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의 아들 그핫은 다른 곳에서 고핫이라고도 불리워졌습니다(6:1). 다섯째, 레위 지파 대제사장의 이름들(6:4~15) 가운데 등장하는 모든 이름이 다 대제사장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아론의 첫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 제사를 드림으로 죽은 후에,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계열이 대제사장이 되는데, 사사 시대에 때로 대제사장이 아론의 막내 아들인 이다말의 가문에서도 나왔기 때문입니다. 엘리와 그 계열이 바로 이다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독에 이르러 다시 엘르아살의 계열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멸망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사닥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6:28)은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을 가리키는데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로 소개됩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짐으로 성전 일을 하게 됨으로 레위의 지파에 편입(입양)되게 되었거나, 에브라임의 기업 경내에 사는 레위 지파였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 음악가들이 다윗에 의하여 임명되어 성전에서 찬양을 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6:31~53). 여기에 속한 인물 중 헤만은 레위의 아들 중 그핫(고핫) 자손으로 고라의 자손이라고도 불립니다(6:38). 그렇다면 그가 열한 편에 달하는 <고라 자손의 노래>라고 되어 있는 시편을 쓴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한 인물은 ‘헤만의 형제’라고 불리는 아삽인데, 그는 레위의 아들 게르손 자손으로 헤만의 우편에서 섬겼습니다(6:39,43). 그가 <아삽의 시>라고 되어있는 열 두 편의 시편을 쓴 사람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 므라리 자손 에단이 헤만의 좌편에서 섬겼습니다(6:44). 여덟째, 레위 지파의 48성읍들(6:54~81)이 ‘저희의 거한 곳은 사방 지경 안에 있다’는 말씀은(6:54), 야곱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7).”
본문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주권은 세상의 서열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한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자기 생애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게 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쫓겨난 자였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어떤 방법과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역대기 기자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얻으려 해서 얻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둘째, 신앙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의뢰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만,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영적 간음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이 교훈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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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해결하는 제사장(1-30)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역대기는 이에 대한 답입니다.
역대기에서 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윗과 솔로몬 왕에 대한 내용이 역대상 10장부터 역대하 9장까지 나옵니다. 이후 왕들은 역대하 10장에서 36장에 몰려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과 솔로몬을 중심으로 역대기가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여전히 다윗의 자손이며, 다윗의 약속을 이어받은 자라는 것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1-9장에 나오는 족보에서도 그들의 정체성과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장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계보입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야곱 곧 이스라엘에 이르는 족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2장부터 9장은 이스라엘의 지파별 계보가 나옵니다. 순서와 분량만 살펴봐도 무엇이 강조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창세기 29-30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자녀는 '르우벤-시므온-레위-유다-단-납달리-갓-아셀-잇사갈-스불론-요셉-베냐민' 순입니다. 그러나 역대기에 나타나는 순서는 다릅니다. '유다-시므온-르우벤-갓-므낫세-잇사갈-베냐민-납달리-므낫세-에브라임-아셀-베냐민'입니다. 장자를 우선하는 이스라엘 문화 속에서 르우벤이 첫번째로 나오는 게 자연스럽지만, 유다가 먼저 소개됩니다. 베냐민(7:6-12; 8:1-40)은 두 번 등장하고, 단과 스불론은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분량으로는 유다가 가장 많고, 다음은 레위, 베냐민입니다. 그 외 나머지는 다 빈약합니다. 양이 많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유다와 베냐민은 포로 귀환 공동체 중 실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비중을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 지파가 두 번째로 분량이 많은데, 위치를 통해 보면 중요도를 더하게 됩니다. 구조로 보면 유다와 베냐민이 양 끝에 있고, 레위가 중앙에 위치합니다. 마치 유다와 베냐민이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데, 레위를 중심에 두고 오는 모양세입니다. 히브리 구조에서는 이럴 때 중앙에 있는 것이 강조됩니다. 곧 포로로 돌아온 자는 레위인을 중심으로 뭉친 공동체라는 겁니다. 귀환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거룩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때 레위인이 그 역할을 맡을 겁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진을 쳤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포로에서 돌아온 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며, 다윗의 약속을 이어 받고, 성전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자라는 정체성을 역대기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6장에 나오는 레위 지파 계보를 통해서도 역대기의 주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절입니다.
