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효림)님의 교우 단상: 우크라이나와 이어진 한국 기독교 ◈
우크라이나는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등 다양한 종파가 한 곳에 어우러진 기독교 국가이다.
내가 사는 르비브 만해도 동서남북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각기 다른 종파의 교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나도 한 때는 매주 다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게 정말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우크라이나 생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무얼 할까 고민 중 우크라이나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관련성을 찾다가 한국 교회사 속에 우크라이나인 선교사와 맺은 뜻밖의 인연을 알게 되어 주보의 교우단상 지면을 통해 소개할까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신약 성경은 ‘존 로스’ 목사에 의해서 1887년 한국어로 처음 번역된 이래 ‘언더우드’ 목사를 통해 1906년에 이르러 ‘로스’의 신약 성경을 대체할 새 신약 성경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구약 성경은 아직 번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미국이나 캐나다 선교사가 아닌 우크라이나 출신의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건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에 의해서다. ‘피터스’ 목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드니프로에서 태어났고, 고전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 공사장에 일하러 가다가 잠시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게 되었는데, 머무는 동안 그곳에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에 이른다.
그 후 ‘피터스’는 미국 성서공회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서 선교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후 ‘피터스’는 조선으로 넘어와 책을 팔며 전도를 하는 권서인(券書人)이 되었는데,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된 구약성경이 없었던 시점이었고, 게다가 ‘성경공인번역위원회’를 통해 구약성경이 출간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틈틈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시편의 일부분을 선정 번역하여 ‘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 후 ‘시편촬요’는 무려 8년 동안이나 유일한 한글 구약 번역본으로 읽히게 되었다.
1906년에 ‘피터스’는 ‘성경공인번역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구약성경 번역에 매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1910년 우크라이나인 목사 ‘피터스’의 손길에서 구약성경이 한글로 출간되는 역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글로 된 ‘구약셩경젼서’이다.
그 후 ‘성경공인번역위원회’가 ‘성경개역위원회’로 개편된 뒤에 ‘피터스’ 목사는 평생 회원으로 위촉되어 1930년까지 구약성경개정에 헌신한다. 그러다 서울에서 같이 살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당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구약성경을 번역할 만큼의 능력이 없는지라, 히브리어에 능했던 ‘피터스’ 목사보다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한 위원회는 다시금 선교부에 요청하여 피터스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여 구약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했고, 마침내 1938년에 이르러 ‘개역 성경전서’를 출판하게 된 것이었다.
구약성경이 완전체로 한국에 소개될 수 있었던 건 우크라이나 사람 ‘피터스’ 목사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하긴 했을지라도 그토록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피터스의 노력과 헌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번역될 수 있었던 과정 안에 역사하신 하느님의 뜻을 들꽃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다. 마치 요나의 이야기처럼 ‘피터스’ 목사가 일본의 나가사키에 머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상상 너머에 존재한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우크라이나에 온 것도, 지금 들꽃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뭔가를 하려는 것도 그렇다. 다만 각자가 ‘피터스’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