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기도하고 말씀만 보는 삶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짐을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이다(2).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계명이다. 범죄한 형제가 드러나면 그 죄를 직면하고 온유함으로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서로 짐을 지는 하나의 방식이다(1). 이것은 그때나 지금의 교회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자가 아닌 동일한 형제로서 바로잡아주는 것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워져 간다. 형제의 짐을 서로 진다고 할 때 그 짐은 혼자서는 질 수 없는 인생의 다양하고도 무거운 짐들을 의미한다(2). 서로 짐을 지는 일의 장애물은 교만과 비교다(3,4). 자기가 뭐가 된 줄로 착각하는 자는 진정으로 형제의 짐을 져줄 수 없다(3).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하는 사람도 형제의 짐을 져줄 수 없다(4). 서로 져주어야 하는 짐뿐 아니라 각자가 져야 하는 짐도 있다(5). 헬라어로 5절과 2절의 ‘짐’은 다른 단어가 쓰였다. 5절의 짐은 혼자 질 수 없는 짐이 아니라 배낭처럼 혼자 져야 하는 짐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도 남의 짐을 져줌으로써 사랑으로 종노릇함을 실천할 수 있다. 사도는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면서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잘 공궤할 것을 언급한다(6).
2. 사도는 영적 삶을 농사에 비유하는데, 영적 삶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일반 원리를 반영한다(7).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8).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여 짐을 져주는 삶이 바로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삶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삶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이고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둔다. 성도는 성령을 위하여 심을 때 지치지 말아야 한다(9).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을 알고 인내해야 한다. 인생은 거두기 보다는 심는 시간이다. 죽어서 우리는 거둘 것이다. 사도는 선을 행함에 있어서 그 우선순위를 믿는 자들에게 두라고 권면한다(10). 교회는 서로 사랑으로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서로 짐을 져주어야 하는 대상의 우선순위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의 순서다.
3. 사도가 서신을 마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받을 핍박을 피하고 쉬운 길을 가려는 동기에서 전해지는 거짓 복음이다(12). 그들이 전하는 할례의 복음은 육체를 자랑하게 하는 거짓 복음이지만(13),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복음이다(14).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는가이다(15). 이보다 중요한 기준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할례 같은 외적 조건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도는 참된 복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약속한다(16).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받은 박해와 핍박과 고난의 흔적(사도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한다)을 제시하면서, 무엇이 참 복음이냐 하는 논쟁을 종식하라는 요청과 함께 서신을 마친다(17).
4.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 짐을 지는 삶을 사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의 짐을 져주고 있는가? 당신이 아는 형제의 무거운 짐이 있는가? 그 짐을 져주라. 당신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가? 당신은 아직도 육체에 속한 무언가를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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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서 지는 짐과 홀로 지는 짐(1-5절)
갈라디아서 1:1-5까지가 도입부(인사)이고, 1:6-6:10까지가 본론부이며, 6:11-18이 종결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데, 율법주의의 큰 특징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지 않고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실패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다른 법을 말합니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 주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따르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실천사항이 서로 상대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 55:2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맡기다’의 문자적인 뜻은 ‘던지다’입니다.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던지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짐을 던지지 못하면 그 짐을 들고 있느라 주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흔들리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서도 우리가 주님께로 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져 주시어 우리를 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우리의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바울은 구약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또한 바울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실 때 직접 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지 못해서이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한 답변은 고린도후서 7:5-7이 대신해 줍니다.
(고전 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바울이 마게도냐에 있을 때는 디도를 보내어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디도가 온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보내어 주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펼치실 때,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가 서로 짐을 져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6:2의 말씀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튼튼한 어깨와 힘찬 골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어깨가 강건하고, 영적 골격이 튼튼해야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고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서 지는 것이 자신을 영적으로 튼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 짐을 지는 공동체와 사회는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제는 자기 짐은 자기가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과 5절을 합해서 정리하면, ‘자신이 져야 할 짐은 자신이 지면서, 다른 삶의 짐을 나누어서 질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만약 자기 짐만을 지고,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삶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바르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짐을 대신 져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짐을 스스로 지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고만 맡기려고 한다면, 그는 공동체를 깨는 사람입니다.
