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고 바른 믿음의 증거.
1. 한 여인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제 곧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를 잡아 온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으니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며, 율법을 자신을 돌아보는 기준이 아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하나씩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에는 주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정죄하고 비난하고 돌로 치는 곳이 아니라, 용서하고 용납하여 주는 곳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도 자기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는데, 혹시 당신의 손에는 여전히 돌이 들려 있지 않습니까?
2. 주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스스로 증거하셨으나, 사람들은 예수님 스스로 말하는 증거는 믿을 수 없다고 따졌습니다. 이 증거와 판단은 주님과 주님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판단이므로, 율법에 말한 대로 두 사람의 증거라고 주님은 주장하십니다. 신자들에게 이보다 깊은 진리와 사실은 없습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셨습니다(16, 29).
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판단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31). 참 제자의 표지는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는데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가로 판별됩니다. 말씀이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이 그를 자유하게 하였음으로 입증됩니다. 복음은 죄인을 자유하게 합니다. 그것이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4. 사람들이 주님께 살의를 품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셨기 때문입니다(40).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44).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지 않는 자들은, 다 마귀의 자녀라고 하심으로써, 주님은 달리 생각할 모든 여지를 끊어 내시고 그들의 악한 생각을 자극하십니다. 그들은 거짓을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기에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45). 이 일은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심령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너무나 잘 듣고 확신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47).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51). 이것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55).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24).
5. 교회는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교회로 세워지고 있습니까? 혹 유대인들도 내려놓은 돌을, 그 손에 여전히 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당신은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그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당신을 자유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도전이고 질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지 않아도, 지금 교회를 다니니까 괜찮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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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유대 종교 지도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시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게 되지만 결국 예수님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무리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들의 아랫사람들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도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눅 22:39~41에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서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바쁜 사역을 마치시고 산에 올라 기도하시고, 이른 아침 미명에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기도하시고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머무시고 다음날 다시 성전으로 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판단을 요구했습니다.
5절입니다. 모세는 율법에는 돌로 치라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6절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정말 여인의 음행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저의가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잡혀온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 여인을 놔주도록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어떻게 율법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할 것이었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사형 선고는 스스로 하지 못하도록 한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어 이 또한 예수님이 공격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대답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더라도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함정을 준비하여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엎드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이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촉구하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들에게 7절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 지도자들 눈에 음행하다 잡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잡아드릴 좋은 미끼가 될만한 사람으로, 죄를 지은 불결한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이 그 여인이 아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셨고, 잠시 후 그 자리에 있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죄를 바라보았을 때 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로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여겼지만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해 감히 자신이 의롭다고 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예수님과 단둘이 남게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본문 11절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 지은 죄인이라고 비난하던 음행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묻지 않으시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죄하지 아니 하시겠다"는 선언으로 인해 그 여인의 죄는 온전히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의롭고, 깨끗하다 하더라도, 아니면 정말 불결하고, 더럽고, 흉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죄가 없어졌다", "죄가 깨끗하게 용서 받았다"는 예수님의 선언. 예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이러한 죄 사함은 오직 죄가 없으신 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신 하나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바로 예수그리스도께 나가 우리의 죄를 정직히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의 힘으로는 이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구원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만 죄가 해결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많이 공부하고, 말씀을 많이 배우면서 신앙의 지식이 계속해서 쌓이게 됩니다. 그렇다 보면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지식만큼이나 깨끗하고 의롭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까지도 함부로 판단하고, 그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가리키는 그 죄인을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보도록 우리의 관점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음행한 여인은 범죄 현장에서 잡힌 사람입니다. 