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새벽에 눈만 멀뚱하게 뜨고 있는데 거실에서 자다가 일어난 아내가 신문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신문에는 천안함 침몰로 인한 장병들의 기사가 대부분이었고 실종된 8명은 함정이 동강날 때 산화되었을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또한 침몰 원인으로 북한의 어뢰 공격을 예측하고 있어 우리 함정이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 후 마인드맵 강의를 들으러 가는 아내를 태우고 경기빌딩에 갔다가 정릉으로 이동하여 오늘도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다. 보국문 정상에 다다를 무렵 쌀이 도착했다는 운송기사의 전화가 왔는데 20킬로의 무게를 12개나 차에서부터 19층까지 옮긴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청주와 여동생한테 보낸 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고향에서 소작농 대가로 온 것인데 힘든 일을 시킨 것 같아 미안함이 생겼다. 포근한 날씨에 능선을 타고 칼바위 정상으로 이동하니 물감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봄날의 자연이 펼쳐져 있다. 심호흡을 하며 맑은 공기를 마셨더니 기분과 몸까지 가벼워져 날아갈 듯 했고 나무들도 바야흐로 움이 트려고 생기가 돌았다. 30분을 머무르다 산길을 걸어 입구로 내려와 따뜻한 순두부로 점심을 사 먹고 학원으로 들어가 오후를 보내며 수업을 준비했다. 얼마 전 맛이 있다는 누룽지를 고향에서 구입했었는데 간식으로 물을 부어 먹었더니 신토불이 음식으로 구수함이 일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를 보는 사이 오늘은 아내가 먼저 안방에서 잠이 들었다.
17일 아침이 더 피곤하여 식사를 대충하고 안방에 들어가 다시 누웠는데 오후 늦게까지 수업이 있어 잠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2시간을 자고 일어나 점심 전에 안산을 올랐더니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하였고 매화나 벚꽃도 자태를 뽐내며 4월의 화려함을 수 놓고 있다. 산악회 운동장에서 기구운동을 하고 중턱을 돌아 12시40분에 집으로 내려왔더니 주말이라고 아들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있다. 점심을 하려고 함께 식탁에 앉았지만 각자 다른 음식에 얼굴마저 외면하는 아들이라 나로서는 혼자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후에 성산대교 건너편 염창동에 갔다가 일전에 차용액 이자로 받은 금붙이를 처분하려니 70만원이라는 원가의 절반에 불과하여 채무인에게 전화를 하여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사려는 사람은 최저가로 부를 것이고 어느 경우나 매수가격과 매도가격이 현격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내가 성급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논술교실에 올라가 이대부고 인창고 중심으로 중간고사 부분 고전소설을 해설했다. 오늘도 아들은 수학시간 간다고 결석을 했는데 같은 학원을 다니는 수강생은 국어를 마치고 가도 수학수업에 문제가 없다며 유유히 교실을 나선다. 밤 10시경 집으로 내려가 이웃 아주머니가 보내온 젓갈 냄새가 먼저인 전라도 여수 김치를 먹었고 늦은 시간에는 경상도 결혼식장에 내려갔던 영식이가 서울에 이제 도착했다며 전화가 왔다.
18일 새벽에 일어나 강의할 교재를 정리하는데 분량이 많고 또한 감기로 목까지 잠겨 교회에 가는 것을 다음 주로 미루었다.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완벽한 연구를 통한 자신감과 여유인데 항상 잊지 않는 나만의 신념이다. 안방에서 책을 보는 중에 딸이 배가 아파서 통증을 호소한다고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이른 아침에 세란병원 응급실로 서둘러 갔지만 돌잔치 무렵에 안과에 간 것을 제외하고 딸로 인하여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응급실에서 1시간 넘게 수액을 투여하는 동안 집으로 왔다가 식사를 하고 다시 갔더니 특별한 증세가 아니라며 안정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어제 음식을 과하게 먹고 차가운 거실에서 잤기 때문에 토사곽란의 증세가 생긴 것으로 아무튼 모두가 허둥댄 일요일 아침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놀란 딸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 평소 아빠라고 해도 대화가 없던 터라 오늘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정도다. 9시에 논술교실로 가서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오늘도 아들은 나오지 않았고 수강생으로부터 국어시험 준비를 끝냈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날마다 결석만 하여 정작 배운 것이 없는데 시험 준비를 다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점심은 컵라면으로 하고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연속으로 수업을 했더니 마칠 때는 힘이 들어 목까지 아플 지경이었다. 집으로 내려왔다가 해가 기울 무렵 안산에 올라 적적한 산길을 걸었고 저녁에는 마트에 들러 문어와 초밥을 사 가지고 들어왔다.
