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책을 끓이다 / 장현숙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 귤이 웃는다 / 백숙현 (202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3. 세계, 고양이 / 김현주 (202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4. 시소 / 김현주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5. 묘목원 / 권승섭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6. 숲을 켜다 / 조이경 (2023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7. 극장의 추억 / 이상록 (202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8. 볼트 / 임후성 (202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9. 연착 / 노수옥 (2023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0.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1. 버터 / 박선민 (202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2. 당산에서 / 신나리 (2023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3. 구 일째 / 황정희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4. 산책 / 차수현 (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5.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2023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6. 멜로 영화 / 이진우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6-1. 홈커밍데이 / 이진우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7.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 최주식
(202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8. 가장 낮은 곳의 말(言) / 함종대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9. 드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 민소연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 레드문 / 권영유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1. 활어 / 황사라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2. 결빙 / 윤계순 (2023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3. 외갓집 / 윤연옥 (2023년 제29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24. 청벚 보살 / 이수진 (202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5. 박스에 든 사람 / 박장 (2023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26. 등등 / 김미경 (2023년 전남매일 골드문학상 당선작)
27.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8. 나방의 긍정 / 오후랑 (202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9. 데칼코마니 / 한이로(필명) [2023년 영남일보 신인문학상]
2023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2월에 발표
2023년 현대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3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 책을 끓이다 / 장현숙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 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는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끼가 사라진다
*장현숙 ; 1964년 경기도 김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현실 속 사물과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총 71편이다. '시적 산문'을 산문시로, '공상'을 '상상력'으로 오해하고 있는 소수의 작품을 빼면, 대부분의 작품은 보통 이상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미리 마련한 심사 기준에 유의하면서 모든 작품을 정독한 뒤, 토론 대상으로 삼을 4편의 작품을 선정했는데, '여름의 부피들', '발자국 상점', '구석구석의 힘', '책을 끓이다' 등이 그 작품들이다.
여름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엄마'를 시적 이야기로 다루고 있는 '여름의 부피들'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널려 있는 상투적 비유가 작품을 진부하고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점이 지적되었다.
상상력은 현실에 토대를 둘 때에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발휘한다. '발자국 상점'에서는 여과 장치 없이 생경한 모습으로 드러난 상상력이 독자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상의 전개가 치밀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의 힘'에서의 '구석구석'이라는 핵심어는 추상성에 의존하는 단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웠다.
'책을 끓이다'는 현실 속의 사물인 '책'과 그에 수반하는 작자의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시어 운용의 능숙한 솜씨가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가하고 있는 점이 크게 돋보였다. 시적 화자의 스탠스가 분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장점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와 함께 더 정진하기를 바라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병택 (시인, 문학평론가), 양영길 (시인, 문학평론가)
2. 귤이 웃는다 / 백숙현 (202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숙현 (55세, 원주출생)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의 편수도 역대급이었고.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오랜 수련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윤계순의 「계량」, 서희의 「침전의 방식」, 원미소의 「원룸」, 김송리의 「카블」,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 등이었다. 「계량」은 폐지 트럭의 무게를 재는 계량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삶의 고단함과 “헐값의 부피”를 그려낸 작품으로, 리얼한 현장성과 빈틈없는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침전의 방식」은 감자 전분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평생 고름 쏟던 마음을 치마폭에 담아/ 어레미로 감자 전분 내리던 어머니”와 가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제목처럼 잘 ‘침전’된 비유가 빛을 발했다. 「원룸」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있는 원룸”에서의 일상을 묘사하면서 관계와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카블」은 제목 그대로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블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전장 같은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숨가쁜 리듬과 강렬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최종에 오른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잘 짜인 작품이 주는 익숙함 때문에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였다. 이러한 활달함 속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나”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등의 구절을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장점들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어 최종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설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심사 위원 ; 이문재, 이홍섭 (시인)
3. 세계, 고양이 / 김현주 (202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김현주 ; 1973년 서울 출생, 제주 거주,
라디오 작가, 시와몽상 동인.
[심사평]**"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심사 위원 ; 김명인, 김윤배 (시인)
4. 시소 / 김현주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김현주 ; 1973년 서울 출생, 제주 거주,
라디오 작가, 시와몽상 동인.
[심사평]**시소의 물리적 속성,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응모작이 투고됐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15명이 투고한 15편이었다. 이들 시편은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경험과 고도로 조직된 언어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찾아왔고, 결국 시상의 참신함과 작품의 완결성,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지속 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해 김현주씨의 ‘시소’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소’는 시소가 가지는 물리적 속성인 ‘올라감’과 ‘내려옴’이라는 순환성을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이다. 멀리 떠나지 못하고 높은 데를 향하는 시간과 낮고 얕은 곳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깊이가 높이로 전화되는 순간에 ‘당신’을 발견해가는 사랑의 서사가 아름답게 전해져온다. 시소를 둘러싼 역동적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면서 자신을 규율해온 시간과 불화하고 화해하는 교차점을 그려냈다고 판단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시소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남겼을 잔상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비교적 긴 호흡 속에 구성하는 만만찮은 비유적 능력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이라고 예감해본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시상과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에 더 빛나는 결과를 얻기를 기대해본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심사 위원 ; 유성호 (평론가) ; 김달진문학상·편운문학상·대산문학상 평론부문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계속 쓰는 겁니다 계속 사는 겁니다>
<신동엽 시 읽기> 등 출간
5. 묘목원 / 권승섭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ㅏㅂ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했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젲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권승섭 ; 2002년 경기 수원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심사평]**‘체험의 일단’을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 뛰어나**
올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감상문과 같은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소재를 취하고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변용과 깊은 사유의 맛이 결여된 감상은 넋두리와 소품에 그칠 뿐이다. 구성이 승했던 때에 작위가 문제였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진술은 절제와 엄밀함을 통해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적 문장의 힘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경구를 떠올리며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음을 덧붙여 본다.
