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1. 7장은 속건제와 화목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속건제에 대한 설명입니다(1~10). 속건제의 희생을 잡고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리고 모든 기름을 단 위에 불살라 화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물의 고기는 담당하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그 번제물의 가죽도 제사장에게 돌려집니다(8). 번제물과 함께 드려진 소제물은 제사장의 자손들이 균등히 분배하여 나누게 됩니다(9~10).
2. 두 번째는 화목제에 대한 설명입니다(11~36). 화목제는 감사함을 표현하는 감사제와 서원제 혹은 자원제의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감사제의 경우, 무교병, 무교전병, 고운 가루로 구운 과자(모두 기름이 들어가야 함)를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12). 그리고 이 경우에는 매우 예외적으로(출 23:18) 유교병도 화목제의 감사 제물과 함께 드릴 수 있습니다(13).
3.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15).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제의 경우에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었고 3일에는 불사르게 되어 있습니다(16).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야 할 것을 나누지 않고 자기만의 것으로 삼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화목제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서 모든 사람이 하루 또는 이틀 동안 배불리 먹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싫어서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화목제물의 정신이 아닙니다.
4. 또한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다면 먹지 말고 불살라야 합니다(19).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습니다. 몸이 부정한 자가 고기를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20~21).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다시 희생물의 피와 기름은 먹어서는 안 되며 다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2~27).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도 다른 용도(제사로는 드릴 수 없으므로)로는 써도 되지만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거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5. 화목 제사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지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28~36). 화목제를 드리는 자는 희생 중에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부분을 스스로 가지고 와야 하는데, 그것은 기름과 가슴입니다(29~30). 제사장은 예배자가 가져온 그 가슴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르고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의 몫으로 돌리게 됩니다(30~31). 또 희생제물의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고, 화목제 희생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담당 제사장이 우편 뒷다리를 자기 소득으로 삼게 됩니다(32~33). 화목제 희생의 흔든 가슴과 뒷다리는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받게 되는 정규적인 제사장 가족의 몫입니다(34~36).
6.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속죄제와 속건제를 통해서 해결하십니다. 화목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은혜는 자기 죄를 깨닫고 인정하는 때이기보다는,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하나님과 가장 풍성한 친교(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사로 표현된다)를 하도록 우리를 끌어 올려주실 때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예배자를 참된 은혜의 누림으로 인도하고 그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해줍니다. 주님은 오늘도 모든 자녀들을 향하여,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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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1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구약 5대 제사법 가운데 각 제사시 제사장의 직무와 몫을 중심한 제사법 규례를 다루고 있는 구절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릴 때의 화목제 규례, 화목 제사 후의 공동 식사에 관한 규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1-12)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물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화목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화목은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은 희생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이런 원리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은 희생 없는 용서 또는 대가 없는 용서로 복음을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오해하겠습니까? 인간이 받은 용서와 배려의 대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생의 대가의 크기를 정확히 그리고 완벽히 이해하는 인간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살 수 없습니다. 단지, 부족하지만, 예수님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도 이처럼 대가가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도 반드시 희생이 요구됩니다. 대가 없는 용서와 화목은 없습니다.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도 양육을 할 때 왜 훈계를 하며, 징계를 하고 용서하십니까? 잘못 또는 죄를 돌이키게 인도해서 용서의 크나큰 감격과 잘못 함과 죄의 무서움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격적으로 알고 뉘우치고 깨닫는 교정과 성화의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은 값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화목함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기쁨은 모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화목제 희생을 드릴 때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 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감사하므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은혜를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화목제가 끝난 후에는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로 제사를 드린 사람 뿐만 아니라 친지를 비롯한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권력자,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 은혜를 나눌 청지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내가 가진 권력, 계급, 서열들이 있다면 복음적으로 지혜롭게 쓰시기 부탁 드립니다. 