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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 / 강성관
가평 남이섬.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밤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일 때 군사 훈련을 시작하여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까지 헉헉대었던 곳이다. 북한강 얼음물 속에서 대원들과 얼차려를 받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귀밑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뒤돌아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훅하고 한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논산 훈련소에서 밤 열차로 갓밝이 즈음 가평에 도착했다. 동살이 잡힐 무렵 가평역 주변 풍경의 첫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 높아 보이던 주변 산들은 내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 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다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가평역 주변은 예전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한류 드라마‘겨울연가’를 쫓아오는 많은 관광객을 위하여 남이섬 부근에 새로 지은 건물이 이채롭다.
20년 전, 막냇동생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갔다. 한사코 말렸지만, 군에서 제대한 후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총기 사고가 잦은 미국에서 캐나다로 방향을 돌려놓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모험 정신이 부럽기도 했다.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 남매의 운명인가 보다. 여동생도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삼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노모가 아직 살아 계시고, 고향에는 선친 산소가 있기에 나는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민 생활은 생각보다 혹독했던 것 같다. 동생은 교포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기술을 배웠다. 한때 동생은 향수병으로 무척 힘들어한 적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만리타향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고달픈 이민 생활을 잘 견뎌준 동생 가족이 한없이 고맙다. 명절에도 서로 만날 수 없는 일이 항상 내 마음속의 허전한 공간으로 남는다. 동생들 가족은 그 나라 풍습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듯하다. 그들은 명절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예전에는 명절이 되면 잊지 않고 안부 전화를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큰조카 결혼식 사진이다.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성인이 된 조카들은 몰라보게 변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다고 하더라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동생의 머리카락은 반백으로 변했다. 얼굴의 잔주름 탓인지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고달픈 이민 생활에 적응하느라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을 만큼 바쁘게 살았을 터이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곳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까지 마음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요즈음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 여유가 있어 보인다. 보고 싶은 얼굴이다.
쾌속정으로 남이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먼발치에서 눈에 익은 고지 하나가 나타난다. 한국 전쟁 때 중공군과 전투에서 아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던‘보납산’이다. 포성은 멈추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아우성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았던 깊은 상처는 푸른 숲으로 가려져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흔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을 터인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한류 영향으로 관광 열기는 아직도 여전히 뜨겁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알록달록한 옷차림의 동남아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던 메타세콰이아 숲길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주인공들이 첫 입맞춤을 하던 곳에도 기념사진을 찍느라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남이장군의 호기가豪氣歌를 새겨놓은 비석 앞이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에게 먹여 말려버리리라
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장군은 이립而立도 되기 전에 벼슬이 병조판서까지 올랐으니 주변에 시샘하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유자광柳子光은 미평국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 장군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임금에게 일러바쳤다. 어느 시대에도 정치에는 앙숙怏宿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사헌부 수장이 밉다고 갈개발들이 그를 쫓아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다. 이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속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망나니의 춤판이 되어버린 이 나라를 바로 세워줄 또 다른 남이장군이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요즘의 심정이다.
부대 앞이다. 위병소는 옛 모습 그대로다. 덩치가 더 커진 밤나무를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젖는다. 바람결에 날아온 밤꽃 향기가 병영의 아스라한 추억들을 불러낸다. 완전 군장을 멘 군인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다. 뙤약볕에서 훈련을 받느라 얼굴은 새카맣고 후줄근한 군복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가는 군인들 속에 땀투성이의 젊은 내가 가물거린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빡빡한 훈련 일정은 우리의 혼쭐을 완전히 빼놓았다. 야간 훈련이 있는 날은 얼차려가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오랫동안 같이 고생하던 전우들이 서부 전선으로 다시 배치되던 날 소낙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도 나처럼 얼굴이 쭈글쭈글한 중늙은이 모습으로 변해 있을 터이다. 그 시절 그 사람들. 만나보고 싶은 얼굴이다.
일상의 행복 / 강성관
지난 겨울은 몸도 마음도 추웠다. 영하의 날씨를 타고 코로나 감염병이 금방이라도 곁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체감 온도가 더 낮게 느껴졌다.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백신을 의무적으로 맞아야 한다는 흉흉한 말까지 나돌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중에도 일자리를 잃거나 생업의 문을 닫는 사람들의 답답한 말들이 넘쳐난다.
