 요청이 있다면 기꺼이 증언자로 나설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기에 반드시 하나님께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개인주의가 강한 시대입니다. 타인의 간섭을 받기 싫어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타인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불의를 당한 사람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니며 하나님께 죄가 됩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돕는 행위에는 용기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발적인 부정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에는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려야 함을 통해서 우리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루하루 부지불식간에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루의 마무리 기도시간이나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속죄제에 마지막 구체적인 예, 함부로 하는 맹세에 관한 속죄 규례를 통해서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혀를 제어하지 못하는 자는 죄에 빠지기 쉬우니 항상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승화하여 선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5장의 속죄제에 관한 규례 후반부 7절부터 13절은 속죄제물에 관한 규례입니다. 속죄제물은 4장에서 4부류에 대한 속죄제물로 수송아지, 숫염소, 그리고 암염소나 어린 암양을 드려야 했는데 일반 백성인 경우에는 백성의 경제적인 형편을 고려하여 저렴한 암염소나 어린 암양도 가능했습니다. 5장 7절부터는 어린 암양조차도 속죄제물로 드리기 어려운 형편의 사람은 비둘기라도 바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속건제와 마찬가지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 제사였습니다. 이는 번제, 소제, 화목제의 자발적인 제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3가지 제사는 제물을 드릴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제사하지 않아도 가능한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속죄함을 받아야 합니다. 속죄제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하는 제사로 드려야 하는 것인데 11절부터는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극빈자인 경우에 드릴 수 있는 제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 2리터 정도의 곡물의 가루를 속죄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곡물이라도 속죄제를 드리게 함은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 에는 속죄에 대한 예외 없음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곡물 자체로는 피의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극빈자들에게는 12절 하반절에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짐승의 피흘림이 있는 화제물 위에 곡물을 드려서 피의 제사를 이루는 속죄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5장 14절부터 6장 7절까지는 5대 제사의 마지막 속건제(trespass offering)에 관한 규례입니다. 속건제의 히브리어 ‘아솸’은 속죄제에서 말하는 죄(Sin)와 구분되는 범죄(guilt)나 범법(trespass)에 해당되는 죄에 대한 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에 해당합니다. 속죄제가 하나님께 대한 수직적 범죄를 속죄받기 위한 제사라며 속건제는 인간에 대한 수평적 범죄를 속죄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물론 인간에 대한 범죄일지라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구해야 하며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울러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범죄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주로 보상 또는 배상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속건제를 보상제(restitution offering)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속건제는 크게 3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5장 15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라고 되어있는데 성물은 하나님께 바쳤거나 또는 제사장의 직무를 위해 드린 물품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성소를 위하여 바친 물품일 수도 있고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제물 중 일부 음식이거나 십일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물을 제대로 드리지 못했을 때에는 그것이 죄가 되므로 하나님께 속죄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속건제물로는 흠 없는 숫양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고 제사장에게는 성물에 대한 잘못으로 인한 보상으로 그것에 1/5을 더 보태서 주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17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했을 때인데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성소나 구별된 사람에게 지은 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제물로는 숫양을 바쳐야 했습니다.
셋째는 6장 1절부터 7절로 앞에 두 경우와 달리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범한 죄일 경우 드려야 하는 속건제 규례입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4가지 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맡긴 물건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거나 물건을 습득하고도 거짓말하는 것입니다(2-3절). 죄가 드러나면 본래 물건의 1/5을 더 보태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5절). 그리고 하나님께 속건제물로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했습니다.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범한 죄일 경우에는 앞의 두 경우의 속건제와는 달리 하나님께 짐승의 피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범죄나 잘못을 바로잡고 보상이나 배상을 해 주어 용서받는 것이 더 우선적임을 말씀해 줍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범죄나 잘못이 있을 때는 당사자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여 화해하고, 또한 보상할 것이 있으면 보상한 후에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열정이 아무리 강해도 나의 잘못으로 기인한 인간관계 실패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사람에 대한 잘못으로 인해 드려야할 속건제가 있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상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나병환자가 치유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을지라도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불순종한다면 하나님께 받은 큰 은혜가 무색해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큰 은혜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한다면 그 큰 은혜를 받은 그 자체로 마음이 들떠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은 그 큰 은혜를 더 은혜롭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그냥 지나쳤던 사람에 대한 범죄나 잘못이 있다면 오늘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보상하는 용기 있는 속건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은혜롭게 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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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민족이나 나라에게 법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매우 성숙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개한 민족일수록 관습법이나 전통 외에 성문화된 법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정도와 자식을 낳고 사는 정도의 관심 외에는 크게 법이 필요치 않은 사회라는 것입니다.
400년간이나 애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노예가 되어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출애굽을 하여 십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 정도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애굽에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시면서까지 구해내신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영광스러운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수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욕망의 문제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실패와 절망과 눈물, 역경을 통과하게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온전하심을 인정하게 만드십니다.
히12:11-13절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성공과 출세와 힘과 권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참 신이며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에게 풍요와 다산과 성공과 윤택함을 주는 이방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단지 그 형상이나 제사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는 세상의 혜택과 복, 돈과 소유를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복과 돈에 있는가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참된 아버지는 자녀가 훌륭해지기를 원합니다. 자녀를 낳은 목적이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만 있다면 참된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면 돈 많이 물려주고 윤택한 조건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자녀를 망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주고 사신 우리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사해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애를 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과 우리를 거룩의 수준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인간의 전존재가 죄에 찌들어 있으며 술 독에 빠진 사람처럼 내가 죄이고 죄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용서받을 필요가 뭐가 있는 것이며 왜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내 쪽에서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 인간은 그 앞에 잠시 잠깐, 조금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죽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라도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아니 넘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그에 대해 죽음으로 갚으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그 성품에 변덕을 부리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으며 본성적으로 죄인된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이 바로 제사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시고 하나님이 먼저 살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이 먼저 샬롬의 길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되며 인생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신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의 핵심은 바로 제물입니다. 6절입니다.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9-10절입니다.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제물, 즉 동물의 생명을 드리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 제사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죄가 누군가의 희생,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섭고 처절하며 피비린내 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제사란 그 형식과 과정을 정성껏 드린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 정성을 받으시고 그 진심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동물의 피, 그 생명을 받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갈 때마다 자꾸만 우리의 정성과 진심과 열정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진심에 감복하시며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진심과 열정 때문에 용서하시고 열납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물의 피를 보시고 그 피의 대가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며 샬롬의 관계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진심이나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의 문제입니다.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고 지금도 용서받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로 인도되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는 심정으로 찾아오시며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라도 가치 없고 쓸모 없는 죄인된 우리를 살려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나를 살리시기 위해 거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못남과 좌절과 불평, 도망감, 무지, 게으름과 반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용서하시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살길을 내시는 은혜의 혜택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셔서 그 모든 절망을 뛰어넘어 오늘도 나를 살리시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다시금 힘을 내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