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으로 주님 앞에 서라.
1. 1장에서 5장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대상으로 주어진 제사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6장과 7장은 제사장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6장과 7장은 제사장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1-5장은 일반 백성이 알아야 할 사항들, 즉 어떤 경우 무슨 제사를 드리는지, 각각의 제사에 어떤 동물을 드려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6-7장은 제사장들이 알아야 할 것, 어떤 절차로 제사의식을 거행하며, 제물의 어떤 부분을 번제단에서 태워야 하는지,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부분과 동료나 친족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부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엄격하게 구별된 것은 아닙니다.
3. 다만 제사의 순서는 약간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1-5장은 신학적인 배열로서, 여호와께 향기가 되는 1-3장(번제, 소제, 화목제), 4-5장은 죄를 용서받는 속죄제, 속건제를 기록하고 있다면, 6-7장은 실제 제사가 드려진 빈도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제, 소제, 제사장의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 6장 7절까지는, 5장 14절부터 이어진 속건제에 대한 규정입니다. 죄책의 문제, 양심의 가책과 관련된 속건제는 하나님께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 대한 침해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저당을 잡거나 맡은 물건에 대한 불법 점유(2), 잃어버린 물건을 발견하고 말하지 않음(3),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을 유혹함(19:20~22), 이웃을 압박함(2), 거짓을 증언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3) 등은, 그 자체로 죄이고 여기에 하나님을 끌어들인다면 더욱 악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경우에 죄를 깨달으면 원래의 손실에 20%를 더하여 보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자신을 속건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과 동일시되셔서 하나님께 자신을 보상으로 드리십니다.
5. 번제에서(9~13) 강조된 것은 번제단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는 제사장의 책임입니다(9,12,13). 제사장이 맡은 직무의 거룩함은 조금도 무시되거나 간과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제사장의 직무에 관련하여 가르치는 것은,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확보해야 하며, 그 일을 위해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불을 밤새 꺼뜨리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사장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성령의 충만을 구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영적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선포를 듣는 신약의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역할을 감당하도록 거룩한 직분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할 필요도 마땅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6. 14절에서 23절은 소제에 대한 규정입니다. 소제는 성도의 헌신을 보여주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일반 개인의 소제(14-18)와 대제사장의 소제(19-23)로 분류됩니다. 일반 백성이 가져온 소제물에서 제사장은 한 움큼을 취하여 유향과 함께 불태워드렸고, 나머지는 누룩을 넣지 않고 회막 뜰에서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소제물은 그 자체가 제사장들의 음식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 제물을 먹는 행위는 예배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시였습니다.
7. 소제는 또한 대제사장에 의해서도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졌는데, 고운 밀가루 1/20 에바를 각각 드렸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대제사장의 소제로 드려져야 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제사장이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시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이 자신부터 매일 소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을 드리지 않는데, 백성들의 헌신을 요구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온전히 드림(헌신)으로써 온전한 소제를 드리셔서 우리의 헌신의 영원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8. 6장의 마지막 부분은(24~30) 속죄제에 대한 규정입니다. 하루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히지 않고 사는 날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제사는 날마다 수없이 많이 드려졌을 것입니다. 속죄 제사도 역시 일반 백성의 제사가 있는가 하면, 제사장 자신의 제사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9. 여기서 제사장에게 가장 강조되는 것은 속죄 제물의 피의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속죄의 피는 오직 한 가지 목적, 죄인을 사하시는 것을 위해서만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제사장에게 중요한 일은 제사를 드린 사람의 제물의 고기를 예배자가 보는 앞에서 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음을 확증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더욱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매일을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서도 안 될 것이며, 또한 삶의 예배를 망가뜨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역자의 책임은 더 더욱 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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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범죄(6:1-7절)
본문은 여호와의 성물, 계명에 이어 속건제를 드리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속건제를 드리는 세 번째 이유는 이웃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득하였을 경우입니다.
