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건축물(야긴과 보아스).
1. 7장은 6장에 이어서 성전 건축에 관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1-12절에서 솔로몬의 왕궁 건축의 이야기가 삽입됩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건축한 기간은 무려 13년입니다(12절). 성전 건축 기간(7년 6개월)에 두 배에 가까운 기간입니다. 건축기간 뿐만 아니라, 건물 규모에 있어서도 월등하게 큽니다. 게다가 왕궁에 바로의 딸을 위한 집(8절)을 지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성전 건축 사이에 이러한 왕궁의 세속적 실태를 지적함으로, 솔로몬이 과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청지기적인 통치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합니다.
2. 솔로몬은 장인(전문기술자) 히람을 초빙하여 성전 건축의 마지막 부분들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13~14). 이 히람은 앞서 등장한 두로 왕 히람이 아니라(5:1),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납달리 지파이고, 아버지는 두로 사람인 놋 세공 기술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예비하셨듯이(출31) 이제는 히람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3.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성전 문의 두 기둥이었습니다(15~22). 그 규모는 웅장했는데 높이가 18규빗(8m), 둘레가 12규빗(5.4m)이었습니다. 이 기둥들은 각각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야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웅장한 기둥을 보는 사람들은, 이 기둥의 의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다윗 왕가(교회)를 세우시며, 다윗 왕가의 존립(교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기둥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국의 계획은 확고불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4. 성전 건축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막에서는 보지 못했던 ‘바다’입니다(23~26). 바다는 말 그대로 the Sea 인데, 거대한 규모의 물통이었습니다. 원형의 큰 목욕통과 같은 것인데, 제사장들이 제사를 전후로 자신들을 씻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대하 4:6 참조). 바다는 직경이 10규빗(4.5m)이고 높이가 5규빗(2.3m) 그리고 둘레가 무려 30규빗(13.5m)이었고 물을 담을 수 있는 용량은 2000밧(45,000 리터)입니다(23). 그리고 히람은 물두멍을 열 개 만들었는데, 이것은 각각 직경이 4규빗(1.8m)이었고, 용량은 40밧(96리터)입니다(38). 바다는 제사장이 몸을 씻기 위한 용도였고 물두멍들은 제물을 씻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대하 4:6 참조).
5. 성전이 신약교회를 상징한다면 성전 문에 두 기둥이 있듯이, 교회에도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기둥들입니다. 그들은 야긴과 보아스의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야긴 즉 ‘하나님이(교회를) 세우십니다’라는 메시지와 보아스, ‘하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그들의 삶과 태도와 말로써 증거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 기둥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 야긴과 보아스는 특정한 직분자들을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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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6장에서 하나님을 위한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갑자기 솔로몬의 왕궁 건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성전 도구들과 치장에 대해서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뜬금 없이 솔로몬의 왕궁 건축 내용이 나온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여호와의 성전과 솔로몬 왕궁에 대한 극명한 대비가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6장 38절에는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 7장 1절에 왕궁의 건축 기간은 무려 십삼 년이기에 성전 건축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간을 들여 자신의 왕궁을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배나 되는 시간을 쓴 것은 그만큼 솔로몬의 마음이 성전 건축보다 자신이 거주할 왕궁에 마음이 기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도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궁은 그저 시간만 많이 투자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2) 그가 레바논 나무로 왕궁을 지었으니 길이가 백 규빗이요 너비가 오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으며
솔로몬 왕궁의 크기는 길이 100규빗(45.6m), 너비 50규빗(22.8m), 높이 30규빗(13.68m)입니다. 이를 성전의 크기와 비교하면 성전의 길이가 60규빗, 너비가 20규빗이기에 왕궁은 성전과 비교하면 4.2배 크게 지어졌습니다. 이미 성전과 왕궁의 크기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건축 기간도 당연하게 왕궁이 두 배 정도 오래 걸린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건축할 때 최고급 목재였던 백향목을 사용하였고, 얼마나 많은 백향목을 사용하였는지 새번역 성경에서는 본문 2절의 왕궁을 ‘레바논 수풀 궁’이라고 표현합니다.
솔로몬 왕궁은 다섯 개의 주요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 또 기둥을 세워 주랑을 지었으니 길이가 오십 규빗이요 너비가 삼십 규빗이며 또 기둥 앞에 한 주랑이 있고 또 그 앞에 기둥과 섬돌이 있으며
먼저 레바논 나무로 지은 큰 본체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랑이 있는데, 주랑은 주 건물 본관에 연이어 있는 기둥들로 벽이 없는 복도를 의미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현관이나 입구로 볼 수 있습니다. 주랑의 크기는 너비가 30규빗(13.68m), 길이가 50규빗(22.8m)입니다. 기둥 앞에는 섬돌이 있는데, 섬돌은 ‘돌층계’라기보다 ‘차양’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어서 지속적으로 주요 건물들이 나열됩니다.