19일 잠을 잘 자고 일어났더니 목소리도 트이고 몸도 가뿐하여 좋았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9시가 되어 식탁에 앉았는데 일찍부터 분주하게 보냈던 아내는 그 사이 잠이 들어있다. 식사를 마친 후 10시에 달리기를 하려고 홍제천으로 나가서 왕복 7킬로를 40분 동안 달렸더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늦게 출발하여 짧은 거리를 달렸지만 내일이라도 긴 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다시 준비를 할 것이다. 돌아오면서 체육관으로 들어가 기구운동을 더 하고 12시30분에 집으로 와서 생선탕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비가 떨어지는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면서 작년을 돌아보니 오늘은 동창들이 모인다고 촌각을 다투는 어머니를 두고 고향에 내려간 날이다.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피가 마르게 고속도로를 달려온 긴박한 시간이었지만 벌써 그 시간도 360여일이 지났다. 요양원에 갈 때마다 늦게 왔다고 울면서 나를 타박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새삼 그리운 4월의 중순이다.
20일 잘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서니 식탁에는 둥근 빵에 촛불과 따끈한 미역국까지 딸의 생일을 준비했다. 일찍 학교에 간 아들을 제외하고 아내와 함께 생일을 축하했고 방에서 사용하는 큰 거울을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나서면서 뉴스를 들어보니 오늘은 기온이 20도가 넘어 완연한 봄이라고 하고 눈길을 돌려 바라본 안산은 마치 신선이 사는 그림 속 세상과 흡사했다. 작년 이쯤에는 꽃이 져서 산이 온통 푸른색이었는데 올해는 봄이 늦게 찾아와 목련도 이제야 절정을 넘어서고 있는 정도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오면서 딸의 선물로 거울을 주문하여 왔더니 예쁘고 아담하여 밖에서 들어온 아내도 만족해 한다. 아침을 늦게 먹어서 점심은 학원에서 하려고 생일음식을 준비하여 나갔고 오후가 되어 누룽지탕과 함께 먹었더니 만족스러움이 보통 그 이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교재를 연구하는 중에 영식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다음 달 4일 자신의 고향에서 나오는 영덕 대게를 먹자고 한다. 1박스 정도를 우리 집으로 보낼 것이니 가족들까지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여 불편함보다는 고마움이 앞섰다. 저녁에 굿모닝 마트에 들어가 주꾸미전골과 청포도 등을 구입했고 집으로 돌아와 생일을 맞이한 딸과 함께 먹었다.
21일 거실에서는 아내와 딸이 자고 있고 하늘은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 날씨로 잔뜩 흐린 4월의 하순이다. 무국으로 식사를 한 아들과 딸을 일찍 학교에 보내고 돌아서 생각하니 부모로서 무엇인가 더 해줄 수 없음이 미안하기만 했다. 잠자는 공간과 먹는 것만 제공해 주었을 뿐 아버지라고 내가 하는 역할은 극히 미미하고 오히려 시간이 자녀들의 성장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10시에 차를 몰고 정릉으로 가서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는데 평일이라 사람도 없지만 흐린 날씨에 꽃까지 떨어져 지난 주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50분을 올라와 보국문에 도달했는데 그 사이 4200보를 걸었고 바로 돌아서 내려온 것까지 계산하면 북한산은 왕복으로 8400보 거리에 능선이 위치해 있다. 물론 가파른 산길이라는 점에서 평지를 걷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칼로리 소모량이 생기고 운동량 또한 몇 배가 될 것이다. 학원으로 돌아와 누룽지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수업을 마친 저녁에는 신설동에 나가서 거의 2달 만에 친구 정식이를 만났다. 일이 힘들어 퇴근을 하면 거의 매일 술을 한다면서도 오늘은 나를 만나 더욱 특별한 날이라고 잔을 든 채 껄껄 웃는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들을 나열하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22일 어제 12시경 집에 들어와 빵을 먹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아프다. 속이 더부룩한 것은 빵을 먹은 탓이고 머리가 아픈 것은 술 때문인데 분명히 빵이나 술은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눈이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둡고 기온까지 내려가 계절이 거꾸로 가는 것 같은데 아내는 일찍부터 산행을 한다며 집을 나선다. 식사를 조금 마친 나도 곧바로 체육관으로 나갔지만 술기운으로 어슬렁거리기만 하고 이내 지하에 있는 사우나로 내려갔다. 한적한 휴게실에 누워 있다가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리기까지 3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잠시 후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치른 아들이 왔는데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시험과 관련해서도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 오전에 운동을 제대로 못하여 오후에는 습관처럼 안산에 올라 산행을 시작했는데 아직도 벚꽃과 함께 봄기운이 있었고 6시에 내려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저녁식사를 하고 논술교실에 올라가 내일 이대부고 국어시험 준비를 하는 중에 평소에 결석을 많이한 아들이 왔다. 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이었지만 땀을 흘리고 노력한 만큼 거두는 것이 원칙이고 그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밤 12시에 아파트 앞까지 내려와 시험공부를 더 한다는 아들을 길 건너 독서실에 보내고 먼저 집으로 들어왔다.
