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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미해결 실종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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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기사 스크랩 개구리소년-알려지지 않은 보도기사(영남일보)
보물상자 추천 0 조회 385 06.04.20 12: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누명벗은 '개구리소년'아버지...종식이 아버지 김철규씨

 

/ 박윤규 기자

 

 

1996-10-04

지난 91년 실종된 성서개구리 소년 김종식군의 아버지 철규씨(43.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가 대구시내 불우소년소녀가장에게 써 달라며 성금 5백만 원을 2일 영남일보에 맡겨왔다.

김씨는 이 성금에 대해 '종식군이 자기집에 암매장 됐다'는 주장을 편 한국과학기술원 김가원 교수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 후 받은 합의금 5백 만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자식을 잃은 후 엉뚱한 누명까지 쓰게 돼 김 교수를 지난 1월 명 예훼손혐의로 고소했었다"며 "자식으로 인해 받은 돈을 마음편케 쓸 수 없 어 영남일보에 기탁하게 됐다" 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 9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5명의 성서국교생 실종사건이 일어난지 6년. 그러나올초 느닷없이 심리학자인 김가원 교수는 실종어린이들이 김씨집 주변에 묻혀있다는 주장을 펴 경찰 이 김씨집 화장실과 보일러실, 샤워실에서 발굴작업에 나섰으나 아무런 단 서를 찾지 못한채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김 교수가 발굴작업 직전 "암매장장소 판다이 잘못됐다"고 번복했으나 김씨는 "터무니 없는 오해를 사기 싫다"며 경찰에 발굴을 요구했다.

김씨는 "아무런 물적근거도 없이 나를 살인범으로 몰아 씻을 수 없는 상 처를 남긴 김 교수가 원망스러웠지만 이젠 새로 낳은 아들 재엽이와 새 삶 을 개척하고 있다" 며 그동안 많은 관심을 기울여준 시민들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박윤규 기자

 

당시 단짝 도영환씨

 

/ 최영호 기자

 

 

 

"태권도복을 입을 때마다 종식이가 보고 싶습니다."

개구리소년 중 가장 막내인 종식이 집과 불과 1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아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도영환씨(21.사진)는 종식이와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종식이의 태권도 제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태권도 공인 4단인 도씨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태권도 사범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종 식이와의 인연 때문.

당시 태권도 1품인 종식이의 권유로 태권도장을 처음 찾았던 도씨는 이 런 인연으로 인해 종식이가 떠난 지금도 태권도인의 길을 걷고 있다.

도씨는 아이들이 실종되던 날 아침에도 종식이를 만났다. 종식이와 같이 개구리를 잡으러 가기로 약속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동행하지 못했다.

도씨는그러나 종식이가 생각날 때마다 종식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태권 도장을 찾았고, 어느덧 유단자가 됐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도 많았지 만, 태권도 사범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도 후회는 없다. 종식이와 함께 지 도받던 사범이 문을 연 도장에서 실종 당시 종식이와 같은 또래의 학생들 을 지도할 때마다 옛 생각에 잠기기도 하지만, 보람을 느끼고 있다.

종식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도씨는 "종식 이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오기가 있어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으로 생 각했다. 종식이가 비록 죽었다고 해도 태권도복을 입고 있는 순간만은 종 식이와 늘 함께 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최영호기자

 

'개구리 소년'..경찰수사 문제점

 

/ 이승형 기자

 

 

 

실종된 개구리소년들로 추정되는 유골이 11년만에 발견되면서 사건발생 당시 경찰의 수사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경찰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하자 연인원 32만여명을 동원, 26일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일대를 이잡듯이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와룡산은 당시 해발 300여m로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실 종 당시가 3월로 숲이 무성한 계절도 아니었기 때문에 철저한 수색만 이루 어졌다면 초기에 발견이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또 유골이 발견된 장소는 경찰이 중점적으로 수색작업을 벌였던 신당못 주변과는 3-4km 떨어진 정반 대쪽으로 밝혀져 수색에 허점을 드러냈다.