사면초가는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우리 동네에도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시내 제과점에 다녀온 이웃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이러스를 옮아왔다는 것이다. 입소문으로 확진자의 인적 사항이 빠르게 알려지면서 주민들이 혼란에 빠졌다. 예전에는 코로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기며 살았는데 눈앞이 캄캄하다. 코로나 영향으로 삶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어느 방송 뉴스가 눈길을 끈다. 홀로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삶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세 명 중 한 명이 심각하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시기이므로 노인 복지 시설도 문을 닫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멀쩡하던 사람들조차도 우울증에 걸려버릴 지경이다.
‘따르릉….’ 어머니의 전화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불만스러운 일이 있는 양 까칠하다. 분명 예전 어머니의 행동과는 다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증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는 아들을 걱정하던 분이다. 무슨 일로 마음이 변한 것일까.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다. 말꼬투리를 잡고 자꾸 화를 내시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찾아온다는 우울증. 앞으로 우리 가족이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몫이다.
명절에 어머니를 모셔오는 길이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하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외로 돌린 채 바깥쪽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을 붙여 볼 기회를 찾는다. “ 병원에 한번 가봅시다.”라며 살며시 말을 건네본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미친 사람 같아 보이느냐. 의사가‘치매’라고 하면 요양원에 집어넣을 작정이냐.”라며 화를 내신다.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복잡하다. 어머니는 코로나 영향으로 노인정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한참 동안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다. 온종일 집에만 홀로 있다가 보니 사람이 몹시 그리웠나 보다. 평온하던 우리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듯 예고도 없이 갑자기 마주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다. 의사는 기억력이 떨어져 ‘우울증’에 의한 ‘치매’ 초기 단계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신경안정제 처방 약 덕분에 예전의 상태로 돌아왔지만, 언제 또 재발할지 걱정이다.
장모도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한 번씩 정신을 놓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 노환인 장인도 오래전부터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어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우리 내외는 손주 돌보미를 하면서도 두 집안 노인을 살펴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그다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아차린다. 오직 코로나를 극복해야 한다는 일념이 삶의 목표가 되고 보니, 지금까지 경험한 조그마한 일 하나까지도 호사스러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몇 해 전의 일이다. 골프 연습을 하다 허리에 탈이 났다. 척추에서 다리로 연결되는 신경 계통에 문제가 생겼다. 혼자 힘으로 양말과 운동화를 신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다행하게도 병원 수술대에 오르기 바로 며칠 전에 지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약물치료를 한 후 가까스로 통증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건강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지금까지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줄 알았다. 건강한 몸으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것도 소중한 일상의 행복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코로나로 인해 온종일 집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형편이 되고 보니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오솔길을 산책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가는 곳으로 여행을 다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상의 행복이었는지 다시 한번 더 깨닫는 계기가 된다.
태풍 매미의 추억 / 강성관
(2020 낙동강 어울림 스토리텔링 &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하늘은 온통 거먹구름이다. 올해는 장마가 예년보다 긴 편이다. 태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선선하기까지 하다. 기상청이 올여름은 강더위가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예보했던 것은 완전히 빗나간 듯하다. 얼마 전에 손주 돌보미를 하기 위해 경북 구미로 이사했다. 무더기비를 뿌려대던 날씨가 어느새 조용해졌다. 자전거를 타고 바깥으로 나왔다. 산동면 소재지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자전거 길을 따라 구미보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싱그럽고 상큼한 강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소나기가 내리면 낙동강은 묵은 때를 벗겨낸 듯이 황톳빛이 되어 흐른다. 자전거길 주변에도 빗물로 청소한 것처럼 수려한 자연 풍광이 한층 더 선명하게 보인다. 낙동강 제방에는 금계국 개망초 달맞이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금계국과 개망초는 금방 세수를 한 듯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달맞이꽃은 아직도 졸음에 겨운 듯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고 있다.
선산 해평 철새 도래지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춘다. 이곳은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종인 흑두루미 재두루미 큰고니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생태 공간이다. 매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4월 초까지 쇠기러기 청둥오리 독수리 흰꼬리수리 원앙 왜가리 중대백로 흰뺨검둥오리 등 철새와 텃새 수천 마리가 찾아드는 집단 철새 도래지이다.