(7) 또 심판하기 위하여 보좌의 주랑 곧 재판하는 주랑을 짓고 온 마루를 백향목으로 덮었고
세 번째로는 심판하기 위한 보좌의 주랑, 재판하는 주랑이 있습니다. 당시 왕이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는 재판입니다. 이미 솔로몬은 열왕기상 3장에서 재판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널리 전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기도드릴 때도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듯 그에게 있어 재판하는 주랑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건축물이 등장합니다.
(8) 솔로몬이 거처할 왕궁은 그 주랑 뒤 다른 뜰에 있으니 그 양식이 동일하며 솔로몬이 또 그가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 주랑과 같더라
네 번째로는 솔로몬이 거처할 왕궁인데, 2절에서 레바논 나무로 지은 왕궁이 ‘집무실’이라면 8절의 왕궁은 ‘관저’입니다. 솔로몬이 거처할 왕궁도 다른 건물의 건축 양식을 따라 비슷하게 지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바로의 딸을 위한 집입니다. 열왕기상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왕궁을 지을 때 바로의 딸을 위해 특별하게 집을 지어 준 것을 보면 솔로몬의 여러 부인 중에서 바로의 딸이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아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주권보다 세상의 권력을 의존했던 솔로몬의 왕국이 기울어지는 것을 암시합니다.
본문은 다섯 개의 주요 건물들을 건축할 때 사용한 재료들도 설명합니다.
(9-10) 이 집들은 안팎을 모두 귀하고 다듬은 돌로 지었으니 크기대로 톱으로 켠 것이라 그 초석에서 처마까지와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니 그 초석은 귀하고 큰 돌 곧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이라
솔로몬의 왕궁을 지을 때 사용한 돌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라 모두 귀한 것들을 사용하였고, 왕궁의 기초석은 성전의 기초석과 같은 10규빗과 8규빗의 크기이며 기초석들은 각 크기에 따라 매우 정교하게 톱으로 다듬어졌습니다. 매우 귀한 돌들과 더불어 솔로몬 왕궁에 대한 평가로 오늘 본문은 마무리 됩니다.
(11-12) 그 위에는 크기대로 다듬은 귀한 돌도 있고 백향목도 있으며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 같더라
귀한 돌과 더불어, 앞서 솔로몬 왕궁 건축에 가장 많이 사용된 최고급 백향목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왕궁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 비교대상이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과 같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왕궁에 대해 긍정이나 부정을 하기보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솔로몬과 그리고 솔로몬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칠 년 동안 지었지만 자신의 왕궁을 위해서는 두 배 정도 해당하는 십삼 년 동안 건축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호와의 성전보다 4배나 더 크게, 그리고 건축 기간도 두 배 이상이 걸렸다면 이미 솔로몬의 마음이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명 솔로몬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려 하실 때 자신을 위해 부와 장수를 위해 구하지 않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했던 대답을 했을 정도로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가 자신의 왕궁을 지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라 그의 화려한 궁전과 재력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솔로몬을 이렇게 타락하게 만들었습니까? 신명기 17장 17절에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신명기 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의 말씀은 마치 솔로몬을 염두하고 기록된 말씀 같습니다. 솔로몬은 신명기 말씀과 정 반대로 살아왔습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습니다. 또한 매우 강성했던 나라였기에 그에게는 수많은 은금이 쌓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재물들과 아내들은 그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혹시 우리가 꿈꾸고 있는 것이 솔로몬의 풍요로운 삶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한 왕궁을 성전보다도 크게 지으면서도 그것이 자기 소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올바른 분별력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면 왕궁의 크기보다 더 크게 성전을 지었을 것이며,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재산을 쌓고, 수많은 아내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 가면서 귀중한 인생을 흘려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물질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을 기초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보다 왕궁을 크게 지은 것은 단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 보다 내 삶에 더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솔로몬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가 앞서는 것이 있다면 그것 모두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솔로몬과 같은 모습입니다.
내 삶에 물질이 하나님 보다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에 세속적 가치관과 욕망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세상적인 성공과 권력들이 내가 간절히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 속에 있다면 왕궁을 성전보다 크게 건축하고,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왕궁을 지었던 솔로몬의 모습이 내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가실 때 무엇보다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욕심과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목적삼고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며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삶에 왕궁을 꾸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우리의 삶이 더욱 견고히,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 몸이 나만의 왕궁이 될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될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 지게 됩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기록한 열왕기상 6장에 이어 7장에는 솔로몬의 궁을 건축한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성전 주랑 앞 두 놋기둥과 놋으로 만든 바다를 제작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함께 살펴 보시겠습니다.