(1)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1절은 레위의 아들 세 명을 언급합니다. 나이 순대로 게르손, 그핫, 므라리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음 2절부터 15절에는 첫째 게르손과 셋째 므라리 자손은 서술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핫의 계보만 나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첫째가 우선 되고 많은 지분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의외입니다.
(2-15)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자녀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엘르아살은 비느하스를 낳고 비느하스는 아비수아를 낳고 아비수아는 북기를 낳고 북기는 웃시를 낳고 웃시는 스라히야를 낳고 스라히야는 므라욧을 낳고 므라욧은 아마랴를 낳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히마아스를 낳고 아히마아스는 아사랴를 낳고 아사랴는 요하난을 낳고 요하난은 아사랴를 낳았으니 이 아사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자이며 아사랴는 아마랴를 낳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고 사독은 살룸을 낳고 살룸은 힐기야를 낳고 힐기야는 아사랴를 낳고 아사랴는 스라야를 낳고 스라야는 여호사닥을 낳았으며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
그핫의 계보만 언급된 이유는 그핫이 대제사장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제사장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초대 제사장인 아론이 그핫의 장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후손을 대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같은 레위인이라도 대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핫 자손 중에서도 아론 자손만 해당됩니다. 마치 대제사장 가문이 일반 레위 사람보다 더 우선되는 듯 보입니다.
레위 족보 중 제사장직이 부각되는 것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제사직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은 레위 제사장을 품고 돌아왔고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알리는 징표입니다. 곧 회복은 회개가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실 때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합니다. 성전이 회복되지 않고, 제사가 형편없이 드려지면서 회복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나머지 레위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레위의 첫째 아들 게르손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 성막의 외형을 이루는 천막과 휘장, 그리고 그 부속물들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제사 제도가 정비된 후, 성막과 장막 부속물들을 관리했습니다. 셋째 아들 므라리는 성막의 널판, 띠, 기둥, 받침 기구 등과 같은 성막의 골격을 이루는 것들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일 담당했습니다. 성막 널판과 그 부속품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이후 16-30절에 레위의 세 아들의 계보가 다시 등장합니다.
(16-30)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이며 게르손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립니와 시므이요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라 그 조상에 따라 레위의 종족은 이러하니 게르손에게서 난 자는 곧 그의 아들 립니요 그의 아들은 야핫이요 그의 아들은 심마요 그의 아들은 요아요 그의 아들은 잇도요 그의 아들은 세라요 그의 아들은 여아드래이며 그핫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은 암미나답이요 그의 아들은 고라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요 그의 아들은 엘가나요 그의 아들은 에비아삽이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요 그의 아들은 다핫이요 그의 아들은 우리엘이요 그의 아들은 웃시야요 그의 아들은 사울이라 엘가나의 아들들은 아마새와 아히못이라 엘가나로 말하면 그의 자손은 이러하니 그의 아들은 소배요 그의 아들은 나핫이요 그의 아들은 엘리압이요 그의 아들은 여로함이요 그의 아들은 엘가나라 사무엘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엘이요 다음은 아비야라 므라리에게서 난 자는 말리요 그의 아들은 립니요 그의 아들은 시므이요 그의 아들은 웃사요 그의 아들은 시므아요 그의 아들은 학기야요 그의 아들은 아사야더라
하나님 앞에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인의 직분 모두 거룩하고 귀합니다. 다만 역대기에서는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에게 정체성과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제사장직이 강조된 겁니다.
대제사장 중에는 주어진 제사장 역할을 잘 감당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힐기야는 요시야 왕 때에 성전에서 성경책을 찾은 대제사장입니다. 비느하스는 우상숭배하던 자를 칼로 찔러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을 지킨 자입니다. 아사랴는 웃시야 왕이 스스로 성전에서 분향을 하려 할 때 과감히 나서서 이를 막은 제사장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대제사장 족보에 들었으나 이를 가벼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 인물은 나답과 아비후 입니다. 그들은 아론의 첫째와 둘째 아들로, 아론의 뒤를 이어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넘치는 은혜와 복을 받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드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 불로 심판받습니다. 제사를 가볍게 여기고, 욕망을 따르다 제사장직을 이어가지 못 한겁니다. 결국 셋째인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이 됩니다.