‘히에로글리프’는 미술관에서의 감상을 시공을 넘나드는 사유로 확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후반부 이후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에서 길어온 잔잔한 사유가 매력적이지만 마지막 대목에 있는 다소 이질적인 논평자적 마무리가 사족이 되고 말았다.
‘묘목원’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고려함과 동시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한 작품을 내밀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과장과 작위가 없이 단정한 문장을 통해 체험의 일단을 문제적인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에서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게 하는 시적 구성도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심사 위원 ; 정호승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6. 숲을 켜다 / 조이경 (2023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주먹을 내야겠어요 오늘이 새나가지 않도록
블랙 미러 속 환삼덩굴이 투명한 손을 뻗어오네요
엄지와 검지의 잔뿌리를 싹둑 자르고 포레스트 어플*을 켭니다
여기는 역설의 숲, 숲지기는 가위로 가위를 잘라야 해요
비탈진 모래 언덕에 곰발바닥선인장을 심어볼까요
보송보송한 솜털에는 지문이 닳지 않겠죠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샀지요
시간의 나무는 백색소음을 먹고 자란대요
건조한 수요일이 명상을 클릭합니다
함께 심기에 당신을 초대할게요
다달이 선물로 주던 데이터, 이젠 꽃과 나무로 주세요
코인이 쌓이면 낙타의 무릎에도 종려나무를 심어요. 우리
눈을 감고 날숨을 길게 내쉽니다
마른 흙이 빗방울에 놀라 소스라치네요
불모의 한때가 비늘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
내일은 집을 지을 거야
수목 한계선 밖에서 울고 있던 야명조夜鳴鳥 한 마리,
가문비나무숲으로 날아듭니다
가문비나무에선 사철 물소리가 들려요
극지의 바람에는 비의 씨앗이 들어 있나 봐요
바람의 숨결에 집중하며 주먹을 풀지 않는 나무
고요히 겨울을 완성한 가문비나무는
악기의 맑은 공명共鳴이 되죠
새에게서 저녁을 삭제하자 발톱이 새로 돋아났어요
여문 실핏줄을 뽑아 시간의 나이테를 그려요
파랗게 녹명鹿鳴을 풀어놓아요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계획한 일에 몰두한 시간만큼 숲에 나무가 자람.
**조이경 ; 경북 문경출생, 문경 여고, 경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서울 거주,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미래지향적 사유 속에 잔잔한 울림**
2022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부문에 1514편(372명)이 응모하였다.
예년에 비해 많은 응모작들이다.
국내는 물론, 미국, 독일, 필리핀 등 해외 동포들까지 폭넓게 응모한 결과다.
총 372명의 응모자 중 김태익, 양수민, 오솔길, 장윤덕, 김소영, 조이경,
이 6명의 작품 20여편을 본심에 올려 심도있게 살펴보았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문법과
탄탄한 구성, 밀도있는 표현 등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 분의 작품이 또다시 최종심에 올랐다.
장윤덕 「방」은 소통부재의 방에 갇혀있는 화자의 우울한 심사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엮어낸 구성이 돋보였으나 다소 산만하였고,
김소영의 「나는 별빛의 일부」에서 ‘나’라고 하는 양면적 존재를
양자 역학적 관점에서 접근, 인식의 깊이를 보여이고 있으나
결구가 허술하였다.
이에 비해 조이경은 「숲을 켜다」 외 3편에서작품의 완성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모의 현장에서 숲을 찾아가는 야생조 한 마리의 지난한 열망이
안정된 구조와 신선한 문장, 미래지향적 사유의 속에서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 김동수 (시인, 독자 위원장)
7. 극장의 추억 / 이상록 (202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3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내려진 그 극장 간판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나 달아야겠네
*이상록 ;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전 혜광고 교사, 제1회 사하모래톱문학상 시 최우수상 수상.