히람과 놋 기둥(7:13-22절)
(13-14)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
본문에 놋쇠 대장장 히람이 나옵니다. 그는 솔로몬의 부탁을 받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벌목하여 보내었던 두로왕 히람과 동명이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 2장 14절에 히람의 어머니를 ‘단의 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 지파의 여인이었던 히람의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 사람과 결혼을 했다가 남편이 죽고 나서 두로 사람과 재혼을 했거나 혹은 단에서 살았던 납달리 지파 소속 사람으로 두로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정확한 맥락은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고, 그의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람은 두로에 거주했습니다. 히람은 두로에 거주하면서 어머니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의 고국에 갈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놋쇠 대장장이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생업을 도우며 놋쇠 대장장으로서 기술을 배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 이름이 같은 두로왕 히람의 추천을 받아 이스라엘 솔로몬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역대하 2장 13, 14절을 보시면 두로 왕 히람(후람)이 솔로몬에게 놋쇠 대장장 히람을 추천하여 보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고국을 향해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듣기만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히람에게는 너무나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과부의 아들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이방인을 아버지로 둔 히람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전 기물을 가공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은 자기 일에 충성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잠언 22장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히람은 어찌보면 어머니의 고향에 돌아가 그 나라의 왕인 솔로몬 앞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될 줄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놋쇠 대장장으로 가업을 이어 최선을 다하며 그 분야에 성실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두로 왕 히람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에 가서 성전 건축에 쓰임받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부르신 자리는 어디입니까? 때론 그 자리가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라 생각이 되거나 힘이 들고 알아주는 이 없는 자리라 생각되어 마음이 상할 때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게 자신이 심겨진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는 자에게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존귀한 자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특히 히람처럼 연약한 입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일에 충성된 자를 하나님은 잊지 않고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5-20)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한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요 다른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으로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기둥을 이렇게 만들었고 또 두 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고 다른 기둥 머리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주랑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 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 개가 줄을 지었더라
히람은 두 놋기둥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십팔 규빗으로 이는 8.2m이며 둘레는 십이규빗 곧 5.47m이고 기둥머리는 오규빗으로 2.28m입니다. 이 기둥은 머리에 바둑판 모양의 얽은 그물과 사슬로 장식하였고, 석류와 백합화 모양으로 화려하게 꾸며 장식하였습니다. 백합화는 성경에 기록된 꽃들중에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꽃이며 석류는 과일 중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열매입니다. 특히 석류는 그 끝이 왕관 모양으로 되어 있어 ‘영광’을 나타내는 과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성전을 찾아온 이들을 압도하는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두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이름도 있었습니다.
(21-22)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는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사가 끝나니라
오른 쪽 기둥의 이름은 ‘야긴’이었습니다. 그 뜻은 ‘그가 세우리라’의 의미입니다. 왼쪽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인데 이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야긴과 보아스’는 성전 입구에 세워져 성전을 오가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억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세우리라는 뜻의 야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까지 모든 순간, 순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불순종의 역사 가운데서도 사사기의 죄악과 사울, 다윗왕의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의 시대에 성전건축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신 결과였습니다. 또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미의 ‘보아스’는 자신들을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약하디 연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력한 가나안 백성들을 무찌르고 주변국을 평정하게 된 것은 오로지 능력의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까닭이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리마인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과 얻게 된 것들이 나의 힘으로 세우고 얻은 것이라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게 세워진 것, 회사가 성장하는 것,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나의 힘과 능력으로 세워나간 것이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긴과 보아스를 통해 우리는 광야에 머물던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에 놀랍도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사랑 때문에 그 은혜로 이 모든 일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먼 훗날 이 야긴과 보아스는 바벨론의 군사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맙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야긴과 보아스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렸고 그 하나님의 세우심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고 스스로의 힘과 능력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삶에 두 신앙의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세워야 합 니다. 이어서 히람이 놋으로 성전 바다를 만든 내용이 이어집니다.