하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직 범죄 현장에서 발각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음행한 여인과 크게 차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범죄의 현장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결코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모습 가운데 혹시 다른 사람의 잘못은 크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우리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삶이 풍족해지고 부와 번영만을 추구하려 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죄를 지적하고 판단하며 ‘주님이 계실 곳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이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우리 사회에서 새로워지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이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가 아니라 ‘있을 곳이 있음이러라’라는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약속된 곳을 향해 광야를 걸어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대대로 기념하여 이스라엘이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갈 때까지 기대하고 소망하며 준비하길 바라셨습니다. 시기상으로는 곡식을 다 수확한 이후이기에 유월절보다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거둘 수 있던 곡식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며, 언젠가 더할 나위 없는 에덴의 풍성함이 임할 것임을 되뇌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가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이집트 노예시절과 같이 여겼을 터입니다. 그렇기에 모세와 같은 누군가 자신들에게 찾아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삶은 텐트를 치며 살아가듯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버려두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인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났던 물을 구해야만 했으며, 어디로부터 올지 모르는 위협 앞에서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 속에 모신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삶을 포기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 순례의 길을 향해 장막을 펼쳐야 했던 자들이 헤롯 성전을 만들고, 나팔 모양의 헌금궤를 제작했으며, 종교시스템을 구축하느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여느 해와 같이 초막절 축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성전 안 여인의 뜰에 섭니다. 7장 39절부터 44절까지는 그가 자신을 영원한 생명이 이어지는 물의 근원이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선언합니다. 스가랴 14장 7-8절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출애굽을 기념하여 제정된 초막절은 반석에서 물을 낸 이미지와 함께 매일 밤마다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불기둥도 기억하게 합니다. 축제 첫째 날 밤에 여인의 뜰에 네 개 금 촛대에 불을 켜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으로 알려진 미쉬나라는 문헌에는 이 촛대는 사다리로 올라가야 하는 꼭대기에 네 개의 황금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그릇들은 제사장의 속옷과 허리띠로 만들었던 심지가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촛대의 불이 켜지게 되면 축제 기간 동안 온 예루살렘이 여인의 뜰에서부터 물 행렬이 지나갈 때 비취는 불을 받아 반사됨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불이 아무리 높은 곳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비춘다 해도 초막절 이후에 꺼져야 했지만, 자신은 영원히 우리를 밝히실 것을 선언하고 약속하십니다.
이 빛은 따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어두운 사막에서 밤을 보낼 때, 불기둥은 나아가야 할 곳이자 나가고 멈추는 타이밍을 정해주는 기준이었습니다. 또한 그 속에 위엄과 생명이 함께했습니다. 불기둥에 지나치게 가깝게 가는 이는 데었고, 이탈한 사람은 짐승들과 기후 그리고 다른 민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빛은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매년 초막절 촛대를 밝혔음에도 태양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손전등을 원했습니다. 빛의 사정권이 자신을 비추지는 못하게 한 채로, 타인의 죄만 보이게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에게 자신을 증명해보라고 외칩니다. 1장 4-5절은 이러한 모습을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설명합니다. 예수를 판단하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빛을 만나 몸을 돌리고 눈을 감음으로 자신이 어두움에 있었음과 예수가 빛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스스로가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가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하길 요청합니다. 오늘날 예수께서 이 교회에 오셨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봅니다. 빛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어두움을 확인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12절과 20절에 ‘말하다’라는 단어로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공간적인 배경을 헌금궤(연보궤)로 두어,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삶을 예물로 드려야 할 것을 요청합니다. 미가서 6장 6-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여인의 뜰 주변을 따라 13개의 나팔처럼 밑은 넓고 입구는 좁은 모양의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안에 손을 넣어 헌금을 훔치는 것을 방지하려고 했지만, 점차 예물을 드릴 때의 울림으로 그의 신앙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랑하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기 전에, 우리의 삶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지 날마다 돌아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언이 참이라는 이유를 스스로의 근원과 목적지를 알고 계셨음에서 찾으셨습니다. 그분의 근원도 종착지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 없이 순간을 잘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기셨습니다. 설령 누군가를 판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기에 참된 판단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흐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이 내려쬔다는 것은, 저 멀리 태양으로부터 지금 이곳까지 끊어지지 않은 빛의 이어짐과 길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잡히지 않은 것이 승리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다 보면 오늘처럼 잡히지 않을 때도 있고 십자가 앞에서 끌려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흐름과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증언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랑하느라 빛이신 예수를 시험하며 스스로를 어두움이라 증언할 것인지, 아니면 광야길에서 불기둥에 온전히 삶을 의탁하듯 우리의 삶을 예물로 드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지 두렵고 떨림으로 소망하고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밤이 지나고 태양이 떠오르듯, 죄악과 연약함의 밤이 날마다 찾아오던 우리에게 변함없이 선명하게 타오르시는 은혜의 빛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이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대화가 지속이 됩니다. 그런데 동문서답도 한 두 번이지, 매번 대화할 때마다 엉뚱한 소리를 하고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참 답답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즘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노답(No+답),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엉뚱하게 이해를 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노답(No+답), 답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집니다.
