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관점을 가져라.
베냐민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여섯 지파를 7장에서 기록하고 있고, 8장에서는 베냐민 지파를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초대 왕인 사울의 지파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왕국이 분열될 때도 남왕국 유다에게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은 먼저 이스라엘의 여섯 지파를 보여주는데, 각각 잇사갈(7:1~5), 베냐민(7:6~12), 납달리(7:13), 므낫세(7:14~19), 에브라임(7:20~28), 아셀(7:29~40)지파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8장에서 소개되고 특별히 사울의 자손들이 나옵니다(8:33~40).
본문에서 특별히 독자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에브라임의 이야기입니다(7:20~27). 에브라임은 블레셋 가드 사람들과의 충돌로 두 아들 에셀과 엘르앗을 잃게 됩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센 지방에서 목축하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생긴 일인 것 같습니다. 매튜 헨리는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으려고 하다가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드 사람들이 목축업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와서 가축을 빼앗으려다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제안하며 이 부분의 오기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어쨌든 에브라임은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의 이름을 브리아라고 하였습니다. 브리아는 ‘고통 중에’ 혹은 ‘불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행과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 구원의 놀라운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이 새로 얻은 아들 브리아를 통하여 가나안의 정복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역대기 기자가 에브라임의 두 아들이 블레셋 가드 사람들에게 죽임당한 사건을 여호수아 출생 기록 앞에 적어두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
요단 강 동편 지파들에 대한 계보 정리를 마치고 이번에는 강을 건너 가나안 북쪽 지역에 정착하였던 지파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지만 앞 부분에서 유다 자손에게 거의 3장 정도의 분량을 할애했었고, 또 바로 앞 6장에서는 레위지파의 이야기가 81절에 달하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7장에서 여섯 지파와 관련된 내용이 40절로 정리됨을 볼 때 역대기 기자가 어느 지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역대기 기자가 이렇게 짧게 가나안 북쪽 지역을 차지한 지파들의 계보를 정리하게된 이유가 인용할 수 있는 자료가 훼손이 되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 기록하려고 애썼던 이유는 이들 지파를 포함한 모든 지파들이 장차 재건될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될 것임과 포로에서 귀한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음을 인식시키고 선택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북부 지역에 정착하였던 지파들 가운데 오늘 본문을 시작하고 있는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인 잇사갈 자손의 계보를 살펴보겠습니다.
잇사갈 자손의 계본
(1-5)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 돌라의 아들들은 웃시와 르바야와 여리엘과 야매와 입삼과 스므엘이니 다 그의 아버지 돌라의 집 우두머리라 대대로 용사이더니 다윗 때에 이르러는 그 수효가 이만 이천육백 명이었더라 웃시의 아들은 이스라히야요 이스라히야의 아들들은 미가엘과 오바댜와 요엘과 잇시야 다섯 사람이 모두 우두머리며 그들과 함께 있는 자는 그 계보와 종족대로 능히 출전할 만한 군대가 삼만 육천 명이니 이는 그 처자가 많기 때문이며 그의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용감한 장사라 그 전체를 계수하면 팔만 칠천 명이었더라
1절부터 5절은 잇사갈의 자녀들(1절)과 그들의 대표적인 후손인 돌라와 웃시의 후손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잇사갈 지파의 수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돌라의 아들 웃시 그리고 웃시의 아들 이스라히야의 자손 수를 2절과 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자손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복으로 여겨지던 시대였기에 잇사갈의 자손들 가운데서 이스라히야가 가장 큰 복을 받았다는 것을 여기서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히야가 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의 가문이 왜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스라히야라는 이름의 의미가 “여호와께서 빛을 발하실 것이다”라는 의미이기에 이 이름의 의미로 추측을 해본다면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가문 가운데 주님의 복을 더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잇사갈 지파의 계보를 죽 읽어 가다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5절에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용감한 장사라고 하면서 8만7천명을 말하였는데, 2절과 4절에 나타나고 있는 장정의 수를 더해보면 5만8,600명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이스라히야의 아들들이 5명이라고 하였지만 기록되어져 있는 이름은 