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도봉시벗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나호열 시창작 교실▒ 스크랩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탐구의 시
잎새 추천 0 조회 129 13.03.19 09: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탐구의 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겨울이 혹독하고 길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지듯이 우리의 삶을 둘러싼 여건이 녹록하지 않을 때 시심은 불현듯 간절하게 솟아오르는 법이다. 그러나 그 詩心은 노래liric 일수도 있고 단발마의 비명悲鳴일수도 있다. 이는 시인의 주관에 따라서, 세계관에 따라서 표출되는 시의 양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태의 일면이다. 또한 한 시대를 주도적으로 관류하는 풍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풍조가 절대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수히 생산되어온 시에 대한 정의가 무용한 까닭은 무한확장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다양성으로, 분화와 갈등으로 달리 부른다고 하여도 확정된 정의 定義를 고집하는 것보다는 차이 差異를 인정하는 것이 한국 현대시를 향유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지엽이 「카오스의 시대, 구원의 시학 - 90년대의 층위」라는 글에서 오늘날의 시의 방향을 서정과 믿음의 시학, 생명과 구원의 시학, 해체와 모순의 시학, 몸과 욕망의 시학, 속도와 쾌락의 시학, 고독과 죽음의 시학, 존재와 성찰의 시학, 시대와 삶의 시학으로 나누어 본 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와 일정부분 걸쳐 있는 시의 난해성에 대한 요즘의 논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와 존재에 대한 개인적 사유의 문제이며, 언어의 쓰임새와 다룸에 대한 방법론상의 차이임을 인정할 때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런 낙관적인 필자의 생각은 '시의 난해성'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수반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요즘 시의 난해성을 거론하는 독자는 일정수준의 시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시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일반인들일 것이다. 문제는 일차적인 언어기능으로 시를 접하는 일반독자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갖춘 사람들이 시의 난해성을 이야기할 때의 시의 평가는, 주제와 소재를 연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의 비유가 어디까지의 유추 한계를 갖는가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시의 난해성에 대한 논란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상각한다. 『산림문학』(2012년 가을.겨울호)에 발표된 35명의 40여 편에 이르는 시(초대시 및 2012년 녹색문학상 시 제외)를 보아도 시에 대한 시인들의 정의가 얼마나 다르며, 자신들의 사유를 시로 드러내는 방법론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 몇 편을 감상하면서 시의 난해성을 해소하는 통로를 모색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해 보고자 한다.

 

1. 자연현상과 1:1의 조응방식

 

산기슭 묵은 밭

참비름, 쇠비름, 명아주 나물

밝은 햇빛 맑은 바람 자연의 정기가 길러준 나물

한 잎 한 잎 공들여 뜯어와

삶으니 나물냄새가 주방 가득하다

옛날 시골 어릴 적

무쇠 솥 장작불 설설 끓는 물에

나무주걱으로 데쳐낼 때의 그 냄새다

삶아도 그대로 푸른 나물

시골에서 보내온 해묵은 된장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쳐 밥상에 올리며

식구들의 표정을 본다

예전에는 나물하면 가난해서 먹는 것이려니 했는데

이제는 존대받는 귀한 음식이란다

양념과 손과 사랑을 만나서

다시 탄생한 나물

다소곳이 머리 맞대고 먹는 이 아침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린 행복한 밥상이다

 

- 강영순, 「행복한 밥상」 전문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당도한 모양이다. 혹한 속에서 아무 것도 살아남을 것 같지 않던 산야에 연두빛 생명의 돋아오름이 눈앞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주식 대용으로 먹었던 나물이 이제는 패스트푸드와 화학비료에 범벅이 된 채소를 뒤로 밀쳐내는 귀한 음식으로 귀환(?)했다. 그러다보니 이 나물들이 온실에서 상업적으로 키워지고 도시로 나와 비싼 기격으로 팔리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나물'을 먹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아마도 화자(시인)은 하늘이 내린 행복한 밥상을 받아든 행운을 통해 평화로운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고자 할 것이다. 초대받은(독자) 사람들은 먹지 않아도 입이 즐거워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에게 이 시는 시인이 의도하지 않거나, 의식하지 못한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이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할까?

