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無言劇)처럼
박완호
나무 몇 그루 무언극(無言劇) 대사처럼 서 있었다. 등화관제의 기억에서 걸어 나온 그림자가 새벽 부둣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발화되지 못한 외마디가 밀사(密使)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바람꼬리에 매달려 가는 소리를 쫓아 나는 말이 보이지 않는 데까지 따라가 보았다. 거기서도 나무 몇 그루는 여전히 무언극 무대의 배경으로 아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은, 말이 없는 데서 더 번뜩였고 누군가는 말 한마디 없이도 스스로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 곁에서 침묵이 빚은 노래를 꿈꾸었지만,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누군가는 그 앞을 그렇게 스쳐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간 『시현실』 2015년 여름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안의 흔들림』(시와시학사, 1999)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천년의시작, 2003) 그리고 『아내의 문신』(문학의전당, 2008),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서정시학, 2011), 『너무 많은 당신』(시인동네, 2014) 등이 있음. 김춘수시문학상(2011) 수상. 현재 〈서쪽〉 동인 및 시인축구단 〈글발〉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