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끝자락은 이미 끈 떨어진 연으로 아득한 하늘 속 어딘가로 길 떠나고 그 빈자리를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불덩이를 안고 태양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며 발그레한 얼굴로 등줄기에 흠뻑 물줄기를 낸다. 6월 중순이 접어들면서 농촌은 양파수확과 마늘수확에 지쳐가고 들녘의 풀들도 태양의 열기에 한낮에는 풀이 죽어있다. 이럴 때 한차례 소낙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근래에 들어 도시와 농촌의 생활환경은 별반 차이가 없는 거 같다. 도시에서여름을 날려면 에어컨이 필수인 것처럼 농촌도 대부분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다. 우리 집에도 거실에 스탠딩 에어컨이 한 대 있고 방마다 벽걸이가 거미처럼 붙어있다. 거기에 선풍기는 소유권 주장으로 법적분쟁 없이 평등하게 한 대씩 껴안고 산다.
그날은 일정이 좀 바빴다. 아침6시부터 요양일정을 시작해 오후 2시10분쯤 하루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공주대 평생교육원으로 시낭송수업을 받으러 가야했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꽃단장을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땀을 흘리며 영업용 대형선풍기를 안고 마당에 들어서는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은 순간 죄지은 아이마냥 눈빛이 흔들렸고 언제 보았는지 아들이 달려와 낚아채듯 커다란 선풍기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아들은 선풍기와 함께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든 일이 찰나에 이루어졌고 나는 시계바늘에 떠밀려 학교로 달려갔다.
생뚱맞게 가정집에 웬 대형선풍기? 머릿속엔 벌떼들이 날아다니고 선생님의 말씀은 갈 곳을 잃고 서성거렸다.
사실 남편은 몇 해 전부터 대형선풍기를 사자고 노래를 불렀었다. 그럴 때마다 가정 경제를 쥐고 있는 막강한 권력에 처참하게 묵살 당했다. 그 뒤로 대형 선풍기 이야기는 입을 봉하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속을 끊여 시꺼먼 숯이 되었을 남편은 결국 이번에는 기필코 소원성취를 하고 말았다.
대형선풍기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제일 득을 본 건 아들이다. 온라인수업으로 대전에서 자취하다 짐을 싸들고 온 후 콧구멍만한 방에 침대가 먼저 차지하고, 한발차이로 책상은 마루로 쫓겨났다. 온라인수업에 영상까지 만드는 아들은 마루위에 부서지는 햇빛 때문에 이마에 구슬땀을 매달고 살았다. 등치가 곰인 아들은 가정용 선풍기가 성에 찰리 없다. 그때에 아버지 손에 들려온 대형선풍기는 그야말로 아들한테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다.
그 뒤로 거실에서는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태풍이 불고 있다. 모터소리가 천둥소리를 버금가며 바람소리 또한 웬만한 태풍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인가. 우리 집 일기 예보는 기상청도 묵살하고 한 결 같이 태풍이다.
아니, 에어컨을 틀면 될 것을 인테리어의 블랙홀인 대형선풍기라니
‘그것은 대문 밖 외양간의 소들에게 양보하세요.’라는 배려의 문구도 모르시나. 아무튼 남편과 아들은 좋아 죽고 내속은 끓고 있다.
그렇게 칼날을 세웠던 대형선풍기의 시선이 뭉툭해질 무렵 고추밭에서 일을 하고 땀으로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바쁘게 저녁준비를 하는데 갱년기가 사태파악 못하고 달려든다. 가슴에서 열기가 솟구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났다. 당장에 에어컨을 틀고 싶었으나 병환에 계신 시어머님은 아직도 한겨울에 살고 있어 추위를 엄청 타신다. 에어컨만 켜면 방으로 들어가면 될 것을 굳이 거실소파에서 하루 종일 앉았다 누웠다 소파분리공포증을 앓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사방으로 창문수를 헤아리다 지친다. 그 많은 창문을 닫고 방문도 닫고 그러다 거품 물기 십상이다. 그럴 때 대형선풍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루에서 거실로 방향으로 틀어 버튼을 눌렀다. 쏴~아 강력한 태풍이 집안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완전 짱 중에 으뜸이다. 막혔던 가슴에 터널하나가 생겼다. 한동안 나는 대형선풍기의 성능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바람맞은 여인네가 되었다.
바람도 갈라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고 아들은 그 맛을 알았고 나도 늦바람에 녹아내린다. 많은 살을 출렁이고 있는 우리는 그렇다 쳐도 남편은 대접 밥을 먹고도 피골이 상접으로 밉상 중에 밉상이다. 그런 사람이 순풍에도 몸이 날아갈까 근심해야 할 상황에 영업용 바람은 생명위협을 느낄 텐데 아직까지 이해불가다.
대형선풍기는 오늘도 바람을 일으켜 집안구석을 돌아다니고 아들과 나는 신나게 바람을 가른다. 남편은 어깨가 올라갔고 좋아할 줄 알았다며 껄껄 웃는다. 그러고 보면 겪어보지 않고 단정먼저 짓는 건 아닌 거 같다. 우리 집엔 영업용 대형 선풍기가 살고 있다.
첫댓글 그 선풍기도 대접을 잘 받고 있으니 입양이 잘 된 것 같다...ㅎㅎㅎㅎ 막힘 없는 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골골루 파고드는 ..ㅎㅎ
처음엔 완전 생뚱이었죠. 그런데 사용해보니 은근 매력덩어리더라고요. 단지 그등치가 예사롭지않아 보기는 쫌 눈에 걸린다는 거죠.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연님의 글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당겨 읽습니다.
어제는 좀 주무셨나요. 남들이 일어날 시각에 수연님은 겨우 하품을 하시는 듯하니 걱정됩니다.
이리도 바쁘고 부지런하신 분이... 거기에 벌써 열대야가 시작될 조짐을 보입니다.
대형선풍기가 집안에? 멋도 없고 시끄럽지만, 시원하긴 하죠.
처음엔 싫었지만, 그래도 가족 모두가 좋아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화목촉진제가 되었군요. 좋습니다.
우리 집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안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사오는 경우가 가끔 있답니다. 허 허
저도 사고 싶은 거 있음 맘대로 삽니다. 그리고 가끔 후회도 밀려오죠. 살아보니 딱 이것이 정답이고 잘한 것이다라고 정확한 건 없는 거 같아요.
남편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사고 싶은 것이 많겠지요. 그런데 대형선풍기는 너무 과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문열고 틀어서 좋고 귀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늘 태풍이 부니 시원해서 좋고 그러더라고요.
ㅎㅎ 속이 시원하기도 하겠네요
소음은 좀 거시기 하겠지만...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소리는 탱크소리가 나요. 그래도 시원해요. 물건들이 바람에 떠밀려 그네도 타구요. 그다지 나쁘지않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깔스럽게 대형선풍기를 들여놓으셨네요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선생님
그런데 그 시끄러움은 아직 더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듯해요.
서작가님의 글은 삶의 아름다운 향기를 가득담고 있어서 참 좋습니다
늘 건필하시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