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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미가1장1절)
1.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① (1절)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 모든 예언서는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역사는 반복 된다’는 말처럼 이스라엘민족과 우리민족은 유사한 점이 많다. 이스라엘민족이 남북분열왕국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민족도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다. 이스라엘민족이 고대열강들의 패권다툼 속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경험했듯이 우리민족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과 같은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지금도 소위 G2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 서 있다.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개인의 삶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오늘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수 천 년에 특정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말씀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그 속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미가는 남 유다 사람으로 이사야와 동시대의 예언자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앗수르제국에 의한 멸망이다. 남 유다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는 대제국 앗수르의 남벌이라는 큰 위협으로 인해 국가의 ‘존폐’가 달린 역사적인 격변기였다.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과 같은 위기의 순간이었다. 오늘 우리는 ‘포스트코로나’,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서 있다. 미가서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를 통해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살아야 내야 하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2.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
① ‘요담’의 시대
▶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적 상황은 역대하 26장~29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를 읽는 키워드는 ‘대제국 앗수르의 남벌(南伐)’이다. 앗수르가 남방의 애굽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남 유다를 통과해야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며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을 내세운 것과 같다. 앗수르제국의 확장전쟁이라는 위기 가운데 약소국들이 생존전략을 모색하던 시기다. (반앗수르/친애굽, 친앗수르, 반앗수르/친바벨론) 이사야와 미가의 주장은 외세를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요담’의 아버지 ‘웃시야’는 앗수르의 남벌에 대항하기 위해 앗수르와 자웅을 겨루던 애굽을 뒷배로 두고 북이스라엘, 아람, 블레셋 등과 연합해서 ‘반앗수르동맹’을 구축했다. 웃시아와 요담의 시대는 강대국 앗수르의 남진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강성함을 누렸다. 그 이유를 (대하26:4~16)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으로...기히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 짐이라’ (대하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은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정도’를 걸었다. 우리도 어려울 때일수록 흔들림 없이 믿음의 ‘정도’를 걸으면 형통케 하시고 강성케 하신다.
② ‘아하스’의 시대
▶ ‘아하스’는 반앗수르동맹을 탈퇴하고 ‘친앗수르정책’을 선택했다. 그러자 동맹국이던 북이스라엘 왕 배가와 아람 왕 르신이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사7:1~14) 이사야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두 왕의 도모가 성공치 못할 것이라 예언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권면했으나 듣지 않았다. 아하스가 요청한 앗수르의 원군은 돕는 시늉만 했다. 이 일로 12만 명 학살되고 20만 명이 포로가 되는 극심한 전란의 고통을 겪는다. 결국 남 유다는 앗수르에게 아무런 실익도 못 얻고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이용만 당했다. (22~25) ‘이 아하스왕이 곤고할 때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육체만 아니라 영혼까지 노예로 전락했다.
▶ 바로 이때, 남 유다를 ‘아하스 왕’이 다르시던 시절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애굽을 의지해서 앗수르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자.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북이스라엘을 침공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어리석은 아하스 왕은 남유다가 망하지 않은 건 친앗수르정책 ‘덕분에’라고 착각했다. 성경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진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하 17:7~8)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니라’ 북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에 의해 힘이 없어서 멸망한 게 아니다. 하나님 아닌 사람(애굽)을 의지했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사람이 세운 율례를 좇아 살다가 멸망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데 힘써야 한다.
③ ‘히스기야’의 시대
▶ 성군으로 널리 알려진 ‘히스기야’는 반앗수르정책을 펼쳤다. 우상을 타파하며 산당을 제거하고 성전제사를 쇄신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대하29:2)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바로서려고 하면 어김없이 시험이 찾아온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끄는 대군에 의해 침공을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이사야의 조언대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산헤립의 대군을 물리치고 신승을 거둔다. 또한 생명이 연장되는 치유의 기적도 경험했다. 불행하게도 히스기야는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아름답지 못한 ‘용두사미’의 신앙이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년에 새로운 고대근동의 강자로 떠오르는 바벨론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우를 범한다.