23일 어제 늦게까지 수업을 했는데 그나마 모처럼 나온 아들이 열심히 해서 보람이 있었고 힘도 들지 않았다. 몇 시간을 자고 불쑥 거실로 나와 작년 임종실에서의 시간과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둑한 새벽을 보냈다. 임종실로 옮긴 날이 오늘인데 체온과 맥박을 재며 긴장으로 보낸 장면들이 선하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올해도 벌써 4월의 하순을 맞이했고 화려했던 봄은 날이 밝으며 온통 푸른빛으로 변하여 있다. 식사를 마친 오전에 마인드맵 강의를 들으러 가는 아내를 태우고 경기빌딩으로 가는 중에 차가 펑크가 나서 트렁크에 있는 바퀴로 교체하였다. 보험에 신청하면 되는 것을 카센터에 전화했더니 수고비와 출장비라고 2만원을 요구했고 금전이나 시간이나 이래저래 손실이 생겼다. 체육관으로 갔다가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국어시험을 마친 아들은 오늘도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소리없이 점심만 먹고 있다. 오후에 시골에서 올라온 쌀을 가지고 아내와 퇴계원에 가서 장모님을 뵈었고 처제가 만든 닭갈비까지 맛있게 먹었다. 3시에 집으로 왔다가 지하철을 이용하여 학원으로 나가서 수업을 하고 비가 쏟아지는 저녁에는 동료선생과 감자탕으로 식사를 했다. 양력으로는 365일이 지난 오늘이 어머니 1주기 기일이라 집으로 돌아와 추모의 마음으로 밤을 보냈지만 잠은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24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의 아침을 맞이했는데 하지만 며칠 전 화려한 꽃동네와 다르게 안산의 오늘은 온통 연녹색 푸름뿐이다. 어머니께서 떠나신 지 1년이 되는 아침인데 휴일 토요일이라고 아들과 딸 아내는 내 심정과는 별개로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다. 천당과 극락의 공간에서 어머니는 잘 계실까 또한 윤회하는 삶이 되어 다음 세상에서 아들인 나와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월요일부터 중간고사 시험이라는 딸이 거실로 나왔고 식사를 하려고 함께 식탁에 앉았다. 월요일 딸의 중간고사 과목이 한문과 음악이라기에 가르쳐 주겠다고 선뜻 나섰더니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고 소리내어 웃기만 있다. 평소에 노력하는 생활을 중학생 딸이 알 리도 없지만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는 나인지라 신뢰가 생기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오전 10시에 TV에서는 한 달 전 침몰한 천안함 일부가 인양되고 있고 실종된 병사 1명의 시신까지 발견했다는 자막도 나온다. 12시에 고향에서 이웃했던 6촌 형의 맏딸 결혼식에 가려고 집을 나섰고 장위동 귀족예식장에 도착해서는 큰어머니(6촌 형의 어머니)를 오랜만에 뵈었다. 고향에서 이웃하면서 특별히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요양원에 입원하셨다가 오늘 가까스로 손녀딸 결혼식에 오셨다. 어머니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 슬픔이 컸던지 예식장에 들어선 나를 붙들고 소리 내어 통곡하는 바람에 나조차 슬픔이 더한 순간이었다. 예식이 시작된 뒤 참석한 고향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학원으로 돌아와 수업을 시작하는데 기온이 높아 여름처럼 더웠다. 저녁에는 논술교실로 이동하여 인창고 대신고 중간고사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긴 하루 4월24일을 보냈다.