레위 족보를 이어가시는 하나님(15, 28)
족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또 한가지는 하나님이 레위 족보를 이어가신다는 겁니다. 15절입니다.
(15)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
15절은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을 옮길 때 여호사닥도 간다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마지막으로 섬겼던 남유다의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다 돌아왔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후 제사장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 대제사장 계보 아론의 자손이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여호사닥은 그 기간을 견디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의 아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 되어 스룹바벨 성전을 짓는 것을 봅니다.
역대기가 쓰여졌을 당시 여호사닥에게는 자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사닥까지만 언급합니다. 아들 여호수아조차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사닥이 첫번째 예루살렘 성전과 두번째 스룹바벨 성전을 연결시키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을 지켜보았고, 다시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전의 제사장직이 이어져 내려갑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 회복됩니다.
15절에서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온 이스라엘을 옮기셨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방나라 왕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궁극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벨론 유수도 하나님의 큰 틀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무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돌아오게 됩니다. 언약을 어겨 심판을 받았지만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 끝이 났던 겁니다.
이제 16절부터 30절에 대해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레위의 세 명의 아들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번에는 나이 순서대로 나오고, 레위의 세 명 아들의 직계 자손이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핫 자손이 강조됩니다.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또한 내용도 독특하게 전개됩니다. 앞에서는 그핫 자손 중 아론의 자손만 언급 되었는데, 여기서는 이스할의 자녀만 나옵니다. 22절입니다.
(22) 그핫에게서 난 자는 곧 그 아들은 암미나답이요 그의 아들은 고라요 그의 아들은 앗실이요
방금 읽은 22절에서 이스할이 나오지 않아 어리둥절 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암미나답이 이스할입니다. 역대상 6:38을 보면 고라의 아버지가 이스할이라 합니다. 이스할이 암미나답의 다른 이름입니다. 대상 6:38입니다.
(대상 6:38)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라
그핫의 자손 중 셋째 헤브론과 넷째 웃시엘을 두고, 암미나답 계보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할 족보에서 사무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8절입니다.
(28) 사무엘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엘이요 다음은 아비야라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 왕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자, 선지자이자, 사사였습니다. 사무엘이 살던 시기는 사사시대였는데 모두 각자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살았습니다. 그때 한나가 불임으로 고통하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사무엘은 부폐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 밑에 자랐으나 하나님은 그를 그곳에서 신실하게 기릅니다. 이상과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 불임과 같은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이스할의 계보를 언급한 이유는 결국 영적 암흑기에 사람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더 사모하게 되는 이유는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배 속에는 은혜를 발견할 때 말씀이 들리고 삶이 달라집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은혜에 감격한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를 해결함으로 시작합니다. 죄를 해결하여 은혜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신 겁입니다. 온전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변함 없으시기 때문에 주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 손이 거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손길이 큼을 볼때, 이걸 발견할 때 우리 결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주가 부르실 때 멈춰설 수 있으십니까?
성경은 인간의 모든 시간을 공평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다루지만, 그 모든 시간의 이야기가 공평하게 성경에 적힌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는 매우 자세히 다루지만, 그 외에 수많은 시간은 빨리 감기 하듯 지나쳐 버립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 중, 모든 시간이 하나님 앞에 공평하게 평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고, 어떤 이야기는 그저 허무한 시간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역대상 6장에서도 그것이 잘 확인됩니다. 6장의 서두에서 레위 지파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들었듯이, 역대기에 등장하는 많은 지파의 족보도 그 비중이나 중요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레위 지파의 족보는 무려 81절이나 되는 큰 분량을 차지합니다. 더욱이 그 위치가 2장부터 9장까지 이어지는 족보 중 한가운데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레위 지파로 상징되는 어떠한 점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 6장을 살피며 우리 인생에서 무엇에 가장 비중을 둬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31-32)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6장의 앞선 구절들에서는 아론에서 이어지는 레위 지파의 족보를 다루었다면, 이제 31절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기능과 역할, 이들에게 주어진 사역을 다룹니다. 그 사역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31절은 다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대기의 시대적 배경은 포로 귀환기입니다.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나 이제 다시금 회복을 꿈꾸던 시기에 역대기 기자는 가장 영토가 넓고 강대했던 시절이 아니라 다윗 시대를 떠올립니다.
