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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 년도 | 연인원 | 완주자 |
1 | 2006년 | 300 | 4 |
2 | 2007년 | 250 | 4 |
3 | 2008년 | 797 | 10 |
4 | 2009년 | 1,200 | 22 |
5 | 2010년 | 1,300 | 15 |
6 | 2011년 | 800 | 13 |
7 | 2012년 | 920 | 12 |
8 | 2013년 | 859 | 18 |
9 | 2014년 | 791 | 16 |
10 | 2015년 | 712 | 22 |
11 | 2016년 | 611 | 18 |
12 | 2017년 | 544 | 12 |
합계 | 9,084 | 166 |
특히 2015년 1월 15일 경상북도로부터 주된 사업(산불예방 캠페인 활동, 산행로 정비 및 자연보호 활동, 안전산행 활동, 건전한 산행문화 창달, 시경계산행 정보제공 및 생태계 학습/체험, 문화유적 안내 등)으로 경상북도로부터 봉사단체로서 공익성을 인정받아, 비영리민간단체 등록증(제2015-1-경상북도-4호)를 교부받음으로써, 경산시경계산행협의회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2018년 제13회 경산시경계산행은 2018년 2월25일부터 11월25일까지 12구간으로 시행된다.
1구간은 거리가 12km(접속거리 2.7km 포함)로 들머리인 건천지에서 시작하여 성암산에서 시산제를 지내고, 병풍산를 거쳐 누리길갈림길를 경유하여 날머리는 동학산 기슭에 위치하고 은해사 말사인 경흥사이다.
경유지
- 성암산
성암산은 대덕산맥의 지류로 대구시 수성구와 경계한 해발 469m의 가파른 산으로, 경산시의 서쪽으로 범처럼 쭈그려 솟은 산이다. 산의 중심이 되는 어름에는 네다섯의 협시봉이 있으며 그 가운데 우뚝하게 솟은 바위산이 주봉이다. 산에 들어서면 계곡 좌우에 이름 모를 수목들이 울창하여 삼림욕 코스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울창한 숲이 뿜어내는 청정한 공기는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끼게 하며, 구석구석 아름답지 않는 곳이 없어 당일 등산 코스로는 아주 좋다.
산의 입구에서 자연학습원을 지나 약 30분 가량 가파른 계곡을 타고 오르면 등산로 좌우에 서있는 세 곳의 사찰을 지나게 되는데, 이 사찰들 모두가 성암산과 잘 어울리게 축조되어 있어 산의 정취를 더해준다.
산의 300m 지점에는 산 줄기가 모여 뭉쳐진 자연암반지대에 한 마리의 범이 앉아 입을 벌린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천연석굴이 있는데, 수십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큼 석굴의 규모가 크고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시원하다. 흔히 범굴이라 불리는 이 석굴은 성암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선조 임진왜란 당시 경산향교의 강개명이라는 이가 향교에 머슴을 살고 있었다. 너나 할것 없이 난리를 피하여 도망을 가고 없는 터에 마침내 향교에도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왔다. 강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평소 같으면 향교에 모신 어느 신주라니 딱히 어디에 모셔 숨겨 둘 곳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생각해 낸 곳이 범굴밖에 없었다. 강개명은 향교의 오성위패(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석굴로 옮겨 병화를 모면한 일이 있어 이 굴을 성암굴이라 불리기도 했다. 난리는 끝이 났다. 이러한 강개명의 소식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마침내 평생의 소원이던 강개명의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렸을 뿐 아니라 충의위에 속하는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옥산이라 불리어지던 산이 성암산으로 개칭된 것도 그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석굴에 불상을 모셔놓고 성암사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억불숭유를 국시로 하던 조선왕조에서 공맹을 중심한 이 다섯 분의 위상이란 말로 풀이할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이 석굴을 지나 10여분을 더 오르면 정상에 이르는데, 정상에서 펼쳐지는 경관 또한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남쪽으로는 굽이굽이 흐르는 선의산 산줄기와 남천강의 푸른 물줄기, 동학산의 맥반석 계곡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대구 욱수동 봉암골을 잇는 대덕산 자락이 우직스럽고 오묘하다. 북쪽으로는 멀리 팔공산 줄기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며, 동쪽으로는 경산의 시가지와 하양, 자인, 진량, 압량의 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삼성산이 성현의 위업을 빛내며 위치하고 있다. 주봉에서 서쪽으로 내려다 보면 낙타 모양의 봉우리임을 알게 해주고, 정면에는 경산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임진왜란 때에는 산의 전망을 이용하여 봉화대를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서북쪽에서 동서로 경산의 허리를 감싸 안아 흐르는 아름다운 금호강이며 다시 서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남천강, 사람들이 옛부터 모여 들어 살아가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이른바 거북이의 신성한 기운이 음호를 하는 우리 고장의 거룩한 기운이 서려 있다.
