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 하나
-상경어린이 문학상 수상작을 중심으로
강정규(동화작가)
나이 들면서 이런저런 정기 간행물이나 단행본의 머리말 또는 발문을 자주 쓰게 된다. 이 원고도 그중 하나인 셈인데 나는 솔직히 지난해 동시집 까지 냈지만 동시는커녕 시도 제대로 모르는데 거기다 어린이 시라니,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현장에서 직접 어린이들을 대할 뿐만 아니라 지도 연구까지 하고 계신 선생님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내 의견은 섞을 필요 없이 지니고 있는 자료나 하나 정리해 보내야겠다고 결론지었다.
여기 소개하는 글들은, 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15년 동안 ‘시와 동화’가 주관한 ‘상경어린이문학상’ 어린이시 부문 수상작들이다(이 문학상은, 고 장재녀 여사의 아드님인 시인 김승배 선생이 평생 자녀교육을 위해 애쓰신 어머님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제정했다).
매년 으뜸상 한 편만 소개하다가 2013년 치만 두 편을 뽑았다(편의상 제목 앞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1. 산
윤석호(서울 외국인학교 4년)
새들은 떠들어도
산은
조용히
듣기만 해요.
산은 키가 커도
작은 풀을
정성껏
키워 줘요.
나는
산을
닮고 싶어요.
(1999년 제1회 대상 수상작)
2. 열매
이혜진(대구 만천초 5년)
할아버지는/배나무 밑에서/조심스레/봉지를 열어 보았다./“어이구, 꽤 컸구나.”//둥글고/누렇게 익어가는 배/주름진 얼굴에/번지는 미소//까치가 쪼을까/조심조심/조심조심/봉지 묶어 놓고//이쪽 작은 나무에 달린 것/저기 키 큰 나무에 열린 것/하나씩 살펴보며//“아직 멀었어./더 커야지.”//포대기 속/아기처럼/들여다보며 얘기하시는/우리 할아버지//봉지 속/노란 배는//할아버지/얘기 듣고/익는다//아무도 모르게/열매 속에/가을이 익는다.
(2000년 제2회 최우수상 수상작)
3. 고향
김현아(대구 동원초 6년)
2층 양지쪽/줄지어 앉은 포도 박스에/흙이 채워졌다.//할머닌/고향 청도에서 가져온/상추씨도 심었다./배추씨도 심었다./고추씨도 심었다.//쏘옥 고개 들고/싹이 텄다./움쑥움쑥 자랐다.//요건 배추밭/조건 상추밭/저쪽 건 고추밭//배추 잎이 파릇파릇/상추 잎이 야들야들/풋고추가 조롱조롱//해님이 내려왔다/흰 나비가 날아왔다/살랑바람이 놀러왔다.//우리 집 2층으로/이사 온/할머니 고향//고향에서/사는 우리 할머니.
(2001년 제3회 대상 수상작)
4. 털보 꽃
임혁규(광주 경양초 5년)
작년 여름/분리수거 통에서/주어 온 화분 하나/“쯧쯧 불쌍하다.”//앙상하고 보잘 것 없는/털보잎 세 장뿐/일 년 내내/엄마와 나는/정성껏 물을 주고/따뜻한 햇볕도 쐐주었다.//털보는 서서히/건강을 되찾았다.//드디어 올 여름/털보는 보라색 꽃봉오리를/마음껏 자랑하더니/여섯 송이의/보라색 꽃을 피웠다.//어려움을 이겨내고/엄마와 나에게/기쁨 가득 안겨 준/털보 꽃
(2002년 제4회 최우수상 수상작)
5. 할머니 병실에서
허지혜(부산 동향초 5년)
할머니가 누워계신 병실에
할머니의 등뼈 사진이 걸려있다.
박물관에서 본 동물의 등뼈처럼
둥글게 휘어있는 하양 등뼈사진
언제나 궂은 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바쁘게, 바쁘게 살아오신 할머니는
저렇게 굽은 등뼈를
남몰래 몸속에 감추고 계셨구나.
햇살도 가려버린 어두운 병실에서
할머니의 굽은 등뼈 사진 한 장만
활처럼 하얗게
살아가고 있다.