수사방향이 단순가출에 집중되면서 수사지역이 광범위해진 것도 발견이 늦어진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경찰은 실종사건에 대해 단순가출이나 아사 (餓死) 등 안전사고, 범죄관련 세가지 측면에서 수사방향을 설정했다. 그 러나 실종어린이 5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우철원군의 일기장에 적힌 '나는 두목이 되어 탐험을 해보고 싶다'는 대목을 보고 후배4명을 데리고 집단 가출한 것으로 추정, 대구시내 신축공사중인 건물, 비닐하우스 등 가 출 청소년들이 흔히 기거하는 장소에 대한 수색을 병행했다.

경찰이 제보에만 의존하다 뒤늦게 수사본부를 설치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종사건이 장기화되고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자 경찰은 사 건발생 6개월이 지난 91년 9월25일에야 정식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국 경 찰과 공조수사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도 가출에 초점을 맞춰 대구는 물론,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에서부터 도서벽지에 이르기까지 수색을 펼쳤다. 전단지만도 수천만장을 뿌렸지만 허탕이었다.

수사방향이 가출에 집중되면서 수사범위가 와룡산 일원에서 대구전역으 로 넓어진 데 이어 전국으로 확대돼 조기 발견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경찰은 또 심령술사나 무속인 등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제보에 매달려 전 국을 헤매는 등 과학적인 수사를 펼치지 못하고 제보에만 의존,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수사력만 낭비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이승형기자

 

실종일 개구리소년 목격 나상열씨

 

/ 전영 기자

 

 

 

"실종 당일 개구리소년에 대한 목격신고를 경찰이 좀 더 신중하게 받아 들였다면 오늘 같은 참담한 일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개구 리소년 유골발굴 및 감식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찾은 나상열씨(여.56)는 11년전 자신이 목격했던 개구리소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경찰의 대 응을 원망했다.

나씨는 실종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오후 4시쯤 딸(당시 고 3)과 함께 서구 평리동 집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현공단 네거리까지 가던중 서 구 중리동 옛 도축장 근처에서 차에 오른 5명의 소년을 보았다고 했다.

시내버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5명의 소년들은 서로 웃고 떠드는가 하면 한 소년은 버스안을왔다갔다해 눈에 쉽게 띄었다. 그 중 한 소년은 올챙이를 담은 깡통을 들고 있었다.

이현공단 네거리에서 나씨는 버스에서 내렸고 시내버스는 사고현장 방향 으로 갔다. 한 소년이 진한 하늘색에 옆줄이 있는 체육복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던 나씨는 그날 저녁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개구리를 잡으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5명의 소년들이 바로 오 후에 본 소년들이었다. 나씨는 서구청에 전화해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알 렸지만, 목격전화가 왔었다는 뉴스만 방송됐을 뿐 자신에게 목격정황을 묻 는 경찰의 연락은 오지 않고 나씨의 기억에서도 소년들이 서서히 잊혀졌다 . /전영기자

 

11년전 와룡산 모습은

 

/ 박진관 기자

 

 

 

지금은 고층아파트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심으로 변했지만 개구리소년이 실종됐던 11년전 와룡산 부근은 산골이었다.

와룡산은 총면적 870여만제곱미터에 해발 300m에 불과한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으나 주변은 대부분 논과 밭이고 군부대의 훈련장과 사격장까지 있 어 일반인이 쉽게 찾는 곳은 아니었다.

1991년 당시는 와룡산을 비롯한 성서지역이 개발되기 전으로 개구리소년 이 살던 마을을 포함해 10여개의 자연부락이 산아래에 있어, 도심과 달리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던 이곳 소년들에게 와룡산은 친근한 놀이터였다.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지금은 가장 가까운 도로 및 마을과 불과 50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산 아래지만 개발이 이뤄지기 전에는 8부 능선에 해당 될 정도로 산 정상에 가까웠다.

이곳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은 현장을 중심으로 600여m 아래쯤에 망당지 , 왼쪽에 선원지, 불미골로 오르는 농로 건너편에는 배실지 등 3개의 못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메워져 고층아파트단지가 들 어섰으며 망당지에는 지금 성산고가 신축되고 있다.