프로 축구팀이 뛰어난 클럽, 명문구단이 되려면 일차적으로는 그 팀에 속한 선수 각 개인이 잘해야 합니다. 자기가 서는 포지션의 짐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만약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 FC나 메시 선수가 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에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선수가 한 명만 있어도 그 팀은 자국 프로축구리그에서 꼴찌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2부 리그로 내려가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3부 리그나 4부 리그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저와 같은 선수가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닐수록 그날은 더 큰 패배를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저 같은 선수가 한 명 더 있다면, 그 팀은 프로팀 간판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축구팀이 뛰어나려면 개인이 잘해야 하지만, 한 사람만 아주 잘한다고 해서 명문구단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라 11명이 하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축구팀이 되려면,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짐을 함께 져 주는 것입니다. 자기 짐을 지고, 상대의 짐도 나누는 사람이 어제 살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문제를 가진 사람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죄를 범한 사람은 바로 잡아주라고 하십니다. ‘바로잡다(카타르티조)’는 ‘원상으로 회복시키다’의 뜻입니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 이 단어는 ‘탈골을 치료할 때’에 사용했었습니다. 어깨뼈가 빠졌을 때, 병원이나 접골원에 가면 원래 뼈가 있는 곳에 바로 끼워줍니다. 그것이 ‘바로잡다’입니다.
또 마가복음 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그들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그물을 깁다’와 ‘바로 잡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어릴 때 바닷가에 살아서 어부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해가 뜨기 전 어두울 때 배를 타고 나갑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돌아와서 그물을 손질합니다. 해초류가 있으면 제거하고, 찢어진 곳이 있으면 꼭 깁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상태로 해 놓아야 다음날 물고기를 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바로잡다’를 ‘restore(회복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로잡아 주는, 회복하게 해주는 일은 ‘신령한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그런 일은 특정한 사람만의 역할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서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올해 교회 표어로 하면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를 살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그런데 서로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기만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3-4)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양 속담에서는 ‘텅 빈 배가 가장 큰 소음을 낸다(Empty vessels make the most noise)’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가득 채워지지 않은 수레이고, 가득 채워지지 않은 배임에도 ‘가득 찬 수레’, ‘가득 찬 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득 차지 않았음에도 가득 찬 것처럼 행동할 때, 그것이 속이는 것이라는 것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더 과장하고, 더 포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아가면 그 인생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랑은 자기가 자기에게만 하는 것이지,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꾸준한 선행(6-10절)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가르치는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운데 두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 농부가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그 수확은 씨앗의 품종, 씨앗의 품질, 씨앗의 양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추수합니다. 또 사과 씨앗을 심으면 사과를 따고, 감 씨를 심으면 감을 걷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을 거두는 일이 없고, 팥을 심고서는 콩을 추수하려고 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사과 씨앗을 심고서 감을 기다리거나, 감 씨앗을 심고서 사과를 먹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심은 콩이나 팥이 건강한 것이면 잘 여문 콩과 팥을 거둘 것이고, 부실한 것을 심으면 실하지 못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또한 두 마지기의 땅에 심은 곡식은 두 마지기의 양만큼 거둘 것이고, 다섯 마지기의 땅에 심은 것은 다섯 마지기만큼을 거둘 것입니다. 과수원이 100평이면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거둘 것이고, 10,000평이면 100평의 100배로 거둘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 영적인 법칙도 동일합니다. 시험을 앞두고 10시간 공부했을 때와 100시간을 공부했을 때, 100시간 했을 때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를 심으면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상의 것을 심으면 세상의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입니다.