(6:2-3)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번에는 이웃에 대한 재물을 범한 사람들에게 속건제가 필요함을 알립니다.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혹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이 범죄 자체만으로도 도둑질하지 말하는 계명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두 가지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이러한 행위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이웃에게 악하게 한 것을 넘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행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으나 그는 창세기 39장 9절에서 이와 같이 대답하며 음행에 빠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아내를 범하는 것이 단지 성적인 죄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야 한다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 착취, 혹은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이 잃은 물건을 줍고도 부정한다면 죄라고 정확하게 명시합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한 속죄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4-5)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죄를 범한 사람은 이웃에게 부당하게 취득한 물건을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물을 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배상액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드렸지만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은 그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액을 돌려 주어야 합니다.
레위기 6장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행위들은 5장의 부지중에 저지른 행위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결코 무의식적으로 훔쳐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탈이나 착취 행위, 그리고 거짓 맹세들이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행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죄가 드러나는 그 날에 진정한 회개와 함께 자신이 피해를 입힌 모든 것에 대한 배상이 필요합니다.
속건제를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조금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가로채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내 지식이 아닌데 내 지식처럼 도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내 물건도 아닌데 교묘한 방법으로 강탈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무엇을 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인 양 가로채고, 거짓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즉시 하나님께 나와 회개해야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당하게 취하였던 것을 당연히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건제를 드리는 모습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6-7) 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부당하게 이웃의 물건을 취한 사람은 그 사람에게 배상을 한 후에는 하나님께 나와 숫양을 속건제물로 드리기 위해 제사장에게로 끌고 가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를 하면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게 됩니다.
보통 사람은 죄를 지으면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아담도 자신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자꾸 숨기고 또 다른 거짓을 낳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범죄한 사실에 직면하며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속건제를 드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겉으로는 평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가증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부지중에 지은 죄, 그리고 의도적으로 지은 죄 모두를 진실되게 고백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으나 우리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속건제를 드리며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번제의 추가 규정 (8-13)
함께 살펴볼 본문은 번제와 소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번제와 소제에 대한 이야기는 레위기 1-2장에 이미 나왔지만 오늘의 본문이 다루는 번제와 소제의 내용과 그 적용대상이 다릅니다. 레위기 초반부에 나오는 규례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공통으로 지켜야 할 규정이라면, 6장 8절부터 나오는 규정은 제사장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진 추가 규정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본문의 규정들은 그 말씀의 대상자가 제사장들에게로 집중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8-9절입니다.
(8-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8절에서 9절은 번제물을 밤새 태우도록 하는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절의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라는 표현에서 ‘명령하다’라는 동사는 제사장들에게 제사의 관련된 율법이 무겁고 꼭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는 표현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그 내용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히브리어 원어에는 번제물을 ‘밤새도록 아침까지’ 태워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밤새도록 제물을 태우는 이유에 대해 성경이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이를 추론해 보자면, 제사장이 성막에서 사역하는 시간이 아침 해 뜰 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이기에, 제사장이 성막에 없는 동안에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향기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완전히 태워져야 한다는 의미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은 끊어짐이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을 방해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태워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회적인 결단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과정, 즉 밤새도록 태워지는 것과 같은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제물을 밤새도록 길게 태우고, 또 완전히 태워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10-11)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0-11절은 번제물을 아침까지 태우고 남은 재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재를 치우는 제사장은 세마포 옷과 세마포 바지를 입고 자신의 몸을 잘 정돈하여 가린 상태로 번제단에 올라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0장 25-26절에서 제단에 오를 때에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게 했던 규정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따금씩 벌어지는 성적으로 문란한 우상숭배와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따라 경건하고 바르며, 품위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면의 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돈되고, 질서있는 모습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단 위에서 번제물의 재를 치울 때에는 성막에서 사역할 때 입던 세마포 옷과 바지가 아닌 다른 정복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성소 내에서 일할 때와 성소 밖에서 일할 때를 구분하여 제사장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 뿐만 아니라 성소 안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제단의 여러 더러운 것들과 재를 치우는 일을 한다고 하여, 아무 옷을 편하게 입는 것이 아니라, 바깥 활동용 정복을 입었는데,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소의 모든 