유골발견현장은 소년들이 살던 마을과 3.5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것 은, 물론 300여m 지점에 3-4가구가 살았으며 60-70가구가 살았던 상당한 규모의 마을도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유족들은 "놀이터 가듯 자주 와룡산에 오른 소년들이 길을 잃고 산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숨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박진관기자

 

'개구리소년'..우철원군 친구 오상국씨

 

/ 전영 기자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체온증으로 숨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 합니다. 온산을 뒤졌는데 못찾았을 리도 없고, 타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 다."

28일 오후 2시50분쯤 개구리소년 수사본부가 차려진 달서경찰서 성서파 출소를 찾은 오상국씨(22.달서구 갈산동)는 "유골발굴현장 부근은 도롱뇽 이나 개구리를 잡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탄피를 주우러 가는 곳"이라고 말 했다.

개구리소년중 한 명인 우철원군과 성서초등학교 5학년때 같은 반으로 친 하게 지냈다는 오씨는 사건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사본부 를 찾았다.

오씨가 저체온증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지 않는 것은 발굴현장과 300m 정 도 거리에 민가가 있었다는 점과 당시 성서초등생들이 자주 탄피를 주우러 가는 곳으로, 해질 때까지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오씨도 실종사고가 나기 며칠전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탄피를 줍기위해 현장 인근에 다녀오는 등 당시 아이들이 탄피를 줍기 위해 쉽게 오가 는 곳으로, 많은 아이들이 다녀왔지만 길을 잃은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이 탄피를 주우러 가지만 군인이 순찰을 돌기 때문에 보통 30분 -1시간 정도 머물렀다"는 오씨는 "밤늦게까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장 이 길을 잃을 정도의 깊은 산속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사격장을 운용했던 50사단측이 현장에는 유탄이 날아오지 않는 다는 해명도 오씨의 말과 다르다. 오씨는 "아이들사이에 탄피를 줍는 것이 유행이었고 실제로 실탄이나 탄피를 주워와 학교에서 자랑하는 친구도 있 었다"고 말했다.

철원이를 말수가 적고 착했으며 머리도 좋은 편이었다고 기억하는 오씨 는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꼼꼼하게 수사해 빨리 해결했으면 좋겠다 "는 부탁을 남기고 수사본부를 떠났다. /전영기자

 

'개구리소년'..발견지점 부근 거주 도재문씨

 

/ 최영호 기자

 

 

 

"개구리 소년들이 발견된 지점은 개구리나 도룡뇽이 서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30-40m 아래에는 넓은 밭이 있고, 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민가가 8가구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곳은 전혀 아닙니다." 개구리 소 년들이 발견된 지점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 도재문씨(70)는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이 부근에서 길을 잃은 사 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며 "아무리 초등학생들이라 해도 길을 잃었다고 는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유골 발견지점 일대 산이 성주 도씨 문중산이어서 지금까지 관리해 오고 있다는 도씨는 "개구리 소년들의 집은 발견지점에서 정상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들이 그곳에 오려면 반드시 정상부근에 있는 사격장을 가로 질러와야 하는데, 당시 사격장에는 보초를 서고 있어 아무도 그곳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며 "개구리 소년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고 했다.

도씨는 또 "사격장에서 사격을 할 때 사격방향이 유골 발견지점과는 90 도 가까이 벗어나 있기 때문에 탄알이 개구리 소년들이 발견된 지점으로 넘어오기 힘들다"며 "탄두가 어떻게 사고현장에서 발견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발견지점 일대에 있는 소나무와 도토리 나무를 직접 심었다는 도씨는 "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이후에도 그 일대에서 경찰들이 수색을 하는 모습 을 보지 못했으며, 평소 사격을 할 때 총소리가 마을까지 들렸지만 그날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영호기자

 

'개구리소년 죽음' 진실은 어디에..

 

/ 최영호 기자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과 유류품 발굴이 마무리됨에 따라 이들을 둘러싼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의문점에 대한 유족과 경찰 및 감식팀의 입장을 정리해본다.