[심사평]**기억 저편의 사물 포획 솜씨 돋보여**
515명이 투고한 2140편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위원들은 자기표현으로서의 시가 인간학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도록 매우 다양한 삶에 처한 이들이 다채로운 시적 발화를 선보였다.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적 수행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하는 일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과업. 이 어쩔 수 없는 역할을 위하여 걸러낸 시편은 김미선의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외 3편, 박봉철의 ‘만개꽃’ 외 2편, 이도화의 ‘무심코’ 외 2편, 김수현의 ‘무한동화’ 외 2편, 이상록의 ‘추억의 극장’ 외 3편 등이었다. 참신한 감각과 포착, 재치 있는 사변, 환상의 표출, 내면의 환기 등을 그에 어울리는 시적 언어로 건져낸 시편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어디 내어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우선 동의하였다. 하지만 단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과 삶을 지각하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발화의 양상에 더 주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상록의 시편들을 남겼고 그 가운데 ‘극장의 추억’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극장의 추억’은 흑백영화처럼 낯선 추억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서정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어 다소 낡은 느낌조차 없지 않다. 그러함에도 구체적인 시어와 비유를 통하여 기억 저편의 사물을 감응하고 포획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획득한 점도 높이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구체에 육박하려는 태도의 성실함이 뚜렷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이를 계기로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심사 위원 ; 구모룡 문학평론가, 성선경 시인
8. 볼트 / 임후성 (202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임후성 ; 1968년 전남 진도 출생,
세종대 일반대학원 예술학 석사,
2021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심사평]**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신해욱, 오은, 정끝별 (시인)
9. 연착 / 노수옥 (2023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설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노수옥 ; 충남 공주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 중앙대 잉걸회 회원, 글향·안양여성문학회 회원,
18회 김포문학상 시 부분 우수상, 경북일보 청송 객주 문학대전 시 부문 입상
[심사평]**사유의 발랄함·냉정한 시선…신인의 과감함 돋보여**
십여 년 전부터 신인상에 응모하는 작품 속에서 응모자의 성별과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다. 이번 심사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인적 사항을 지우고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방식의 영향이 크겠지만, 신선한 감각과 개성적 사유가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투고된 작품들이 하나같이 세대의 구분을 지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 다시 한번 청춘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고투도 빛나 보였다. 응모작 중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다만 심사자의 입장에서는, 온몸으로 받아낸 자기 체험 없이 손끝으로 매만진 작품의 가벼움은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응모작 행간에 스며있는 사유의 농밀함과 시선의 깊이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이중 ‘마트료시카’ 외 4편,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 ‘버드 세이버’ 외 4편, ‘슬리퍼’ 외 4편, ‘연착’ 외 4편을 시간이 허락하는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읽었다.
‘마트료시카’ 외 4편은 사회적 메시지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성이 돋보였다. 이미지나 의미를 자기 시의 질서 안에 수렴하는 모습이 안정되어 있으나, 의미가 시의 맥락을 선도하려는 태도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은 자기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하지만 이미지로 구축된 시적 세계를 지탱해줄 시적 논리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서 아쉬움이 컸다. ‘버드 세이버’ 외 4편 역시 흥미로웠다. 시에서 다루는 제재가 현실과 밀착되어 있으되, 시인의 은유를 통해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시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못해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슬리퍼’ 외 4편은 나름 자신만의 개성적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어 눈길이 갔다. 하지만 매 시편에서 반복되듯 드러나는 서술어의 변주가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어조는 시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골라야 하는데, 시인의 간섭이 다소 지나치다 싶었다.
결국 당선작으로 ‘연착’ 외 4편을 선정했다. 응모작 5편 모두 오랜 수련의 흔적을 안은 채,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사유의 발랄함과 시적 대상을 뜨겁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발굴해내는 솜씨가 훨씬 값져 보였다. 당선작은 자전과 공존의 정확한 주기로 재단된 세계 속에서, 오히려 결렬이나 연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단면을 은유적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고,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해내는 과감함이 신인으로서 기대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다만 시를 조금 더 현실로 팽팽하게 끌어당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시인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당선자가 세상과 교감하고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자기 시를 쓰며 오래오래 버텨주길 응원한다.
*김병호(시인, 협성대 교수)
10.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이예진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ㅈ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심사 위원 ;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11. 버터 / 박선민 (202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박선민 ; 1997년 경기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심사 위원 ; 김행숙, 황인숙, 이경수, 송경동 (시인)
12. 당산에서 / 신나리 (2023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신나리 ; 1991년 서울 출생,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
[심사평]**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여성…서사의 저력 육화한 수작**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언어와 다른 시선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서들을 재배치하는 데서도 온다. 먼저 ‘새들의 주식회사’는 말과 이미지를 빚어내는 제작술이 돋보였다.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 또한 두루 균질한 편이어서 신뢰할 만했으나 완성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 공간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된 습관’ 외 네 편은 당대의 그늘진 삶을 다루면서도 활달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맥락 속에서 시상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함께 읽은 작품들에서 탈골하듯 드러나는 비유의 도식성은 숙고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당산에서’ 외 네 편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돌리는 시적 운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작은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저력을 육화한 수작이다. 독백이나 넋두리 수준의 사담에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 또한 상투화된 기우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꺼이 시인의 모험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부식토로 깔려 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김사인, 진은영, 손택수 (시인)
13. 구 일째 / 황정희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며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기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황정희 ; 1962년 경북 영주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제1회 경북여성문학상 수상
[심사평]**감정 노출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새로운 시공 ‘매혹적’**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심사 위원 ; 장석남, 나희덕 (시인)
14. 산책 / 차수현 (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차수현 ; 서울출생 대전 거주, 한남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를 경쾌하게 표현**
경제난과 아직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 시인이 창작의 열정을 멈추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왔다. 시를 쓰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 역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시인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시인이 많은 사회는 정치인이나 투기꾼이 많은 사회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214명의 시인 지망생이 총 1589편의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 23명의 시 134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오랜 시간 검토하여 이영숙의 ‘태풍주의보’, 서승환의 ‘3D 큐브 레이아웃’, 차수현의 ‘산책’,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 이 4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영숙의 ‘태풍주의보’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표현이 매끄러우나 시적인 시상의 새로움과 시적 표현의 참신성이 부족해서 제외되었다.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는 주제 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사유의 깊이를 전개해 내지 못해 최종심에 오르지 못했다.