일을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 일을 가볍거나 하찮은 일로 여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자신의 저서 ‘의상철학’에서 인간이 입는 각 의상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철학적 표현으로 역설하였습니다. “물질세계는 그 배후에 놓인 정신적 질서가 눈에 보이게 드러난 것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정신적 존재라 해도 그 본질은 물질세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성경에도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중심을 강조하는 표현이지만, 반대로 생각을 해보면 연약한 인간은 어찌 되었건 외모에 흔들린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세계, 즉 현실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내가 영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여, 긴 시간 쌓아온 물질세계의 문화와 규범, 질서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제사장이 옷을 바르게 입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12-13)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12-13절은 앞선 9절에서 언급한 번제단 위의 불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이 밤새도록 피워진 채로 아침까지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시며 이 불을 가지고 제사장이 아침마다 나무를 제단 위에 올려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레위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느헤미야 10장 34절, 13장 3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가 정해진 시기와 순서를 따라 이 나무들을 바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로 피운 나무 위에 번제물을 태우며, 이 번제물 위에 화목제 기름을 불태우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은 불이 번제단 위에 피워져 있고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반복하여 명령하시면서 하루 24시간 동안만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불이 꺼지지 않고 피어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점을 놓고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 된 성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불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소제의 추가 규정 (14-23)
(14-15)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4-15절은 소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짐승을 바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소제물만 들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밀가루로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동일하게 여호와 앞에서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시며 이 예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죄를 덮어놓고 그냥 살아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한 방법까지도 따로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16-18)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소제의 남은 것도 동일하게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면서 이 역시도 속죄제와 속건제의 고기처럼 동일하게 지극히 거룩한 것들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소제의 제사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제사로 취급하고 제사장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일한 거룩한 제사로 알고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18절의 ‘이를 만지는 모든 자는 거룩하리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데 거룩한 예물을 함부로 만져서 모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반대로 제사장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물건과 질서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19-23절은 제사장이 그들의 임직식 이후에 매일 하나님께 드릴 소제물에 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제사장이 소제를 드리는 시기를 개역개정 성경은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로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는 날로부터’라고 해야 그 의미가 더 적절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나오는 가르침은 제사장이 임직 이후부터 항상 드려야 할 소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분량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공식 제사에서 드리는 소제의 분량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제사장 임직식 제물에 관한 규정 역시 이 제물을 온전히 불사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한 점에서 9절에 나온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은 온전히 불태워야 하는 것과 성막 제단의 불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고, 매일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보았을 때 한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된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적용은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일차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이겠으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세워주신 영적인 제사장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각의 심령에 있는 거룩한 성소 속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불꽃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불꽃을 잘 유지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 일을 완벽하게 감당하기가 역부족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으로도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 모든 중심이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드려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8장 2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실 우리는 연약하여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기도의 불을 잘 꺼트리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각자가 만들어 놓은 신을 찾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도의 불을 잘못 사용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어, 우리가 어떻게 이 기도의 불을 사용해야 할지 친히 알려주시고, 또 직접 그 기도의 불이 되어 주시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해주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되시며 동시에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며, 더 나아가 직접 우리 기도의 불이 되어 주시어 우리 안에서 절대로 꺼지지 않는 존재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는 성막이 예표하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성막으로 통하여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을 눈을 들어 함께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태워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하지만 우리를 모든 것을 다 태워도 우리가 올려드리는 불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불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규례
오늘 본문은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릴 때 제사장의 직무와 제사장에게 주어진 몫에 대한 내용입니다.
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에서 새로운 주제를 설명할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관용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모든 규례가 인간 모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맡은 제사장의 임무에 대해 전하셨습니다.