(2003년 제5회 최우수상 수상작)
6. 오징어
김병수(김해 동광초 4년)
고깔모자 쓰고/내 생일이라고/온 바다 안을/휘젓고 다닌다.//어제도/생일/오늘도/ 생일//오징어에게/선물 하나 안 줘도/아무 소리 하지 않고/신나게 /헤엄친다.//생일도/많아서/ 다리도 많은가 봐!
(2004년 제6회 최우수상 수상작)
7. 가을 밥상
이은철(제주 서초 3년)
완두콩을 설탕에 찍어 먹고
고구마도 삶아 주시고
애기배추로 쌈도 싸주시던
할머니
봄부터 누우신 할머니
가을 밥상보고
우신다.
(2005년 제7회 대상 수상작)
8. 휴전선
김유라(서울 치현초 5년)
휴전선도 많이 늙었겠지?
못 가게 막느라 힘들었을 거야
가시 팔 들고
막느라 그래서
온 몸이 녹슬었을 거야
보내주고 싶어도
눈치 보느라
못 보내주는 거야
(2006년 제8회 대상 수상작)
9. 이구아노돈 공룡
이해솔(서울 동교초 1년)
등이 굽은
할아버지 같은 이구아노돈
힘없는
할아버지 같은 이구아노돈
옹기종기
사이좋은 이구아노돈
겉만 힘없이 보이는
할아버지 같은 이구아노돈
(2007년 제9회 대상 수상작)
10. 배추벌레 이유진
허진원(울산 온남초 2년)
배추벌레는 배유진의 별명이다.
배추벌레는 잎을 갉아먹지만
배유진은 잎을 갉아먹지 않는다.
배유진은 수다를 떨지만
배추벌레는
수다쟁이가 아니다.
(2008년 제10회 대상 수상작)
11. 옆집 할아버지
최원혁(동해 북평초 5년)
오늘도 옆집 할아버지를 봤다.
“안녕하세요?”
축구를 하다가도 할아버지를 보면
“안녕하세요?”
마치 우리 할아버지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항상 놀아주시던 할아버지
난 옆집 할아버지가 좋다.
집이 잠겨 집에 못 들어간 날
옆집 할아버지가 날 데려가셨다
다음날 엄마가 주신
찐빵 한 접시 들고 옆집으로 걸어간다.
할아버지가 날마다 부르던 별명
똘콩! 하며 웃어주신다
(2009년 제11회 최우수상 수상작)
12. 식빵과 할머니
김기현(jha home school 2)
할머니가 식빵을 주신다.
이리 봐도 맛있겠고
저리 봐도 맛있겠다.
할머니도 나도 식빵을 좋아한다.
땅콩 잼을 바를까?
딸기 잼을 바를까?
갈팡질팡 한다.
(2010년 제12회 최우수상 수상작)
13. 머리 깎은 날
홍유석(안성 비룡초 4년)
머리를 잘 깎는다고
아빠가 데려간 미용실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오는 미용실
내 차례가 되어
의자에 앉았더니
잠시 후 내 머리는
개떡이 되었다.
슬퍼서 앞으로 절대로
그 미용실 안 갈 거다.
(2011년 제13회 대상 수상작)
14. 이상한 우리 엄마 아빠
유지수(내혜홀초 6년)
엄마랑 아빠랑 며칠째 싸운다.
이제는 서로 말도 인사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아빠한테 밥도 차려주지 않으시고
아빠는 엄마 전화도 받지 않는다.
나도 화가 나서
아빠한테 인사를 안 하면
아빠한테 꼭 인사하라는 우리 엄마
내가 엄마 말 안 듣고 말대꾸하면
엄마한테 그러면 못쓴다는 우리 아빠
서로 맨 날 싸워도
서로를 챙겨주는 이상한 우리 엄마, 우리 아빠
(2012년 제14회 대상 수상작)
15. 딱지
주수현(천안 불당초 1년)
딱지를 치다가
딱지가 하수구에 빠졌다.
하수구가 먹었다.
기분이 안 좋다.
엄마한테 일러야겠다.
(2013년 제15회 대상 수상작)
16. 심술쟁이 바람
송효주(충주 남산초 2년)
학원차를 놓쳐
집으로 가고 있었다.
너무너무 짜증나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불던 바람이 휭, 불어
침이 내 옷에
딱 붙었다.