삶의 예배가 없이, 예배 속의 예배만 드리면 우리의 주인은 반드시 결산의 날 물으실 겁니다. ‘내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냐’고 말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까지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3-14)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13절을 보면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예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성경에서 죄악과 부패를 상징하는 누룩을 넣은 유교병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유독 감사의 화목제에서만은 유교병을 희생과 함께 예물로 드리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크면 클수록 좋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죄와 부패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음식물을 부풀리는 특징 때문에 확장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감사 화목제에 유교병을 함께 드리라고 한 것은 풍성한 감사를 드려야 함을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하나님께 거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목제 예물을 제사장이 하나하나 일일이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많은 예물을 일일이 하나씩 들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매우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제단 위에 있는 예물을 한꺼번에 놓고 감사를 드리면 더욱더 효율적이고 편리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 명하신 것은 특별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429장은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찬송가입니다. 그 받은 복을 세어 볼 때,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라고 이어 나옵니다. 죄의 습성을 가진 우리 모두는 불평,불만,원망 등을 세어볼 때가 많지만, 은혜 가운데 주님께서 주신 복들을 우리의 인생에서 잘 살펴보며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5-18)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15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그 날에 먹고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원제나 자원제 희생고기는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는데 비해 감사제 희생 고기는 먹을 수 있는 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감사제의 희생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으라는 명령이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에 나만을 위해 쓰고 있는 감사제는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나누라고 주신 나의 인생의 여러 가지 혜택들을 혹시 나만을 위해 지속적으로 쓰려고 묶어놓고 숨겨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길 기도합니다. 16절에 나오는 서원제와 자원제는 화목제와 달리 하루 더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주석서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온도 차이가 심한 광야에서 고기를 보관하는 것은 사실상 냉장고가 없는 시대에 불가능했을 것 같다는 상황적, 시대적 추측은 가능하지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을 생각해 보며 본 절을 묵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썩은 음식 즉 부정한 음식을 먹을 만큼 그의 자녀들을 빈곤에 처하게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날마다 풍족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신뢰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일상에도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올 때 있습니다. 우리 개인이 볼 때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몇 일 지난 고기를 먹는 게 뭐가 잘못 된 일인가 하는 질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나 요청하신 일은 당장 이해 되지 않는 일들도 많습니다.
‘유대인은 왜 전염병에 강한가?’ 유대인들이 왜 역사적으로 이동이 많았고,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 살았는데, 질병이 적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흑사병도 감염률이 낮아 한동안 흑사병을 퍼뜨린 게 유대인이 아니냐는 헛소문이 돌았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감염률이 낮은 이유는 결국 그들의 정결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식사 전 손 씻기 방법만 2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의식을 배웠을 때는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질병에서 보호될 때는 그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고 행하기에 귀찮고 버거운 일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들이 오면 그 진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운 때 빛을 발하는 귀한 역사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19-21)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19절을 보면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자가 먹으면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자만이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한 깨끗한 자라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히 행하고 지킨 자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죄 사함을 받은 자를 성경은 깨끗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복하는 사람이 깨끗함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죄를 잠시 가리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피의 공로로 씻을 수 없는 우리의 죄가 가려지고 씻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쉽고 간단한 과정이라고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죄 씻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은 부정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제물을 먹는 자들에게는 더 가혹한 처벌이 주어진다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강한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함부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때론 신앙생활에서 찾아오는 익숙함과 반복은 우리가 죄에 쉽게 빠지게 합니다. 한없이 내려지는 죄 사함의 은혜와 한없는 자비로 내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경험할 때, 이러한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이 정말 쉽게 용서받을 수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하셨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먹어버린 사건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 중, 하지 말라고 하시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신 것이 아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주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이 아침 깨달아야 할 부분입니다.
