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인 | 함성호
초월 나비
어제 나는 부채를 잃어버렸다
남쪽 하늘에서 새로운 별자리가 떠오르는 저녁
한가위에는 햅쌀을 팔아서 첩을 샀다네
눈매가 서늘하고 팔다리가 길어서
놀기에 좋았던 여자
단오에는 그 여자를 팔아서 부채를 샀지
깨끗한 손으로 눈꼽을 떼어주던
(부끄러웠지만)여자의 손길이 시원한 바람으로 불어와 참 좋았지
그 부채를 잃어버렸다
마지막 잔은 그냥 두어야 했다
기어이
별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돛을
펼치고야 말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어리석었나)
나는 유리배를 타고 은하수를 흘러가네
―꽃피고 새잎 나는 어여쁜 날에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데려가 주오―
性을 알 수없는 작고 늙은 꽃들이
쭈그리고 앉아 부르는
마지막 노래의 아름다움을 나는 보았지
(누가 들어줄까?)
나는 유리배를 타고 은하수를 흘러가네
소용돌이치는 성단을 지나 모든 빛들의 무덤으로
흰 버드나무가 백발을 감는 어느 별의 강가에서
잠시 해진 신을 벗어 지친 발을 씻기도 했지
그 강물에 비친 옛이야기처럼
비행기가 야간등을 켜고 염소자리를 지나고 있다
문득―, 나는 왜 이럴까?
생각한다
한가위에는 뭐든 팔아서 첩을 사고
단오에는 사랑하는 여자를 팔아서 부채를 샀지
변죽이 딱 스물 한 마디로 마음에 들었다네
그 부채를 잃어버렸다
나는 유리배 작은 유리배를 타고
가장 흉한 꿈들이 버려진 별의 무덤을 찾아
무서운 여울과 중력의 파랑을 건너
방금 우연과 필멸을 지나왔다
그때 사수자리에서는 천진하게 별이 지고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인 줄도 모르고 소원을 빌었지
얼마나 어리석었나
그런 날이면 차가운 유리바닥에 누워 잠을 밀어낸 적도 있었지
초월 나비
나는 나비
어두운 밤하늘을
떼지어 오르락내리락 나는 나비들
어떤 음도 붙일 수가 없고, 따라갈 수도 없어서
팔랑거리는 춤은 신비음에 맞춰 날아가네
누가 들어줄까?
몸을 잃었으니―고래고기는 이제 먹지 않으려구요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내가 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나면 오늘을 떠올리며 너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비의 날개로 만든 돛이 우수수 지며
흩어져 날아가버리네
나는 유리배를 타고 은하수를 흘러가네
피곤한 발을 씻었던 강은 이제 찾을 수가 없겠지
나비의 흐름을 헤치며 향유고래가 유영하는
이 어둠에서는
사랑했던 사람도
기억나지 않는 고백도
필사적이었던 변명도
밖은 없고 안만 있는 어둠에 와 있다
먼 옛날 한 번 들었던 고래의 울음을 좇아
졸면서 바다를 건너는 어부를 만났지
나는 어제 부채를 잃었어요
그의 꿈을 열고 들어가 들려주었지
초월 나비의 기억과
내 유리배의 상처를
꿈(蒙) 아니면 없었던 일이었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잘 감춰둔 기억
그래서 아무도 찾을 수 없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초월 나비의 기억
그런 일은
얼마나 어리석었나
- <21세기문학> 2015년 가을호 수록
함성호, 나의 시를 말한다
시의 손가락
어느 산중의 작은 암자에 스님과 그를 모시는 동자가 살고 있었다. 스님의 깨달음은 가까운 곳뿐만이 아니라 멀리에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풀지 못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공부가 막혀 길을 잃었을 때 큰 빛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암자는 외지고 작고 초라했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의문에 답하는 스님의 대답이었다. 스님의 대답은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항상 같았다. 그것은 이치를 꿰뚫는 논리도 아니었고, 뜨거운 눈물을 떨구게 하는 위로도 아니었으며, 정확한 질타도 아니었다. 스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스님의 검지가 들어 올려지는 순간, 사람들은 존재의 모순이 사라지는 것을 알았고, 그 사라짐은 새로운 빛으로 터져 나왔다. 스님은 죽음에 관한 물음에도 검지 하나를 들어 올려 보였고, 사랑의 고통에 대한 물음에도 검지 하나를 들어 올려 보였다. 어떤 심오한 철학적 물음에도 대답은 같았다. 언제나 검지 하나. 그것이 다였다.