놋을 부어 만든 바다(7:23-26절)
(23-26)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며 박이 있는데 매 규빗에 열 개씩 있어서 바다 주위에 둘렸으니 그 박은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 줄로 부어 만들었으며 그 바다를 소 열두 마리가 받쳤으니 셋은 북쪽을 향하였고 셋은 서쪽을 향하였고 셋은 남쪽을 향하였고 셋은 동쪽을 향하였으며 바다를 그 위에 놓았고 소의 뒤는 다 안으로 두었으며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고 그것의 가는 백합화의 양식으로 잔 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이천 밧을 담겠더라
이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을 수 있도록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놋으로 만든 기구였습니다. 그 직경은 십규빗인데 이는 4.56m이며 높이는 오규빗으로 2.28m, 둘레는 30규빗 곧 13.68m입니다.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박’모양의 장식으로 꾸몄으며 그 바다의 아래에는 소 모형 열 두개가 각 세 마리씩 동서남북으로 향하여 받히고 있었습니다. 소는 순종과 희생을 상징하며 그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큼 두꺼워 매우 무거웠고 백합화의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는 물 이천 밧 곧 45,420L의 물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용량의 물을 담을 수 있었기에 ‘놋바다’라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이 놋바다는 성전에 많은 물을 보관함으로서 제사장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씻어 하나님앞에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많은 물의 양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늘 성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루 세 번 식사의 기도를 할 때 단순히 감사의 기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과 시간 사이에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며 우리의 양심과 의지를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말씀의 개혁자들이 되게 해주시길 간구해 보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이 놋바다는 훗날 악한 유대왕인 아하스가 놋소에서 내려 돌판 위에 올려 놓고 사용을 하였고 결국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깨뜨려져 두 놋기둥과 함께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는 야긴과 보아스를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 성결’ 곧 거룩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신앙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곧 우리를 세우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또한 놋바다의 가득한 물로 자신을 씻어야 했던 제사장들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날마다 의지하며 회개와 성결의 자리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히람을 통해 세워진 이 아름다운 놋기둥과 놋바다는 결국 불순종,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여호와의 성전 기물이 아닌 그저 놋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허물어진 두 놋기둥과 놋바다와 같은 아픔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금 허리 띠를 부여잡고 내 삶에 무너진 야긴과 보아스, 그리고 내 더러워진 양심과 마음을 씻어낼 회개의 놋바다를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바다에 이어 열 개의 놋 물두멍이 등장합니다. 이 열 개의 물두멍은 바다와 같이 고정식이 아니라 수레에 올려 이동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일종의 리어카 위에 물탱크를 얹은 모양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성경 기자는 그 기구의 제원을 상세히 밝힙니다. 하지만 글을 읽어서는 그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으며 모호한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따라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두멍 10개의 제원 (27-39)
(27) 또 놋으로 받침 수레 열을 만들었으니 매 받침 수레의 길이가 네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요 높이가 세 규빗이라
받침 수레의 길이와 너비가 네 규빗이라고 하는데 각각 1.8m 정도 됩니다. 높이는 세 규빗이라고 하는데 약 1.4m 정도입니다. 높이가 가로 세로의 3/4인 육면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즉 길이와 폭이 2m가 안 되는 정사각형에, 깊이는 약 1.5m 정도인 수레를 열 개 만든 것입니다.
(28-29) 그 받침 수레의 구조는 이러하니 사면 옆 가장자리 가운데에는 판이 있고 가장자리 가운데 판에는 사자와 소와 그룹들이 있고 또 가장자리 위에는 놓는 자리가 있고 사자와 소 아래에는 화환 모양이 있으며
그 수레 사면에는 판을 대서 사각 틀로 만듭니다. 그리고 판에는 각종 장식을 합니다. 사자와 소와 그룹을 새겨넣었는데, 사자는 힘과 용맹과 통치권 등을 상징하고, 소는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며,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의 수호를 상징합니다. 29절을 보면 가장자리 위에는 놓는 자리가 있다고 하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29절을 이렇게 옮깁니다. 그 놋판에는 사자와 소와 그룹 천사들이 있고 그 틀 위에는 밑받침이 있으며 사자와 소 아래에는 화환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즉 틀을 가로지르는 가로대 또는 물두멍을 얹을 받침 기능의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31) 그 받침 수레에 각각 네 놋바퀴와 놋축이 있고 받침 수레 네 발 밑에는 어깨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어깨 같은 것은 물두멍 아래쪽에 부어 만들었고 화환은 각각 그 옆에 있으며 그 받침 수레 위로 들이켜 높이가 한 규빗 되게 내민 것이 있고 그 면은 직경 한 규빗 반 되게 반원형으로 우묵하며 그 나머지 면에는 아로새긴 것이 있으며 그 내민 판들은 네모지고 둥글지 아니하며
이 수레에는 네 개의 놋바퀴를 달았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30절을 이렇게 옮깁니다. 또 놋받침에는 놋으로 만든 바퀴 네 개와 축이 있고 그 놋받침 네 모퉁이에는 물통을 얹을 수 있는 네 발이 있으며 그 발은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즉 30절에 나오는 발 밑에 어깨 같은 것 이란, 수레 네 모퉁이에 물통을 얹을 수 있는 버팀 장치로 보입니다. 예전에 겨울이면 리어카에 연탄을 실어 집으로 가져갔었습니다. 100개를 맞추려면 약간의 기술이 필요했던 생각이 납니다. 이 리어카는 바퀴가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 무게 중심을 잘못 맞추면 뒤로 넘어가 연탄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두멍 받침 수레는 바퀴가 네 개이기 때문에 그러한 염려는 없었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31절을 또 이렇게 옮깁니다. 그리고 놋받침 맨 위에는 오목한 받침대가 있었다. 그것은 놋받침에서 위로 45센티미터 올라왔고 그 깊이가 약 68센티미터였으며 그 면에도 무늬를 아로새겼다. 즉, 이 받침 밑면에는 위로 45cm가 올라오는 일종의 장치를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2-36) 네 바퀴는 옆판 밑에 있고 바퀴 축은 받침 수레에 연결되었는데 바퀴의 높이는 각각 한 규빗 반이며 그 바퀴의 구조는 병거 바퀴의 구조 같은데 그 축과 테와 살과 통이 다 부어 만든 것이며 받침 수레 네 모퉁이에 어깨 같은 것 넷이 있는데 그 어깨는 받침 수레와 연결되었고 받침 수레 위에 둥근 테두리가 있는데 높이가 반 규빗이요 또 받침 수레 위의 버팀대와 옆판들이 받침 수레와 연결되었고 버팀대 판과 옆판에는 각각 빈 곳을 따라 그룹들과 사자와 종려나무를 아로새겼고 또 그 둘레에 화환 모양이 있더라