*두개골 3개가 돌 밑에서 발견된 점= 매장을 위해 다져놓은 돌이다(유족 ), 오랜시간이 지나면서 인근 지역의 돌이 빗물에 쓸려 이동된 것일 수도 있다(감식팀).

*발굴된 유골 중 두개골은 낮은 곳에 다리는 위쪽에서 발견된 점= 사고 사일 경우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다(유족), 시간이 지나 유골상태는 사망 당시와 다를 수 있다(감식팀).

*조호연군 점퍼가 발굴되지 않은 점=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이 옷을 다른 곳에 벗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유족), 좀 더 현장발굴이 필요한 부 분이다(경찰).

*2개의 두개골이 크게 손상된 점= 외부충격이 있었다는 증거이다(유족) , 충격에 의한 것인지 부식으로 인한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감식 팀).

*유골 중 일부가 두개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5m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굴 된 점= 사체가 다른 곳에서 이동된 증거이다(유족), 빗물에 쓸려 이동될수 있다(감식팀).

*의류 중 대부분은 완전한 상태이나 일부는 심하게 손상된 점= 외부충격 으로 인해 부패가 빨랐다는 점을 말해준다(유족), 지금으로선 뭐라고 해명 할 수 없는 현상이고 조사가 필요하다(감식팀).

*3월26일에도 동사(凍死)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유족), 일반적으로 영 상 5도 이하이면 가능하다. 5월에 동사한 사람도 있다(감식팀).

*현장에서 탄두가 발견된 점= 타살과 관련이 있다(유족), 지금으로선 뭐 라고 답할 수 없다(경찰).

*옷의 일부가 뒤집힌 채 묶여 있는 점= 저체온사로 죽었다면 옷을 벗은 후 매듭을 묶을 일이 없다(유족), 인위적인 현상은 틀림이 없고 동사의 경 우 죽기 직전 발열현상이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옷을 벗을 수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감식팀).

*유골이 층층이 쌓인 상태에서 발견된 점= 암매장의 모습이다(유족), 추 위로 인해 엉킨 상태로 죽었을 수도 있고 조사가 필요하다(경찰). /이승형기자

 

'개구리소년'..유골소재 제보자 몽타주 배포

 

/ 박윤규 기자

 

 

 

경찰은 지난 25일 오후 서울지역 모 신문사 앞에서 "개구리 소년에 관한 기사를 왜 쓰지 않느냐"고 항의한 40대 남자의 몽타주를 만들어 30일 전국 에 배포했다.

몽타주의 남자는 165-170cm의 키에 통통한 체격이며, 얼굴은 갸름한 편 이다. 약간 검은색 얼굴에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다. 경찰은 이 남자가 이날 오후 5시쯤 이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 소년 5 명의 유골이 나란히 묻혀있다"고 제보한 사람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큰 것 으로 보고 있다. /박윤규기자

 

근거없는 제보 하지맙시다"..'개구리 소년'

 

/ 정혜진 기자

 

 

 

개구리소년 타살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경찰에 신빙성 없는 제보와 갖가지 설이 쏟아지고 있어 수사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다. 유해 발굴 하루 전 한 남자가 서울의 한 언론사에 “개구리소년 기사를 왜 안 쓰느냐”며 “와룡산에 큰 무덤이 있는데 거기를 파보면 개구리소 년 유골이 나온다”는 제보를 해 경찰이 이 남자의 몽타주까지 작성, 3만 장을 배포했지만 5일만에 결국 근거없는 해프닝으로 결론났다. 대구의 수사본부에도 총기살해 제보와 함께 3∼4명의 남자가 개구리소년 들을 앵벌이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새로운 제보가 들어왔지만 대부분 제보가직접 본 것이 아니라 ‘∼카더라’ 수준이어서 신빙성이 약하다. 대구지방경찰청 홈페이지에도 개구리소년의 사인을 추측하는 의견이 하루 에도 수십건씩 올라오고 있다. 이들 의견 가운데는 경찰의 수사 방향에 논 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글도 있지만 ‘군부대를 조사해 보라’ ‘익명의 제보자가 수상하다’는 등 이렇다할 근거가 없는 글이 대부분이다. 수사본부의 한 경찰관은 “시민들의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근거없는 제보는 수사력만 낭비시킨다”면서 “신빙성없는 제보와 추 측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혜진기자