오늘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먼저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22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미리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결하는 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3절과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기에 내일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한 여름의 매미에게는 내년이 없기 때문에 내년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사람의 인생도 그 시간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영생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가운데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성경을 관통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에 대해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고 숨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본질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 없이 내 스스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주시지만, 내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삶은,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름이 더 심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거꾸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보여주는 복음의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죄 가운데서 반드시 죽고, 예수님 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 속에서 이처럼 인간이 죄 가운데서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를 하고,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초대와 기회를 거절하게 되면 남는 것은 오직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오늘 말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우리도 결코 혼자 있지 않는다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 할지라도 항상 허무함과 허전함이 밀려오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슨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을 친히 보내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일이자 기뻐하시는 일이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도무지 답이 없는 노답(No+답)의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인생의 답이 없는 우리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셔서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인생의 답을 주시고 믿게 하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주님께서 계실 곳을 내어 드리며,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오늘 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단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단지 공간뿐만 아니라 소유와 생각까지도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을 전제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관계를 뜻합니다. 비록 같은 공간을 점유하며 지낼 지라도 사랑의 없이 따로 따로 각자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하는 것’은 ‘머무는 것’입니다. 단지 공간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곧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됨에 관해 언급하시며 '머뭄'을 이야기 하십니다. 참 제자됨은 곧 당신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머뭄'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며,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머뭄'은 '행위언어'가 아니라 '관계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을 어떤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 무엇을 지키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졌고, 또 율법이요구하는 것들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친밀한 관계없이 단지 장소만 공유하는 부부처럼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그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말씀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윤리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는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단지 ‘종교인’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도리일 수는 있지만 영원한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삶의 도리를 나타내는 언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깊고 넓습니다. ‘말씀’은 곧 인격이신 ‘예수그리스도’ 자체입니다.
말씀을 따른 다는 것은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넘어 훨씬 더 본원적인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곧 인격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그 삶을 성경은 출생에 비유합니다.(요3:5) 그 후에 그분의 생각, 그분의 뜻을 쫓아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내 삶의 방향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혹 그 삶의 걸음이 비틀거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비틀거리지만 그의 온 시선과 관심은 자신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는 엄마에게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안전과 생명이 엄마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 생각, 내 욕망을 투사하여 말씀을 해석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종교적인 언명으로서의 교훈일 뿐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땅히 해야하는 죽은 명분일 뿐 생명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 오늘 본문 속에서 책망하신 유대인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진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반문했던 것 처럼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즉 율법을 간직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고, 진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진리를 지킨다는 열심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죽이려하였습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인격이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14:6) 예수그리스도가 곧 진리 자체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어떤 객관적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님과 직접적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분과의 교류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말씀은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 말씀이 삶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미가 됩니다.
진리는 생명을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는 생명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진리가 아니라 명분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뿐 생명을 상실한 명분은 폭력의 또다른 쌍둥이 형제가 됩니다. 명분만이 가득한 공동체는 폭력이 일상화 된 그저 '공간'일 뿐입니다. 그속에서 사람들은 억압되고 죽어갑니다. 진리는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명분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명분에 집착하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바른 도리로서의 말씀, 종교적 언명으로서의 말씀만을 간직한 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자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참 제자가 아니라 종교인으로서 율법의 짐을 오히려 짊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율법적인 명분을 쫓아 그것을 세우려고 보이지 않은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종교인으로만 살아간다면 허구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누구에겐가 우리 자신이 폭력이라고 자각하지도 못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 진리는 생명을 억압하지 않고 생명을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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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두 번째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유월절에서 6개월 후에 있는 초막절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에는 중요한 행사가 2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실로암으로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도 순금 항아리를 들고 동행하여, 실로암의 물을 담아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긴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수문(water gate)으로 들어와서,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초막절이 지나면 보리를 파종해야 하는데, 그때 비를 내려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기에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라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치셨습니다.