 

2. 자연현상에 대응하는 정서의 고취

 

 

목련나무 근처를 지나는데

목련꽃

다북다북 걸어오네

 

벚나무 아래 누웠는데

벚꽃들

토닥토닥 내려앉네

 

목련나무 아래엔

목련발자국,

 

벚나무 밑엔

벚꽃 발자국,

 

땅꼬마 둘 손가락 걸고

깨금발로 걸어가는 뒤쪽

 

눈부셔라

꽃발자국

- 박완호 「꽃 발자국」 전문

 

「행복한 밥상」과 같이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또 다른 정서를 환기하는 시가 있다. 박완호의 「꽃 발자국」은 봄꽃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서늘하게 지는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내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희구하는 낙관을 노래하고 있다. 「행복한 밥상」이 밥상을 차리는 일련의 행위를 묘사하는 까닭에 리듬을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 시는 사건이 아니라 정물화된 풍경을 묘사하는 까닭에 리듬감을 충분히 살려낼 수 있다. '다북다북', '토닥토닥'과 같은 의성.의태어를 활용하므로서 봄날의 따스한 풍경을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주안점은 풍경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꼬마 둘 손가락 걸고/깨금발로 걸어가는 뒤쪽//눈부셔라/

꽃발자국"에 드러난 바와 같이 동심 童心의 순수함이 인생의 끝까지 가서도 꽃발자국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의 간절함에 있다. 그런 점에서 「꽃 발자국」은 「행복한 밥상」과는 또다른 층위의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나(독자)도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3. 자연 섭리의 냉정한 확인

 

「행복한 밥상」이나 「꽃 발자국」과 같은 자연현상을 매개로 한 낭만적 정서와는 달리 자연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시가 있다.

 

바깥은 늦은 저녁이고, 바깥은 늦은 저녁의 공원이다 공원이 아닌 곳이 없다 어린 것들은 눈을 감고 노인들은 두 눈을 뜬 저녁이다 공원에는 끝없는 게임을 계속하는 노인들이 있고, 날아다니지 않는 새가 있고,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있고,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라서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는 눈을 떴다

나뭇가지 위로 작은 잎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황인찬 「앤드게임」

 

 

바람 한 점 없는 날

차가운 복도 바닥에 말벌 한 마리 모로 누워

뒷다리를 떨고 있다

 

열린 창으로 교실에 들어와서

머리 위를 윙윙거리더니

아이들의 몸을 움츠리게 하고

우루루 몰려 다니게 하고 소리치게 하던 그가

풀어놓았던 넋을 도로 거두고 있는가보다

 

아니, 어쩌면 넋의 보따리를 다시 풀어내라고

공기방울이 그를 흔들고 있는 것인지도

허공을 밀어내며 다시 한 번 창공을 날아오르라고

일어나라고 그를 흔들고 있는 것인지도,

 

한 때 꽃 속에 들어가 묻혀 온

노란 꽃가루 같은 햇빛이

뒷다리에서 반짝 빛난다.

 

허공을 밀어내며 날았던 그의 힘참을,

이제는 가무룩한 정신 하나를 깨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쭉 흰 송이들이 제 몸을 흔들어 떨어지고 있다

한 우주가 돌아가는 중이라고

잘 가시라, 깊은 강도 잘 딛고 가시라

꽃잎을 뿌리고 있다

 

얼룩 줄무니의 통통한 배는 아직도 꽃봉오리 같은데,

말벌이 조용하다

 

- 조재학 「조용한 아침」

 

「앤드게임」의 시적 공간은 공원이고 「조용한 아침」의 배경은 학교의 복도이다. 공원과 학교는 인공화된 자연 그러니까 이 공간들은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서 도모된 자연이 억압된 장소인 것이다. 「앤드게임」의 화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공원에서 죽음을 계획(?)하고 있다. 의식의 바깥이 저녁이고 공원이라는 절망은 억압으로서 다가오는 존재 전체이다. 그러나 눈을 뜬 순간 '나뭇가지 위로 작은 잎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라는 자연 무가치적 생명력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냉정한 희망일 것이다. 「조용한 아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속으로 들어온 침입자인 '말벌'이 제 생명을 다하고 숨을 거두는 장면을 인간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처치해버려야 할 곤충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리한 편견에 불과할 뿐이 아니던가! 이 두 편의 시는 더 오래 살고 싶어하거나 더 빨리 죽어버리고 싶은 오만한 인간에게 던지는 자연의 묵언은 아닐까?

 

4. 자연을 내면으로 들어앉힌 전통적 서정

 

두 물이 만나는 곳에서

나도 너를 만나고 싶다

 

천굽이 만굽이 돌아오면서

흐린 것 무거운 것 다 가라앉히고

이제는 오로지 맑은 물이 되어

말없이 서로 껴안는 저 물같이

나도 너를 그렇게 만나고 싶다

 

먼 하늘 지나온 아득한 시간이

연꽃의 미소를 안으로 머금게 하고

고요한 물이 한가로이

갈대를 어루만지는 곳

 

노을이 내려앉는 황혼녘에

산허리 절간의 종소리를 들으며

연꽃의 미소로

갈대의 침묵으로

간절히 한 몸이 되는 저 물같이

나도 너를 그렇게 만나고 싶다

 