서승환의 작품과 차수현의 작품 두 편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래 고심했다. 두 편 모두 표현의 참신성과 주제의 밀도가 장점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서승환의 ‘3D 큐브 레이아웃’은 어항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한 측면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우리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등 오랜 창작의 숙련 기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진 문장들이 흠이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차수현의 ‘산책’을 선택하는 데 합의했다. 차수현의 작품에서는 뛰어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산책하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쾌한 언어가 반대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말해주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잘 살아 있어 시의 주제 의식을 강화해 주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전환이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운문의 효과를 아주 잘 살려내고 있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친 듯한 작품의 완성도와 신인으로서 보여주는 참신한 패기가 모두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런 좋은 작품을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어 기쁘고 뿌듯하다.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 위원 ; 황정산 (평론가), 신미균 (시인)
15.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2023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안시표 ;
[심사평]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정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의식으로부터 제법 사이 띄기가 된 것인지, 몇 해 동안 보이던 어둡고 우울한 감상성이 어느 정도 걷혀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아 반가웠다. 좋은 시는 능란한 기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과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통찰하는 자기 성실성에 의해 산출된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시가 언어를 몸체로 하는 한, 언어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자기 감상에 먼저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시, 그러면서도 상상력의 참신성과 가능성을 갖춘 좋은 시에 주목하였음을 밝혀둔다.
응모작 중 심사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시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 작품만을 당선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미향의 '속도의 풍장'은 버려진 자동차를 통해 인간 삶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데,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박행신의 '지워질 줄 알았다'는 어머니와 목기에 얽힌 서사적 모티프를 산문시형으로 구성하면서도 끝까지 서정적 긴장을 놓치지 않은 뚝심이 돋보였다. 최서정의 '풍경사(寺)'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정경들을 풍경의 사찰로 응시하는 독특한 상상력과 성찰의 언어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의 자리에는 안시표의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는 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소(沼)와 소(牛)의 동음이의어로 교직하고 있는 상상력의 확장성, 장소 체험으로 환기하는 그리움의 서정성, 소환된 기억을 늪에 사는 생물들로 구체화시키는 예민한 감각, 한 편의 시를 마치 언어로 그린 수채화처럼 보여주는 이미지의 선명성 등이 그것이다. 표현이 난삽해지거나 의미에의 집착을 범할 수 있는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으로서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또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김동근 (문학평론가, 전남대 명예교수)
16. 멜로 영화 / 이진우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진우 ; 1988년 서울 출생, 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
영상 촬영 프리랜서.
[심사평]**당선자가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살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열세 분의 작품들이 취업 절벽, 사회 양극화, 저출산, 이주 노동, 기후 재난 같은 사회의 현안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분이란 미시적 영역에 천착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번 신춘문예의 공동 주제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메아리이고, 생의 사소한 기미를 머금은 감정 생활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기분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쏠림은 다소 염려스럽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오늘의 비정한 세태를 반영한 징후이고, 자기애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탓이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감정의 굴곡인 기분이 어떻게 시의 모티브가 되는가를 눈여겨볼 수밖에. 먼저 경험과 이미지 사이 표면 장력이 작동하는 힘이 느슨한 시, 얕은 경험과 조각난 이미지의 흩어짐으로 끝나는 시, 감각적 명증성을 견인하는 데 실패한 시를 걸러냈다. 최종으로 남은 ‘멜로 영화’ 외, ‘손자국’ 외, ‘연안’ 외 등등은 좋은 시는 “운명을 동봉한 선물”(파울 첼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변곡점일 수 있는 순간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명증성을 붙잡은 한 응모자의 ‘멜로 영화’ ‘홈커밍데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은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서점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 읽고 싶다는 게 우리 속마음이다. 당선 문턱에서 멈춘 두 예비 시인께도 아낌 없는 박수를 드린다.
*심사 위원 ; 장석주, 김기택 (시인)
16-1. 홈커밍데이 / 이진우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17.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 최주식
(202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최주식 ; 1964년 부산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재학 중,
현재 월간 ‘오토카코리아’ 편집장.
[심사평]
응모된 시의 경향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시, 실험적인 시, 새로운 감각의 시로 분류할 수 있었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젊은 세대의 독특한 언어 감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심사위원들은 십여 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쪽방촌 오르트 씨’, ‘미행’,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세 편의 시를 놓고 마지막 논의에 들어갔다.
세 편의 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세 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음미해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세 작품이 각각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어서 심사위원들 간의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선작을 내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쪽방촌 오르트 씨’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기법적 완성도도 높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도 뛰어났다. ‘미행’은 담백하면서도 깊이와 품격을 지닌 좋은 시였다. 재치 있는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풋사랑을 그려낸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였는데 특히 뒷부분의 반전이 좋았다.
좋은 시에 필요한 요소는 많다. 언어의 깊이와 생각의 높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감의 폭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올라온 세 편의 시는 모두 이런 요소를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 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의 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감의 폭이 가장 넓은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은 언어 감각이나 호흡 면에서는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이 점은 시를 계속 써나가면서 점점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선보일 좋은 작품을 기다려 본다.
*심사 위원 ; 김이듬, 김참, 손택수 (시인)
18. 가장 낮은 곳의 말(言) / 함종대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무에 물오르듯 올라온다
머리를 낮게 숙여 두 손으로 발을 잡아본다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는지 볼까지 흠뻑 젖었다
개울이 발의 울음소리까지 보듬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산의 발등이나
나무들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개울도 울컥거릴 때가 있어 강에 발을 담근다
바다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하구를 보듬는다
장사가 어려워 가게를 폐업하던 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뭍의 등을 철썩철썩 쓸어내린다
*함종대 ;
[심사평]**“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
‘시인은 ‘시’를 매개로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준으로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 673편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행복하였다. 너무 많은 비유가 오히려 흠집을 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사물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역량껏 드러낸 좋은 작품들은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새겨읽고 싶었다.