정상에서 남쪽 계곡을 따라 20~30분쯤 내려가면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약수터가 있다. 산을 내려온 후에 남서쪽 오솔길을 따라 한시간반 정도 걸으면 동학산 계곡을 만나는데, 이 곳에서 다시 10여분 걸으면 거울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절골 계곡이 펼쳐진다. 이 계곡은 입구에서 모골과 절골로 나뉘어져 있는데, 해마다 여름철이면 가족단위 휴식처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계곡은 대부분 맥반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석 채취가 금지되어 있으며, 절골 중턱에서 만날 수 있는 농장의 무공해 청정미나리는 계곡의 맥반수로 키워져 각종 성인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06년 경산의 중방 마을에 살던 박용순이란 이가 하루는 성불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한 대사가 나타나서는 이르기를 "나는 송운인데 일찍이 내가 이 곳에서 불도를 닦은 일이 있었노라. 나를 위하여 그대가 암자를 지어 주었으면 한다." 송운대사는 임진왜란의 그 어려운 소용돌이 속에 우리나라가 처해 있을 때 의병승군을 이끌어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쳐 싸우던 어른이 아닌가. 어찌 모른 척 하겠는가. 박씨는 송운대사의 뜻을 따라서 강남진이란 이와 힘을 합하여 절벽 아래에다 절을 세우게 된다. 이 도량이 오늘날의 화련암이다.
1962년에 들어서면서 산의 기슭에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충혼탑을 세웠다.
- 범굴
옛날 조선시대에 세찬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까지 휘몰아치는 어느 추운 겨울밤에 어두움을 헤치고 마을에 가서 그 이튿날 먹을 양식을 구하여 범굴암으로 오르고 있는 한 노승이 있었는데 이 노승은 한 손에는 바위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를 잡으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중이었다.
이 스님은 일찍이 인적이 드문 성암산 정상에 외따로 암자를 세우고 그 암자를 범굴암이라 부르고 동자 하나를 데리고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 때 스님이 암자를 비우면 어린 동자는 홀로 암자를 지키며 스님이 돌아오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하며 스님의 수도생활을 돕고 있었다.
이상히도 이 날 따라 날은 어두운데 쌓인 눈길을 걷는 스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여 잠시 서서 숨을 돌리며 쉬려고 하는 참인데, 바로 그 옆에 두눈을 붉히면서 큰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큰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은 정신을 차리며 두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자꾸만 입안을 들여다 보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하도 이상하여 가까이 가서 입안을 들여다보니 웬일인가 스님이 오히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는 입안에 여자들이 흔히 꼽고 다니는 비녀가 목구멍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고 있던 중 이 노승을 만나게 되어 호랑이가 노스님에게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노스님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호랑이를 쳐다보며 아낙네나 잡아먹고 사람을 괴롭히는 사나운 짐승이라고 호통을 치며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니 호랑이는 그제서야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개 숙여 참회를 하였다.
그래서 이 스님은 호랑이를 도로 불쌍히 여겨 범굴에 데리고 와서 동자와 한식구가 되게 하였다. 그로부터 동자승과 호랑이는 친구가 되어 열심히 수행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동자승은 성암대사가 되었으며 호랑이는 성암산 산신령이 되어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성암산 수호신이 되어 중생들의 등불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비내고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와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를 연결하는 고개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병풍 산맥 또는 용지 산괴의 산줄기 중 비내고개[480m]는 달성 가창 누리길 제3구간이 지나는 곳으로, 병풍산(屛 風 山)[571.0m]과 두루봉[598.9m] 사이에 위치하는 동서 방향의 고개이다. 비내고개의 기반암은 백악기 말의 화산 활동과 관련된 안산암질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에서 비내고개까지 약 2.25㎞의 상원 임도가 조성되어 있고, 비내고개에서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까지 남천 임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비내고개에서 남쪽 방향으로 개설된 임도는 경산 공원 묘원까지 이어진다. 현재 병풍 산맥 또는 용지 산괴의 종주 산행을 하는 등산객 못지않게 임도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많은 사람들이 산악 자전거[MTB] 코스로 즐겨 찾는 곳 중의 하나이며, 대구광역시 생활 체육 산악자전거 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 경흥사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동학산(動 鶴 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59년(무열왕 6)혜공(慧 空)이 창건한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 僧 軍) 700∼800명이 이곳에서 최초로 훈련을 받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1990년 대웅전 불상의 복장(腹 藏)에서 사적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4∼5개의 부속암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만 하더라도 현재 가람의 동쪽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학승들이 상주하던 큰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불사는 1637년(인조15)에 창건된 사찰이며, 대웅전 안에 봉안된 주존불(主尊佛1) 아미타여래좌상은 물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도 드물게 보이는 목조불상으로 조각이 우수하다.