4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역대기 기자가 기록한 내용들이 전해져 오면서 그 내용들이 잘 보존되지 못해서 생략된 채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용의 일부가 생략이 되었지만 역대기 기자가 잇사갈 지파의 병력의 수효를 기록하였던 것은 과거 통일왕국 당시에서의 이들의 위치를 확인케 하기 위해서이며 이것은 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였던 북이스라엘 지파에 속하였던 자들의 후손들도 포로 귀환자들의 대열에 섞여서 귀환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약한 국력으로 항상 불안 가운데 있었던 포로기 후대 공동체의 잇사갈지파 사람들에게 과거 그들의 조상이 강대한 다윗 왕국을 일으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인식 아래 이스라엘의 재건에 함께 힘쓰게 하기 위해서 병력의 수효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잇사갈지파 계보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외며치 않으시며 세심하게 돌보시는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삼아 경배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고 또 앗수르의 민족혼합정책으로 민족성까지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에 속하였던 잇사갈지파의 후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방 땅으로 간 뒤에 회개하며 어렵지만 선민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주님은 잇사갈지파의 후손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무리 가운데 세워질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을 통해 그들을 기억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역사속에서 잊혀질 수도 있었을 북이스라엘의 한 지파를 세심하게 살피시고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잇사갈지파를 기억하시고 세심하게 살피셨던 그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주님의 자녀된 우리를 기억하시고 세심하게 살피십니다. 단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무심코 지나치기에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면 저녁에는 주님께서 오늘 나의 삶을 세심하게 돌봐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하루를 마감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베냐민과 단 자손의 계보(6-12)
이어서 6절부터 12절에서는 베냐민지파와 단지파의 계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12)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벨라의 아들들은 에스본과 우시와 웃시엘과 여리못과 이리 다섯 사람이니 다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이천삼십사 명이며 베겔의 아들들은 스미라와 요아스와 엘리에셀과 엘료에내와 오므리와 여레못과 아비야와 아나돗과 알레멧이니 베겔의 아들들은 모두 이러하며 그들은 다 그 집의 우두머리요 용감한 장사라 그 자손을 계보에 의해 계수하면 이만 이백 명이며 여디아엘의 아들은 빌한이요 빌한의 아들들은 여우스와 베냐민과 에훗과 그나아나와 세단과 다시스와 아히사할이니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모두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들의 자손 중에 능히 출전할 만한 자가 만 칠천이백 명이며 일의 아들은 숩빔과 훕빔이요 아헬의 아들은 후심이더라
6절부터 12절까지를 베냐민지파의 계보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시각과 12절을 베냐민지파의 계보에서 떼어내어 단지파의 계보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12절을 단지파의 계보로 보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12절 부분의 보존이 잘 되지 않은 반면에 6-11절의 베냐민지파의 계보는 상당히 잘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창세기 46장23절을 보면 단의 후손을 말하며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12절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후심’이기 때문에 12절을 단의 계보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일 본문인 13절 끝 부분의 “빌하의 손자”가 원어에서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복수이기 때문에 13절에서 말하는 것은 빌하의 두 아들 중 납달리외에 다른 아들인 앞절의 단의 후손까지 포함해서 언급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두고 두 번째 단락 부분에 기록된 베냐민지파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베냐민지파에 대해 기록하면서 베냐민의 세 아들 벨라, 베겔, 여디아엘의 이름을 밝히고 각각의 아들들로부터 나온 자녀들을 계수하여 그 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용사’라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 벨라 자손들을 말하며 ‘큰 용사’라고 하였고, 둘째 아들인 베겔을 말하면서는 ‘용감한 장사’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인 여디아엘의 자손을 말하면서는 다시 한 번 ‘큰 용사’라고 말합니다. 