특히 7절의 ‘업신여기다’의 문자적인 뜻은 ‘코를 비틀다’입니다. 그래서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이 법칙인데,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하는 것이나, 심은 것과 다른 것을 거두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코를 비트는 것과 같습니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무엇을 심든지, 그 심는 것은 우리의 몫인데,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을 ‘선(善)’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거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인데, 거두는 것은 아주 분명한데, 무엇을 얼마나 거둘지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심는 역할도 내가 하려고 하고, 거두는 것도 내가 하려고 하면, 나는 ‘성과주의’나 ‘결과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역할을 도둑질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면, 거두게 된다고 하십니다. 즉 거두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가정들’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교회와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착한 일(선)’을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것은, 선을 행할 때 그들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은 만큼만 거두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심은 만큼만 거두게 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누리는 것을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롭고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육체를 위한 것만 심다가 우리의 삶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 성령을 위하여 심음으로 우리의 삶을 기도하는 집으로 가꾸어 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11-16절)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전하는 마지막 당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여러 어려움으로 인하여, 대필자에게 편지의 내용을 전하여 이를 대신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기록 방식과는 다르게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은 사도 바울이 대필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펜을 들어 기록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1-12)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여기서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참된 신앙이란 ‘율법’이라는 단어로 정리되는 ‘나 자신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12절에서 말하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것이 ‘율법’, 즉 ‘표면적인 행동’이라면, ‘복음’은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거짓 교사들이 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요했는지를 설명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한 본질적인 변화는 피하고, 표면적인 행위와 이익만을 따랐기에 십자가로부터 오는 책임과 자기부인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거짓 교사들은 복음을 따름으로 선언되는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할례라는 표면적인 의식에 기대어 자신의 신앙을 확인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모습과는 다르게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한 박해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7-32절에서 그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면서 복음으로 인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감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복음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포기해야 하는 세상의 이익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항속에서도 복음의 참된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세상의 이익 앞에서 담대히 자신의 신앙을 지켜냅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하늘에 속한 것들이 세상이 주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확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육체로부터 오는 것을 자랑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십자가 복음을 자랑합니다.
물질과 힘을 우상시하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유일한 능력이며,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복음의 담대한 선언을 세상의 사람들은 불쾌하게 여기거나 어리석을 것으로 치부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인간은 결국 인간 스스로를 구원하기에 한없이 나약하고, 악한 존재라는 점을 복음이 꼬집어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쪽이 어리석은 존재이겠습니까, 스스로의 능력을 의존하는 인간은 결국 허망한 결론에 도달할 뿐이며,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은 복음에 대한 세상의 비난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실제로 긴 시간 율법적인 경건을 추구해본 사람이라면, 외적 경건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 13절의 거짓 교사들도 율법을 강조하였지만, 정작 이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거짓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작 자신들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없고, 다른 영혼을 이끌기는커녕 자신의 인생도 감당할만한 버팀목이 없으니, 결국 거짓 복음으로 할례 의식을 강조하여 그 결과를 자랑삼아 자신의 사역의 열매로 위안 삼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율법은 이처럼 사람을 처량하고, 허망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복음으로부터 오는 충만함과 만족이 아니고서는 결국 이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와 다르게 사도 바울의 자랑은 거짓 교사들의 허망한 자랑과는 달랐습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기에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죄와 거짓된 속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박하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십계명을 단순히 율법적인 도구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를 속박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십계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며 복음 안에서 하나씩 내 삶에 적용해보면, 십계명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 인간이 나약하여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존하고, 우상시하는 존재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붙잡아 종과 같이 묶어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한 분만을 붙잡고, 신뢰함으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담대하고, 자유롭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도, 세상의 모든 죄악과 거짓을 피하라는 계명도 사실은 인간의 악하고 거짓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힘으로는 인간 본연의 죄악 된 본성을 끊어내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참된 자유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가 그 인생에서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5-1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을 기록하는 사도 바울은 참된 복음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유의 사람이었고, 이 복음의 자유를 자신의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할례인가, 무할례인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받은 존재가 되었는가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규례는 지금까지 설명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맹금류와 같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본질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구원의 규례를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참새와 제비같이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여 주의 말씀의 제단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긍휼이 그 인생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복음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내가 진정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내 삶의 참된 능력으로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내 삶의 참된 원동력이며, 무엇을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끝인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거룩한 흔적과 그 은혜가 영원히 함께한다는 점을 선언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끝인사 (17-18절)