여러 번 정성 들여 읽는 단계를 거쳐 1차로 선정한 일곱 작품은 「서폐」,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 「동백낭 아래」, 「회색 늑대」, 「유성」, 「마두금」이었다. 일곱 개의 시를 되풀이하여 읽고 난 후 「서폐」와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을 2차로 선정하였다.
박승균 님의 「눈과 발」은 적절한 수사와 시적 장치들이 좋았고, 차분하게 주제를 끌고 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읽을 맛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그리고 어느 작품에선가 본 듯한 결말이 마음 한구석을 서운하게 했다.
노수옥의 님의 「서폐」는 ‘책허파’라는 독특한 소재를 온전히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능숙한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작품의 분위기를 책임지는 시적 화자의 시선 처리와 묘사도 정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했으나 매우 아쉽게 되었다.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함종대 님의 「가장 낮은 곳의 말」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가장 낮은 곳의 말」은 시상을 무리하게 전개하지 않으면서,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매끄럽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도 시의적절하였다. ‘발톱’이라는 오브제에서 시작한 시적인 사유를 거침없이 확장해내는 활달함도 돋보였다. 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해내는 점도 작가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했다. 대한민국 시단에 무르익은 기량을 맘껏 펼치시기를 바란다.
*심사 위원 ; 김영 (시인, 전북문학관장)
19. 드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 민소연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민소연 ;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심사평]**“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심사 위원 ; 안도현, 유성호 (시인, 평론가)
20. 레드문 / 권영유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파이
오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 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권영유 ; 1965년 경북 김천 출생,
경기 김포 거주, 김포문예대학 16기~20기 수료
[심사평]**참된 삶의 의미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 돋보여**
한국 문학의 샛별이 될 신진 시인의 산실인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응모작품 편수가 지난해보다 늘었다. 시인 지망생이 늘었다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미학이 지닌 성찰적 인식을 수용해 삶의 가치를 북돋우려는 의식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 저변에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 열정을 담은 많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고무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전체 응모작에서 여덟 편의 작품을 가려낸 후 논의를 거쳐 ‘막판의 자세’, ‘창문 외전’, ‘퍼즐’, ‘레드문’ 등 네 편의 작품으로 축약해 숙고했다. ‘막판의 자세’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과 서사의 진행이 진지하면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표현이 평이했고, 의식 깊숙한 곳에 은폐된 문제를 사회성과 결부시켜 의미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창문 외전’은 비유를 통한 언어의 직조가 신선했고 시적 전개가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후반부에서 긴장감이 풀려 있었고 마무리가 미진했다. 좀 더 치밀하게 사유를 갈무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퍼즐’은 사고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주제의식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부한 표현들이 한계로 지적됐다.
‘레드문’은 일상적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시가 밀도를 더하면서 마침내 삶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의를 끄집어내는 상상력은 이 시를 견인하는 힘이다. 아쉬운 점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다소 거칠더라도 당대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첨예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논의와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레드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개기월식을 보면서 이를 숙련된 솜씨로 형상화해내는 자연스러운 시적 시선, 그리고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을 보여준 응모자의 시적 잠재력에 신뢰를 걸어보기로 했다. 더욱 정진해서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고대한다.
*심사 위원 ; 성선경, 배한봉 (시인)
21. 활어 / 황사라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황사라 ; 익산 출생,
동국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
<심사평>**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 시적 진정성**
이미지의 부조화와 언어표현의 부정교합으로 빚어내는 파격미 혹은 의외적 정서충격도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했을 때 유의미하다. 투고한 많은 작품들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강박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험적 언어표현을 과도하게 구사한다든지 열린 언어 구조로 너무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떠넘기는 경우를 본다. 의미맥락을 간추릴 수 없거나 일상적 의미맥락에서 너무 멀어진 경우가 많다.
주제의 치우침 현상 때문에 예심을 넘어서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회적인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었을 때 변별력을 잃고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개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투고된 많은 작품들에서 산문화 경향이 뚜렷했다. 압축과 생략 그리고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는 (혹은 감추어두는) 시의 언어적 속성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긴 시간 고립된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문장 특성도 자주 발견되었다. 고립된 시간을 견디며 혼자 읊조리는 독백형, 사변형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배출 혹은 배설과 다른 지점에서 씨 쓰기의 이유는 찾아져야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우려를 하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아보카도', '밀리터리룩의 이중성', '활어', '검은 고양이'다. 이 작품들과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도 참고하여 시인이 그의 시 세계를 계속하여 펼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도 가늠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아보카도'에서 견디기 힘든 폭염 속 시적화자는 “비닐하우스가 녹아내려 그 안에 자라고 있던 푸른 식물들이 다 타버릴지도 모를 날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밀리터리룩의 이중성'은 위선과 관능과 관음을 도덕으로 위장한 ‘이곳’(도시)에서 ‘그곳’으로의 이탈(혹은 일탈)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시의적절한 문제의식과 함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단순 서사에 머물거나 설명적 요소가 강하여 형상화가 미흡하다거나 정서 수준으로 용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검은 고양이'는 빚어내는 이미지가 발랄하고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이 흥미롭다는 점에서 눈이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상상이 과잉된 측면이 있고 그 어떤 메시지로 수렴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활어'는 바닷가의 삶에서 읽어낸 활력과 긍정의 힘을 그려낸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끌어가는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그가 펼치는 정서에 신뢰를 갖게 하는 노련함이 보인다. 서정성도 잃지 않고 있다. 그 어떤 섬광 같은 새로움이 아쉽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 역량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의 없이 「활어」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심사 위원 ; 김사인(문학평론가), 복효근 (시인)
22. 결빙 / 윤계순 (2023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윤계순 ; 충남 청양군 장평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사회복지학 석사),
2021년 공직문학상 수상,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심사평]
불교신문이라고 해서 불교 소재나 공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강박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두 해째를 맞은 한국불교신춘문예 시부문의 첫인상을 공유하면서 심사위원들은 200여 명의 1,100편이 넘는 작품 중 예심을 통과한 김동임의 ‘꽃’ 외 4편, 조현미의 시조 ‘분꽃, 누이’ 외 4편, 윤계순의 시 ‘결빙’ 외 4편을 중심으로 최종 심의에 들어갔다.