베냐민의 자손들을 향해 “큰 용사”, “용감한 장사”라고 했던 말이 성경에서 다른 지파들에게 기록이 되긴 했지만 베냐민 자손들에게 했던 것 만큼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냐민 자손들이 전쟁에 능했다는 것을 역대기 기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사사기를 보면 베냐민족속의 전쟁 능력은 나머지 지파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록 강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기 기자가 이것을 말하는 의도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공동체 내에서 군사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었기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베냐민지파에게는 전쟁을 잘한다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아픔, 상처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잘못은 했겠지만 자기 지파 사람들을 내어준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되어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여 겨우 600명의 장정만이 살아 남았고, 또 거기에 더해 이스라엘 다른 지파에서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지파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여 베냐민지파가 살아질 위기에 쳐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했던 베냐민지파가 다윗 시대에는 회복되어 그 때 당시보다 100배의 군사를 가진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함께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더 깊은 악을 행해 달려가고 있던 시대여서 선과 악을 분간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였겠지만 악을 향해 가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모두가 다 잘못이라고 충고하고 지적하였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혈기를 부리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자존심 때문에 또는 내 이익 때문 ‘욱’하며 화를 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상황이 달라지거나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합니다. 잠언 1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중략)
이 잠언의 말씀은 쉽게 말해서 화를 잘내면 어떤 일을 할 때 그르치기 쉽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내 의도는 그런게 아닌데 내 자존심을 지키려다, 조금의 이익을 더 얻기 위해 화를 내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어떤 일들이 전개되어 지고 내가 원하던 것과 다른 결과를 받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37편 8절에서 분을 그리차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악을 만들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셔서 공생애 기간동안 ‘욱’하며 화를 내신 모습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셔도 당연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은 분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잊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조차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되려 인자함으로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셨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이러한 모범이 되어 주셨기에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라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화가 나게 하는 어떤 순간에 화를 내지 않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순간에 화가 아닌 인자함으로 대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을 향해 창문을 열 때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포로기 이스라엘민족을 세심하게 돌보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심으로 우리가 혈기가 아닌 인애로 화가 아닌 온유함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 주님의 세심한 돌보심을 기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살아가시십니다.
납달리 자손(13절)
(13) 납달리의 아들들은 야시엘과 구니와 예셀과 살룸이니 이는 빌하의 손자더라
역대상에 나오는 다른 지파와 달리 납달리 자손들의 계보는 단 한 절만 등장합니다. 다른 지파에 비해 유독 납달리 지파의 기록이 짧은 것에 대해 그들이 사사기 1장 33절에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납달리 자손들을 소개하며 다른 지파와는 다르게 그들의 할머니 빌하의 손자임을 밝힙니다. 빌하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자 그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였고, 그 아이가 납달리입니다. 또한 빌하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동침하는 죄악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로 인해 납달리 자손의 기록이 적게 남겨졌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납달리 자손들은 갈릴리 바다의 서쪽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사야는 납달리에 대해 이와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가 됩니다.
(마태복음 4:12-16)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앞서 이사야의 예언을 바라보면 납달리 지파에게는 앞으로의 상황과 환경이 어둠 속에 있는 것 같고, 끝이 없는 터널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지금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후에 영화롭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납달리 자손에 이어서 므낫세 자손들의 계보가 나옵니다.