- 김청광 「두물머리 연가」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자연을 응대하는 몇 개의 장면을 살펴보았다. 자연의 숭고함, 숭고함 속에 함축되어 있는 섭리를 자신의 삶에 투영하는 염원, 자연의 복원력과 냉엄함의 증언이 몇 개의 장면에 농축되어 있었다면 김청광의 「두물머리 연가」는 전통적 서정의 한 세계를 보여주는 휴머니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되고, 어딘지 낡아보이는 어법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주관적 서정의 대상으로 의인화하는 기법은 오래되고, 낡아보여도 질리지 않는 즐거움을 준다. '두물머리', '산허리 절간의 종소리', '연꽃의 미소', '갈대의 침묵'이 유장하게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같이 흘러가는 사람(정인)과의 포옹과 영원함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래 음미해보아야 할 시인의 과제가 아닐까?

 

5. 자연을 도구화하는 난해시의 진경

춘광사설 春光乍洩/ 김현

 

낯빛 깨끗한 풀잎 위로 햇살 들었다 사라지고 들었다 사라진다. 빛과 그늘 사이 달팽이 두 마리 떠 있다. 당신은 찬물로 설거지할 시간, 나는 까닥까닥 졸고, 고양이의 수염과 발을 가진 하늘사무실 경리는 도시락을 혼자 먹으며 지상으로 내려보낼 눈과 비의 재고를 검사한다. 구름을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놓으며 뭉실뭉실 구름의 문장을 짓는 건 그녀 사무실 밖의 일.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처럼 만질만질한 구름 두 마리 느릿느릿 멈춘다.1)당신은 휘파람으로 옛 노래를 흥얼거릴 참, 나는 사무원의 연필을 굴리고, 경리는 이따금 지우개로 지운 먹구름 때를 훌훌 날린다. 2)풀잎 흔들린다. 초록의 해발고도는 점점 낮아진다. 각자 몫의 둥근 살림을 지고 달팽이들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뿐. 무게를 잡지 않는다. 당신은 야옹야옹 하품을 하며 젖은 행주를 펼치고, 나는 고개를 주억주억하며 서류철 이면지 위에 당신이라는 주저를 그려넣는다. 곡선이 있다. 떠도는 파도, 달팽이집, 구름 옆 구름, 아낌없는 발등, 꿈꾸는 수염, 두 명의 그림자, 경리 아가씨, 3)당신은 작고 낮은 베개의 생활 위에 머리카락을 너울너울 펼치며 눈 감기를. 엎드린 내 잠으로 당신의 검고 온순한 빛살이 찰박찰박 밀려왔다 밀려가고 밀려왔다 밀려간다. 아가씨의 뜻에 따라 우주가 봄볕에 젖는다. 잠깐, 구름 사이로.

 

1)“네 목소리를 여기에 녹음해. 너의 슬픔을 땅 끝에 묻어줄게.”

2)“난 늘 그와 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독해지면 똑같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3)“폭포에 도착하니 그가 생각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난해시의 문제를 짚어볼 차례가 되었다. '난해시'의 문제는 독자들의 감상능력에 해결의 열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정의에 따라 더 난해해 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김현은 「춘광사설」과 「동사서독東邪西毒」의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글이 과연 시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과 당혹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편의 시 중에서 「춘광사설 春光乍洩」을 읽어본다. 형태상으로는 산문시의 형식이고 주석이 달려 있는 특이함을 보여준다.( 이 주석은 아마도 영화 속에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다이얼로그 dialogue이면서 시인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이다). 춘광사설은 말 그대로 직역하면 '봄날의 언뜻 비추는 햇살'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에 사용되는 달팽이, 하늘 등의 자연물은 축자적 의미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표들이다. 더 나아가서 이 시는 춘광사설, 즉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의 제명으로 개봉된 영화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10년 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국영이라는 홍콩 배우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감상은 커녕 독해조차 불가한 글이 될 것이다. 아마도 짐작컨대 이 시를 쓴 시인은 왕가위 감독과 장국영을 좋아하는(그들의 인생과 예술관)마니아일지도 모르겠고, 그들과 그들이 만들고 출연한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인식하는 이 세계에 대한 독백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에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이과수 폭포나 동사서독東邪西毒의 배경이 되는 사막은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거나 현실도피의 막다른 막장을 의미할지 모르겠다. 의미를 캐물을수록 더 미끄러지는 삶이라는 실체와 부조리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아무튼 시의 정의가 무한 확장되는 숙명을 지니고 있으며, 21세기의 문명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티가 위력을 드러내는 악몽 속에 있다면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에 대한 논의는 현대시의 또 다른 진경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시는 원래 난해한 것이 아니었나?

<산림문학 2013년 봄.여름호 계간평>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