우선 ‘꽃’은 상징계의 제도 언어에 대한 부정의 어법이 소박한 가운데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소품이었으나 동봉한 단형 시편들의 편차가 극심하여 안정감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조 ‘분꽃, 누이’는 방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옮겨오면서도 은유의 동일화 욕망을 저만치 여의면서 리듬과 형상과 뜻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룬 가편이었다. 형상과 뜻이 경직되지 않도록 시조의 리듬을 조직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당선권을 다툴 만하였으나 역시 함께 읽은 ‘어떤 곡예’ 같은 작품의 기시감을 쉬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이미 기성의 시조들과 경쟁을 하고 있으리라 예측되는 이 시인이 돌파해나갈 세계의 기꺼운 파열을 기대하는 것으로 미련을 달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당선작 ‘결빙’은 불교 소재의 선입견을 극복하면서 재배치를 통해 오리려 낯설게 만드는 인식의 렌즈가 돋보였다. 결빙의 물리적 현상에서 손뼉 치는 논쟁과 합의의 동시성을 읽는 눈은 결빙과 해빙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손쉬운 진술이나 설명이 아니라 제시된 이미지에 의해 역설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집중적인 관찰력과 성실한 묘사력, 뜻의 과잉 전달과 일방통행을 유연하게 만드는 시적 이미지의 힘이 크다고 하겠다.
당선자와 참여해준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아울러 한국불교신문의 지극한 노고와 보람이 보다 드넓은 지평 위에서 지속할 수 있도록 문학장 안팎의 관심 또한 증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심사 위원 ; 안도현, 손택수 (시인)
23. 외갓집 / 윤연옥 (2023년 제29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윤연옥 ; 1954년 충남 천안 출생,
청주여고, 충북대 사범대(물리전공) 졸업,
전 중등교장 정년퇴임(2016)
한국문인 김소월백일장 운문부문 장원(2021)
푸른솔문인협회 도민백일장 운문부문 장원(2022)
새한국문학회 회원, 경암문학회 회장
[심사평]**“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보다 많은 작품(588)으로 늘어났지만 미숙하고 난무한 작품들이 많았다.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이 예년보다 떨어지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 김길중의 ‘컵라면’에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의 몸매와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짙은 어둠과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 정황을 엿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낡은 일기장에 작은 파편 같은 가을이 데려온 바람, 햇볕 냄새가, 툇마루 뒹굴던 추억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그리움으로. 찬바람 속의 허기와 장독대 항아리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아 먹던 시절의 외가의 추억들을 일떠세워. 사랑의 자취들을 속에서 읽어낸다.
가뭇없이 떠나가는 한 조각 속에서 무심의 공덕이라며, 해조음의 하늘만 본다. 여기서 해조음은 불타의 관음음으로 세월 속에서, 하냥은 함께의 방언으로. 무심의 삶속에 살아나고 있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이 돋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
24. 청벚 보살 / 이수진 (202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이수진 ;
[심사평]**시심과 신심에서 태어난 환희의 노래**
불교신문 ‘2023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와 시조 작품들을 상세하게 읽었다. 시적 경향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작품들과 불자로서의 내면을 살피는 작품들이 많았다. 불교신문의 신춘문예가 불자 문인을 발굴하는 등용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 선정을 위해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탁발승’, ‘물의 집’, ‘청벚 보살’이었다. 시 ‘탁발승’은 “절 아래 마을”로 탁발을 떠나는 수행자의 여정을 순차적인 시간을 따라가며 노래했다. “염소의 부러진 뿔을 쓰다듬고/ 늙은 도요새의 남루를 여며주었네”라고 쓴 시행의 끝자락은 공양물을 받는 탁발의 일을 오히려 마을 대중에게 베푸는 일로 적음으로써 탁발의 궁극적 의미를 장엄하게 부각시켰다. 다만, 탁발을 나선 주체가 선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맹그로브 나무로 의인화함으로써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시 ‘물의 집’은 시상이 빛나는 대목이 많았다. “백무리 물고 웃는 함박꽃 환한 마당”이라고 쓴 시구에서는 흰색의 밝은 색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심우도 빛바랜 벽엔 홀로 깊어 부푸는 달”에서는 빛이 바랜, 시간이 쌓인 벽과 달이 내뿜는 그 신생의 빛이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쑥 들어가고 부드럽게 튀어나온 질감 또한 대조적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있는 시공간이 현실의 시공간인지 상상의 시공간인지가 불분명했고, 절의 공간과 세속의 공간 또한 뒤섞여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고심 끝에 시 ‘청벚 보살’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시심이 매우 맑았고, 또 무엇보다 깊은 신심을 시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청벚나무를 시적 주체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곧 구도 수행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벚나무)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라고 써서 청벚나무가 개화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고, 깨달음을 향한 희원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거리감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라고 쓴 결구에서도 귀의와 경배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신심을 바탕으로 웅숭깊은 찬불의 시편들을 계속 보여주길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 문태준 시인
25. 박스에 든 사람 / 박장 (2023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박 장 ; 1971년 제주 출생,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다층적 구성…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 포착**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평이한 감각에 머물거나 시적 긴장을 견인하는 힘이 부족한 작품들이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축한 절제의 미학과 시어의 갱신을 이루어낸 작품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재독과 윤독을 거쳐 5편으로 압축한 뒤 다시 3분의 작품을 두고 최종적으로 깊은 논의를 거쳤다.
