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는 왜 살해되었나 코브라파의 일당은 모두 아홉명이었다. 수사관들은 유괴사건 쪽으로 그들을 몰아붙였지만 그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하고 나왔다. 허걸은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너희들 가운데 오른쪽 이마에 흉터 있는 놈 이름이 뭐지? 미남 말이야. 체크 무늬 남방에 머리가 긴 놈 말이야." "강치수입니다." "어디 가면 그놈을 만날 수 있지?" "강남에 있는 디스코홀에서 내일 밤 여덟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 네명이 아무 연락 없이 한꺼번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겁니다." 그 디스코홀의 이름은 ‘이스탄불’이었다. 7월 22일 밤이 되자 전담 수사 요원 이십 명이 이스탄불로 출동했다. 그들은 각자 여자 한 명씩을 데리고 디스코홀에 잠입해 들어갔다. 수사본부에서 요원들에게 여자를 붙여준것은 아니었다. 수사본부장은 각자 책임지고 여자 한명씩을 데리고 몇시까지 정해진 장소로 나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각자 여자를 구하러 나갔던 그들은 놀랍게도 한사람도 빠짐 없이 여자를 한명씩 달고 나왔던 것이다. 사실 본부장은 반수 정도만 여자들을 달고 나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두가 한명씩 달고 나왔으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고 말았다. 본부장은 수사비만 축내게 되었다고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을 문전에서 되돌려 보낼수도 없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본부장은 결국 그 말밖에 할말이 없었다. 여자들의 직업은 각양 각색이었다. 다방 레지, 미장원 아가씨, 여대생, 과부, 여동생에다 자기 부인까지 데리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조태는 단골로 드나드는 술집 여주인을 데리고 나왔고, 허걸은 아내를 불러냈다. 허걸 부부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부부가 함께 나들이하는 것이 가능했다. 저녁을 사줄 테니 나오라고 하자 허걸의 아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더니, "웬일이세요?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요." 하면서 몹시 기뻐했다. 요원들은 4인 1조가 되어 행동했다. 조태와 허걸, 그리고 다른 요원 두명은 강치수 담당이었다. 이스탄불 맞은편에는 여섯 대의 차가 주차해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자가용들이었다. 본래가 그곳은 노상 주차장이기 때문에 거기에 차가 주차해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교통 순경이 나타나 먼저 주차해 있던 차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그 여섯 대를 주차시켰던 것이다. 먼저 주차해 있던 차의 주인들이 따지고 들자 교통순경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협조해 달라고 사정하다가, 도대체 그 사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 보자고 늘어붙자 나중에는 나 몰라라 도망가 버렸다. 여섯대의 차중 다섯대의 차속에는 남녀 한쌍씩 앉아 있었다. 얼른 보기에는 데이트족 같았지만 남자들은 모두 수사요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손에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차 속에는 수사본부장이 다른 세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세사람중 두명은 수사 요원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코브라파의 서삼수였다.여섯대의 차는 모두 불을 끄고 있었다. 허걸은 아내를 불러낸 것을 후회했다. 그는 아내에게 몹시 미안했다. 그녀는 잔뜩 부어서 그를 외면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 이젠 저까지 끌어들이는군요. 기가 막혀서……." "미안해. 하는수 있어야지. 여자를 데리고 나오라는데 나야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데리고 나올만한 여자가 있어야지. 나한테 여자란 오직 당신 하나뿐이잖아. 자, 그러니까 이해하라구." 허걸이 손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뭐? 저녁을 사준다고요? 갈비탕 한그릇 사주고…… 기가 막혀서……." 아내가 화를 낼 만도 한 것이 그들 부부가 밖에서 만난 것은 꼭 여섯달 만이었다. 그녀는 소녀처럼 잔뜩 기대에 부풀어 나오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구경을 시켜 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아주 소박한 바람이었는데 웬걸, 남편은 그런 소박한 바람에 찬물을 끼얹고 만 것이다. "나 먼저 집에 갈래요."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허걸은 질겁하고 아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안돼, 가면 안돼! 잠깐이면 끝날 테니까 좀 기다려.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어?" "놔요! 가겠어요!" 바로 그때 무전기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다. "5조 나와라!" 본부장의 목소리가 차내를 울렸다. 허걸은 아내를 놓고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5조!" "손님이 나타나셨다! 흰 티셔츠를 입은 놈이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와 동행이다!" 손님이란 강치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허걸은 이스탄불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흰 티셔츠 차림의 청년이 빨간 티셔츠를 입은 계집애와 함께 출입구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허걸의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그런가 봐." 젊은 남녀가 안으로 사라지자 허걸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아내도 따라 내렸다.그녀는 이제 집에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홀은 어느새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거의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허걸 부부는 조태가 자리잡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놈이 나타났습니다." 허걸은 턱으로 강치수를 가리켰다. "저쪽에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 놈입니다." "빨간 티셔츠 입고 있는 계집애하고 같이 앉아 있는 놈 말인가?" "네, 바로 그놈입니다." 옆 테이블에는 같은 조원 두명이 여자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허걸은 그들에게도 강치수를 지적해 주었다. 강치수가 앉아 있는긴 테이블에는 다른 네명의 청년들이 동석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여자들도 앉아 있었다. "일당들이 다 모인 모양이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침내 수사본부장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명의 수사 요원과 함께 구석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가 호각을 불어대면 수사요원들은 행동을 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섯명이 몰려 앉아 있는 것이 행동을 개시하는데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따로따로 앉아 있다면 조별로 기습하기에 아주 좋으련만 놈들은 하필이면 몰려 앉아 있었다. 코브라파 다 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시간이 거의 한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두목을 비롯한 네명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웬일이야, 누가 연락 못받았어?" 