제사에 관한 규정들을 읽다 보면, 현대 시대를 살아가고, 편리와 합리를 찾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고리타분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 요청들이 많아 보이는 구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성경은 우리의 이해나 동의를 구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선포이며, 약속입니다. 노예를 다루듯이 억압적으로 강요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서열이 높은 존재가 아래를 깔보듯 하나님은 말씀을 따르라 우리에게 억압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을 마구 휘두르듯이 인간에게 말씀을 따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 인격적으로 말씀에 순종 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궁극적 모습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와 오고 오는 세대의 구원자로 우리와 같은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 고귀하며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본문에서는 청중이 제사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바뀝니다. 본문의 규례들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지켜야 하는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22-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 것이요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이미 모든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레 3:16-17)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본문은 이 규정에 대하여 추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희생 제물로 드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짐승의 살과 섞여 있는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장을 감싸고 있는 기릉을 의미합니다. 즉 갈비살과 섞인 기름은 먹을 수 있지만, 콩팥, 간 등 내장을 감싸고 있는 기름은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태웠던 제물의 기름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진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기름은 먹지 말고 불살라야 했습니다. 제단 위에 올려진 기름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바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이 자연적 원인으로 죽는다면 더 이상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이는 오직 흠 없는 짐승만이 하나님께 드리기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사한 짐승의 기름은 먹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용도로는 무엇이든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등불을 밝히는 것, 윤을 내는 것, 집안의 다른 목적들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일 사람이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짐승의 기름은 최상의 것을 뜻하며, 그 최상의 것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최상의 것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6-27)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피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피를 먹는다는 것은 새나 짐승의 몸에서 피를 빼내지 않고 고기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기를 먹을 때는 피를 다 제거한 후에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나 짐승의 피 섭취 금지는 어떠한 형식이든 모두 금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피를 먹는 것은 물론이며 피를 넣어 만든 일체의 음식이 금지됩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순댓국과 선짓국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또한 도살할 때 피를 제대로 빼지 않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것은 고기를 피 째 먹는 일, 즉 피가 섞인 고기를 먹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유대 문헌의 가축 도살법에 의하면, 도살자는 짐승의 목의 동맥을 정확히 찔러 도살한 뒤 거꾸로 매달아 놓거나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비스듬히 눕혀 놓아 몸통의 피를 철저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3-4절 말씀입니다.
(창 9:3-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은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육식을 허용하시면서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피를 먹는 것을 이렇게 강력하게 규제하실까요? 레위기 17장 11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새번역, 레 17:11) 생물의 생명이 바로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물로 삼아 제단에 바치라고, 너희에게 준 것이다. 피가 바로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를 속하는 것이다.
새나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피가 곧 그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인간이 새나 짐승의 고기를 먹을 수는 있지만, 그때도 새나 짐승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도 선짓국이나 순댓국을 먹으면 안 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음식에 대한 규정은 더 이상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먹는 것은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민족과 국가의 식문화를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14-23). 바울 또한 이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롬 14:15; 고전 10:25-26).
(28-30A)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하나님은 화목제를 드리는 자가 자기 손으로 제단에서 태워질 짐승의 부위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 의하여 강제로 가져오도록 강요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자가 제단으로 가져가는 짐승의 부위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는 제물의 가장 소중한 부위를 스스로 제단에 있는 제사장에게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처럼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는 강제성을 완전히 배제해야 하며,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드리는 가장 좋은 제물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더 이상 짐승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지만, 근본 원리는 동일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새번역, 고전 9: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는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주님의 권위 아래 두겠다는 신앙고백으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30B-34)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화목제의 희생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두 부위입니다. 하나는 제물의 가슴이고, 다른 하나는 제물의 오른쪽 뒷다리입니다. 가슴 부위는 하나님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아 제사장에게 돌리고, 오른쪽 뒷다리 부위는 거제를 삼아 제사장의 소득으로 돌리도록 규정합니다. 제물의 가슴은 일반 제사장들의 몫인 반면 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를 드린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여기서 요제와 거제는 제물을 드리는 의식과 관계된 용어로 제사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대교 주석에 따르면, 요제는 제물을 좌우로 흔드는 의식을 가리키고, 거제는 제물을 위로 올리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자들은 요제와 거제 모두 제물을 위로 올려서 드리는 의식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위로 올리는 것은 소유권 이전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이 행동으로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처럼 우리도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이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목적과 의도에 맞게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5-36)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아론에게 돌릴 것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 것이니 그들을 세워 여호와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한 날 곧 그들에게 기름 부은 날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돌리게 하신 것이라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니라
레위기 6-7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화제물 중에서 제사장에게 돌릴 몫은 그들이 대대로 영원히 받을 소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물에 대한 제사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생계를 돌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칙을 신약의 복음 전도자들에게 적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14절 말씀입니다.