바퀴는 수레에서 길게 뺀 축에 연결했는데, 그 높이가 한 규빗 반, 즉 약 70cm 정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받침 수레 옆면의 높이까지 같이 계산하면 전체 받침 수레의 높이는 2m 이상이 되는 작지 않은 크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과 테와 살과 통을 다 놋을 부어 만든 것으로 보아 세밀한 공예 기술이 필요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34절에 네 모퉁이에 어깨 같은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30절에 나오는 어깨 같은 것의 추가 설명 또는 또 다른 고임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나오는 받침 수레 위에 둥근 테두리는 31절의 대접 받침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37-39) 이와 같이 받침 수레 열 개를 만들었는데 그 부어 만든 법과 크기와 양식을 다 동일하게 만들었더라 또 물두멍 열 개를 놋으로 만들었는데 물두멍마다 각각 사십 밧을 담게 하였으며 매 물두멍의 직경은 네 규빗이라 열 받침 수레 위에 각각 물두멍이 하나씩이더라 그 받침 수레 다섯은 성전 오른쪽에 두었고 다섯은 성전 왼쪽에 두었고 성전 오른쪽 동남쪽에는 그 바다를 두었더라
히람은 이와 같이 받침 수레 열 개를 만들었는데 다 동일하게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물두멍 열 개를 만들어 그 위에 둡니다. 직경은 네 규빗 약 1.8m였고, 사십 밧 즉 908리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수레는 길이와 너비가 네 규빗의 정사각형 모양이었기에 물두멍의 직경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이 물두멍은 수레에 딱 들어맞는 크기였을 것입니다. 물론 수레 아래 고임 장치를 두어 물두멍이 수레 윗부분으로 솟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이조차도 상당히 거대하였기에, 여기에 물을 채우거나 끌고 다니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력이 투입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 개의 물두멍은 어떤 기능을 합니까? 역대하 4장 6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 물두멍 열 개를 만들어 다섯 개는 오른쪽에 두고 다섯 개는 왼쪽에 두어 씻게 하되 번제에 속한 물건을 거기서 씻게 하였으며 그 바다는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더라, 즉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자기 몸을 씻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번제물을 씻는 용도였던 것입니다. 번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물이 될 짐승에 직접 안수하고 동물을 잡았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피를 사방에 뿌리고 번제물을 물로 씻습니다. 레위기 1장 13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즉 피로 범벅이 된 제물을 씻는 용도로 그 물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수레가 10개나 된다는 것은 당시 드려지는 제사가 많았고, 성전 뜰 여러 곳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함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전 건축과정을 살피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약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대체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2장 21절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즉 성전 자체가 예수님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또한 그 기능도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1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9장 11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성전이 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영원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전과 그 기능을 모두 자신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종교와 비교해도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으며, 너희가 제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로 씻겨진다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바로 팔복입니다. 즉 이 세상은 마음이 부한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즐거워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슬퍼함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세도를 부리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온유함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돈에 주리고 권력에 목마른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받은 대로 갚아 주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권모술수를 복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깨끗한 것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이 세상은 자신의 권리만 누리면 복이라고 하지만 평화를 이루는 것이 복이라고 믿는 것이며,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일이 오히려 복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직관에 반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하도록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의 행동 양식은 이렇게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반대 되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개혁하여 참된 승리를 누리기 원합니다. 또한 수레가 10개가 되었듯이, 우리 삶의 어느 영역이든 우리가 깨끗이 씻기어 제물로 드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반구십리(半九十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이 구십 리에 이르러서도 겨우 반 정도 온 것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목표한 일과 맡겨진 일을 할 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함을 떠올려 봅니다.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에게 부탁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했고, 본문은 성전의 외부, 내부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각종 기구들까지 제작 완료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의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는 히람과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 어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전 건축의 완성(40-45)