초막절에 행한 또 하나의 행사는 ‘등놀이’였습니다.
초막절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4개의 금 촛대가 높이 세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을 켜면 전기가 없던 당시에 그 주변이 환해져서, 그 불빛 아래에서 여인들이 바느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삶에 빛이 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의 끝날을 ‘큰 구원의 날’로 여겼습니다. 그날도 다 끝나갈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의 양을 치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그 부르심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입니다. 이 표현과 “나는 세상의 빛이다.”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표현하면, “나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입니다.
12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더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다’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같은 길에 서다’입니다. 당시 이 동사는 3가지의 경우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군인이 자신의 지휘관을 따른 경우와 노예가 주인의 뒤를 따르는 경우 그리고 제자가 스승을 따를 때입니다. 만군의 주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지휘관이시고,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구원의 주인이시며, 그 어떤 스승과도 비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질곡, 죄의 진창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게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열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습니다. 그 열매를 먹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될 것만 같았고, 하나님과도 견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빛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각광(脚光)을 받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빛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고, 그 결과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죽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에서 단 12명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랐지만, 빛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밤에 나가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따를 때만 어두움은 어두움이 되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올바른 분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시다(13-19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을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 ‘나는 세상의 빛이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이 빛을 얻으리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목수가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4-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갈릴리 나사렛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자 목수로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 일 수가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감을 따라서 예수님을 판단했고, 모든 사람을 다 판단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분명히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닌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있고, 또 분명히 보고 들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중에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틀릴 수 있고,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하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적자, 비난자, 비판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바르게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므로 친히 주님의 증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신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옳다고 인정해 주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변 이후에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과 사람들은 “당신의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오?”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중의적입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팔아 당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 마시오.”의 의미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버지(목수 요셉)는 이미 죽지 않았소.”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영적으로 생명의 빛 속을 거닐고 있지 아니하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시다(20절)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약간 의아하게 보이는 단어, 하지만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킴 중에는 철저한 헌금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온전한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뿐만이라,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리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 먹기 위해서 마당에 있는 밭에 심은 채소와 조미료 역할을 하는 식물의 십일조까지 드리려고 했습니다.
당시 성전 중 여인의 뜰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넓은 입구에서 내려갈수록 좁은 통로의 함)이 13개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거기에 헌금을 넣을 때, 헌금이 들어가는 소리가 자신의 의를 더욱 굳게 세워준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바치는 헌금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재물이 필요하시기 때문이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이며, 헌금의 종류와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진리와 생명에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도, 단지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만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며 탄식하곤 하셨습니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드려야 할 본질적이고 올바른 헌금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헌금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보다 더 바른 헌금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게 여겨져도, 또 우리가 연약한 아이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길을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12장은 표적들의 책이라고 해서 일곱 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이 땅에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을 일으키셔서 위의 세상과 진리를 이 땅에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위와 아래를 연결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현상에 몰두함으로써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를 해소하시고 그 참 의미를 설명하시는 강론을 하십니다. 이를 오해 기법이라고 하는데 표적을 일으키셔서 이 땅과 하늘 사이에 괴리를 일으키시고, 이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심으로써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강론을 보면 그 특징이 나는 무엇 무엇 이다, 즉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일곱 개의 선언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어제 말씀까지 두 선언이 등장했는데, 바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는 말씀과(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은 스스로를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라고 선포하실 것입니다.