먼저 속죄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25~26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속죄제는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제사장이 죄를 지은 경우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사에 바치는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자리, 곧 주 앞에서 잡아서 바치라고 하십니다. 잡은 제물은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의 죄를 속하였고,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은 그 제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속죄제물은 거룩한 제물로 분류가 되었고,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소도 거룩한 장소, 즉 회막 뜰 안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이 된 고기에 접촉된 사람은 누구나 거룩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27~28절입니다. 그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고기에 접촉된 사람은 누구나 거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거룩한 사람이 제물을 다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하지 않은 상태로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27절에서 제물의 피가 옷에 묻은 경우 거룩한 곳에서 옷을 빨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제물을 토기에 삶았으면 그 토기는 깨뜨리라고 하셨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로 씻으라 하셨습니다. 제물의 피가 튀기 쉬운 곳은 제사장의 옷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 묻은 옷을 거룩한 곳에서 빨라고 명령하십니다. 단지 피 묻은 옷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피 묻은 옷을 성문 밖으로 가져가게 되면 거룩함이 훼손될 수 있기에 반드시 그 옷을 거룩한 성막 안에서 빨도록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피 묻은 옷을 성막 안에서 빨게 하셨을 뿐 아니라 고기 삶은 그릇도 깨뜨리거나 삶게 하셨습니다. 깨뜨려야 하는 그릇은 토기 그릇입니다. 희생 제물을 넣고 끓일 때 우러나오는 국물이 토기 그릇에 스며들게 됩니다. 따라서 그릇 속에 스며든 국물은 완전히 씻어낼 수 없었기에 깨뜨리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제물을 삶았던 토기 그릇을 다시 사용한다면 거룩하게 구별한 것이 훼손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기, 즉 놋그릇은 물로 씻게 하셨는데 놋그릇에는 국물이 스며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거룩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거룩’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드려진 흠 없는 제물은 모두 거룩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먹는 제사장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은 제사장은 성막 안에서만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적용하며 내가 만든 신, 하나님의 대용품을 하나님이라고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통로 된 삶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교회에서의 나의 경건한 모습이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 또한 동일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양의 모습으로 칭송을 받지만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는 이리의 모습으로 지탄받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대용품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29~30절입니다.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은 남자로만 구성이 되었는데 제사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거룩한 제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지은 죄로 인해 드린 희생제물은 제사장 자신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회중의 죄로 인해 드린 희생제물도 제사장 몫으로 돌릴 수 없었고 불에 완전히 태워져 소멸시켜야 했습니다. 제물을 불에 완전히 태워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각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추고 덜어낼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제물의 속까지 완전히 드러내어 불태우듯이 우리의 죄 또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완전히 드러낼 때 우리 죄는 사함받습니다.
7장 1~10절은 속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속건제는 부지중에 성물에 대해 죄를 범하였거나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경우, 이웃에게 해를 끼친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가 자신이 범한 죄를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부지중에 범한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로 속죄제나 속건제 모두 같은 규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드릴 때 피를 성막 안에 뿌린 제물 외에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은 모두 제사장의 몫으로 챙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1지파는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 땅을 분배받아 생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1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한 지파인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막에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드려진 제물을 태워 드리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8~10절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냄비에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모두 그 드린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소제물은 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니라
번제의 가죽은 번제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고, 소제물의 남은 부분 중 익힌 것은 소제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이 되게 하셨습니다. 익히지 않은 것은 다른 제사장들의 몫이 되게 하셨으며,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하셨습니다.
29절과 같이 6절에서도 제사장이 제물을 먹을 때에는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거룩이라는 단어 ‘코데쉬’는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뜻합니다.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때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 닮은 사람으로 다듬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용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응답하며, 내게 허락하신 자리가 더러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별된 자리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가꾸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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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부터 6장 7절까지 이미 번제, 소제와 속죄제를 포함한 5대 제사법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번제, 소제와 속죄제의 규례에 대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선 6장 7절까지의 내용이 ‘백성들이 행할 제사 규례’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주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지침’ 곧 ‘제사장들이 행할 제사 규례’ 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를 뒷받침 해주는 말씀들로는 9절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14절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25절 전반절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이 있습니다.