(40) 히람이 또 물두멍과 부삽과 대접들을 만들었더라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
히람이 성전의 모든 일을 마쳤다고 언급하면서 41절부터 45절까지 그 내용을 다시금 요약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45) 솥과 부삽과 대접들이라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이 모든 그릇을 빛난 놋으로 만드니라
히람이 성전의 모든 그릇을 빛난 놋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최상의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또한 그 그릇들을 열심히 갈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최상의 그릇이 되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위해, 또한 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위해 히람은 최고의 것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성전 건축에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묵상집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1년간 주제 성경 구절을 가지고 묵상할 수 있는 글이 소개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오스왈드 챔버스입니다. 책의 제목은, 1월 1일의 묵상에 나오는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My Utmost for His Highst)”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말씀에서 따 왔습니다. 챔버스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고, 1911년에 런던의 클래펌에 성경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중 이집트에서 군목으로 사역을 하다가 그곳에서 4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속기사였던 챔버스 부인은 그가 전한 말씀들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힘썼고 그 결과로 40여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책의 제목처럼 스스로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중에 가장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았던 기억이 언제인지 떠올려 보기를 원합니다. 입시를 치르기 위해 매진했던 고3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직장에 막 입사해서 가장 열심히 일했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쏟았던 때는 언제였는지 떠오르십니까? 그때가 아직 오지 않은 분도 계실 것이고, 아득한 추억처럼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최고의 주님께 최선의 것을 드렸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심히 많은 성전 기구와 재료(46-51)
(46) 왕이 요단 평지에서 숙곳과 사르단 사이의 차진 흙에 그것들을 부어 내었더라
숙곳과 사르단 사이의 지역은 주물하기에 적합한 좋은 흙이 풍부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곳에서, 많은 청동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이곳을 기물들을 제작하는 장소로 직접 정한 것을 보면, 그가 성전 기물을 제작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47) 기구가 심히 많으므로 솔로몬이 다 달아보지 아니하고 두었으니 그 놋 무게를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
놋으로 만든 기구들의 무게를 측량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성전 건축을 향한 열망이 컸던 다윗은 생전에 이러한 재료들을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케 해 줍니다.
(48-50)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곧 금 단과 진설병의 금 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씩 둘 정금 등잔대며 또 금 꽃과 등잔과 불집게며 또 정금 대접과 불집게와 주발과 숟가락과 불을 옮기는 그릇이며 또 내소 곧 지성소 문의 금 돌쩌귀와 성전 곧 외소 문의 금 돌쩌귀더라
성전의 모든 기구를 솔로몬이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분향단과 진설병 상, 등잔대 등 금으로 만든 기구들은 히람이 만든 놋 기구들과는 달리 성막에서 쓰였던 것들을 만들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기술들이 전수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제작 당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주셔서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솔로몬에게도 지혜를 주셔서 성전 건축을 완벽하게 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성전 내부와 성전 안에서 사용할 기구들은 주로 금으로 만들었으며, 성전 밖에서 사용될 기구들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성전의 내부 기구들을 보다 귀한 재료인 금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에서 사용된 기술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합작품이듯, 이 성전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와서 솔로몬 성전을 보고 감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깊은 의미를 후에 망각하고 선민사상이라는 교만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성전 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역 역사를 미리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 자체는 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왕궁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이후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갔던 그의 모습을 보며, 본래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변질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 최선의 것을 드리고자 하는 그 마음이 한결같도록, 변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51)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금, 은, 놋을 많이 사용하였지만, 성전 완공 이후에도 그것들이 많이 남아서 곳간에 보관했다고 말씀합니다. 보관을 했다는 것은 이후 성전이 노후화되거나 수리가 필요할 때 사용할 것을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전 건축 완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가나안 땅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전에 임재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구원하신 주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40절과 51절에 성전의 모든 일을 마쳤다고 반복하여 언급합니다. 