(고전 9:13-14)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사역자들의 생계를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생계를 책임지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는 사역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우를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마땅히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37-38)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위기 1-7장 전체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과 제사장 모두와 관련된 이스라엘 제사 제도의 적합한 시행 지침 및 절차를 계시하신 레위기의 첫 번째 주요 부분에 대한 맺음말입니다. 이것은 저자, 출판사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의 마지막 장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누가 지금까지 말씀하셨고, 누가 이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제사를 나열하는 일에 있어서 레위기 6-7장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중간에 위임제를 삽입합니다. 이 규례들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되풀이함으로써 레위기의 시작 부분(레 1:1)과 더불어 수미쌍관을 형성합니다.
본문은 희생 제물의 기름과 피에 대한 규정과 희생 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는 부분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더 이상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취해야 할 바른 태도와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수천 년 전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며,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목적과 의도에 맞게 사용하십시다. 모든 생명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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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주요 제사에 대해 본문 1장에서부터 6장 7절까지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제사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불로 태우는 제사로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 소제입니다. 소제는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제사로서 헌신과 충성을 나타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헌신과 충성된 우리의 삶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하는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유일하게 예물을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제사의 기본 개념은 화평과 친교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로마서 5장 10절의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친히 화목 예물이 되어주셨습니다.
네 번째는 죄를 속함 받기 위해 드려진 속죄제로서,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죄를 인식할 때마다, 깨달을 때마다 즉시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든 예외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속건제입니다. 속건제는 물질과 관련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로서, 속죄제와 동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우리가 새신자반에게 배운 것처럼, 속죄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라 한다면, 속건제는 돌이킬 수 있는 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위한 제사입니다.
이렇듯 레위기의 앞부분은 다섯 가지의 제사법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장 8절부터 오늘 본문인 7장 까지는 앞에서 언급해 드린 다섯 제사의 대해서 추가되는 규정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어제는 번제, 소제와 속죄제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속건제와 화목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선 속건제를 드리는 규례입니다. 본문 2-5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곳에서 잡아야 하고,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한다. 제물에 붙어 있는 기름기는 모두 바쳐야 한다. 기름진 꼬리와, 내장 전체를 덮고 있는 기름기와, 두 콩팥과, 거기에 덮여 있는 허리께의 기름기와, 콩팥을 떼어 낼 때에 함께 떼어 낸, 간을 덮고 있는 껍질을 모두 거두어서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이것들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주에게 살라 바치는 제사로 바쳐야 한다. 이것이 속건제사이다.