(2013년 제15회 최우수상 수상작)
첫해에는 시 3백 26편, 산문 6백 75편이 응모되었다. 2회 때 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3회 심사소감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어린이 시 응모 편수가 산문의 배에 가깝고 수준 또한 월등히 높았다. 특히 대상 수상자 김현아의 작품은 어린이가 썼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담임교사, 글쓰기 선생님, 부모님, 본인에게까지 확인을 거쳤고, 산문의 경우는 이 같은 확인과정에서 최우수작이 표절로 들어나 해당 작품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4회 때는, 고 유경환 선생님이 심사를 하셨는데 “최우수작 ‘털보 꽃’은 선인장을 소재로 하여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분리수거 현장에 버려진 생명에 정성을 부어, 마침내 꽃을 피워낸 경험에서 교훈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5회 때도 유 선생님이 심사를 맡으셨는데, “일반적으로 저학년 어린이들의 발상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옮겨진 반면 고학년 어린이 작품이 그러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도를 따져보면 고학년 어린이 글이 돋보인다. 수상작 ‘할머니 병실에서’에는 어린이 나름의 철학이 들어있다.”고 소감을 남겼다.
7회 때도 역시 유 선생님께서 심사를 맡으셨는데, 수상을 바라고 어린이 글에 어른(지도교사나 글쓰기 학원)의 손길이나 입김이 닿는 것을 염려하셨다. 8회부터는 이상교 선생님이 심사를 맡으셨는데, 다음과 같은 소감을 써주셨다.
“수상작 ‘휴전선’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거나 실제로 보았거나 남북이 서로 오가지 못 하도록 쳐놓은 철조망을 보고 제 나름대로 상상하여 쓴 시다. 가시 팔을 들고 서서 막느라 온몸이 녹슬었을 거라는 어린이다운 생각에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는 걸’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저학년 어린이들의 시가 좀 더 많이 입상권 안에 들었다. 이것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멋을 부려 어린이다운 수수함을 잃은 까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9회 때 대상으로 뽑힌 ‘이구아노돈 공룡’에 대해서는,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모두 뛰어났거니와 ‘……겉만 힘없이 보이는/할아버지 같은 이구아노돈’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특히 재미있다고 말하고, 10회 때는 그동안 보아온 어린이 시에 대한 총평 같은 말을 해주었다.
“……고학년 어린이들이 쓴 작품에 비해 저학년 어린이들의 작품이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짐작되는 점이 있긴 하다. 저학년 어린이들은 새로운 사물을 접했을 때 놀라움과 새로움으로 보는 데 비해 고학년 어린이들은 이미 내려진 정의에 길들여져 ‘새롭게 보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 쓰기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 같은 마음과 눈으로 사물을 접한 느낌을 글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11회 심사소감에서 이상교 선생님은, “최종심에 올라온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옆집 할아버지’는 자주 마주치는 옆집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담백하게 그려냈다. 할아버지가 붙여준 ‘똘콩’이라는 별명이 정답다. ‘똘똘해 보이는 콩 같은 야무진 모습의’ 지은이가 단번에 그려진다.”라고 쓰셨다. 이어서 12회에서는, “‘시’라고 하면 어쩐지 멋진 말을 넣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참’이 아닌 생각이나 느낌을 꾸미거나 만들어 넣게 된다.”며 이어서 “식빵과 할머니는 식빵에 대한 생각을 적은 글로, 얼마나 맛이 있는지 갈팡질팡한다는 표현이 어린이답고 특별하다.”고 덧붙였다.
13회에서는,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쓴 시를 읽는 즐거움이 크다. 반대로 어린이가 썼는데도 어린이답지 않은 시를 읽게 될 때면 신이 안 난다.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하고 찜찜하다……‘머리 깎은 날’은 소재도 재미있지만 진솔한 표현이 어린이다웠다. 마무리도 싱겁지 않았다.”라고 칭찬하였다. 14회에서는, “말다툼으로 냉전중인 엄마 아빠와 상관없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이끄는 부모님의 모습이 무리 없이 그려져 있다.” 평하고, 마지막으로 15회 작품에 대하여 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심사소감을 말했다.
“본선에 들어온 20여 편을 살펴 읽었다. 어떤 글이든 그러하듯이 쓴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쓴 글은 즐겁게 읽힌다. 어린이 시도 마찬가지여서 억지로 쓴 글은 즐겁고 편안하게 읽히지 않는다. 가장 좋은 작품으로 가려진 ‘딱지’는 자신만의 느낌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가려진 ‘심술쟁이 바람’도 시 쓴 솜씨가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