모든 일에 마무리가 중요함을 생각해 봅니다. 연초에 많은 계획을 세우고 어떤 것을 시작하지만 끝내지 못한 계획들, 일들이 참 많이 있음을 봅니다. 계획했던 일이 마지막까지 완성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노력, 그리고 주변의 도움 등 많은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공사를 하다 멈춰 있는 그래서 약간은 흉물스러운 건물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저 건물은 왜 공사를 하다가 말았을까? 부도가 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생도 언젠가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를 향해 끝까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우리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찌그러진 통에 불과할지라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로 조선에 내한해서 교회를 세우고 교단까지 설립한 침례교단의 말콤 펜윅 선교사님이 자신을 투영해서 쓴 소설 형식의 책입니다. 펜윅 선교사님은 젊은 시절,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부르시고 복음을 위해 먼 타국 조선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온 열정과 젊음을 바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국말로 된 성경을 번역하고 조선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조선인들의 삶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고백이 이러합니다. ‘비록 녹슬고 찌그러진 통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구하는 물을 나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찌그러진 쓸모없는 깡통과도 같은 존재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귀하다 여기시고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시고, 또 당신의 뜻대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를 보내신 그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날마다 이기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다윗과 솔로몬과 히람과 같이, 오스왈드 챔버스와 펜윅 선교사님과 같이 찌그러진 통과 같은 인생을 부르셔서 귀하게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하며 최선의 삶으로 드려지는 귀한 인생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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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裏面).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이라는 단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만큼, 눈에 보이는 만큼, 말하는 만큼 그럴 듯 하고, 근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이면(裏面)은 어떻습니까? 내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누추한 나의 또 다른 이면(裏面)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메스컴을 통해 사회 종교 지도층 인사들의 추악한 이면(裏面)을 듣고 보며, 놀라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이면(裏面)은 괜찮습니까?
성전 건축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6장에서는 성전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7장에서는 성전 안의 세부적인 모습들, 그리고 성전에 사용되는 도구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7:13절부터 성전도구 설명).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작은 생뚱맞습니다.
솔로몬이 자기의 왕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1절).
성전 건축 이야기에서 느닷없이 왕궁 건축 이야기로 넘어갑니다(1-12절). 왜 열왕기서 역사가들은 성전 건축이야기 흐름 속에 왕궁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솔로몬의 이면(裏面)에 대한 고발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과 열정은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간절한 신앙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진심과 간절함 이면(裏面)에는 솔로몬의 또 다른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놓치지 않습니다.
6장 38절에 의하면, 성전 건축이 7년 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솔로몬 자신의 왕궁을 13년 동안 건축했음을 밝힙니다. 의도적인 대조입니다. 그리고 곧 바로 성전의 크기와도 대조합니다. 솔로몬 왕궁이 성전보다 4.2배나 큽니다(2절). 또 다른 고발은 성전 역시도 많은 양의 백향목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왕궁은 차원이 다릅니다. 왕궁을 화려한 백향목으로 도배를 합니다(2-3절). 결국 그 과도한 화려함과 거대함이 막중한 노동과 세금 징수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이방 여인인 바로의 딸을 위해서도 왕궁 안에 화려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8절).
이것이 솔로몬의 이면(裏面)입니다. 성전을 향한 진심 그러나 그 진심 이면(裏面)에 감춰진 화려한 욕망과 부에 대한 탐욕. 솔로몬의 겉으로 드러나거나 눈에 드러난 부분이 아닌 그 이면(裏面)의 실체를 성경은 결코 포장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타락이 열왕기상 11장 이후에나 일어나는, 특별히 망가진 어느 시점 이후부터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성전 건축이라는 거룩한 사역의 때부터 이미 솔로몬의 이면(裏面)에는 이런 불안요소가 꿈틀되고 있었음을 고발하고 폭로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불완전하게 시작된 자신의 왕권 수호와 유지를 위해 아마도 솔로몬은 자신 스스로를 위대한 왕으로 과시하려는 초조함과 불안이 그토록 집요하게 화려함과 거대함, 그리고 부를 좇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솔로몬은 일천 명의 처첩을 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11:3). 무엇이 그토록 그를 결핍과 공허함으로 내몰았던 것일까요? 어찌됐든 솔로몬의 이면(裏面)은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裏面)은 결국 왕국 분열과 죄악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왕들 역사의 시발점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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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6장은 솔로몬은 즉위 4년째 둘째 달에 성전 건축을 시작해서 11년째 여덟째 달에 성전 건축을 끝냈으니, 7년 동안 (엄밀히 7년 6개월)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성전 건축이 끝나자, 솔로몬은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였는데 그 기간이 13년이 걸렸다고 본문 1절은 증거합니다.