이는 일곱이라는 완전 숫자에 맞춘 것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을 충분히 드러내신 계시자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드러내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곱 개의 선언이 나를 설명하는 보어를 통해 설명하는 용법이었다면, 보다 심오한 용법으로 쓰인 두 말씀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바로 개역개정에서 “나는 그”라고 번역된 24절과 28절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나는 그”라고 옮긴 이 부분은 원어로 보면 ‘나는 이다’라는 문장입니다. 즉 영어로 하자면 I am 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내가 가는 곳(21-24절)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다시 이르신다고 하시는데, 이는 앞의 가르침에 이어서 계속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 말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와 이어지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보자면 예수님이 가신다는 말씀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갈지를 아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사람 중에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나 철학자를 데려와도 이 땅에서의 삶은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2절은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합니다. 또 요한복음 7장 33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이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12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며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어둠인 죄 가운데에 헤매다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한 채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는 곳에 우리는 가지 못한다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하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과 말씀의 외적인 현상에 집중하여 그 깊은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들의 말이 오히려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넓게 보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시고 그 길을 걷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아래에서 났지만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생명과 사망 등과 같이 대조적인 어구를 통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사실은 자신의 아버지인 마귀에게 속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고 거짓만 말한다는 사실을 보이십니다. 24절입니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죄란 내가 그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초반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말은 내가 그라고 옮기고 있지만, 이는 요한복음을 구성하는 나는 – 이다, 즉 에고 에이미 표현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이다’를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는 말입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옮기고 있습니다.
(새번역 24)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곧 나임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표현은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밝히신 말씀을 헬라어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자신이기를 멈추시지 않고, 다른 원인 없이 계속 자신으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8장 24절, 28절, 58절, 13장 19절에 이 표현이 등장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24절을 통해서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죄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님이심을 믿고 그대로 살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래서 당신이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25절입니다.
네가 누구냐(25-30절)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그들은 예수님이 나는 이다 라고 생소한 표현을 쓰시니 그래서 도대체 네가 무엇이냐는 말이냐고 물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의 의도를 알고 네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소리냐 라고 성이 나서 물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는 않고 내가 처음부터 얘기한 그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미 충분히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불경한 질문에 답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26절입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시고,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람의 마음과 숨은 생각을 다 아셨습니다. 그들이 따지고 드는 질문과 품는 생각이 너무나 악하심을 알기에 그것들을 다 폭로하고 판단 및 심판까지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를 보내신 그분에게 들은 대로만 말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을 가리켜서 하는 말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28절입니다.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은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즉 내가 나인 줄을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에고 에이미 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을 보내신 이가 아버지이시며, 그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도 하나님으로 오셨으며,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다 행했다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자이신 예수님을 드신다는 말씀은 양면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높이 든다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 올려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십자가에 달아 죽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내가 나’ 즉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행하셨음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9절과 30절입니다.
(29-3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예수님의 본질이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연합하셔서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않으시고 가장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심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과 귀를 말씀으로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같은 은혜를 누리기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에서 어둠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으시고 자신을 높이 드셔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연합에 참여하여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는 그 영원한 사랑에 포섭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류 역사상 아무도 답하지 못한 이 질문에 예수님은 답변을 주셨고, 자신이 비추시는 빛을 따라 우리도 걸어오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홀로 버리지 않으시는 그 사랑의 연합에 참여하기만 하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31절부터는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시며, 여과 없이 복음의 진리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이 논쟁을 통해 어떤 주제를 가르치시는 것인데, 오늘 본문은 그 특징이 두드러진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논쟁하는 상대는 유대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무려 67번이나 쓰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평균 6번 쓰인 것에 비해 유독 많이 쓰였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쓰여진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주후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기독교인이 유대인회당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대인의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심해지는 그 시점에, 유대인 반대파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맞서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시작부에서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31-44)
(31-33)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이 말은 즉시 듣고 있던 유대인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은 비록 정치적으로 외세에 속박되어 있는 처지이었을 지라도, 영적으로는 우월의식이 아주 강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라는 말은 그들의 ‘영적인 우월의식’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부터는 약 600년 간 외세로부터 자유롭지 못 했고, 당시에도 로마의 속국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속박되어 있음에도, 자신들은 자유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적인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종으로 전제하는, 예수님의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에 격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실상은 죄의 종된 상태지만, 자신들은 자유하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이 죄에서 비롯된 허영이고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드러내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34-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고 하시며 그들의 말을 볼모 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오히려 아브라함 보다 높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밝히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말로 인해 의도치 않게 예수님보다 영적으로 낮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돼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허영이 드러납니다. 영적 우월의식에 상처를 입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바꾸어,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합니다(41절). 이러한 태도는 유대인들의 허영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렇듯이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허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유대인들의 ‘영적 우월의식’은 마귀의 욕심과 거짓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유대인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의 이런 '영적 허영과 자기기만의 상태'가 바로 ‘죄의 종’인 상태 일 것입니다. 영적인 허영은 신앙을 무엇이 되려는 수단으로 삼는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허영에 빠져서 무엇이 되지도 않았는데, 되었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이 자기기만입니다.