(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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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마지막 장인 6장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실제적인 적용으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져야할 실천적인 지침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날 때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정죄합니다. 하지만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주고 그리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성도가 악으로부터 서로 보호하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이끌어 주는 것을 짐을 서로 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2절) 이 짐은 가혹해서 감당하기 힘든 짐을 말합니다. 이 짐을 서로 지는 것은 조금, 잠깐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누어지라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것이라고 말합니다. 2절과 5절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원어에서는 2절의 짐은 가혹하여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인생의 좌절을 의미하지만 5절의 짐은 한사람의 짐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짐을 서로 나누어 져야 하지만 마땅히 내가 져야할 짐을 이웃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보편적 원리를 따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육체의 열매를 거두지만 영적인 씨앗을 심으면 영적인 열매를 거두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실제적인 행동지침들을 가르쳐주면서 이제 그 모든 것의 중심원리를 강조하며 가르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 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말하는 것을 받아쓰던 동역자의 손에서 펜을 받아들고 마지막 부분만큼은 자신의 친필로 간절함을 담아서 큰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자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거짓교사들은 신앙의 목적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영광과 특권을 누리고,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할례 받은 것을 구원의 방법으로 착각하여 십자가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실천의 결과인 할례를 행한 육체로 자랑거리를 삼고 있습니다.
그들과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자랑거리였습니다. 바울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 즉 십자가만을 자랑하여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흔적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 흔적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받은 고문, 매질, 투옥 등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일 것입니다. 육체의 요구를 따라 세상과 타협하는, 아니 세상을 사랑하는 거짓교사들에게는 이런 흔적이 없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십자가의 참된 증인의 표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권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이겠습니까? 입술의 흔적이 아닙니다. 재물과 권세의 흔적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 즉 내 삶에 남이 있는 거룩의 흔적, 사랑의 흔적, 섬김의 흔적, 코이노이아의 흔적 그것이 아니면 무엇으로 우리가 주님께 보일 것이 있겠습니까? 빌립의 네 딸처럼 성경말씀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어도 자기 안일과 이기심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삶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님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으로 알아보고 옆구리에 창 자국으로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여 서로 짐을 지고, 말씀대로 살되 낙심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왔던 흔적으로 성도를 알아보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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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화두는 이미 잘 아시는 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자유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와 박해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집요하게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모함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결사대를 조직하여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하~27)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수많은 고난 중에서도 자신의 동족 즉 유대인들에게 받은 고난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자신을 그토록 고달프게 했던 유대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할례를 부정하는 바울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조차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유대인들과, 그리고 거짓 선생들과 피를 흘리기까지 싸웠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화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것이지만 바울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를 갈라디아서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5:11~12)
사도 바울은 박해를 받아 자신이 부서질지언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복음과 그 복음이 주는 자유를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그 어떤 세력이나 가르침에도 넘어가지 말고 단호하게 맞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바울은 여느 서신과는 달리 매우 강경하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또 누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격정에 못 이겨 아무렇게나 쏟아내듯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냉철한 지성과 논리로 율법과 할례의 무의미함을 치밀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진리를 떠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따끔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를,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목회자의 심정으로 겸손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결론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2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단어에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2절에서 ‘법’으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 ‘노모스’는 ‘율법’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곧 ‘모세의 법’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유가 있다고 해서 법이 없는 무법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15절의 표현처럼 ‘새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법을 지키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의로워지기 위한 수단, 자신의 