1990년에 재윤(在 閏)이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고 요사 1동을 보수하였으며,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1996년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 등 건물 5동을 단청하였고,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 삼존불상을 개금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명부전·독성전·자미전·산령각·종각·강학당·심우당 및 요사 등이 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된 대웅전 목조삼존불상은 1644년(인조 22)에 영규(靈 奎)가 중국 흑룡강에서 은행나무를 구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크기는 주존불의 높이 158㎝, 좌우 협시보살의 높이 126㎝이다.
예로부터 무병장생를 의미했던‘십장생(十長生)’은 우리네 일상생활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특히 그 중 학(鶴)은 우리의 풍수와 접합해 사찰의 배치조건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다. 학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도도한 기상과 높은 생존력을 의미한다고 하니 학이 지닌 풍수와 관계된 사찰은 그 사세와 밀접한 관련성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동학산 경흥사는 이러한 학과 연관된 풍수를 지니고 있는 사찰이다. 동학산은 학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경흥사는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거기다 학의 서기(瑞氣)를 막기 위한 병풍산이 건너편에 있어 경흥사는 외부와도 차단된 지형적인 특성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특히 경흥사는 학의 도도한 기상을 닮아서인지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義僧軍)들이 이 곳에서 최초로 훈련해 전장에 나가 용감히 싸웠으며, 또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다고 한다.
현재 경흥사에 남아있는 고승의 부도들이 이를 묵묵히 증명하고 있으며 동학산 언저리에 잔존하고 있는 경흥사의 광활한 옛 절터에서도 초석과 석축 등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곳이 결코 미미한 사세가 아니었음을 역시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경흥사가 임란 때 승병을 훈련시켰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한국전쟁 전후의 극심한 도굴 등으로 인해 절은 점차 피폐해졌다. 그러나 예전의 사세를 회복하려는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 경흥사는 대웅전, 명부전, 독성전, 산령각, 종각 등 대부분의 불사가 모두 마무리되어 동학산 기슭에서 경산시청법우회 등의 법찰로 지역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경흥사가 있는 동학산은 사찰 주변의 산세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하여 이름짓게 된 것이라 한다. 실제로 해발 603m에 달하는 이 산을 사찰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치 학이 북쪽으로 훌쩍 날아가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학의 주둥이 부위에 사찰이 위치하고 있어 당시 창건주가 이 곳에 사찰을 건립할 때 주변의 지형지세와 풍수지리를 세심하게 배려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찰의 건너편 계곡 앞으로는 동학산과 키를 나란히 한 병풍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맥반석 물이 흐르는 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산사의 정취를 더해주는데, 인근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경흥사 주변에서 우는 새소리에 따라 경산지방의 길흉사를 미리 알 수 있다고 한다.
사찰 동쪽으로 난 진입로를 따라 사찰에 도착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져 깊은 계곡과 높은 하늘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천혜의 요새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1990년 대웅전에 모셔진 주불의 복장에서 발견된 이 절의 사적기에 의하면 원래 경흥사는 주변에 4~5개의 부속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전소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현재의 승가람(불도를 닦는 집, 절의 건물) 동편을 중심으로 큰 승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여기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흥사는 글자 그대로 경산을 흥하게 한다는 향토애가 담겨진 이름으로, 사찰의 위치 또한 경산시가지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곳이다. 경흥사의 이러한 향토애는 그 이름이 지어진 것보다 더욱 유서가 깊은 것으로, 이는 사찰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학의 형상이 동학산이 경산을 발전시키는 명당이하 하지만 학이 날아가 버리면 그 운세를 다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학을 머물게 하기 위하여 학의 주둥이 부분에 사찰은 건립하여던 것으로 보이는 바, 사찰 건립 당시부터 향토애가 가득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흥사는 임진왜란때에 한차례 전소된 바 있는데, 옛 경흥사는 임진왜란 직전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이라 하여 왜구들이 사찰까지 달려와 불을 질러 원래의 사찰은 전소되고 말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편 구릉지에는 이 절에 주석한 역대 고승대덕 36명의 부도군이 있었다고 하나, 이 또한 왜구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한다. 경흥사 주변에는 신라시대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의 주춧돌이 군데군데 남아있으며, 동학산 곳곳에 당시 승병들이 훈련하였다는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적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사찰의 불상 조성을 위해 당시 주지인 영규대사가 3년간이나 권선하면서 은행나무로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주불은 아미타불이고 좌우의 협시불은 보살상으로 문수,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이곳 불상은 인자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며, 지성껏 빌면 반드시 그 송원이 이룰 수 있다는 영험있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불상의 크기는 경상북도 목조불로는 그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1990년 8월 7일 지방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되었다.
1. 일시 : 2018. 2. 25(일)
2. 코스 : 건천지←<2.6km>→성암산←<4.9km>→병풍산←<1.8km>→누리길 갈림길←<2.7km>→경흥사
3. 실거리 : 9.3km, 접속거리 : 2.7km
4. 소요시간 : 6시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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