므낫세 자손(14-19절)
(14-15) 므낫세의 아들들은 그의 아내가 낳아 준 아스리엘과 그의 소실 아람 여인이 낳아 준 길르앗의 아버지 마길이니 마길은 훕빔과 숩빔의 누이 마아가라 하는 이에게 장가 들었더라 므낫세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슬로브핫이니 슬로브핫은 딸들만 낳았으며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정복 당시 둘로 나눠서 반 지파는 요단 서쪽 지역을 차지하였고, 또 다른 반 지파는 요단 동쪽을 차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요단 서쪽 지역을 차지한 므낫세 반 지파만 나오는데 그 이유는 앞서 역대상 5장에서 요단 동쪽을 차지한 므낫세 반 지파의 이야기를 이미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므낫세의 자손들을 이야기하며 슬로브핫을 므낫세의 둘째 아들로 표현하지만 실제 계보로 볼 때 슬로브핫은 므낫세의 5대손입니다(수17:3). 이렇게 계보 순서의 차이가 있는 것은 계보를 축약했거나 아니면 슬로브핫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슬로브핫은 아들 없이 딸들만 있었기에 자칫 기업이 끊어질 위기에 놓였지만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종족 중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기업을 물려줄 것을 정당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기업을 물려 주었고, 그녀들도 므낫세 지파 내에서만 결혼을 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분깃을 지키며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진 조상의 기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며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하며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일으키는 모습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시대에는 부계 혈통으로 기업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구가 묵살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정당한 기업을 물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는 것이 세상이 정해놓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납달리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 이어 에브라임 자손에 대해 설명합니다.
에브라임 자손(20-29절)
(20-21)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의 아들은 베렛이요 그의 아들은 다핫이요 그의 아들은 엘르아다요 그의 아들은 다핫이요 그의 아들은 사밧이요 그의 아들은 수델라며 그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으나 그들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에브라임의 자녀들을 설명할 때 그의 자녀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에브라임의 자녀들이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당시 에브라임의 아버지는 요셉으로 애굽의 총리였고, 총리였던 요셉의 자녀인 에브라임과 그들의 자녀들이 다른 사람들의 짐승을 빼앗아야 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가드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가축을 빼앗기 위해 그들을 죽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부모는 자녀가 자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된 다면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 중에 에브라임을 위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22) 그의 아버지 에브라임이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
에브라임이 자녀의 죽음으로 여러 날 슬퍼할 때 그를 위로한 것은 형제입니다. 여기서 ‘형제’는 원어로 ‘형제’와 더불어 ‘친척’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어이기도 합니다. 슬픔 가운데 필요한 것은 그 슬픔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슬픔이 다가 왔을 때 함께 있는 형제들이 위로를 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삶을 살아갈 때 각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어려움이 찾아와 슬픔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진정한 공동체라면 그 지체를 위해 힘써 기도하는 것과 더불어 실질적인 위로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도 누군가 자신과 함께 하며 위로하고 있다면 그것을 깨닫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고, 그 길에 예수님이 동행하시며 함께 대화도 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해 함께하시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도 하고, 위로를 받을 때 위로를 주는 사람이 누군인지 깨닫는 영적인 긴장감도 함께 유지해야만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슬픔과 고난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잃은 에브라임에게도 다시금 사랑을 베푸십니다.
(23-27) 그리고 에브라임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브리아라 하였더라 에브라임의 딸은 세에라이니 그가 아래 윗 성 벧호론과 우센세에라를 건설하였더라 브리아의 아들들은 레바와 레셉이요 레셉의 아들은 델라요 그의 아들은 다한이요 그의 아들은 라단이요 그의 아들은 암미훗이요 그의 아들은 엘리사마요 그의 아들은 눈이요 그의 아들은 여호수아더라
하나님과 형제들의 위로를 받은 에브라임은 슬픔에서 벗어나 아내와 동침하여 다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 중 딸 세에라를 낳았는데, 그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벧호론 위와 아래에 각 한 개씩, 그리고 우센세에라를 건설하여 총 3개의 성읍을 건설합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성읍을 셋이나 건설하며 아버지 에브라임에게 큰 자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에브라임을 형제들이 위로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딸을 통해 에브라임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에브라임의 후손으로 여호수아를 보내주십니다. 비록 에브라임은 자녀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졌었지만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형제들을 통해 위로하시며 다시금 회복되어 소망과 희망을 갖게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담하고 좌절하며 슬픔에 빠질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당장의 상황에 대한 비관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지금의 상황만 볼 때가 많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고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순탄한 삶을 살아간다 한들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안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없음을 기억하며 무엇보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갑 시다.
