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고고학-1 (구약시대-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이 신화이거나 사람이 조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m 높이로 솟아 있는 유적 언덕의 발굴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흙벽돌 건물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풍화작용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는데,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무너진 최초의 텔 발굴은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1년 행했는데,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을 계기로 '주거층론'이 등장하였는데, 주거층이란 일정 기간 존속한 고대인들의 삶의 터전을 말하여, 1890년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인 페트리는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유적 언덕을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한 성경의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나사렛 등의 주요 성지들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아 왔고, 중세시대부터
로빈슨은 수주일동안 네게브 광야를 헤맨 끝에 조그만 샘을 중심으로 형성된 비르 에-세바라 불리는 베두인 마을에서 로빈슨은 하루 종일 길 없는 외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을 당나귀를 타거나 걸어서 탐사하였습니다.
* 목차 (구약시대-1)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박물관에서 고고학 연구를 위 사진의 B.C.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라트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만 순종을 하여, 하란까지만 가서 살다가 늙어서,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가지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이지요.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현재의 하란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의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습니다. 여기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요? 어떤 잘못된 견해로 이집트에서 나온 문자를 토대로 '하비루'라는 노예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이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히브리'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결국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의 아들인 '에벨'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이 에벨이 큰 문명국가를 이루었고, 에블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 셈족의 국가인데, 어떤 원인에 의해 수메르인에게 멸망당합니다. 강 아래쪽의 더 강성한 국가 수메르의 사르곤 왕이 에블라를 멸망시킨 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끌고 갔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우상이나 만들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영적 분별력을 주셔서 새로운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가다 말고 자기 조상 에벨이 세웠던 찬란했던 나라 '에블라'의 고토 하란 땅에 머무르다가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에벨 시절에 번성하던 에블라는 수메르인들이 강해지면서 망하게 되었고, 니므롯의 제국 때 바벨탑을 세우다가 세상이 나누이게 되었는데, 그때가 벨렉의 시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가 말하기를 "네 목숨을 위하여 도피하라. 네 뒤를 돌아보거나,
여기서 성이란 도시를 말합니다. 개정개역판 성경에 보시면 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성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던 것이지요. 이를 누가 주도했을까요? 바로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 '니므롯' 입니다. 니므롯이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가지 이질적인 종족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쉽게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같이 도시부터 만든 이후에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이제 바벨탑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그라트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뿐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BC500년 경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되는 것이지요. 63빌딩보다 더 높습니다. 수천년 전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탑을 지은 것입니다. 다 지었으면 더 높았겠지만, 중간에 하나님이 공사를 중단시켜 그 정도로 그친 것이지요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많은 지구라트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그라트의 무너진 수많은 벽돌을 다시 쌓아서 복원하였습니다.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진의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습니다.
고대 근동에 최고의 영웅이던 니므롯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창세기 10장에 상세히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꾼'이란 히브리어 뜻으로 볼 때 '전쟁을 즐기는 사냥꾼',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은 '님(높은 사람)' + '마랏(반역한다, 대항한다)'으로서 높은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반역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도시라)을 건축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말은 쳐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앗수르는 셈의 자손들로 큰 민족이었으나, 니므롯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동방으로 이주해서, 아사달에 도착해서 홍익인간의 기치를 내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동방으로 이주할 때 앗수르족속만 온 것은 아니고, 야벳족속의 일부와 함족속의 일부도 함께 이주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 고대도시 니므롯도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다른 고대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위 왼쪽은 그 니므롯 지역의 발굴현장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 왼쪽 그림은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니므롯의 도성을 복원한 복원도입니다. 비록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니므롯은 대제국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니므롯이 죽은 후 가족들에 의해서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화했다고 조작되었습니다. 고대 갈대아인들이 세운 모든 나라의 왕들은 이 니므롯의 화신인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권위가 인정되었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 은 앗시리아의 살만엣셀 왕의 모습인데요,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고 왕권을 받는 모습입니다. 결국 니므롯은 사후에도 계속 갈대아지역을 통치한 것입니다.
위 왼쪽 그림은 니므롯 지역의 신전 입구에서 발견된 거대한 인면수신의 조각입니다.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현재 이 조각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모두 망한 뒤에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니므롯의 권위는 계속유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비석에도 니므롯이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위 중앙). 위 오른쪽 그림은 그리이스 사람들이 세운 영웅의 만신전, 즉 팡테옹입니다. 여기서도 니므롯은 중앙의 가장 높은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는 서열이 한참 아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힛타이트)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힛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힛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위 그림를 보면 터키 지도가 있습니다. 붉은 색을 칠해놓은 이곳이 힛타이트의 중심부 입니다.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위 왼편 그림은 지금의 터키 땅에 있는 힛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의 왕궁터입니다. 위 오른편 그림은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입니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일산 자체가 아주 붉은 산입니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 색과 같은 땅을 좋아해서 거기서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고요, 오른 쪽 그림은 집단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색깔이 붉지 않습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 좁은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은 안쪽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이곳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달력에서도 많이 나오는 페트라 입니다. 이것의 건축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어디서 돌을 가져다가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조각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한 것입니다. 조금만 실수해서 조각이 떨어지면 작품전체가 망가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왼쪽 사진은 에돔족속의 왕이 살던 집이요, 무덤입니다. 야곱자손과 에서자손 사이의 투쟁이 계속 내려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왕인 헤롯이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대표적인 족장들의 도시인 헤브론의 역사는 이집트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해발 950 m 의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므로 시작되었으며 (창 13:18 ~ 33) , 은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Machpelah, 쌍굴) 의 동굴을 샀다 (창 23:16 ~ 18).
한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12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 정탐하게 한 곳이 바로 헤브론에 이르는 에스골 (포도송이) 골짜기였으며, 정탐 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들이 가지고 온 "포도 한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였다" (민 13:23).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헤브론의 포도와 과일은 유명하여, 포도의 경우 한 송이의 무게가 10 Kg 이상 나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맛도 매우 달다. 이 기사에서 성경은 "헤브론은 이집트의 소안보다 7년전에 세운 곳이다" (민 13:22)라는 토를 달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헤브론에서 일어나는데, 바로 다윗왕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임명되어 (삼하 2:1 ~ 4), 7년 6개월동안 수도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삼하 5:44).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헤브론은 여전히 유다의 중요한 요새였다. 이 사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헤브론을 그의 혁명 기지로 삼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하 15:1 ~ 10). 헤브론에 관한 신약 성경에서의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헤롯 대왕 때에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 위에 거대한 건축을 함으로써 조상들의 무덤을 보호하는 일을 하여, 오늘까지 그가 쌓은 예루살렘 성전 벽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8세기 이후 아랍이 이 지역을 장악한 이래 족장들의 무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아랍인들이 관리하고 있어, 1967년 6일 전쟁이후 이 곳을 찾는 유대인들과 종종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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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별나라 신학 원문보기 글쓴이: mat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