 

'개구리소년'..김영규군에 집중된 의문들

 

/ 최영호 기자

 

 

 

개구리소년들의 유골 가운데 가장 나중에 발굴된 김영규군의 유골과 유 품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의문이 집중되고 있다. 유독 김군의 유골과 유품에 상식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정황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

유족들이 유일하게 발굴을 지켜볼 수 있었던 김군의 유골은 배열상태부 터 비정상적이었다. 두개골이 다리부분보다 낮은 곳에서 발견됐고, 두개골 과 다리부분이 3m 가량 떨어진 채 발굴됐다. 경북대 법의학팀(단장 곽정식 교수)은 오랜 시간이 지나 유골이 이동될 수도 있다고 해석했지만, 김군의 유골은 다른 유골보다 더 깊은 곳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이동폭이 작아야 한다는 것이 물리법칙에 부합한다.

김군의 상의와 하의가 뒤집힌 채 묶여 있는 것도 의문점. 저체온사의 경 우 죽기 직전 발열현상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견해 도 있지만, 무의식 상태에서 옷소매와 바짓가랑이를 묶는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지적도 많다.

두개골 정수리 부분에 직경 5cm 가량 함몰된 흔적도 발견됐다. 외부충격 에 의한 것인지 자연스러운 부패현상인지 법의학팀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 다. 충격에 의한 손상이아니라고 가정해도 다른 부위에 비해 부패가 유독 빠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게 틀림없다.

두개골이 옷소매에 묶여 있는 것도 다른 두개골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 경찰은 묶인 정도가 목을 죌 만큼 강하게 묶이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 지만, 여전히 의혹은 남아 있다. 더욱이 김군의 유골이 가장 땅속 깊은 곳 에서 발굴된데다 옷의 손상 정도도 가장 심하다. 다른 아이들의 옷가지는 대부분 육안으로도 제모습을 알아볼 정도이나 김군의 옷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손상돼 외부충격에 의해 상대적으로 부패정도가 심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케 하고 있다.

유해에서 탄두 1개와 발사되지 않은 총알 1개가 나온 점도 타살의혹을 키우고 있다. 물론 인근에서 수많은 탄두와 탄피가 발견됐지만, 유해에서 탄두가 같이 발견된 것도 유일하다.

법의학팀도 이러한 점을 중시하고 있다. 곽정식 단장은 "종합적인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특정인의 유골과 유류품에 법의 학적 해명이 필요한 사항이 집중돼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밝 혔다. /최영호기자

 

'개구리소년'..언론사 제보 추측전화 '해프닝'

 

/ 박윤규 기자

 

 

개구리소년 유골 발견 하루전인 지난달 25일 서울의 한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와룡산에 가면 개구리소년 5명의 유골이 나란히 묻혀 있다"는 제보 를 해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됐던 40대 남자는 정모씨( 40.주거부정)로 확인됐으나, 실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추측성 제 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정씨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등 신병 확보에 나서자 정씨는 30일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이날 밤 대구로 불려와 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은 정씨는 "신문을 보고 와룡산을 알았으며, 전화 하기 며칠 전 이 신문에 개구리소년 관련기사가 나추측을 제보했다"고 말 했다. 경찰은 배포하다 남은 정씨의 몽타주를 폐기 처분하는 해프닝을 연 출했다.