강치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몹시 빠른 말투였다. 네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중 한명이 짝이 없었는데 강치수의 애인에게 춤 한번 추자고 손을 내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일어섰다. 그들이 플로어로 나가자 다른 세명도 여자들을 데리고 일어섰다. 자리에는 이제 강치수 혼자 남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다른 조의 수사 요원들이 각자 여자들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플로어에서 춤을 추다가 그들을 덮칠 모양이었다. "슬슬 일어서 볼까?" 조태가 허걸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제일 불리하겠는데요." 그때 웨이터가 강치수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강치수는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웨이터가 내미는 메모 쪽지를 받았다. "이게 뭐야?" "어떤 손님이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누가?" 강치수는 얼굴을 치켜들고 웨이터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있는 남자 손님이 부탁했습니다. 3번 룸입니다. 홀 한쪽에는 룸이 몇개 달려 있었는데 커튼으로 내부를 가리도록 되어 있었다. 강치수는 메모지에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어두워서 잘 알아볼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이터 불을 켜서 그것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빨리 피하라. 너희들은 경찰에 포위되어 있다. 경찰이 너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출구는 봉쇄되어 있으니 화장실 창문을 통해 달아나라.’ 강치수는 라이터 불을 껐다. 그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은 플로어에서 춤추고 있는 친구들에게 향했다. 그들에겐 신호를 보낼 여유가 없었다. 만일 신호를 보내면 경찰이 덮칠 것이다. 그는 공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의식했다. 날카로운 눈들이 번득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몸을 일으켜 3번룸 쪽으로 향했다. 네명의 수사 요원들은 토끼눈이 되어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치수는 커튼을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메모 쪽지를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는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허걸이 조태에게 물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칠까?"본부장에게 좀 기다려 달라는 사인을 보낸후 그들은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려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들은 계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그 주위에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강치수는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조금 있자 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나왔다. 강치수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흘겨보면서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키 높이에 사람이 겨우 하나 빠져 나갈수 있는 창문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창문에는 나무 창살이 견고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두손으로 창살 하나를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보기보다는 나무토막이 쉽게 빠졌다. 창살은 모두 네 개 달려 있었다. 못이 빠질때 나는 끽끽 하는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창살을 하나씩 떼어 냈다. 이윽고 창살을 모두 떼어 내자 다음에는 창문을 뜯어 냈다. 창문은 먼지가 쌓이고 깨어지고 해서 더럽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하나의 직사각형 공간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몸이 호리호리한데다 움직임이 재빨라서 도망치는 데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장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장어는 벽을 타고 기어올라갔다. 먼저 머리를 밖으로 빼내 주위를 살펴보았다. 밖은 좁은 골목이었는데 몹시 어두운데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는 잘 됐다 싶었다. 숨을 몰아 쉰 다음 상체를 먼저 밖으로 뽑아 냈다. 다음에는 오른쪽 다리를 창틀에 걸쳤다. 몸을 돌리면서 두 다리를 차례대로 밖으로 빼내는데 성공했다. 디스코홀이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은 일층에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화장실 창문에서 골목 바닥까지는 별로 높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는 격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비틀거렸다. 발을 잘못 디딘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구부려 오른쪽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아이구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를 덮쳤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전혀 색다른 고통이 등을 꿰뚫고 들어왔다.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그는 상체를 뒤틀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있는 사람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너…… 너…… 너는……." 그의 입을 새로운 고통이 틀어막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복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으으윽!" 장어는 천천히 무릎을 꺾었다. 이윽고 그의 몸뚱이가 상대방의 발치에 흡사 썩은 통나무처럼 쿵 하고 쓰러졌다. 허걸은 아무래도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상하다는듯 화장실 입구를 올려다보다가 조태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데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글쎄, 그런 것 같은데……." 조태도 조그만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올라가 볼까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들이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요란스럽게 홀 안을 울렸다. 그것을 신호로, 그때까지 춤을 추고 있던 수사요원들이 네명의 코브라파 청년들에게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홀안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욕설이 어지럽게 난무했고, 탁자와 술병이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허걸은 계단을 두칸씩 뛰어올라갔다. 그 뒤를 조태와 두명의 다른 요원들이 따라왔다. "조심해!" 