종은 헬라어 ‘둘로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내맡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의 종이란, 죄의 의지에 자신을 내맡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한 죄로 인해 그 죄의 의지에 속박되어, 영적 허영과 자기기만의 악순환의 늪에 빠져 있는 '죄의 종된 상태' 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철저한 사람들이고,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죄가 작동하면, 영적인 허영과 자기기만이 믿음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허영과 자기기만'은 죄의 종된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늘 믿음으로 둔갑해 있는 ‘영적 우월감, 허영, 자기기만’이 믿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늘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므로 믿지 아니하다(45-53)
(43, 45-46)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지금 계속해서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믿은 유대인’이라고 31절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5절에서는 그 유대인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시작고 곧바로 믿음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죄의 종’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45절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나를 믿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리키시는 ‘진리’는 32절과 34절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너희는 죄의 종이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격분했습니다. 그것도 ‘죄의 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의 ‘죄의 종’이라는 말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41B, 48)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유대인들은 ‘죄의 종’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앞에서, 선택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 선택적 믿음의 태도로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거짓이라고 확증 편향하며, 예수님을 온갖 것들로 모욕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결혼 전 관계를 통해 예수님을 출산했다고 암시하는 예수님을 경멸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또한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혹은 귀신에 들렸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교도와 우상숭배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경멸의 대상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의 종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욕하며 선택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택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에게, 45절에서 어찌하여 믿지 않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믿는 우리에게도 정도는 다르지만, 불리한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거짓으로 취급하는 선택적 믿음의 경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3, 57)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최후의 수단으로 가기전 유대인들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합리적 논거로 예수님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24절과 28절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믿었다고 하고 있지만(30절), 지금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들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합리적 이유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네 말을 지키면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한다‘,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이는 설득력 있는 합리적인 비판입니다.
2000년간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시도가 계속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와 신화적으로 표현된 예수를 구분하는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이 17-18세기 부터 있어 왔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실상은 선택적 믿음의 한 형태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서라도 자신의 생각과 맞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믿으려고 하는 죄된 경향이 있습니다.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4-59)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은 시종일관, 자신과 자신의 말을 동격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다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을 지키지 않음’과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병행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며, 그 본질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죄가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하기에 반대로 죽지 않음 곧 영원한 생명은,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명약관화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시고,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본질입니다.
(56, 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처음 예수님과 유대인의 논쟁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나 예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는 하나님이다’로 마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인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영적 허영심이 있어,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마치 그렇지 아니 하냥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믿고, 불리한 것들에는 무관심하거나 비판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라고 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상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힘을 주고 자기 힘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허영과 자기기만, 선택적 믿음은 우리가 이루었다고 확신할수록, 더 깊은 허영과 자기기만과 선택적 믿음에 빠져들게 되는 악순환의 늪입니다. 말 그대로 죄의 종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우리의 죄의 종된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 잊어선 안 됩니다.
죄의 종인 상태에서 우리 스스로 자유롭게 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 대속적 죽음만이 우리를 이 죄 된 상태에서 자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우리가 가진 전부로 여기며 살 때, 우리는 자유함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믿음의 경주를 달리다, 예비된 하나님 나라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