이에 앞서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정씨는 "6공정권이 강경대.김 기설씨 사건 등 당시 어수선한 시국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개구리소년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사건"이라는 등 횡설수설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조사결과 정씨는 10여년 전 가출해 머리를 다쳐 정신이 불안정한데 다 최근 서울역 등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왔고 수시로 언론사나 수사당국에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다며 전화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윤규기자

 

'개구리소년'..종식군 아버지 묘소 찾은 유족

 

/ 전영 기자

 

 

 

"아들을 찾는다고 그렇게 애태우고 고생하더니.... 비록 유골이지만 이 제 아들을 찾았으니 좋은 세상으로 가세요."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한을 이기지 못해 얻은 병으로 인해 지난해 10월22일 숨진 종식군(당시 9세)의 아버지 김철규씨(당시 49세)의 무덤을 찾은 유족들은 눈물을 쏟았다.

1일 오전 11시쯤 성주군 용암면 양지바른 가야산 자락에 있는 무덤에 도 착하자 부인 허도선씨(44)는 무덤위 풀을 쓰다듬으며 "여보, 우리 종식이 찾았어요"라며 오열했다.

허씨를 비롯해 김철규씨의 동생 재규씨(39)와 영규군의 아버지 김현도씨 (56) 등 4명은 준비해간 음식과 과일, 술을 무덤앞에 놓고 차례로 절을 올 린후 10년을 하루같이 아들을 찾으러 다니던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김현도씨는 "제일열심히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던 사람이었기에 아이들 이 싸늘한 유골로 돌아온 것을 알고 하늘에서도 피눈물을 쏟을 것"이라며 "자네가 11년 동안 차가운 땅에서 떨었을 아이들 영혼을 달래주라"고 말했 다.

허씨는 연방 "종식이 찾았다"는 말을 되풀이하다 "종식이 아빠! 아이들 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인을 명확히 밝혀내겠다 "며 가슴을 쳤다. 종식이의 둘째 삼촌 재규씨도 "살아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김철규씨가 숨지기 며칠전 가족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내 할 도 리는 다 한 것 같다, 삶에 대해 후회는 없다'란 말을 떠올리고 "11년동안 산에서 헤맨 아이들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인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묘소를 떠났다. /전영기자

 

개구리소년 사망사건..정황으로 볼땐 "살해후 옳겼다"

 

/ 이승형 기자

 

 

개구리 소년 유골이 발굴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사망원인에 대한 의문 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이나 증거로 볼 때 경찰이 주장하 는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사보다는 타살됐을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경찰은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핵심쟁점인 △상당수 치아유실 △두개골 관절부분 일부골절 △두개골 함몰과 구멍 △옷가지가 뒤집어진 채 묶인 매듭 등에 대해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문점에 비춰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 에서 소년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돼 옮겨졌을 가능 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 다. 5구의 유골중 치아가 온전히 보존된 것이 1구도 없는데 다 치아 결손율 이 50%를 넘고 있고 두개골 관절부분 일부 골절현상과 3구의 두개 골이 심 하게 손상된 점은 흉기 등에 의해 두개골 및 치아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 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개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2개의 구멍과 정수리부분의 함몰 흔적, 방사선 촬영결과 드러난 유골의 미세한 균열도 외부충격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경찰은 자연부식에 의 해서도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있으나 일반적인 현상 은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처럼 유골에 따라 훼손이 심한 것과 그렇지 않은 사실은 집중적인 외부충격에 의해 소 년들중 일부가 먼저 변을 당한 뒤 나머지도 살해됐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 옷가지의 매듭은 용의자들이 사체를 옮기기 위해 묶었다는 강력한 의문이 제기되고, 전 문가들도 묶인 강도나 매듭 종류가 아이들이 할 수 있 는 범위를 벗어났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골과 인근에서 발견된 탄두와의 상관관계도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이다. 이 때문에 유탄 및 오발사고 등 총기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도 배제하 지 못하고 있다. 군 부대는 유탄과 피탄이 실종 사건 이전에 수십년간 쌓 인 것이며 실종당일 사격이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사격일 지가 없는데다 유골 현장에서 나온 탄두 2개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 사의 가능성은 낮지만 유골현장에서 소년들의 머리 카락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점에 미뤄 완 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경 찰은 머리카락이 공기중에서의 부패가 땅속에서보다 8배정도 빠르기 때문에 일찌감치 저체온증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했다. /이승형기자

 

'개구리소년'..찬인군 윗옷도 없어져

 

/ 이승형 기자

 

 

개구리소년 유골발견 현장에서 조호연군의 윗도리가 지금까지 발견 되지 않은 가운데 박찬인군의 윗 도리도 없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4일 찬인군의 가족에 따르면 “실종 당일 찬인이 집을 나가면서 윗도 리 를 찾아 찬인이 할아버지가 청색옷을 내줬다”고 주장했다.