영어 성경의 두 번역본에서는 본문 1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It took Solomon thirteen years, “however”, to complete the construction of his palace. (NIV)
“But” Solomon was building his own house thirteen years, and he finished all his house. (KJV)
이 두 번역본에서는 성전 건축 후에 시작된 솔로몬의 왕궁 건축 사건에 대해 “그러나” 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7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문은 시작하고 있을까요?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 6개월이 걸렸는데 반해 궁전을 건축하는데 13년이라는 더 긴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면 솔로몬의 왕궁의 크기는 길이 백 규빗, 너비 오십 규빗, 높이 삼십 규빗으로, 높이만 성전과 같지, 길이는 성전보다 40 규빗이 더 길고, 너비는 성전보다 30 규빗이나 더 큰, 성전에 비해 약 2배 정도가 되는 규모였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최고의 건축자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하였는데, 2절의 “레바논 나무”를 원어적으로 그대로 해석하면 레바논 숲의 궁이라는 뜻이 되니, 단순하게 건축자재로 백향목을 사용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백향목을 어마어마하게 사용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자신이 거할 왕궁뿐만 아니라 장가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똑같은 집을 지었다고 8절이 증거합니다. 이뿐이 아니라 안팎을 최고급 품질의 돌로 지었고 장식도 해놓았는데,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과 동일한 장식품으로 치장했다고 합니다(12).
물론 성전과 왕궁의 규모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왕궁은 단순히 왕이 사는 공간만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재판을 하는 공간도 필요하고, 국정을 운영하는데 많은 인력들이 있어야 하기에 성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또한 왕비로 맞아들인 바로의 딸을 위해 따로 궁궐을 지은 이유에 대해 역대하 8:11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역대하 8:11)
즉 솔로몬이 왕비로 맞아들인 바로의 딸에게 왕궁을 지어준 것은 결코 왕으로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이방인인 바로의 딸로 인해 하나님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결코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이방 여인인 부인에게 자신과 같은 규모의 궁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바로의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기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방 여인을 향한 그의 모습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불안감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문맥상으로는 성전의 내부공사 완료 후에 7장 13절 이하 성전 외부에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을 설치하고, 성전제사에 사용될 기구들을 만들고, 성전봉헌식을 한 후에 7장1절-12절까지의 솔로몬의 왕궁을 건축하는 순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서 기자는 이 순서를 따르지 않고 성전이 완공된 후에 솔로몬의 왕궁을 건설하고 이후에 성전제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의 순으로 기술을 했습니다.
납달리 지파 여인이 이방인인 두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두로 남자는 놋쇠 대장장이로 그들 사이에는 히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히람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놋 일에 대한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솔로몬은 두로에 있던 놋쇠 대장장이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히람을 데려와서 성전에 필요한 기둥과 성전제사에 사용될 기구들을 만들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는 달리 모계혈통주의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이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히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놋 다루는데 있어서 당대 최고의 기술자 히람은 야긴과 보아스 기둥도 세웠고, 바다와 수레와 물두멍, 성전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놋으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놋으로 만든 그 양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구가 심히 많으므로 솔로몬이 다 달아보지 아니하고 두었으니 그 놋 무게가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47)
만약 두로의 히람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성전의 놋 장식은 누가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여인이 이방인 두로 사람과 결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의 만남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한 사람을 양성하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히람이라는 인물에 대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14)
즉 본문에 의하면 히람은 두로에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두로라는 이방국가에 살면서 그곳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면 아무리 솔로몬이 초청했다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온갖 장식품과 기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두로에 살던 그에게는 자신의 고향인 두로를 떠나 외지인 이스라엘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신앙심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히람의 어머니의 교육에 의해서였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여인이 어떤 역경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면, 그 집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이처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일들의 가장 가까운 예는 이재철 목사님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던 저 역시 제 아내가 신앙의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냘퍼 보여도 여인의 힘은 이처럼 남자를 훨씬 능가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솔로몬으로 되돌아오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솔로몬의 중심은 히람을 통해 세운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에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27)
야긴은 '그가 세우셨다'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성전 건축을 마치고, 왕궁을 건설하는 동안 솔로몬은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 그리고 현재의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셨기에 가능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였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가장 귀하다는 정금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정도로 순수한 정금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전 건축을 마치자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둘(51)” 정도로 사심이라고는 일말도 없었습니다. 이같이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금 같은 삶을 사는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고, 비록 성전보다 더 큰 왕궁을 건설하고 그 안에 살지라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후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에 의존하여 이방국들과 정략결혼을 하는 등 자신을 의지하면서 그는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립니다.
혹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원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두 기둥을 우리 가슴에 굳게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할 지라도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을 굳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좌절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금과 같이 순수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