냄새나는 내면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 곧 모세의 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회반죽을 잘 바른 무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의로워지기 위해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참된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놀라운 영적 차원에 이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술해두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7~8절)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온갖 죄악과 탐욕으로 썩은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들은 율법을 수단 삼아 자신들의 내면을 교묘하게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포장에 속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속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육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다시 말해 썩을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지고 새로워진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모세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도,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해왔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용해왔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영적 권위를 상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이유와 의미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오용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우님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다. 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걸어온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곧 주님의 생명을 주고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생명의 크기를 알았기에 바울은 일평생 주님의 십자가 뒤를 겸손히 뒤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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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기도하고 말씀만 보는 삶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짐을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이다(2).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계명이다. 범죄한 형제가 드러나면 그 죄를 직면하고 온유함으로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서로 짐을 지는 하나의 방식이다(1). 이것은 그때나 지금의 교회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자가 아닌 동일한 형제로서 바로잡아주는 것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교회는 이렇게 세워져 간다. 형제의 짐을 서로 진다고 할 때 그 짐은 혼자서는 질 수 없는 인생의 다양하고도 무거운 짐들을 의미한다(2). 서로 짐을 지는 일의 장애물은 교만과 비교다(3,4). 자기가 뭐가 된 줄로 착각하는 자는 진정으로 형제의 짐을 져줄 수 없다(3). 남과 비교함으로써 자기를 확인하는 사람도 형제의 짐을 져줄 수 없다(4). 서로 져주어야 하는 짐뿐 아니라 각자가 져야 하는 짐도 있다(5). 헬라어로 5절과 2절의 ‘짐’은 다른 단어가 쓰였다. 5절의 짐은 혼자 질 수 없는 짐이 아니라 배낭처럼 혼자 져야 하는 짐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도 남의 짐을 져줌으로써 사랑으로 종노릇함을 실천할 수 있다. 사도는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면서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잘 공궤할 것을 언급한다(6).
2. 사도는 영적 삶을 농사에 비유하는데, 영적 삶도 심은대로 거둔다는 일반 원리를 반영한다(7).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8).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여 짐을 져주는 삶이 바로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삶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삶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이고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둔다. 성도는 성령을 위하여 심을 때 지치지 말아야 한다(9).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을 알고 인내해야 한다. 인생은 거두기 보다는 심는 시간이다. 죽어서 우리는 거둘 것이다. 사도는 선을 행함에 있어서 그 우선순위를 믿는 자들에게 두라고 권면한다(10). 교회는 서로 사랑으로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서로 짐을 져주어야 하는 대상의 우선순위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의 순서다.
3. 사도가 서신을 마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받을 핍박을 피하고 쉬운 길을 가려는 동기에서 전해지는 거짓 복음이다(12). 그들이 전하는 할례의 복음은 육체를 자랑하게 하는 거짓 복음이지만(13),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복음이다(14).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는가이다(15). 이보다 중요한 기준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할례 같은 외적 조건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도는 참된 복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약속한다(16).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받은 박해와 핍박과 고난의 흔적(사도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한다)을 제시하면서, 무엇이 참 복음이냐 하는 논쟁을 종식하라는 요청과 함께 서신을 마친다(17).
4.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 짐을 지는 삶을 사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의 짐을 져주고 있는가? 당신이 아는 형제의 무거운 짐이 있는가? 그 짐을 져주라. 당신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는가? 당신은 아직도 육체에 속한 무언가를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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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6:1)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을 하는데 교회의 화평과 자신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하여 명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어떤 형제가 범죄한 일이 있어서 그 형제에게 권고하려면 먼저 자신이 신령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거울삼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경종한다.
1. 범죄에 대한 권고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한 울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성경에서는 형제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들 중 혹 육신의 욕심에 이끌리어 범죄한 자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는 집고 넘어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방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했다.
① ‘신령한 너희’라고 말하고 있는 대상은 누군가? 범죄한 자를 권고하거나 바로잡는 일에는 신앙적인 덕을 갖추었으며 적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사람,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한 지체로써 정말로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권고가 아니면 범죄한 형제에게 결코 감화를 줄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실을 바로잡게 할 수 없을 것이다.
②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다. 온유한 심령이란 곧 온유한 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겸손을 뜻한다. 권고를 교만한 마음에서 한다면 상대방에게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될 것이며 그 반감은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상대방을 책망하려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권고는 결실이 있어야 권고 한 보람이 있게 된다. 교만한 자세로 책망하려 든다면 효과를 가져 오지 못할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사랑에서 나온다. 허물을 덮어 주려는 마음과 이미 용서한 마음으로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을 가지고 권고해야 한다.