당시 찬인군이 입었던 윗도리는 청색바탕에 뒷면에 영어글자가 적혀있고 앞면에는 그림이 있는 옷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소년들의 유골에서 치아 상당수가 유실되고 두개골 관절부분이 골절된 사실이 사인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고 정밀분석작업에 들어갔다. 경찰은 또 유골발견 현장 인근에서 발견된 사람이 은거했던 흔적이 있는 구덩이 내부에서 여자이름의 모은행 계좌번호를 발견하고 은거했던 사람의 신원을 찾는 한편 사건 관련 여부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 이와함께 매듭 등 타살의혹 부분에 대한 수사와 함께 와룡산 일대 수 색도 병행하고 있다. 한편 3일 수사본부와 유골발견 현장을 방문한 이팔호 경찰청장은 “사인 규명을 밝히기 위해 철저한 수사를 하도록 했다”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승형기자

 

'개구리소년' 미스터리, SBS 그것이 알고싶다

 

 

 

 

SS TV '그것이 알고 싶다'는 5일 밤 10시50분 실종 11년만에 최근 유골 로 발견된 '개구리소년'이 남긴 의문점을 추적한 '끝나지 않은 미스터리- 주검으로 돌아온 개구리소년'편을 방송한다.

11년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해도 찾지 못했던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갑자기 11년 뒤 실종 마을 근처 와룡산 자락에서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 할까.

제작진은 저체온사 등 조난사의 가능성에 대해 산악구조 전문가와 마을 지리나 역사를 잘 아는 주민들, 지질학자, 토양학자 등의 조언을 받아 현 장실험과 함께 정밀 분석해본다.

타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린이 5명을 상대로 했다는 점과 산에 유골 을 묻었다는 점을 단서로 봤을 때 어떤 동기로 범행을 저질렀고 어떤 범죄 가 성립될 수 있는지 국내 범죄심리학자들의 범죄학적 추론을 들어본다.

또한 최근 소문으로 돌고 있는 군부대 총기 오발사고와 관련된 타살이라 는 제보, 개구리 알을 파는 업자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제보 등의 진위를 알아본다.

이밖에 유골 발견 후 초동수사에서 문제점은 없었는지 등 유골 발견 후 7일간의 경찰 수사 진행과정과 수사 성과를 짚어본다.

 

'개구리소년' 실종당일 새 제보 잇달아

 

/ 이승형 기자

 

 

 

'개구리 소년' 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실종당일 오후 유골발견현 장에서 직선거리로 2-3km 떨어진 와룡산 무학사 계곡에서 소년들을 목격했 다는 새로운 제보가 들어와 제보내용의 신빙성 여부를 조사중이다.

경찰에 따르면 김모씨(당시 13) 등 2명은 "91년 3월26일 오후 4시쯤 무 학사 계곡에서 개구리소년들로 보이는 5명의 소년들이 도롱뇽 알을 줍고 있는 것을 봤다"고 제보했다.

지금까지 소년들의 행적에 대한 마지막 목격시간은 실종당일 오후 2시였 으나 이 제보가 사실이면 목격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셈이다.

경찰은 이 제보가 실종당일 소년들의 행적조사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 로 보고 무학사 주변을중심으로 새로운 목격자를 찾고 있다.