아셀 지파와 헤벨 가문(30-40절)
흥미롭게도 역대상 기자는 다윗 왕조 중심의 이스라엘 시대사를 기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 뿐만 아니라 북부 지파들의 계보에 대해서도 기록했습니다. 외적인 이유로는 포로기 후대 공동체 안에 북부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북부 지파의 계보를 역대기에 편입시킴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 전부가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며 더 이상 분열과 대립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과 관점으로 지파들의 족보를 읽는다면 역대기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본문은 레위 지파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6장을 이어 이스라엘 북방에 위치한 다섯 지파 반, 그중에서도 마지막 아셀지파의 주요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30, 31) 아셀의 아들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요 그들의 매제는 세라이며 브리아의 아들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말기엘은 비르사잇의 아버지이며
아셀은 ‘기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로 레아의 시녀 실바를 통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여호수아 19장에서는 아셀 지파는 동쪽으로는 스불론 및 납달리 지파,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한 지역에 거주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모세는 이들 지파가 비옥한 지역에 거주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이들이 거주했던 지역은 올리브, 포도와 같은 가치가 높은 곡식과 과일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 문제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비옥한 토지를 기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셀 지파에게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셀 지파야 말로 다른 어떤 지파보다고 번영과 번창의 복을 누리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32,33)헤벨은 야블렛과 소멜과 호담과 그들의 매제 수아를 낳았으며 야블렛의 아들들은 바삭과 빔할과 아스왓이니 야블렛의 아들은 이러하며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소개되어야 할 것 같은 아셀 지파 중에서 아셀의 막내인 브리아의 아들 헤벨 가문만이 온전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셀 지파가 가나안 정착 후 원주민들의 저항과 공격으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벨의 가문만은 용맹을 떨치며 자기들의 역할과 몫을 다 했음을, 그렇기에 후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길 수 있는 가문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0)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우두머리요 정선된 용감한 장사요 방백의 우두머리라 출전할 만한 자를 그들의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육천 명이었더라
정선된 용감한 장사라는 말은 아주 탁월한 용사들로 뽑혔다는 뜻입니다. 즉 아셀 지파 중에 헤벨 가문 사람들은 인물이 출중하고 힘센 장사들이었으며 으뜸가는 대표즐이었다고 말씀하는 이것입니다. 다만 아셀 지파에서 출전할 만한 자를 계수해보니 2만 6천명이었습니다. 이는 같은 장에 기술된 잇사갈 지파의 전투 병력 145,600명과 베냐민 지파의 전투 병력 59,434명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입니다. 왜냐하면 아셀 지파에서 유일하게 번성했던 가문이 헤벨 가문이었고 이들의 숫자만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아셀 지파의 다른 가문들은 자기들이 기업으로 차지한 땅을 온전히 자기들만의 기업으로 삼지 못하고 가나안 사람들로 인해 오랜 시간 시달려 세력이 약해졌지만, 헤벨 가문의 사람들만큼은 대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기들의 기업을 잘 지켜냈기에 큰 용사라고 칭찬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셀 지파는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았지만, 그 복에 합당하게 살아낸 사람은 일부에 불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야에 있을 때보다 더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주민을 물리치고 이방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세상이 보여줄 수 없었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만이 드러낼 수 있는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는 삶을, 그들을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살아내야 했었습니다.