25일 몸도 피곤하지만 학생들 중간고사 직전이라 교회에 가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딸부터 태우고 일찍 정독도서관에 다녀왔다. 오늘도 화창하여 들이나 산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고 상대적으로 실내에서 보내는 사람들은 억울할 것 같은 날씨다. 하지만 하루 종일 수업을 하는 나로서는 강의하는 것을 생명이자 보람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정도에 동요가 생기지는 않는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하러 집으로 갔더니 아내도 중학교 학생들 보충을 한다고 열심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날씨에 관심도 없어 보인다. 오후에 다시 논술교실로 가서 열심히 수업을 하고 해가 남아 있는 5시경 지체 없이 안산으로 올랐다. 휴일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걷고 뛰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고 마지막 봄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 벚꽃 터널을 통과하야 7시에 내려왔다. 이번 이대부고 중간고사 국어는 까다로운 편이라고 해도 내가 가르친 두 명의 95점에 비하여 85점의 아들의 성적은 저조하다. 무엇을 하든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원칙이니 아쉬워도 수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아들의 3월,4월 학습과정이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수업을 마친 아내가 내려왔고 9시가 지나서는 딸을 태우러 정독독서실로 나갔는데 광화문의 밤은 여전히 화려하기만 했다.
26일 비가 오려는지 날이 흐리고 유난히 무거운 컨디션으로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아들과 딸이 동시에 중간고사 시험을 보는 날이라 격려를 하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아들이 먼저 나가서 딸하고만 함께 식사를 했다. 지난 주 아들의 국어 점수가 85점이라니 지각이나 결석을 자주 하여 예상은 했어도 미련의 덩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노력하는 사람은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인데 평소 아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생각하면 너무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는 내가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또한 내 뜻대로 일일이 지적해 가며 인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제라도 한 발치 비켜서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착잡한 심정으로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곧바로 학원에 가서 정신을 놓고 보내다가 3시경 점심을 먹으러 나왔더니 밖에 비가 내린다. 좋을 일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안개 속 같은 50줄을 살아가는 현재의 내 인생이 오늘의 날씨처럼 잔뜩 어두워 울고라도 싶은 저녁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온 수강생들을 4시부터 수업하고 7시에 영식이를 만나려고 지하철을 타고 남영동으로 이동했다. 사업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고 오늘은 내가 심난하여 미성회관에서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많이 마셨는데 영식이는 농담까지 하며 애써 분위기를 만든다.
27일 어제 과음을 하여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아내는 내가 식사도 하기 전에 한양아파트에서 플롯을 배우기로 했다고 일찍부터 나선다. 영어를 한다 마인드맵을 한다 이제는 플롯까지 한다니 배우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수준이 있고 돈이 되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면 프로의 정신으로 도전해야 하고 그것을 생활로 연결시켜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플롯이 아무리 정서적으로 좋다고 해도 언제 배워서 어디에 사용한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체육관이라도 나가서 운동을 하면 건강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져 기분이라도 상승하는 효과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다음 주까지 실시하는 각 고등학교 중간고사 준비를 먼저 온 수강생 순서로 수업을 시작했다. 저녁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금전 5백만 원 차용을 요구하는데 현금이 없어 근근이 생활하는 터라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존심이 강한 영식이가 금전적인 차용을 부탁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도움을 주지 못한 나로서는 미안함이 많았다. 하루라도 빨리 선박이든 필리핀이든 사업의 가닥이 풀려야 할 것인데 가까이서 영식이를 지켜보는 나도 남의 일 같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밤 8시에 내일 국어시험을 보는 환일고 수강생을 지도하려고 논술교실로 들어서니 감사의 표현으로 그의 어머니께서 홍삼엑기스를 보내왔다. 12시까지 하기로 한 수업은 수강생이 이해를 잘하여 일찍 마칠 수 있었고 집으로 내려오니 도서관에서 왔다는 딸은 밤 기온이 차가워서인지 얼굴이 벌겋다. 내일이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이라 하여 오늘 밤 잠을 줄여서라도 최선으로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했다.