열왕기서 전체를 지나온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왕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이성, 외교적인 방법, 군사적인 강대함을 의지했지만 올바르게 다스릴 수도 없었고, 복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없었습니다. 나라를 망치려고 작정한 왕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지혜와 방법, 수많은 세상적 도구를 이용해 애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왕도 국가가 저물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역사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곱씹었을 이스라엘은, 정작 문제는 우리의 힘 없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왕 삼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으로 사느냐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열왕기서는 왕들을 평가할 때 다윗의 길로 행했는지 아니하였는지 평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습니다. 그은 왕이었지만 자신 위에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둔 사람이었습니다. 31절에 나오는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는 언약궤가 기랏여아림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를 말합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금 모셔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찬양하고 춤췄던 왕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만을 왕으로 삼는 ‘봉신 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나긴 왕국의 역사 동안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을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을 기억하며, 그 시대로의 회귀를 꿈꿨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로 돌아가는 것”의 구체적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역대기 족보에 드러납니다. 역대기의 족보는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가 그 중심을 차지합니다. 유다 지파는 성전의 건축을 상징하며, 레위 지파는 제사장 사역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임재하시는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며 그들의 정체성과 거룩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그들이 회복하기 원했던 구체적 다윗 시대의 표상인 것입니다.
33절에서 47절까지는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았던 세 인물의 족보를 거론함으로, 이들이 회복하기 원했던 레위 지파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33-38절까지의 헤만의 족보를 보겠습니다.
(33-38)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사무엘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여로함은 엘리엘의 아들이요 엘리엘은 도아의 아들이요 도아는 숩의 아들이요 숩은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마핫의 아들이요 마핫은 아마새의 아들이요 아마새는 엘가나의 아들이요 엘가나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아사랴의 아들이요 아사랴는 스바냐의 아들이요 스바냐는 다핫의 아들이요 다핫은 앗실의 아들이요 앗실은 에비아삽의 아들이요 에비아삽은 고라의 아들이요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 이스할은 그핫의 아들이요 그핫은 레위의 아들이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아들이라
헤만은 역대상 15장에서 노래하는 자 혹은 놋 제금을 연주하는 자로 표현됩니다. 역대하 5장에 따르면 그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도 참여합니다. 그의 아들 열 네명도 모두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헤만은 가장 중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시편 88편을 짓고 노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만약 시편 88편이 헤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그는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자이며, 고난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며 찬양하는 자입니다.
두 번째로 39-43절까지 아삽의 족보를 보겠습니다.
(39-43) 헤만의 형제 아삽은 헤만의 오른쪽에서 직무를 행하였으니 그는 베레갸의 아들이요 베레갸는 시므아의 아들이요 시므아는 미가엘의 아들이요 미가엘은 바아세야의 아들이요 바아세야는 말기야의 아들이요 말기야는 에드니의 아들이요 에드니는 세라의 아들이요 세라는 아다야의 아들이요 아다야는 에단의 아들이요 에단은 심마의 아들이요 심마는 시므이의 아들이요 시므이는 야핫의 아들이요 야핫은 게르손의 아들이요 게르손은 레위의 아들이며
아삽은 헤만의 오른쪽에서 직무를 행했습니다. 역대상 16장을 보면 그는 언약궤를 옮길 때 제금을 치며 찬양한 자로 나옵니다. 또한 아삽은 열 두 개의 시편의 저자로 여겨집니다. 아삽의 자손들은 이후로도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으며, 포로 귀환 이후에도 성전을 기공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때 찬양하고 나팔 부는 직무를 감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로, 44-48절까지는 에단의 족보를 다룹니다.