박이음의 시는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툭툭 끊기는 질문과 대화들 속에는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담겨 있었다. 내밀한 고백과 연계된 낯선 이미지가 감정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적 대상의 관계와 상황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아 시적 주체의 사유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주제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능력도 좋고, 시의 도입부를 도발적인 진술이나 감각적인 묘사로 제시하여 흡인력 또한 있었으나, 환상적인 상황 설정이 혼돈스러운 시적 전개와 맞물려 의미를 잡기 어려웠고 흐릿한 환상으로 처리된 종결부에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면이 아쉬웠다.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편차가 있다는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선민의 시는 새로운 발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중심에서 이탈되거나 인식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낯선 사유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정해진 중심과 질서가 포섭하지 않는/ 못하는 주변의 것들, 중간과 평균으로 재단된 것들 너머를 지향하는 이미지들이 교직되면서 주제로 응집되어 시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상력의 폭이 예상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고, 관념적인 진술이 사유의 깊이를 동반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동어반복에 그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투고된 작품들이 엇비슷한 시적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목소리도 일정해 단조로운 인상을 받았다. 시적 대상과 현실의 고통이 맞닿는 자리를 섬세하게 잇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박장(본명 박미영)의 시는 언어의 내포와 외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 역전된 현실에 대한 감각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있었다. 시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형식적 실험과 세계 내의 상징적 폭력에 따른 고통이 핍진하게 담겨 있었다. 일상적 상황과 사건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시적 상상이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행한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해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박스에 든 사람'은 자본주의의 상품 체계에 종속된 삶, 비굴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존재가 지워지는 현실이 아버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삶의 힘겨움과 겹쳐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간명한 상황 전개가 주는 시적 긴장, 안과 밖을 역전시키는 상상력, 언어의 굴곡과 뒤틀림을 통해 찢어지고 뜯어지고 구겨진 삶의 맨살이 드러난다. 주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지워진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이 신인의 단단한 내공이 앞날의 시작(詩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 위원 ; 손진은(시인), 신철규(시인)
26. 등등 / 김미경 (2023년 전남매일 골드문학상 당선작)
요즘 뒤에 있는 것들이 좋아집니다
당신처럼, M에게도 빈티지 공간 하나 있었죠 그때 M은 무척 어렸고, M을 업었던 등은 순하고 따뜻한 조도를 갖고 있었어요 잠투정하던 M이 눈물 콧물 번진 얼굴로, 그곳에다 새근새근 잠을 기대놓으면, 달빛도 베이지색 커튼을 수직으로 드리웠죠
그거 아세요
이 세상 어린 잠들은 모두 수직이 키웠다는 거
비밀스런 달의 뒤뜰도, 사다리타고 내려오듯 위에서 아래로 점점 깨어나고, 이따금 놀다가던 천왕성도, 목련꽃 켜 둔 그녀의 뒤란까지 따라왔던 초록 이파리도, 명지바람이 업어 키웠죠 달이 지구 그림자를 컬러로 인화해 준다는 뉴스가 뛰어다니던 날, M은 쓰러진 그녀를 업고 응급실로 달리던 중이었다는데요
건초처럼 가벼워진 그녀 몸이
M의 등에서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렸다는데요
그동안, 들판과 벼랑마다 피는 꽃이 달랐던 것도 다 그 이유였을까요 늙은 수직은 어린 수직 위에서 온전히 잠들기 어려웠을까요 그 등에는, 당신의 위급한 잠조차 기대기 아까웠던 걸까요
의사선생님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응급실에 불안한 숨을 눕혀놓고서, 시든 파 같은 그녀 등이, 그믐달보다 어둡게 식어가는 걸 보았다는 M, 어떻게 알았는지 공중을 열고 문병 온 태양도, 가로보다는 세로의 언어로 토닥이다 가고, 달도 허공에 벽지처럼 서서 회복을 기다렸다는데요
M의 빈티지 침대는
꿈속에서, 울고 보채던 어린 벼랑을 등에 업은 채
신음하다 눈 감았고요 숨진 침대를 상여가 -어영차 수거해갔죠
우리는 따뜻한 수직의 잠을 기억하는 족속들,
M을 본 건 며칠 후였습니다
잔뜩 웅크린 어깨로, 사망진단서 팔랑이는 손을 데리고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그 앞을 스친 버스 안에는, 흔들리는 손잡이에 오늘 태어난 졸음을 기대놓은 사람들,
사람들이 저녁마다 집으로 향하는 것은, 자신의 등 어디쯤에 있는 벼랑 하나가, 어리거나 늙은 주인들을 애타게 부르기 때문, 당신이 퇴근하는 골목이 가끔씩 캄캄한 것도, 등에 업은 아기 깰까봐 가로등도 자는 척 눈 감았기 때문이죠
*김미경 ; 1963년 해남 출생, 성결신학대 신학과 졸업,
필리핀 트리니티 칼리지, 필리핀 라살대학교 대학원 과정 수료.