속건제사에 대한 내용은 앞에서 언급해 드린 것처럼, 레위기 5장 14절에서 6장 7절까지의 본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속건제사가 언제(when) 드려지는 제사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속건제사가 어떻게 드리는지에 대한, 즉 how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속건제는 번제물의 희생을 통해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기는 모두 바치며,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서 화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먹을 수 있으나 거룩한 곳에서만 먹어야하고, 성경은 가장 거룩한 제물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속건제물로 사용된 것이 흠이 없는 숫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흠이 없고 잘 키워진 숫양이라고 해도, 우리는 양에게 거룩하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 제물을 거룩하다고, 지극히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숫양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다른 짐승들과 구별도 안 되고 크게 다를 바 없는 숫양이었지만 그 양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순간 그 짐승은 세상 어떤 짐승보다도 거룩하고 귀한 존재로 취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면, 우리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적으로 봤을 때, 때론 뒤처지고, 능력도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다고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서 나아간다면 그 누구보다도 고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화목제물을 드리는 규례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이는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의 동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감사제, 즉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12, 13, 15절)입니다. 여기에서 제물로 드려진 고기는 그 날 먹거나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는 안됨을 명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경우, 또는 서원이 이루어진 경우에 드리는 서원제입니다.(16절) 그리고 세 번째는 특별한 규정은 없지만 자원해서 드리는 자원제(16절)입니다. 이때에도 제물의 고기는 그 날 먹거나, 먹고 남은 것이 있다면 그 다음날까지는 다 먹되, 사흘째 되는 날까지 고기가 남게 된다면 그것은 꼭 불사라야만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고 제 삼 일에 조금이라도 고기를 먹게 된다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왜 일까요? 왜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이튿날까지만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멋지고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드리고 많은 예물을 올려드린다 하더라도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와 예물을 결코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 우리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자 정신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깨어 지키며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과는 영적 거리는 더욱더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겸손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손이 결코 짧지 않으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37절을 보면, 다섯 가지 제사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조금은 낫 설은 또 하나의 제사가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
바로 위임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을 세우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임제가 5대 제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위임제의 중요성을 본문이 웅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론과 그 자손들이 위임받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직분인지를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지금의 우리가 물려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바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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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의 사역이 결코 화려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깊이 헌신되어야만 그 많고 다양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의 그러한 헌신과 노력이 그 정신을 잃었을 때 그들은 선지자들의 호된 질책을 들어야 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한 오늘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다면 그것은 겸손히 엎드리는 것뿐임을, 즉 우리 자신이 번제물임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우리 자신이 곱게 빻아져야할 죄인임에 통곡하며 엎드리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레위기 5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일반적인 제사 규례요, 6장부터는 제사장들을 향한 제사 규례이기에 7장은 6장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속건제와 화목제와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속건제는 인간이나 성물에 대하여 손해를 끼친 죄에 대하여 속함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드릴 때 제사장은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 번제물을 잡았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속건제 제물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곳에서 제물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단 사면에 뿌렸습니다. 히브리서 8장에서 “율법을 쫒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속건제물의 피를 단 사면에 뿌린다는 것은 죄가 사하여졌음을 의미합니다.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하여 비로소 죄를 범한 사람의 죄가 사해 집니다. 그 피 뿌림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그림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화목제의 규례가 나옵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의무적인 제사가 아니라 자원제이며 감사제입니다. 화목제는 속죄제 속건제와 달리 백성들에게도 그 제물의 몫이 돌아갔습니다. 화목제물의 남은 몫이 나누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의미하며, 그 화목은 곧 이웃과의 화목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목제에서는 이 공동식사가 중요합니다. 화목제물을 함께 나누고 먹는 과정에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은 드리는 그 날 다 먹어야 했으며,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다음날까지 먹을 수 있었지만 삼일은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삼일이 지나면 그 남은 제물은 불태워 없앴습니다. 하루만에, 또는 이틀 안에 제물을 다 먹기 위해서는 이웃을 초청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이웃일 지라도 그들을 초청하지 않으면 그 고기를 다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공동식사의 자리에서, 그 나눔의 자리에서 화해가 선포되고 경험되었습니다. 화해와 평화는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친근한 존재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목은 나와 상반되는 자리에 앉은 이웃을 향해서도 선포되고 나누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화해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예수그리스도의 화해입니다.
28절부터는 부수적인 규정이 등장하는데 화목제의 제사장 몫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요제로 드려진 가슴과 거제로 드려진 우편 뒷다리, 그리고 화제로 드려진 무교병, 무교전병, 구운 과자가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제사 제도에서 이러한 부가적인 규정들을 주신 것은 제사를 더욱 효율적으로 드릴 수 있게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제사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돌아갈 몫에 대한 규정인데, 아론과 그 자손들이 제사장에 임명되는 그 날부터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분이 하나님이 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제도를 영원한 규례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도 동일합니다. 예배는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예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지고 경험되는 참된 예배자로 서는 우리의 예배가 되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