③ 그런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다. 바로 잡으란 말은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뜻이다. 어떻게 하든 범죄한 자로 하여금 그 죄악의 길에서 떠나 바른 길을 걷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죄인을 바로 잡는 일에는 자기의 힘으로는 안 된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이 마음의 변화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으므로 권고하는 자는 성령께 간구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
2. 너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1절 하반 절 말씀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너 자신을 돌아 보라”고 한 말씀은 다른 사람의 범죄 사실을 보았을 때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라는 의미다. 자신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도 범죄한 형제와 같은 육체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후 13 : 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 자기도 범죄한 형제와 똑같이 그런 죄를 범할 수 있는 육체의 소유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도 그 사람의 처지에 있었다면 그 같은 죄를 범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갈 때는 그런 시험에 빠져 들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시험에 드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새삼 깨달아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는 생활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결론 : 우리는 언제나 나도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이며 또 영적 생활에 게을리 하여 육신의 욕심을 따라가면 그 사람보다 더 두려운 시험에 빠진다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이 경우를 거울로 삼아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
(갈라디아서6:2-5)
바울은 1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으며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 짐을 서로 지는 일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임을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들이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로 인한 책임을 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죄에는 책임이 따른다. 죄에는 그로 인한 열매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와 닿는다. 하나는 죄로 인한 말할 수 없는 번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로 인한 근심이 그 사람의 생애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 준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고통으로 인하여 회개하기에 이르게 되고 새로운 순종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징계로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형제의 짐을 함께 지라고 한 것이다.
번죄한 형제들에 대한 권고는 바로 그로 인해 고민하고 고난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그와 함께 그 고난의 짐을 함께 지는 심정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누가 시험을 당하여 괴로워할 때 우리는 그 괴로움을 함께 지는 마음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그 괴로움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일에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느 형제가 범죄함으로 옥에 갇혔다고 할 때 옥에 갇혀 있는 그 사람의 괴로움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마 25 : 35절 이하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는 말씀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내 주변에 있는 형제들 중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짐을 져 주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법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온전한 율법으로 사랑의 법을 의미한다.
2.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교회에는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는 사랑을 원치 않고 받는 사랑을 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지 사랑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돕는 일, 짐을 함께 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을 막으려 한다. 그들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면서 멸시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려 한다고 책망하셨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의인인 채 자기를 보이려 하지만 그 같은 일은 스스로 속이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했다. 자기를 올바로 바라보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좀더 깊이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확히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자랑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기가 기도생활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자랑이 자기에게는 자랑할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과장하고 의도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일은 스스로 속이는 일이요 교만에서 나온 외식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각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기가 한 행위에서 온 모든 결과에 대한 짐을 져야 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져야 할 모든 짐을 스스로 져야 하며 다른 형제의 짐에 대해서는 그와 함께 져 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자세
(갈라디아서6:6)
바울은 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와의 상호 관계를 말씀해 준다. 여기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한계와 대상이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각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역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이해하게 된다. 즉 교회의 일반적인 성도들과 그들을 복음으로 약육하는 복음의 사역자로 목회자를 뜻한다.
1. 가르치는 자의 위치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들로 한 형제들이지만 직분상 분명한 구분이 그어져 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영적 우위에 있다. 가르침을 받는 양 무리들을 양육할 책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처럼 양 무리들을 가르치는 자의 명칭에 대하여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롬 1 :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고 했다. 갈 1 : 10절에서도 “내가 지금까지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과 구분한 특별한 사명자로서의 자기를 나타낸 말이다.
② 양의 목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임을 의미한다.
③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른다. 딛 1 : 7절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말씀해 준다. 여기서 청지기란 선한 청지기를 말하며 이 청지기는 주의 집의 모든 일을 충성 되이 보살펴야 한다.
④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다. 골 1 : 23절 하반 절에서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이 같은 사역자들을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셨다. 이들은 교회에서 일반 성도들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다. 이 짐은 죄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짐이지만 지기에 힘겨운 짐이다. 이 짐을 지는 주의 사역자들은 이 짐을 잘 지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또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짐을 함께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면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2.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처럼 자신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이 진 짐을 함께 지는 심정으로 그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이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다.