자전거 페달 위에 다시 발을 얹는다. 낙동강을 횡단하는 장대 교량 건설 공사장이 보인다. 구미 국가 5 산업단지 진입도로를 건설 중이다. 낙동강에 설치된 임시 교량과 수질 오염을 예방하기 위한 오탁방지시설을 바라보니, 문득 한때 공사 감독을 하며 건설 현장을 누비고 다니던 내 모습이 흘러간 옛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간다.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니 세월이 유수처럼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구미 해평 청소년 수련원을 거쳐 금호 수문에 도착했다. 먼발치에서 구미보가 아련하게 보인다.
구미보는 거북이와 용龍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망대는 지역성을 반영하여 거북이 모습으로 만들었다. 전망대 좌우에 하나씩 있는 기계실은 기둥 밑부분에 용 비늘을 그려놓았다. 신성한 용의 기운으로 안전한 낙동강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미를 표현했다. 거북이는 장수와 복을 상징하고, 용은 낙동강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을 터이다. 집중 호우가 지나가고 나면 구미보 상류와 하류의 모습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상류 쪽은 언제나 잔잔한 수면을 유지하며 조용한 편이지만, 하류 쪽은 가동보 아래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물줄기가 가동보 아래로 곤두박질친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때 발생하는 굉음과 하얀 물거품이 장관을 이룬다. 집중호우가 내릴 때마다 황톳빛 소용돌이는 낙동강 수질을 향상하는 역할을 하게 될 터이다. 하얀 물거품은 구미보와 이별하는 것이 아쉬운 듯 주변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 난 후에야 다시 하류 쪽으로 향한다.
구미보 전망대에서 나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를 바라본다. 어느덧 나의 시선은 낙동강 물길을 따라 함께 하류로 흘러간다. 칠곡보를 거쳐 강정고령보를 지나자 먼발치에서 눈에 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있는 월성배수펌프장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손때가 묻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때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 공사감독을 하며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내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서 한 올 한 올 되살아난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 동안 건설사업장을 돌아다니며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2003년 14호 태풍‘매미’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하마터면 낙동강으로 실족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던 공사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시 본청에서 건설본부로 인사 발령이 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 공사감독 임무를 맡고 업무 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다. 2003년 9월 12일 태풍‘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매미는 우리나라 기상 관측 사상 최고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매미가 우리나라에 상륙할 당시 중심부 최저 기압은 950 hpa이다. 종전의 최고 기록인 1959년 태풍‘사라’(952 hpa)를 넘어섰다. 최대 순간 풍속도 종전의 최고 기록인 2000년 태풍‘프라피룬’(초속 58.3m)을 제쳤다. 2003년 9월 12일 오후 6시 11분 제주 기상대 풍속계에 매미는 초속 60m를 기록했다.
집중호우로 낙동강이 범람했다. 낙동강의 범람으로 지류인 진천천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천 수위와 유수지 상황을 파악하여 시 본청과 건설본부로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진천천 제방으로 안전 점검을 나갔다. 야간에는 강한 비바람 때문에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고압선이 춤을 추듯 휘청거렸다. 고압선 철탑은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 났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비바람으로 나는 제방 위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하마터면 제방 아래로 미끄러져 낙동강으로 떠내려갈 뻔했다. 건설 현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대구광역시 달서구와 달성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진천천이 역류하면, 인접하고 있는 대명천으로 물이 거꾸로 흘러 들어가게 되므로 사전에 진천천 제방의 수문을 닫아야 한다. 월성배수펌프장 주변에는 낙동강 바닥 높이보다 위치가 낮은 성서공단이 있다. 집중호우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첨단시설이 많은 성서공단을 수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대구광역시는 월성배수펌프장을 중점 관리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엘니뇨 및 라니냐 현상으로 점점 강우 강도가 높아지는 추세에 대비하여 대구광역시는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이 준공되면, 한강 이남에서는 배수 용량이 제일 크다. 부산 녹산공단 배수펌프장과 더불어 이 정도 규모의 배수펌프장은 드문 편이다. 배수펌프 지름 2m. 사람이 배수펌프 안으로 걸어 다녀도 여유가 남을 정도의 크기이다. 배수펌프 수량 12대(원래는 13대였지만 예산 부족으로 12대만 우선 시공). 펌프 1대가 분당 600t의 물을 소화할 수 있다. 따라서 증설되는 월성배수펌프장 하나만으로도 분당 7,200t의 물을 퍼 나를 수 있다. 애초의 계획은 2005년에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공정추진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그 당시에는 대구시의 재정 상태가 아주 열악했다. 특히 국비 확보가 큰 문제였다. 중앙 정부에 찾아가서 아무리 애로사항을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부서에서는 오죽하면 그때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푸념했을까. 예산 부족으로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가는 배수펌프장 공사가 언제 마무리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배수펌프장 건설공사는 일반적으로 비교적 비가 적게 내리는 겨울철에 시행한다. 