뒤에서 조태가 소리치는 것도 듣지 않고 허걸은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홀에서 일어나는 소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롭게 소변을 보고 있던 두명의 청년들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듯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았다.아가씨 한명이 대변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수사관들은 눈을 부릅뜨고 두 명의 청년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한쪽도 강치수는 아니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청년 한 명이 바지 지퍼를 끌어올리며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허걸은 아가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가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덜컹거렸다. "아무도 없나요?" 하고 허걸이 물었다. "이상해요. 문은 안으로 잠겨 있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응답이 없어요." 아가씨는 급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가씨가 급하게 됐군." 하고 조태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안에서 아가씨가 오줌을 누다가 기절해 버린 모양인데요." 소변을 보고 난 또 한청년이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이 안에 아가씨가 들어갔나요?" 허걸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청년에게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청년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문을 부숴!" 조태가 소리치자 수사관 한명이 문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몇번 그렇게 잡아당겨 보았지만 문은 도무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저리 비켜!" 조태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끙 하고 힘을 쓰면서 그 육중한 몸을 통째로 문에다 내던졌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날벌레 한 마리뿐이었다. "이럴 수가……." 허걸은 나무 창틀 조각을 구둣발로 냅다 걷어찬 다음 휑하니 뚫려 있는 창구멍을 바라보았다. "빨리 밖으로!" 조태가 먼저 고함치면서 계단을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홀안은 여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네명의 코브라파 청년들은 저마다 잡히지 않으려고 발악적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수사관들에게 꼼짝없이 몰리고 있었다. 수사관 한명은 한청년의 등을 타고 앉아 팔을 뒤로 꺾어 손목에 수갑을 채우느라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이스탄불 뒤 좁은 골목으로 맨 처음 뛰어든 조태는 하마터면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람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몸이 비대하면서도 그럴 때는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는 그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앞을 노려보았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골목으로 흘러 들어오는 가느다란 불빛속에 사람의 윤곽이 천천히 떠올랐다. 뒤따라온 수사관들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치수 아닙니까?" 허걸이 마침내 신음을 토해 내듯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대꾸하려 들지 않았다. "어디 가서 플래시 좀 빌려 와!" 조태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치자 수사관 두명이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침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태와 허걸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었다. 빗방울이 차츰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소낙비가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플래시를 구하러 갔던 수사관들이 플래시를 켜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강치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향하고 있었고, 얼굴 근육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손은 복부 위에 얹혀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칼이 손잡이 부분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옷도 손도 모두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런 모든것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빨리 구급차를 불러!" 조태가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고, 한 사람이 골목을 뛰어나갔다. "차가 오기전에 끝나겠는데요." 라고 허걸이 중얼거렸다. 그는 무릎을 꺾고 앉아 마지막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강치수를 내려다보며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아무리 악한 자라도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을것이다. 그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강치수! 너는 왜 죽어야 하지? 누가 너에게 이런짓을 했지? 그자가 누구야? 말해봐, 누구냔 말이야!" 강치수의 호흡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한참 만에 내쉬곤 했다. 여러 사람들의 발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강치수! 우리는 경찰이야!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어! 넌 살아날수 없어! 아무말이라도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봐! 한마디만 말이야!" 강치수의 오른손이 조금 쳐들려지는 듯하다가 도로 밑으로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보일듯 말듯 움직였다. 허걸은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이 조용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강치수의 입가까이 귀를 갖다댔다. "2……4……3……." 그는 계속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 이상 소리가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말해 봐! 잘 안들려! 좀더 큰 소리로 말해 봐!" 갑자기 강치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더 이상 숨을 내쉬지 않았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것이 정지한 것이다. 허걸은 허공을 향해 떠 있는 눈을 감겨주면서 중얼거렸다. "2,4,3이라고? 그게 뭐지?" 허걸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뭐라고 그랬지?" 수사본부장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암호 숫자 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2,4,3이라고 했습니다." "2,4,3이라고? 그게 뭐지?" "모르겠습니다." 허걸은 다시 엎드려 강치수의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메모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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