28일 새벽에 일어났더니 아내가 거실에서 자고 있는데 차림새로 보아 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습이다. 서울은 오늘도 비가 내리고 오후부터 돌풍이 예상된다지만 대관령에는 100년 만에 4월 최저의 기온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된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9시에 집을 나서 서부교육청 교사 평가단 연수에 나갔더니 각 학교에서 운영위원 대표들이 모였다. 이름 그대로 학습을 맡은 교사가 적절한 수업을 하는지 평가하는 서울시 교육청 자문단인데 그렇더라도 수업하는 선생들을 제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을 마치고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친구 훈이가 부탁한 부자가 되는 길(富者學) 리포트를 작성하는데 중간에 컴퓨터에 이상이 생겨 멈추었다. 일전에 이대부고 운영위원들이 학교에 기부금을 개인당 30만원 내기로 약속을 하여 오늘 이체를 했고 아마 아내도 학부모위원이라 약간의 금액을 냈을 것이다. 모두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학교로 연결된 것인데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은 물론 모교를 빛내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녁에 중학생으로 처음 중간고사를 응시한 딸에게 수고했다는 전화를 했고 10시경 집에 들어가서 갈비찜으로 함께 저녁을 먹었다.
29일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PC방으로 들어가 친구가 부탁한 리포트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오늘은 아들의 마지막 시험이고 아내도 이대부고 감독을 간다기에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와 새벽에 완성한 자료를 노훈이에게 보냈다. 훈이는 대학교 동기인데 용구 아빠처럼 안식일 교인이라 삼육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신설된 사립학교의 교감으로 이동한 친구다. 과거에 친하게 지내면서 그와의 추억도 많은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를 취직시킨다며 내 이력서를 자신이 직접 작성하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울역 대일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는 방학을 이용하여 이천에서 직접 국어수업을 받으러 수강생으로 왔다. 선생과 학생으로 마주한 그 때의 반가움과 뿌듯함은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고 이듬해는 학교의 국어선생들을 보내어 강의법이나 내용을 나로 하여금 배우게 했다. 당시에 친구의 학교에서는 서울에서 유명한 강사로 내가 지목이 되었다는데 그렇다 해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 부끄러움이 없지는 않았다. 나를 인정하며 뿌듯함과 보람을 안긴 친구 그리고 날마다 결석만 하여 실망과 당혹감을 안긴 아들 내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전혀 다른 모습의 그림들이다. 현재는 훈이와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인품이 있고 판단이 정확한 친구는 훗날 학교장으로도 부족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틀 동안 체육관을 결석하여 오늘은 일찍 나가서 운동을 마쳤고 점심을 한 뒤에 학원에 나가 동성고 경동고 수강생을 지도하고 저녁에 논술교실로 이동하여 대신고 수업도 실시했다. 10시경 딸을 태우러 정독도서관으로 갔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나왔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학부모 회의를 한다고 아직도 연희동에 있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서 마트로 걸어 나가 군것질 거리를 사고 불 켜진 식당에 마지막 손님으로 들어가 소주와 함께 김치찌개를 사 먹었다.
30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침대에서 자는 아내를 거실로 보냈다. 소리가 요란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잠도 깨고 짜증이 나서 신문이나 보려고 했더니 아직 배달도 되지 않았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잠도 못 잤으니 이 기회에 다른 신문으로 교체를 하리라 생각을 했다. 아침에 식사도 거르고 일찍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이후 서울역 근처에서 고향 친구와 점심을 먹기로 하여 나섰다. 식당으로 들어가 주문을 했는데 종업원이 얼마나 성의가 없던지 큰 소리로 화를 내고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잠을 많이 못 자서 신경이 예민한 상태라 그랬을 것인데 작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더 문제다. 7년 전에 형을 벽제화장장에서 연기로 날려 보낸 4월 말 오늘인데 인간은 망각이 안 되기 때문에 불안정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영식이와 방배동에서 9시에 만나기로 하여 일단 학원으로 갔다가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을 경유하여 이동했다. 언제 보아도 반갑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좋은데 사업이 어려우니 서로 간 웃는 것도 한계가 있다. 늦은 시간에 만나 식사를 하다 보니 12시가 금방 지났고 택시를 타고 동작대교를 넘어 집에는 새벽 2시에 들어왔다. 얼음 위를 걸어온 것 같은 4월의 날들이 대부분 유쾌하지 못했지만 신록이 우거지는 5월에는 새로운 나를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