왜냐하면, 제방을 해체하고 공사를 시행해야 하므로 갈수기에 집행하는 것이 적절하다.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은 대명천 둔치에서 토류벽을 설치하고 터파기 작업등 주 공정 대부분이 시행되었다. 예산 확보도 중요했지만, 연약 지반인 대명천 둔치에 10m 이상의 깊이까지 터파기해놓은 상태에서 장마철을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만 했다. 시 본청 주무 부서에 예산 조달과 관련하여 대책을 빨리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선 터파기를 한 부분은 반드시 우수기가 오기 전에 배수펌프장 하부 콘크리트 벽체 구조물을 완료하고 흙 되메우기를 시행하여야만 공사장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배수펌프장 하부 콘크리트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처리하여야 할 것이 있었다. 월성배수펌프장이 증설될 위치의 지반구조는 연약지반이다. 낙동강이 형성된 후 수천만 년에 걸쳐서 대명천과 진천천 수로를 따라 운반되어온 흙 성분이 하천 바닥에 쌓이고 쌓여 10m 이상의 퇴적층을 만들어놓았다. 애초 설계 때에는 배수펌프장 구조물의 침하 방지를 위하여 퇴적층으로 구성된 연약지반에 강관 파일 기초를 시공토록 계획하였으나 토공 굴착 결과 연약 지반인 점토층을 걷어내자 바로 밑에서 사질토층이 나왔다. 교수 등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강관 파일 기초를 전면 매트 기초로 공법을 바꿀 예정이었다. 다만 토공 굴착 완료 후 평판재하시험을 별도로 실시하여 지반 지지력을 다시 확인하고 공법을 바꿀 계획이었다.
우수기는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나는 답답한 심정이었다. 토공 굴착이 마무리된 후 평판재하시험은 다섯 군데에 걸쳐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반 지지력 시험 결과는 예상 밖으로 나왔다. 세 군데에서는 합격 판정이 나왔으나 나머지 두 군데에서 불합격 판정이 나왔다. 가슴이 철러덩 내려앉는 줄 알았다. 다시 애초 설계대로 시공해야 한다면, 공법 변경 검토 과정에서 허비한 시간 때문에 절대 공사 기간이 부족했다. 도저히 우수기 전에 계획 공정을 마칠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며칠 후 토질기초 분야 자문을 맡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석 결과 강관 파일 기초를 전면 매트 기초로 변경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비상주 감리(토질 및 기초기술사)담당자에게 다시 확인했지만, 그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사 감독인 내가 기초의 안전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설명을 해봐야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할까 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그냥 괜찮을 것 같다고만 했다. 한편으로는 공사 기간을 당길 수가 있어서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연약지반의 장기적 안전성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펌프장 준공 후 가동단계에서 콘크리트 구조물 하중과 펌프 기계 진동으로 인해 연약지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영향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며 고민을 했다. 과연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건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평판재하시험에서 두 군데나 지반 지지력이 불합격으로 나왔는데 어찌하여 괜찮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비상주감리 담당자의 말 한마디가 더욱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계장님. 땅속의 일은 귀신도 잘 모릅니다.’그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월성배수펌프장 하부 기초 부분에서 훗날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면 나는 영원히 두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최종 판단은 내가 결정해야 했다. 공사 감독으로서 기초의 안전성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지만, 우수기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초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월성배수펌프장 확장공사를 준공하였지만, 마음 한쪽은 늘 찜찜하고 편하지가 않았다. 그 후 다른 사업장에서 공사 감독을 하고 있을 때도 한쪽 마음은 늘 월성배수펌프장 기초와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의문 사항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대구사격장 건설 사업장에서 공사 감독을 할 때 사면보강공법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노련한 비상주감리(토질 및 기초기술사)에게 월성배수펌프장 기초를 설명하고 자문했다. 그에게서 배수펌프장 하부 기초의 안전성에 대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설명은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그와의 인연은 훗날 내가 토질 및 기초 공학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월성배수펌프장 기초의 안전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는 테르자기(Terzaghi)의 얕은 기초 극한지지력 공식을 내 앞에 써놓고 설명했다. 지지력은 기초지반 흙의 점착력과 단위중량, 전단저항각에 따른 지지력계수, 기초의 근입깊이와 비례한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얕은 기초에서 토공 굴착부의 지반지지력이 부분적으로 약간 미흡하다고 하더라도 기초의 근입깊이를 고려하면 충분히 지지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성배수펌프장 확장 공사를 할 때 관여했던 전문가들은 왜 이런 방법으로 나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았는지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우수기가 도달하기 전에 월성배수펌프장 하부 콘크리트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1.5m 두께의 바닥 콘크리트 공사만 하룻낮과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야 끝났다. 이어서 하부 벽체 콘크리트 공사까지 마치고 흙 되메우기를 무사히 끝낼 수가 있었다. 공정 계획 추진상 새로 설치하는 펌프 12대는 제작 중이었으므로 두 해를 더 넘긴 2005년에 설치할 수 있었다.