내가 교회에 있고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운다고 해서 신앙의 여정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력은, 어제 드린 부활주일 예배에서가 아닌, 한 주가 시작되는 바로 오늘,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단히 세상 가운데 성도로 살아내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백성이 되십시다.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계보에 등장하지 않은 지파. 단과 스불론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에서는 또 한가지 특이한 지점이 발견됩니다. 역대상 7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단 지파와 스불론 지파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로는 단과 스불론 지파에 대한 기록이 이 시기를 지나면서 유실되었을 가능성 입니다.. 다만 기록을 남기는 일에 대해서 목숨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회복과 화합을 목적으로 삼은 역대기 계보에서 단순히 족보의 유실 때문에 이들 지파를 어떠한 언급도 없이 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워보입니다. 오히려 이들 지파가 살아온 과정과 결말이 이스라엘의 영속성과 정통성을 설명하는 데 불편함을 주기 때문에 뺐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단 지파는 본래 가나안 중부 지역에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 지역에는 블레셋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고 때문에 단 지파는 이들과 싸워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를 봐서도 아시겠지만 블레셋은 쉽게 쫓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왕 시대만 봐도 그들의 군사력은 한 지파 정도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를 두렵고 떨리게 만들 만큼 막강하였습니다. 이에 사사기 18장에서는 단 지파가 블레셋과의 전투를 피해 이스라엘 최북단인 라이스로 이동했다고 증언합니다. 문제는 단 지파가 새롭게 정착한 라이스는 이방 사람들과의 교류가 빈번한 곳이었으며 훗날 분열왕국시대때는 여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 우상이 세워져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중심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이라는 말은 우상숭배를 연상케할 만큼 불명예스러운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스불론 지파는 아셀, 납답리 지파와 더불어 가나안 북부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들이 머문 지역 역시 이방 민족들의 영향을 받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다른 지파들도 실상은 명맥을 유지했던 일부 가문만 소개될 정도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는데 스불론 지파에서는 일부 가문 조차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로 볼 때 스불론 지파는 거룩하게 구별되기보다 이방 민족들과 혼합 당함으로써 정체성을 상실하였음을 시사하여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나의 삶 속에서 치러야 할 영적 전투는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보십시다. 나의 욕망과 세속적 가치관에 이끌려 살기보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하신 복을 붙잡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당당히 주님의 생명 계보안에 우리의 이름을 올리는 은혜를 사모하십시다.
◇◇◇◇◇◇◇◇◇◇◇◇◇◇◇◇◇◇◇
잇사갈 자손,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 에브라임, 아셀 자손의 족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족보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5장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족보에서부터 노아의 족보, 셈의 족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 야곱의 족보 그리고 신약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등등 많은 족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많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 가문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전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반사로서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범죄하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주고, 그 말씀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성경에 대한 연구와 고찰,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 후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곧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뒤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대기를 기록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포로기 이후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를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조명을 통해 오랜 세월의 포로생활로 해체되고 무너진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고, 비굴한 노예생활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며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때 한 번 사는 일생을 보다 이유 있고 의미롭게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 자신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대답을 스스로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바울이 “내가 속한 바 하나님께”라고 고백하고 증언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그 사실과 고백이 자기 인생의 울타리가 되고 삶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말씀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확인하며 말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깨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동시에 우리 삶의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의 족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의 족보에 기록된 그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족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이어지는 족보의 가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역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교 역할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갈라놓고 관계를 갈라놓는 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고,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갈라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십자가에서 이어주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듯이 사람을 그리스도와 이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놓기를 조장하거나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부단한 훈련을 통해서만 사람을 이어주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경건의 훈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첫 자리가 말, 언어입니다. 궁극적으로 언행, 말과 행동입니다.
참으로 말은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고, 갈라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백 번, 천 번 조심하고 숙고해서 해야 하는 것이 말입니다. 너무 가볍게, 급하게, 선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그 말의 결과가 다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배우고, 침묵의 길을 지나서 나오는 선하고 진실한 생명과 유익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알 것은 결코 한 번 받은 구속의 은혜 하나로 믿음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훈련으로 우리의 믿음은 그 날에 찬란한 영광을 얻습니다.