[심사평]**시적 사유의 깊이와 상상력에 중점**
책상에 쌓인 원고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삶이 팍팍한 시대에도 문학을 향한 열기는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시적 사유의 깊이와 시적 구성, 상상력의 폭과 넓이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그중에 ‘광합성 야구’, ‘서부 우회도로’, ‘기억제본공장’, ‘등등’이 군계일학처럼 눈에 들어왔다.
‘광합성 야구’는 아버지의 서사를 ‘오렌지’와 연결한 참신성이, ‘서부우회도로’는 ‘누룽지 냄새’로 그려낸 그리움의 풍경이, ‘기억제본공장’은 책을 제본하듯 기억을 제본해 나가는 상상력이, ‘등등’은 “수직”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한 점이 참신했다. 엄마의 등도 햇살도 벽도 수직성으로 ‘어린 것’들을 키워낸다는 발상의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작품들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울림의 폭이 큰 ‘등등’에 손이 갔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에서도 사회적 현상과 문제를 바라보고 새롭게 표현하는 등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소통의 폭이 큰 점도 믿음이 갔다. 큰 축하를 보낸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당선되지 못한 분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강대선 (시인)
27.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김혜린 ; 1995년 서울 출생,
숭실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심사평]**‘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 위원 ; 나희덕, 문태준, 박형준
28. 나방의 긍정 / 오후랑 (202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낮은 열두 시간 더하기 열두 시간 꺼지지 않는 낮은 좀 우울 했어요 내 표정을 보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므로 그건 예외이고요
그래요 꽃 말고도 내게 향해줄 것을 찾다가 지난밤을 밤이 아닌 것처럼 꼴딱 샌 거죠 불어터진 라면발 같이 풀어진 졸음과 갓 삶은 계란처럼 뜨거운 열정이 마구 섞여 골라낼 이유 없는 은밀한 밤의 계단을 지나면
요란한 풀밭이 나와요 나는 투명 수채화처럼 색칠됐고요 겨드랑이가 부서질 듯이 날아봤어요 거친 붓칠 같은 숨결들이 빙빙 돌며 나의 길을 더 어지러이 파닥이게 하는 그런 일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가령 별이라든가 주머니라든가 물론 작명소에 들러야죠 아핫 아버지 아시면
날갯죽지 확 꺾어 버리고 호적 파버린다 하실 텐데
괜찮아요 이미 얼굴을 다 잊어버린 이름들과 꽃 같은 조명 밑에 납작 엎드려 본 것이나 나선으로 머리를 흔들어대며 다 드러난 나를 외워댔던 일이나 또 너무 멀어 다시 올 리 없는 환각의 벽에 아주 시원하게 박치기를 해봐서
무서운 게 없어요
*오후랑 ; 1980년 완도 출생, 목포 가톨릭대학 졸업.
[심사평]**“참신한 발상 안정적으로 끌어가는 솜씨 일품”**
본심에 올라온 일곱 분의 작품에서 먼저 네 분의 작품을 가려 뽑았다. 김태춘의 시는 빛나는 문장이 있었다. “자고나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거야/바보 같은 바나나가 범인이라니” 같은 구절은 낯설고 참신하다. 오후랑의 시는 참신한 발상을 끌어가는 솜씨가 일품이었으며 언어유희나 은유와 상징 사용에도 능했다.
이은정은 어떤 것이 시가 되는지는 알고 있다. 특히 ‘낙하’에서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한꺼번에 실려 온 걸음 같아/난간에 부딪히는 발소리”로 표현한 대목이 좋았다. 김혜윰의 시는 특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손을 놓친 듯/나의 목소리는 끝까지 잠기고 있습니다” 같은 구절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 중 두 사람으로 선택지를 줄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은정은 어떤 발견과 인식이 자기만의 개성에 이르지 못했다. 반전이나 재해석 없는 나열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김혜윰의 시는 이미지나 진술들이 파편화 되었다는 점이 약점이었고, 시상을 끝까지 전개해 가는 힘이 약했다.
김태춘은 시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고, 시적 감수성이 좋았다. 다만 “대상 없는 저주가 술병에 쌓이고 우리는 불판 위에서 자폭 한다” 같은 문장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웠고, “먼지 자욱한 광고가 끌고 가는 늘어진 시간” 같은 경우에도 관념을 사물화 한 점은 좋았으나, ‘광고가 끌고’에서 ‘끌고’에 의문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문장의 옥석을 가려 더 밀도 높은 시를 써낸다면,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후랑의 ‘나방의 긍정’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어떤 작품을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이 골랐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특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같은 엉뚱해 보이는 진술이 시적 일관성 속에서 살아있다는 게 돋보였다.
*이대흠 (시인) ; 창작과비평 등단,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조태일문학상 등 수상,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 등
29. 데칼코마니 / 한이로(필명) [2023년 영남일보 신인문학상]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 꼬리 살짝, 올라간다
*한이로 (필명) ; 1973년생, 현재 부산교도소 장기복역수,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
'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 위원 ; 이하석, 전동균 (시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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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부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춘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