2003년 추석 연휴에 태풍‘매미’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기존의 노후 월성배수펌프장 용량으로는 집중호우와 강풍을 동반한 대형 태풍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구시 대명동 일원의 도로 대부분이 콘크리트 또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집중호우 시에 대명천으로 유입되는 빗물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한꺼번에 월성배수펌프장 방향으로 몰려든 수량이 너무 많아 기존의 펌프 시설로 물을 대명천에서 진천천으로 퍼 넘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날 밤 성서공단 일부가 침수되었다. 그나마 태풍이 도달하기 전에 월성배수펌프장 확장 구간의 하부 콘크리트 공사를 미리 마치고 진천천 제방을 원상 복구해 두었기 때문에 성서공단 침수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구미보 전망대에서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감상에 젖는다.‘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하지 않던가. 월성배수펌프장 준공 표지석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후세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역 발전과 재난방지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다.
우리의 삶에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만약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기억할만한 값어치가 떨어지는 경우가 될 터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도전과 응전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 심지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태풍‘매미’는 내가 월성배수펌프장 확장 공사를 추진하는 동안 하마터면 목숨을 앗아갈 뻔하기도 하였지만, 내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갔다.
세월 무상이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2006년도에 월성배수펌프장 확장공사를 준공한 후 지금까지 수많은 태풍이 지나갔지만, 성서공단이 침수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월성배수펌프장의 배수 용량에는 여유가 있다는 말일 터이다. 게다가 최근에 펌프 한 대를 추가로 더 설치하였다고 한다. 직장에서 은퇴한 후 집중호우가 내릴 때마다 나는 월성배수펌프장을 한 번씩 떠올려 본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먹으며 산다고 한다. 월성배수펌프장 확장사업은 내가 경험하고 공부한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는 우리 지역 발전을 위해 멋진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해 우리나라로 접근해 오는 태풍의 위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 4호 태풍‘하구핏’의 간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자마자 연이어 5호 태풍‘장미’가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 많은 비를 뿌렸다. 기상청에서 역대급 태풍이 될 것이라고 예보하던 8호 태풍‘바비’와 9호 태풍‘마이삭’그리고 10호 태풍‘하이선’이 강력한 비바람을 몰고 왔지만, 성서공단 첨단시설이 수해로부터 안전한 것은 대명천 하류에서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월성배수펌프장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거먹구름이 사라졌다. 비무리 뒤로 숨었던 태양이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선다. 산동면을 가로지르는 성수천 언저리를 따라 낙동강 자전거 길로 향한다. 생명의 물길을 따라 싱그러운 숲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삶의 활력을 얻는다. 구미로 이사 한 후부터 자전거 타기는 하루 일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에 속한다. 은퇴 후 체력 관리를 위해 자전거 타기를 선택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젊은 자전거 동호인들이 쏜살같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렇듯 싱그럽고 생동감이 넘치는 낙동강 자전거 길에서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낙동강 자전거 길을 따라 늘어선 느티나무에서 늦여름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 평판재하시험 : 지반에 재하판을 사용하여 하중을 가하고, 그 하중의 크기와 재하면의 변위 관계로 부터 기초 지반의 지지력을 구하는 시험
* 감리 : 건설공사가 설계도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지 관리 및 감독을 하는 행위
* 토질및기초기술사 : 토질과 지반에 대한 물리적 특성과 역학적 특성을 구하여 안정된 구조물의 기 초를 제공할 수 있는 전문 지식과 풍부한 실무 경험을 갖춘 전문기술자
* 카를 폰 테르자기 (1883〜1963) : 오스트리아의 지질학자. 토질역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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