세 번째로 오늘 족보의 말씀을 보면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족보에서 주목하게 되는 내용인데 “능히 출전할 만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4절 “그들과 함께 있는 자는 그 계보와 종족대로 능히 출전할 만한 군대가 삼만 육천 명이니 이는 그 처자가 많기 때문이며” 11절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모두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들의 자손 중에 능히 출전할 만한 자가 만 칠천이백 명이며” 40절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우두머리요 정선된 용감한 장사요 방백의 우두머리라 출전할 만한 자를 그들의 계보대로 계수하면 이만 육천 명이었더라.”
세 자손의 족보에 “출전할 만 한 자”란 말씀이 나옵니다. 곧 “싸움에 나갈 만한 군인”이 얼마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내에 갖추어진 군대조직을 엿보게 합니다. 즉,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군대조직을 정비한 것입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는 참으로 여러 분야에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국방입니다. 그러므로 국방 비리와 부정, 군대 내 성폭력은 철저하게 척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또한 중요하게 우리의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도 참 생명을 위해 이 땅의 양식을 취하며 말씀에서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분명이 알고,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가교로, 이 시대의 중보자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역대기를 읽다 보면 왜 이리 많은 장에 걸쳐 처음부터 족보가 나오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다 보면,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족보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열흘이 지나서야 족보의 이름이 끝나고 이제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1장에서는 아담부터 에서와 에돔 족속까지의 자손들이 기록되어 있고,
2장은 유다로부터 다윗까지의 기록이,
3장은 특별히 다윗 자손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으며,
4장은 유다와 시므온의 자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은 르우벤, 갓, 므낫세의 유력한 자손들의 기록이,
6장에서는 레위지파 자손들의 족보가 기록됩니다.
7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여섯 지파 자손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섯 지파는 먼서 잇사갈 지파, 베냐민 지파, 납달리 지파,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아셀 지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단 서편으로 시작하여 분배받은 지파들 가운데 북쪽지역에 위치한 지파라는 점입니다. 역대기가 쓰였을 당시, 기자가 유다왕들에 대한 포로기 후기의 시대에 낙관록적으로 써 내려가며, 성전과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다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사실상 북이스라엘에 속하는 여섯지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족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이들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섯 족보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기자의 의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7장 1절에서 5절은 잇사갈 지파 자손들을 기록합니다.
1절입니다.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
잇사갈은 야곱과 레아에게서 태어난 아홉 번째 아들입니다. 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돌라의 자손들은 유명한 용사들입니다. 3절에서는 웃시의 아들인 이스라히야의 아들들을 언급하는데, 그의 아들은 전부 5명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미가엘, 오바댜, 요엘, 잇시야 네 사람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부학자들은 네 사람 모두 이스라히야의 아들이 아닌 웃시의 아들들로 보기도 하지만, 그 근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잇사갈의 가문은 모두 용감한 장사들이었고, 그중에서 돌라와 웃시는 가장 크고 힘이 센 자녀였습니다. 그들을 포함하여 잇사갈 족보의 계수는 모두 팔만 칠천 명에 이릅니다.
6절부터 12절은 베냐민 지파가 거론됩니다. 6절입니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베냐민은 야곱과 라헬에게서 태어난 막내아들입니다. 내일 살펴 볼 8장에서는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7장에서는 베냐민의 세 아들, 벨라, 베겔, 여디아엘에 관하여 간략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49장 27절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야곱의 축복 되로, 베냐민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보입니다. 매우 호전적이었던 베냐민과 그의 후손들은 사사 에훗처럼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레위인의 처를 강간한 기브아 사건처럼 매우 위험한 면도 표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미 야곱의 예언처럼 그들은 싸움에 능한 전사들이며, 큰 용사로서의 기질을 보입니다. 9절과 11절입니다.
“그들은 다 그 집의 우두머리요 용감한 장사라 그 자손을 계보에 의해 계수하면 이만 이백 명이며”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모두 그 집의 우두머리요 큰 용사라 그들의 자손 중에 능히 출전할 만한 자가 만 칠천이백 명이며”
10절에 등장하는 에훗은 8장에 기록된 사사 에훗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10절의 에훗은 여디아엘의 후손이고, 사사 에훗은 베냐민의 넷째 아들 게라의 후손입니다.