먼저 8절부터 13절까지는 제사장들이 주의하여 행하여야 할 번제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관련하여 제사장들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임무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2절 전반절입니다.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13절입니다.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그 일은 바로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의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계속 해서 올려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제사장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가 되어야만 그 일은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 시대의 제사장들로 불러 주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우선적이며 중요한 책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깨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끊어지지 않는 예배”입니다. 곧 저희 삶의 현장이 예배의 현장이 되게끔 삶을 제물로 드리는 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세마포를 입었습니다(10절). 구별된 옷을 입고 제사에 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롬13: 14). 그런 우리의 정체성에 맞게 우리가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예수님을 닮은 구별된 언행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런 우리의 삶은 ‘끊어지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참 제사장의 삶’이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제 14절부터 23절은 소제에 관한 규례입니다. 특히 이 부분 중 14절부터 18절까지는 본문의 다른 단락과는 달리 ‘일반 백성이 드리는 소제’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후 19절부터 23절까지는 다른 본문처럼 ‘제사장이 드리는 규례’ 곧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의 규례’에 대한 내용입니다.
15절입니다. “그 소제의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성경은 소제의 제물들을 ‘기념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기념물’이란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이라는 의미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기념의 대상, 곧 기억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바드’와 ‘샤하’는 ‘섬기다’, ‘부복하다’는 뜻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들로 종들은 ‘예배’를 통해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무릎 꿇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예배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드린다는 점입니다. 추악한 죄인이었던 나를, 죽어 마땅한 나를,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품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곧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경배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바른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자기 위안을 삼는 도구로 예배를 잘 못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림으로 ‘나’라는 존재는 철저히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마음과 정신이 예배안에 녹아져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 하나님께서 열납해 주시는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일반 백성들이 드리는 소제물과는 달리 제사장이 드리는 소제물은 모두 태워야만 했습니다. 이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통해 결단하여야 할 부분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입니다. 소제의 제물이 모두 불태워 없어짐으로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소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24절부터 마지막 30절까지는 속죄제 중 특히 속죄 제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24절부터 29절까지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속죄 제물’에 대한 내용이며, 마지막 30절은 ‘제사장이 먹을 수 없는 속죄 제물’에 대한 내용입니다. 25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속죄제물을 가리키는 가장 특징적인 단어는 바로 ‘거룩’입니다. 속죄 제물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장소에서 잡아야했고(25절),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으며(26절), 피가 묻을 경우, 거룩한 곳에서 그 옷을 빨아야만 했습니다(27절). 아울러 28절에 의하면 제물을 삶은 그릇은 깨뜨리거나 물로 깨끗이 닦아내야만 했습니다. 거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레위기를 관통하는 핵심주제인 ‘거룩한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제사법을 알려주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구별된 행동이 곧 거룩함의 시작이요 거룩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보면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했던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하게 치유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불순종합니다. 비록 그의 몸은 깨끗하게 나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거룩함, 곧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얻어지는 거룩함에는 이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당신의 보혈로 씻어 주심으로 택함 받은 족속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민족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은 거룩한 구별, 곧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며 거룩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모두에게 소중한 한 날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 앞에 늘 깨어 삶으로 예배드리는, 중단 없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소제물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당신의 보혈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저희의 삶을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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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5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일반적인 제사 규례에 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본문 6장 8절부터는 제사장들을 향한 제사 규례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번제와 소제, 속죄제에 대한 제사장들의 행동 규례 및 주의 사항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8-13절은 번제에 대한 제사장의 규례인데, 번제 규례에 따라 제사장들의 하루의 일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녁에 단 위에 올려놓은 번제물이 아침까지 다 타고 재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긴 세마포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다 타고 남은 재를 긁어모읍니다. 재를 잠시 단 곁에 내려놓고 세마포 옷을 벗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진영 바깥까지 나가서 버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다시 세마포 옷을 입고 새 나무를 올려놓고 번제물을 올려놓은 뒤 저녁까지 태웁니다. 그렇게 번제단 불은 끊임이 없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을 향한 정성과 헌신입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단의 불이 꺼져 가는지 살펴야 하고, 입기도 불편한 세마포 옷을 연신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해야 하고, 재를 버리기 위해 진영 바깥으로 왕복하는 발걸음 또한 결코 가볍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정성과 헌신이 눈물겹고 귀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14-23절은 소제에 대한 제사장의 규례인데,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해 고운 가루 한 움큼을 취하고, 유향도 첨가하고, 기름으로 반죽도 해서 불살라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드립니다. 이 또한 큰 정성이요 헌신입니다.