(44-48) 그들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의 왼쪽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 에단은 기시의 아들이요 기시는 압디의 아들이요 압디는 말룩의 아들이요 말룩은 하사뱌의 아들이요 하사뱌는 아마시야의 아들이요 아마시야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힐기야는 암시의 아들이요 암시는 바니의 아들이요 바니는 세멜의 아들이요 세멜은 말리의 아들이요 말리는 무시의 아들이요 무시는 므라리의 아들이요 므라리는 레위의 아들이며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
에단은 헤만의 왼쪽에서 봉사했습니다. 에단은 역대상 25장과 역대하 5장에서 ‘여두둔’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여두둔은 ‘찬양하는 자’라는 의미이기에, 그는 성전 건축 이후에도 계속해서 찬양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두둔의 가문도 아삽 가문처럼 이후에 계속해서 찬송하는 일을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33절에서 47절까지의 본문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일을 담당했던 세 사람의 족보를 다룸으로써, 회복을 꿈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임을 말합니다.
사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이 명령한 레위 지파의 직무 중 찬송은 없습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와 그것에 수반한 임무들을 수행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직무가 다윗 시대에 와서 예배하는 일로 연결됩니다.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이 실상 회개와 헌신, 순종이라는 제사의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회복을 꿈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가장 큰 분량과 그 중심을 차지하는 일이 예배였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회복이 필요하다면 가장 중심 삼아야 하고 비중을 두어야 하는 일은 예배입니다. 경제적 문제가 생겼다면, 경제에 집중해야 그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예배하는 삶의 습관이 진짜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예배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이면에 상대방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본질적 문제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이면에 하나님보다 나의 편함과 이기적 욕망을 사랑하는 삶의 방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관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와 그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의 자아를 예배하는, 예배의 문제가 늘 본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한 상황이 정치적이고 국가적이며 군사적인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표면적 문제고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회복을 꿈꾸는 우리도 이면이 아닌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예배자로 올바르게 서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대충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체계화 되어 있었고, 질서 있고 비중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만약 시편 중 몇 편이 정말 그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맞다면, 그들은 그저 맡은 직무를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동원해 하나님 앞에 예배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다윗은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포로 귀환기에 백성들도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다루길 원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인생이라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내 욕심으로만 채우면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허망한 것으로 주어진 시간이 가득찰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비중 있는 시간들이 늘어가는 우리의 인생 되길 소망합니다.
(49-53)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아론의 자손들은 이러하니라 그의 아들은 엘르아살이요 그의 아들은 비느하스요 그의 아들은 아비수아요 그의 아들은 북기요 그의 아들은 웃시요 그의 아들은 스라히야요 그의 아들은 므라욧이요 그의 아들은 아마랴요 그의 아들은 아히둡이요 그의 아들은 사독이요 그의 아들은 아히마아스이더라
54절 이하에는 이스라엘 전 지파에 흩어진 48개 레위 도성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살았던 레위 지파가 등장합니다. 54절 이하를 “생활의 예배화”라는 우리 신앙의 목표로 표현한다면 오늘 본문인 31-53절은 “예배의 생활화”가 될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에 최선을 다할 때, 흩어져 살아가는 삶의 중심에도 예배가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본문 49절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성소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사를 통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야만 진정으로 번제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우리를 태워 드리는 예배는, 이곳 예배의 자리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가는 곳들마다로 확장될 것입니다.
실상 그러한 예배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이후 더욱 완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순종과 온전한 찬양으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고, 제사와 예배를 위한 모든 속죄와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유다 지파의 모든 기능과 레위 지파의 모든 기능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예배로 인해 은혜 얻은 우리는, 그렇기에 더욱 예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서도 레위 지파가 회복되길 원합니다. 우리 삶의 분량에서도 레위 지파가 큰 비중을 차지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만이 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생활 안에 우리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레위 자손에게 주되
첫 사람 아담으로 시작한 선민 이스라엘의 족보가 9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70년 만에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역사의 영속성과 정통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기 전 남유다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종교를 담당하던 레위 지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기상•하는 많은 부분이 일치된 내용입니다. 열왕기서는 선지자적인 관점으로 기록이 되었다면 역대기서는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살펴보고 있는 역대상 6장은 레위 지파의 주요 계보와 그들의 기업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6장 마지막 부분은 레위 자손 각 분파가 분배받은 주요 성읍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54절부터 60절까지는 대제사장 아론 가문이 정착하게 된 성읍들을 먼저 소개합니다. 61절부터 63절까지는 레위인 삼대 분파별 거주 성읍에 대해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64절부터 65절은 레위 자손이 성읍을 취득하게 된 과정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66절부터 81절까지는 레위 분파별 거주 성읍을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합니다.