①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복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일꾼이 그 삯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하셨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성도는 목자에 대한 물질적 생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② 다음에 성도는 주님의 일꾼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히 13 :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성도들이 목회자들로 즐거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게 하려면 믿음으로 살고 진리 가운데 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목자에게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살피는 생활을 해야 한다. 자기 가정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목회자와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배려를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목자에게 순종하여 그 목회 방침에 잘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양과 목자는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그 교회는 화목하고 사랑이 있고 신앙적으로 성장한다. 서로간 맡은 본분을 잘 지키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6:7-8)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연계에 나타나는 법칙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도 적용시키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법칙대로 보응과 상급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홀히 여기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바울은 7절에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또는 ‘무시당한다’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로 사람들이 그럴듯한 변명이나 외식으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거짓된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인가?
①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를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자들을 의미한다. 주일을 지키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내 사정을 아시고 이해하실 꺼야’라는 식으로 책임을 하나님께 넘기고 지난날의 악한 생활에서 발을 뺴지 못하면서 그런 자신의 연약함을 다른 탓으로 돌려보내는 자들의 경우다.
②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우는 하나님도 눈감아 주실 꺼야’하는 식으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연결시켜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키려 한다. 이 같은 일을 몇 번인가 되풀이하면 아주 습성이 되어 버리게 된다.
③ 어떤 경우에는 ‘나 같은 경우라면 하나님이신 들 어쩔 수 없으실 꺼야’라는 식으로 자신이 범한 범죄 사실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그러면 이들은 왜 이 같은 변명, 자기 변호, 자기 방어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죄악의 길에서 떠나기가 싫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요, 돌같이 굳은 자이다. 이들은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공의와 진리를 기뻐하시고 언제나 거룩한 표준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을 거짓되고 패역한 자기의 수준의 분으로 끌어내려 그런 분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2.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중, 그들의 모든 행실을 무엇으로 비유하시는가 하면 마치 씨앗을 심는 것으로 하셨다. 땅에 심는 씨앗은 결과적으로 아무라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심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일까? 바울은 8절에서 간략하게 둘로 나누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해 준다.
그러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란 누구를 말하나? 하나님이 없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육신의 소욕과 정욕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칭찬을 듣고 영광을 얻을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 하셨다. 썩어진 것이란 자기 인생의 영원한 파멸을 의미한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인간들은 모두 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들이 심는 씨앗에 대하여 바울은 갈 5 : 19절 이하에서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결실은 놀랍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다. 성령을 위해 심는 일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 또한 갈 5 : 22절 이하에서 성령의 아흡가지 열매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열매는 성령이 맺어 주신다. 우리가 평소에 성령을 힘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하면 그것이 이런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으로 거두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으로부터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심판의 날에 그가 만홀히 여기심을 받으신 대로 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자,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심는 생애를 살아가자.
선을 행하는 자의 약속
(갈라디아서6:9-10)
바울은 9절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이르고 있다. 왜 낙심치 말라고 한 것일까? 선은 거두는 일이 늦어질 때가 있다. 선행의 결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인데 이 축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을 때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 앞에 올라가 하늘의 상급으로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반드시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선행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1.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육체를 위하여 심믄 일은 선행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일은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따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은 그 일이 아무리 엄청난 것처럼 보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들이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선행이라고 볼 수 없다. 선을 행하는 일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맺는 열매가 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 15 : 8절에서는 이 선행이 과실로 나타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형제의 짐을 서로 져 주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이루고 있는 한 지체인 형제가 시험이나 범죄나 환난 중에 어떤 번민과 고통을 당할 때 그가 당하는 고통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일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이다.
은밀한 중에 모든 이에게 주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하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같은 선을 행하는 생활을 하는 중에 혹 낙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왜 낙심하게 되는가?