경찰은 또 함모씨(22)가 4일 제보한 "개구리 소년 실종 당일인 91년 3월 26일 오전 10시쯤 유골발견 지점과 2km 떨어진 와룡산 서재 방향에서 '으 악'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경찰은 지금까지 접수된 제보 54건에 대해 모두 조사를 벌였으나 이 중 27건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박희경 법치의학실장은 5일 경북대 법의학교실 에서 소년들의 보철물 및 치과기록 대조를 통해 정확한 신원확인과 사인규 명을 위한 단서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승형기자

 

'개구리소년' 수사.."실종 다음날 와룡산서 봤다" 제보

 

/ 이승형 기자

 

 

 

‘개구리소년’들의 사망시점이 실종 당일로 추정됐으나 실종 당일 이후 이들을 봤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경찰도 이에 대한 수사에 나서 개구리 소년들의 사망시점이 새로운 의문점이 되 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개구리소년들의 이동경로를 추 정, 실종 당일 숨졌 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여왔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실종 당일 이후 목격자들에 대한 재 조사를 벌이고 있다.

당시 성서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모씨(22)는 “실종 다음날인 27일 오후 6시쯤 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한 상점앞에서 개구리소년들을 목격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역시 성서초등학교 3학년 이었던 강모씨(22) 등 3명도 “실 종 이틀 뒤인 28일 오후 신당동 와룡산 중턱에서 개구리소년들 을 봤다”고 제보해 경찰이 사실 확인중이다.

또 경찰은 개구리소년들의 최후 목격시간을 실종 당일 오후 2시쯤으로 보고 있으나 이보다 2시 간 늦은 오후 4시쯤 유골발견현장에서 2∼3㎞ 정도 떨어진 무학사 계곡에서도봤다는 제보와 오 후 5시쯤 서구 중리동에서 유 골발굴현장으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 소년들을 봤다는 제보에 대해 서도 조 사하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개구리소년들의 이동경로를 성서초등학교∼성서중학교∼ 이곡 동 쌍마섬유∼항공대입구∼불미골입구∼유골발견현장으로 보고 최후 목격시간을 오후 2 시로 판단해 수사를 벌여왔다. 개구리소년들이 경찰이 추정하는 이동경로 외의 다른 지점과 실 종 당일 이후에 목격됐다는 내용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타살여부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나올 것으로 보여 경찰의 수사결과가 주목 된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실종 당일 행적에 대한 조사결과 특이점이 나타나 지 않아 이후 목격내용의 신 빙성여부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면서 “ 실종 당일 목격된 지점과 많이 떨어져 있는데다 어린 이들이 밖에서 밤을 보내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신빙성은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 다 ”고 말했다. /이승형기자

 

뒤늦게 개구리소년 유골현장 찾은 찬인군 아버지

 

/ 전영 기자

 

 

"지금도 찬인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지난달 공무집행방해혐의로 구속됐다 24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8일 오 전 개구리소년 유해발굴현장을 찾은 박찬인군(당시 10세)의 아버지 박건서 씨(48)는 아들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박씨는 11년동안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아들이 싸늘한 유골로 산속에 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아니야, 아니야"란 말만 되풀이했다.

찬인군을 비롯한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발견 후 일 주일쯤 지난뒤 교도관으로부터 들었지만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박씨는 "나는 폐인이 되고 아들은 뼈조각만 남았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

이어 경북대병원 법의학과해부학교실을 찾은 박씨는 조각조각 나눠진 아들의 유골과 옷가지를 보고는 11년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아들의 모 습이 떠오르는 듯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다 "내 아들이 아니야"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박씨는 2대 독자이던 찬인군이 실종된 뒤 생업을 포기하다시피하고 전국 을 떠돌면서 수천만원의 빚만 졌다. 소규모 가내 섬유업으로 겨우 살림을 꾸려왔지만 아들이 생각날 때는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난달 14일에도 찬인군 생각에 술을 마시고 동네주민과 시비를 벌이다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관을 폭행해 구속까지 됐다. 아들을 잃은 11년동안 얻은 홧병 때문이었다.

"찬인이가 죽어간 이유를 끝까지 밝혀내겠다"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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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4.17 16:22

    첫댓글 마자요~

  • 07.05.25 00:18

    아무런 이유없으면 집에 진작 들어갔을텐데 안들어간 이유는 몰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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