개략적인 개요를 먼저 소개하고 뒤 이어 각 분파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6장 16절~19절에 레위 지파의 계보를 간략히 소개한 뒤 20절~30절까지 레위 지파 분파별로 다시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기록은 역대기 저자가 레위 지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는 다르게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셋째 아들입니다. 당시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이 자기 누이 디나를 욕보이자 레위는 자신의 형 시므온과 함께 세겜 족을 학살하며 복수를 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레위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형 시므온과 함께 그들 자손이 이스라엘에 흩어지리라는 유언을 들어야 했습니다(창 49:5~7). 아버지 야곱의 유언대로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다른 지파들에게서 성읍을 분배받아 각지로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복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레위 지파는 모세의 편에 서서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출 32:25~29). 결국 레위 지파는 아버지 야곱의 유언대로 이스라엘에 흩어져 살되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복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어제 살펴본 역대상 6장 49절에 기록되었듯이 레위 지파의 사명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보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 지파의 거주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레위 지파가 거주한 성읍을 확인하게 되는 동시에 레위 지파의 정통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포로기 이후 당시 레위 자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아야 할 지파의 분깃을 잃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54절입니다. 그들의 거주한 곳은 사방 지계 안에 있으니 그들의 마을은 아래와 같으니라 아론 자손 곧 그핫 종족이 먼저 제비 뽑았으므로
61절입니다. 그핫 자손의 남은 자에게는 절반 지파 즉 므낫세 반 지파 종족 중에서 제비 뽑아 열 성읍을 주었고
63절입니다. 므라리 자손에게는 그 종족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제비 뽑아 열두 성읍을 주었더라
65절입니다. 유다 자손의 지파와 시므온 자손의 지파와 베냐민 자손의 지파 중에서 이 위에 기록한 여러 성읍을 제비 뽑아 주었더라
방금 읽은 네 절의 기록대로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받은 성읍을 나눌 때 사용한 방법은 제비뽑기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제비뽑기는 죄인을 분별해 낼 때(수 7:14~18), 왕을 선출할 때(삼상 10:20), 합당한 일꾼을 뽑을 때(행 1:26),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법의 하나로 시행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지파 천 명씩 여호와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제비뽑기로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을 초대 왕으로 결정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범죄 한 아간을 찾아낼 때도 제비뽑기로 찾았습니다. 다시스로 도망치던 요나도 제비에 뽑혀 폭풍이 휘몰아치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욘 1:7).
신약에서는 제비 뽑힌 맛디아가 가룟 유다 대신 열한 사도의 무리에 들어갔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성읍을 할당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주지를 할당받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55절입니다. 그들에게 유다 땅의 헤브론과 그 사방 초원을 주었고
55절부터 81절까지 이스라엘 지파들이 레위 지파에게 준 땅 이름과 함께 ‘초원’을 주었다는 기록이 41번 등장합니다. ‘초원’은 민수기 35장 4절의 기록대로 레위 지파가 한 성읍을 얻을 때 성읍과 함께 성읍의 성벽으로부터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 2천 규빗, 약 912m에 이르는 땅을 목초지로 할당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읍은 레위 지파의 거처로, 초원은 그들의 가축과 짐승들을 둘 곳으로 지정해 주시며, 그들이 정착할 땅을 세심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57절입니다. 아론 자손에게 도피성을 주었으니 헤브론과 립나와 그 초원과 얏딜과 에스드모아와 그 초원과
67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도피성을 주었으니 에브라임 산중 세겜과 그 초원과 게셀과 그 초원과
57절과 67절에는 도피성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에게 배분된 땅 48개 성읍 중에 6곳을 도피성으로 지정하게 하셨습니다. 도피성으로 지정된 곳은 요단강 동쪽에 르우벤 지파의 베셀과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 그리고 요단강 서쪽에 잇사갈 지파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지파의 세겜과 유다 지파의 헤브론입니다.