세상에는 자기가 베푼 선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애써 베푼 선이 쓸데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낙심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는 다른 이를 성심껏 도와주는데 자기에게는 좋지 않은 일만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낙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사람인지라 이런 일을 만날 때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무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잠길 때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계획하고 계시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피곤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선행은 피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행을 피곤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행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새힘을 얻는다. 그것을 억지로 하거나 힘들게 하게 되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선행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에는 냉수 한 그릇에도 상급이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잠 3 : 33절에서 이르시기를 “악인의 집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때가 있다. 봄철에 심고 가을철에 거둠같이 선행은 심는 것이다. 그리고 참고 기다리면 결실의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에게 어떤 때에 선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했다. 선행은 베풀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상실하면 선행은 가치가 없게 된다. 자기에게 선행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다음에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했다. 모든 이에게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선행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이 기회가 모두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기회 인줄로 알고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피곤하여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해야 한다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갈라디아서6:11-14)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에 따른 할례를 받게 하는 자들은 할례를 받게 한 일에 대해 자랑하는 자들임으로 그 같은 자랑은 허탄한 자랑임을 밝히고 자기에게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없다고 말하고 있다.
1. 할례를 받게 하려는 자들의 자랑
바울은 원래가 눈이 좋지 않아 여러 교회로 글을 보낼 때 입으로 말하는 것을 대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바울이 친히 쓴 것을 밝힘으로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력이 나쁜 관계로 큰 글씨로 써서 보낸다고 말해 준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실상인즉 복음의 일꾼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인데 그들이 할례를 주는 일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12절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할례를 선민의 표로 받게 한다. 이것은 지극히 외식적인 행사로 육체의 모양으로 자신을 선민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행위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다. 그곳에는 육체의 모양이 필요 없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도 율법을 따라 육체의 모양을 갖추려고 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고 했다. 복음이 유대인 사회에서 핍박을 받는 이유는 십자가 때문이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믿음으로 온전한 의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율법이나 할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할례를 행하는 일에 젖어 왔기 때문에 복음이 그들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과 할례를 행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이들 무리 가운데 속하는 자들로 순수한 복음을 율법적인 복음, 곧 다른 복음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그 육체에 할례를 준 그 사실을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2. 자랑할 것은 십자가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라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자랑할 것이 아니며 할례를 받는 일이 자랑할 일이 아니라 정말로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것이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처럼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인가?
① 그리스도인의 죄는 십자가에서 소멸되었다. 우리의 무거운 죄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벗겨졌다.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②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살아나신 그 생명이 믿음으로 내 생명이 되어 나는 그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③ 그리고 십자가에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오예물 처럼 여긴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며 십자가에서 풀리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로 인하여 두 가지 사실이 적용되는데 하나는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박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역시 세상에 대하여 못박힌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은 것이요 나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 박혔으니 이제 나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세상과 더불어 짝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니 새로운 소망으로 살아가야 한다.
(48)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갈라디아서6:15-18)
바울은 본 절에서 갈라디아서 전체의 결론적인 말로 매듭 짓는다.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이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 할례나 무 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무 할례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아직까지 할례의 무용론을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 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만을 밝힌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귀한 일이다. 기독교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경영하는 새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재하시어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핵심은 의식이나 제도, 할례나 무 할례나 학식 등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들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일임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 또는 거듭나는 일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물은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회개를 뜻하고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울은 16절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지어다”고 축복하였다. 이 규례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밝힌 모든 구원의 도리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이며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영적인 생활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같은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란 뜻이다. 언약의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에서는 장남이요 이삭의 아들로 태어나 유업을 이을 자로 보였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고 오히려 야곱에게 언약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유업의 후사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체적인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나를 괴롭게 말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나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 왔다. 그러나 바울은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힌 일은 그들의 교훈을 따르므로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로부터 더 큰 괴로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서신을 보내면서 한가닥 큰 기대를 걸면서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고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예수의 흔적은 무엇인가? 어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바울의 몸에 생긴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핍박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능욕, 매맞음, 배곺음 등이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 5 : 11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가졌다고 하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흔적이 많을수록 하늘의 상급이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축도를 보내 주고 있다. 이 바울의 축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 기도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성도들에게 예배 마지막에 보내는 축도는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