24-30절은 속죄제에 대한 제사장의 규례인데, 만만치 않은 헌신입니다. 때로는 산 동물을 잡아야 할 때가 있고, 피를 찍어 뿌리다가 보면, 옷에 피가 묻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매번 피 묻은 옷은 거룩한 곳에서 정성껏 빨아야만 했습니다. 제물의 고기를 삶은 토기는 깨뜨려야 했고, 유기그릇에 삶았다면 그 그릇은 물로 말끔히 씻어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이 서 있는 공간의 자리는 결코 화려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참혹한 현실, 그 자체입니다. 동물이 잡혀지고 각이 떠지는 아비규환의 소리들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난장(亂場)입니다. 실컷 거룩한 표정으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문을 나설 때는 다시금 인간 본연의 탈을 다시 뒤집어쓰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얼굴들을 수도 없이 봐야 했고, 때로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하고, 아침부터 저녁 까지 제물을 태우고, 치우고, 씻고, 싫어도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하는 육체의 한계에 신음하기도 합니다. 한 복판에서 제사장들의 고군분투가 눈에 그려지십니까?
그 눈물겨운 헌신과 정성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에 갸륵한 반응을 보이던 그들에게 놀랍게도 이사야,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독설을 쏟아냅니다.
이사야서 1장 12-14절의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호세아서 6장 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왜 이런 지경에 처해있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토록 불이 꺼질세라 헌신했는데,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드리려고 애를 썼는데, 옷도 빨고 토기도 깨뜨리고 그릇도 씻고 충성이 대단한데, 어째서 저런 독설을 들어야만 했습니까?
제사 규례를 어겨서도, 율법을 등한히 대해서도 아닙니다. 규례와 율법은 서슬 퍼렇게 지키느라 고군부투 했습니다. 그런데 까마득히 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입니다.
제단 불은 꺼지지 않게 태워 냈건만 그 불 가운데 타고 있어야 할 번제물이 실은 자기 자신임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불타 재가 되어야 할 번제물임을 잊은 것입니다(롬12:1). 수없이 많은 소제를 드리기 위해 곱게 곱게 가루를 빻아갔지만 자기 자신이 그렇게 곱게 빻아지고 깨어져야 할 고운 가루임을 잊은 것입니다. 짐승의 목을 따서 생명, 즉 피를 흘려내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인생, 그래서 속죄제물이 필요함이요. 그렇게 각이 떠지고 깨어지고 불태워져도 마땅한 속죄제물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의 실책은 이를 잊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향한 정성과 헌신을 다한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힘 다한 갸륵한 반응을 보이노라고 하는 그 곳에서 자기자랑만 있고, 자기를 위한 애씀과 고투(苦鬪)만 남은 것입니다.
기막히고 눈물겨운 헌신과 수고가 실은 자기를 위함이요, 자기 자랑이요, 자기 이름이요, 자기 애씀과 씨름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세우고 자기의 자랑만 남은 자기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기에 독설을 들어도 마땅하지 않습니까.
나를 위한, 나를 향한, 나의 신앙에서 탈피하여, 실은 나를 위할 만한 것도, 나를 향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 불타 사라져도 당연한 번제물의 실체가 ‘나’요, 깨지고 빻아지고 빻아져도 만족스럽지 않은 고운 가루의 수준이 ‘나’요, 죽어 피를 철철 흘려도 마뜩지 않는 속죄제물의 형편이 ‘나’임을 기억하십시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헌신과 수고가 있다면, 그것은 겸손히 주의 제단에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내가 번제물임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곱게 빻아져야할 죄인임에 통곡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한 심령의 산제사만이 우리가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십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