도피성을 세우신 이유는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보호하거나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로 사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선정된 6곳은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거리에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도망가야 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에서 일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중보자의 역할뿐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직무도 동시에 겸했습니다. 6개의 도피성을 책임지는 일과 재판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 등도 담당하였습니다. 당시 왕이 정치, 경제, 행정과 군사 등의 일을 감당했다면 제사장을 포함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등 영적인 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저주스런 유언을 들었던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변해가며 자신들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던 주님께서 오늘 친히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와도 동행하시며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남은 사순절기와 고난주간을 보내며 참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부활의 주님을 소망 가운데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간들로 채워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레위 지파처럼, 부활하신 주님처럼 죽어가는 내 주변의 영혼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은혜를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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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서는 열왕기서와 동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차이점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열왕기서가 선지자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라면 역대기서는 제사장적 관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좀 달리 말한다면 열왕기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정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역대기서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한 신앙적 측면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기록시기도 차이가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남유다 멸망이후 1차 바벨론 포로귀환 사이 어느 시점에 기록되었지만 역대기서는 2차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시기의 차이에 따른 각 역사서의 강조점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멸망당했기에 역대기서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바벨론 포로 귀환을 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주전586년)당한 후 50년이 지나서 1차 바벨론 포로귀환이 있었습니다. 반세기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된 그들의 조상의 뿌리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역대기서의 초반부는 이스라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이스라엘 지파들의 자손을 기록하면서 가장 많은 양을 할애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자손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지파가 하나님께서 제사와 성전업무를 부여했던 레위지파입니다. 역대기서에는 제사장직을 중심 주제로 다루면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 주목할만한 구절은 2절에 레위의 아들들 3명을 언급하면서 둘째 아들 그핫의 후손을 먼저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요한 이유로는 레위 아들들 중에 그핫의 후손에서 모세가 태어났으며(3절) 그핫의 후손 중에서 아사랴가 솔로몬 성전에 제사장 직분을 행했기(9절)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 제사장 여호사닥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습니다(15절). 남유다가 멸망당한 이후 50년 동안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제사하는 제사장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역대상 6장에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계보를 먼저 언급하면서 본국으로 돌아온 포로세대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성전과 제사장직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신앙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예전처럼 육체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예전과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참 생명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될 때 이스라엘은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며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우상과 탐욕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 회복을 통한 참 생명을 취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역대상 6장에서 신앙의 중심이 될 성전맡은 자들의 레위지파의 족보와 그들의 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31절부터 53절까지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자들, 성전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들, 하나님께 분향하며 제사드리는 자들의 조상을 언급하면서 포로 귀환한 이스라엘 지파의 후손들이 참 생명을 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54절부터 81절은 레위 지파들이 여호수아 시절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분배받지 못했지만 여러 지파들이 살고 있던 땅의 성읍들을 받고 살았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6개의 도피성 중심으로 레위사람들이 비록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분배받아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신앙적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레위사람들이 흩어져서 살았지만 이스라엘이 참 생명을 취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레위지파 후손들 역시 레위사람들의 원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어야 했습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레위사람들의 역할이 바벨론 포로 귀환이후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더 필요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한 사람들은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려 열나흘째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한 상태의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한 사람들과도 같았습니다. 이들에게 참 생명의 빵을 취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역할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점은 이 땅에서 집과 토지 등 소유물이 없더라도 국가와 사회와 신앙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와 가정과 개인이 기진맥진한 상태일지라도 참 생명을 함께 취하여 먹고 마시는 자가 되십시다. 비록 나 자신이 병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힘들어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참 생명을 함께 취하자고 권하는 자로 오늘 하루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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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레위의 가계
6:1-30까지는 레위의 아들들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들이 어떤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보다도 더 자기들의 족보를 보다 분명히 보존하는 데에 관심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들의 직무가 가진 영광과 특권은 그들의 혈통에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1. 레위지파의 첫 조상의 이름은 두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1, 16절).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1절과, 16절에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2. 또한 아론의 후계자 엘르아살의 계열이 여기에 포로의 시대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4-15절). 그것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엘르아살에서 시작되고, 바벨론의 속박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여호사닥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3. 더불어 레위 가족들 중 또 다른 사람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게르솜의 가족들 중 하나인 립니의 가족의 계보가 사무엘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의 영광을 가진 자로 레위 족속에 부가되었습니다. 므라리의 가족들 중 하나인 말리의 가족도 역시 몇 대까지 기술되어 있습니다(29, 30절).