어린 동자에게 그 모습은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챙기러 산을 내려갔다. 오랜만에 암자에는 동자 혼자였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스님이 없는 걸 아는지 발길이 뜸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이제 동자의 일과는 낮잠이 전부였다. 그날도 낮잠을 즐기던 동자는 오랜만의 인기척에 반가워 일어나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웬 나그네가 암자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동자는 얼른 찻물을 올리려다 말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메울 좋은 장난이 생각났던 것이다. 동자는 짐짓 스님인 체 꾸미고 나그네를 기다렸다. 나그네는 스님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 놀랐지만 감히 의심할 수는 없었다. 나그네는 동자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장황한 질문을 해댔고, 동자는 그저 나그네의 눈앞에 자신의 검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순간, 나그네의 얼굴에서 섬광과 같은 기쁨이 지나갔다. 나그네는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뜬 기쁨에 스님으로 꾸민 동자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고, 동자는 자신의 장난이 성공했다는 기쁨에 흥분해 있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마치 스님이 계셨던 때처럼 사람들이 다시 암자를 찾기 시작했다. 동자는 계속 자신의 장난을 시도했고, 단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을 뿐인데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깨달음의 기쁨이 터져 나왔다. 동자 역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고, 횟수가 거듭되자 동자는 자신이 발명한 장난에 금방 시들해졌다. 이제 동자는 아무 긴장 없이 건성으로 손가락을 사람들 앞에 던지다시피 하게 되었다. 가부좌도 무너진 지 오래여서 아예 반 누워 있다시피 되어 사람들을 맞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동자의 (귀찮아하며 던지는) 검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갔다. 동자는 이제 그만 스님이 얼른 오셨으면 하고 바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동자는 몰랐다. 동자가 장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스님은 이미 암자에 도착해서 동자가 자신을 흉내 내는 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스님은 부엌과 방을 연결하는 문 뒤에 숨어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 역시 찾아온 누군가의 물음에 동자가 심심하게 검지를 들어 올리자 스님은 방으로 뛰어들어, 준비한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그 순간, 동자는 깨달았다고 한다.)
흉내선을 경계하기 위해 선가에서 전해 오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도 괜찮을 듯싶다. 언어는 항상 대상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책을 책이라고 말할 때 그 책이 무슨 책인지, 판형이 어떤지, 제본은 어떻게 했는지, 종이는 무엇을 썼는지, 하는 것들을 다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책이라는 단어는 책이라는 실재와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 시는 항상 온전하지 못한 언어라는 틀을 가지고 세계를 구성하는 불가능한 시도를 계속해 나간다. 그 불가능한 시도는 책이라는 불완전한 단어를 통해 책이라는 실재를 완벽하게 구성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책이라는 불완전한 단어를 통해 책이라는 실재 너머의 삶을 그려내는 데 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스님의 손가락을 통해 동자의 없어진 손가락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는 언어의 불가능성을 삶으로서 보여준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론, 깨달음은 먼먼 얘기다.
함성호
*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를 냈다.
시 · 인 읽기
밖이자 안인 비밀통로 ‘모미’
왜 시가 필요한가? 시에는, 세계의 “복잡성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모미’). 함성호의 시에 숨어 있는 대답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전지전능한 신만이 그 전모를 알 수 있으며,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불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다. 이 불가능성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가득 차 있”으며(‘아스가르드의 화석’), 텅 비어 있음과 아무 일도 하지 않음 자체로 세계에 개입하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차라리 어떤 에너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초월 나비’는 불가능성의 차원으로부터 날아온 정령(精靈)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손을 내밀어 잡는 한 꽃송이”(‘모미’) 속에 살고 있다. ‘모미’에 앉아서 ‘모미’라는 창을 통해서 보면, 이 없는 꽃과 없는 나비를 만날 수 있다. ‘모미’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창(窓)과 그 창 밖과 다르면서도 같은 창 안을 의미하는 한글 상형 문자”다. 상형문자인 ‘모미’는 의미와 발음이 아닌, 형상으로 읽어야 한다. 읽으면서 그 형상 속에 거처해야 한다. ‘모미’는 사전에 없는 단어로, 시인이며 건축가인 함성호가 만든 개인어다. 없는 형상을 상형한 아이러니한 운명의 문자다. 함성호의 시는 세계의 복잡성에 근접하는 몇 개의 상형문자와 그 빈약한 대체물인 2차 언어(한국어, 그림, 부적 등)로 만든 시적 건축물에 속한다. 함성호에게 시는 곧 ‘모미’다. 없는 창이자 공간이며, 밖이자 안인 모미=시는 없는 세계가 이 세계에 깃드는 비밀통로다. 이런 연유로 시는 세계의 복잡성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극복할 수는 있다. 불가능성을 환대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없는(있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도 붙일 수가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저 꽃과 나비들을.
물론 함성호는 세계의 복잡성을 상대하기에는 아름다움이, 또한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어떤 대응이나 미래도 염두에 두지 않는 마지막 대책을 고백한다.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고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낙화유수’).
김수이 문학평론가 ·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