13절에서는 납달리 지파의 자손들을 언급합니다. 13절입니다.
“납달리의 아들들은 야시엘과 구니와 예셀과 살룸이니 이는 빌하의 손자더라”
납달리는 야곱이 첩 빌하를 통하여 낳은 자손입니다. 야곱은 이 지파를 ‘놓인 암사슴’으로 비유합니다. 그의 예언대로 납달리 지파는 자유롭게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갑니다. 본서에서 이처럼 간략하게 한 절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인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19절은 므낫세 지파를 기록합니다. 14절입니다.
“므낫세의 아들들은 그의 아내가 낳아 준 아스리엘과 그의 소실 아람 여인이 낳아 준 길르앗의 아버지 마길이니”
7장에 나타난 므낫세의 족보는 5장 23절과 24절에서 언급되었던 요단 동편을 제외하고, 요단 서편에 위치한 므낫세 반지파의 족보의 기록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본처에게서 낳은 아스리엘과 아람여자인 첩을 통하여 낳은 마길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 31절에 따르면 아스리엘이 므낫세의 아들이 아닌, 실상 그는 므낫세의 아들이었던 마길의 손자로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길은 므낫세의 장자로 볼 수 있으며, 마길과 그의 아들들은 요셉의 슬하에서 자랍니다. 창세기 50장 23절입니다.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그리고 후에 마길의 후손들은 므낫세 지파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계속해서 20절부터 29절까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족보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에브라임 자손 중, 에셀과 엘르앗은 가드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가축을 빼앗으려 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유명한 다섯 성읍 중의 하나이며, 특히 이곳은 장신인 아낙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블레셋 족속은 아브라함시대부터 가나안 남서쪽이었던 이곳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였던 골리앗이 바로 이곳 가드 출신입니다.
에브라임은 죽은 자녀를 놓고 여러 날을 슬퍼하였고, 그의 형제들이 에브라임을 위로합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죽은 자녀를 놓고 매우 슬퍼하였기에 다음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브리아’, 히브리어로 ‘재앙’이라 짓습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대를 이어 마지막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등장시킵니다.
마지막으로 30절에서 40절까지는 아셀지파와 그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이는 창세기 46장 17절과 민수기 26장 44절에서 47절에 기록된 족보를 따릅니다.
야곱은 아셀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하였습니다. 창세기 49장 20절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그의 예언처럼, 아셀지파는 매우 기름진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해변의 기름지고 소산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셀지파를 끝으로 오늘 읽은 본문 역대기 7장의 기록된 족보들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다시 앞에 거론하였던 질문들을 다시 던져봅니다.
역대기 기자는 무엇 때문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지파를 기록하며,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북이스라엘의 지파들 또한 그들의 족보를 역대기에 기록하고 있을까요?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북쪽 지파 가운데 다른 지파는 모두 소개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단과 스불론 지파의 계보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과 스불론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지파였고 그들은 다른 지파들 보다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하였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일부러 두 지파를 뺀 나머지 북쪽의 지파들을 기록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 위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는 한민족임을 부각하고자 의도적으로 여섯 지파를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단과 스블론을 제외함으로 한 민족, 한 종족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 우상숭배를 하는 후손들에게는 더 이상 그 언약이 성취되지 못하고 명단에서 제외됨을 본문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또한 특정 지파의 군사의 수를 기재하여, 이스라엘의 재건에 다시 박차를 가하며, 한 민족, 한 공동체의 의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가정을 모두 기억하시며, 비록 죄악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시고 기록하시며,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동참케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따라 믿음의 계보는 흔들리기도 하고 굳건히 세워지기도 합니다.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계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자라나는 자녀들을 보며, 세상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하여, 믿음의 선조 된 우리가 바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기록하시는 주님 앞에, 먼 훗날 우리의 족보가 주의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족보로 기록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