Ⅱ.레위인들의 업무 분담
6:31-53까지의 말씀은 레위인들의 업무 분담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 족속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광야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고 성막과 성소의 성물들을 운반하고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그들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레위인들 대부분은 전국에 분산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전에 나온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들 모두가 동시에 늘 해야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특수한 임무와 지시를 받아 새로운 형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그들에게 부여한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1. 찬송하는 일(31절). 다윗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아름다운 송시가로 유명했습니다(삼하 23:1). 그는 또한 시편을 썼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서 그들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48절). 그것은 물과 연료를 준비하고-쓸고 닦고 찌꺼기를 끌어 내는 일-제물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삶는 일이었습니다.
3. 제사 드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오직 제사장들에 의해서만 행해져야 했습니다(49절). 이들은 피를 뿌리고 분향하는 일을 했고 "지성소의 일" 은 다만 대제사장에 의해서만 행해져야 했습니다. 각자는 자기 일이 있었고 그들 양자는 서로가 필요했고 서로 도와야 했습니다. 레위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자기들 일의 목적은 자신들의 삶을 부요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공공에서 봉사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계의 역할을 함으로써 이스라엘백성들이 제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게 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Ⅲ.레위인들의 도성
6:54-81
여기에는 레위 사람들의 성읍들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여기서 "성(城)" 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사방이 벽으로 쌓여 요새화 되었고, 그 지경으로 인하여 잘 방어되어 있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레위인들과 그들이 소유한 물건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 이렇게 된 것은, 이 족속을 보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지리라" (창 49:7)고 한 야곱의 임종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서였습니다.
2. 또한 이스라엘은 땅에 하나님과 자신과 자신의 율법에 관한 지식을 전파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모든 족속은 자기들 영토 안에 레위 족속의 성읍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레위의 직책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3. 이것은 성물을 관리하는 레위인들의 생계 안전을 위해서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헌물 이외에 성전 영지와 그들이 거주할 성읍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도성들 중에서 일부가 레위 족속의 몫이 되었습니다. 모든 족속은 레위 족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은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헌납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구약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여 자립교회들은 대부분 전임목회자에 대하여 생계 걱정없이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택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일정금액의 신수비를 지급해 오고 있습니다. 이같은 혜택을 받은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교회를 지키고 목회를 감당해 왔고, 교회는 그와 같은 목회자의 헌신을 감사히 여기고 최선으로 목회자를 지원해 온 것이 한국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많은 것들이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돈과 권력, 명예에 눈이 멀어 불신자 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뿐만 아니라 출산인구의 감소와 함께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빈익빈 부익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가난한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은 다른 직업을 겸하여 갖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못 버티게 되면 교회 문을 닫고 목회를 포기하는 목회자들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단 상관없이 서울에만 무임목사가 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 다니기를 포기하거나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는 숫자도 통계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기존교회에서 상처받고 마땅히 다닐 만한 교회가 없어 등록 없이 이 교회 저 교회 배회하는 교인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등록교인심방을 통하여 확인된 바에 의하면 몇 년씩 등록하지 않고 다니다가 등록했다는 분들이 많아지는 것은 현재의 교회가 지난 시대의 교회보다 검증이 필요하고 믿을만한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신뢰가 가는 교회에 등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 각자는 만인제사장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아가야하겠습니다. 또한 성경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전통과 한국교회의 전통을 잘 이어받아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의 선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힘쓰며 훗날 하나님앞에서 잘 했다 칭찬받는 제자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