▶ ‘히스기야’는 솔로몬처럼 말년에 타락했다. 역대기는 히스기야를 타락시킨 것이 무엇인지 명시한다. (대하32:27~31) ‘히스기야의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히스기야가 추락한 원인은 자신에게 부와 영광, 형통과 번영을 허락하시고, 구원하시고, 치유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벨론이 불안한 미래를 보장하리라는 착각 때문에 국가의 미래와 운명을 맡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벨론 사신에게 내탕고, 군사시설 등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도적에게 집안의 보안시설까지 다 공개한 격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남 유다가 그토록 의지하던 바벨론에게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세상을 마치는 날 자신이 의지하던 것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물질을 의지하면 물질로, 명예를 의지하면 명예로, 쾌락을 의지하면 쾌락으로 무너진다. 국가나 공동체, 개인의 삶도 예외가 없다. 믿음의 길에서 ‘끝이 아름다운 인생’,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3. 역사는 현재를 비취는 거울
① 미가는 세 왕의 시대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검증된 교훈을 증거 한다. 타산지석을 삼으라’(다른 산의 못난 돌을 옥돌을 가는 숯 돌로 귀하게 선용, 타인의 실수와 허물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겸비하는 지혜) 미가의 예언이 선포된 때는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던 시대다. 미가의 예언으로부터 100여년 후인 B.C 586년 남 유다도 마침내 바벨론에게 멸망했다. ‘역사는 현재를 비취는 거울이다’ 미가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도하며 ‘타산지석’을 삼아 장차 올 남 유다의 멸망을 막기 위해 회개를 촉구했다. 지금 안심하고 있는 남 유다여, 너희도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를 회개치 않으면 북이스라엘과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될 거다. 장례식은 인생을 정직하게 보는 기회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미래의 내 모습,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② ‘특권의식 & 선민의식에 안주하지마라’ 예루살렘성전이라는 ‘특권의식’에 도취돼 있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멋대로 제사하는 이단사이비라고 멸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통의 탈을 쓰고 우상숭배’를 저질렀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예배 안 드린 게 아니라 예배를 잘못 드린 탓이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잃어버렸다. 남유다는 스스로 다윗왕가(솔로몬-르호보암)를 잇는 ‘적통’이라는 ‘선민의식’을 자부했지만 정작 ‘다윗의 길’이 아닌 ‘여로보암의 길’을 좇았다. 신앙의 의로움은 혈통이나 직분, 모래위에 지은 집 같은 외적인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 미가 5장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메시아 예언’은 가짜 왕의 시대는 가고 진짜 왕(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한다. 진정한 위기의 극복은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흔들리지 않는’ 진짜 믿음을 세워야.
③ ‘사람을 의지하지마라’ 미가가 예언했던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공통점은 강대국 외세의 침공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불안할 때 무엇을 의지하는지 중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열강(애굽, 앗수르, 바벨론)을 더 의지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바벨론 의지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했다. 자기가 의지하던 대상으로 인해 무너졌다. 세상을 마치는 날 자신이 의지하던 것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물질을 의지하면 의지하던 물질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면 의지하던 사람으로 인해 넘어진다. 전대미문의 재난, 위기, 삶의 주관자 되신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한다.
④ ‘교만은 패망의 선봉, 넘어짐의 앞잡이다’ 교만하면 무조건 넘어진다. 풍선이 터지기 전에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다. 세 왕들의 시대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던 시대였지만 ‘동시에’ 야수 같은 고대 열강들로 인해 풍전등화 같은 위기를 대비해야 하는 엄중한 때였다. 임진왜란 때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평화와 안정, 성장과 축복, 형통할 때 교만하지 않도록 겸비 또 조심해야 된다. 고난 때문에 실족하는 이가 열에 하나면 아홉은 축복과 번영에 넘어진다.(고전10:12)‘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⑤ ‘은혜를 기억하라’ 세 왕들의 시대는 외적인 어려움 가운데도 안정과 평화를 누렸던 이유는,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주셔서 번성케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왕들은 자신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 반앗수르나 친앗수르, 친바벨론 ‘덕분에’라고 착각했다. 내 공로와 내 공덕(내 덕분에)을 내세우는 삶에는 은혜가 없다. 은혜가 사라지면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은 ‘감사’가 사라지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환란 중에 승리, 고난 중에도 영광은 나의 수고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외친 ‘회개하라’는 말씀의 본래적인 메시지는 ‘주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라’다. ‘은혜로 살던 삶으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재난과 급격한 기후위기로 인해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중한 현실을 살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내는 생존전략은 예나지금이나 한결같고 동일하다. 다른 길은 없다.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1장2절~9절)
1. 불확실성의 시대
모든 예언서는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다. 예언이 전하는 본래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언이 선포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하다.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미가가 예언했던 역사적인 정황은 한마디로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대제국 앗수르의 남벌정책으로 국가의 존폐가 풍전등화 같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은 합종연횡을 통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사람을 의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와 달리 예언자 미가는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정로(正路)’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나갈 ‘정도(正道)’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의 ‘성찰과 회개’뿐이다.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는 전 세계를 위협하는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속에서 온 인류가 불안과 공포 가운데 삶의 위기를 겪고 있다. 난제를 극복하는 선택지는 동일하다.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위기의 순간에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할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갈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안타깝게도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또 다른 열강 애굽을 중심으로 반(反)앗수르동맹을 선택했다. 오늘 본문은 그 선택에 따른 비참한 결과를 기록한다.
2. 사마리아의 몰락
① (2절~3절)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찌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 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 ‘들을찌어다’ 미가서는 세 편의 설교다. 청중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다. 주의와 주목을 명한다. (출14:13) ‘두려워 말고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위기의 순간, 가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이 모든 재난이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임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침내 심판하시는 삶의 주관자시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간접통치에서 직접치리로 전환될 것을 선포한다. 지금까지 위임받은 왕을 통한 간접 통치에서 직접 치리에 나서신 까닭은 위임받은 청지기들의 불순종 때문이다.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하나님 노릇하는 모든 오만을 낮추시고 무엇보다 위임받은 청지기들의 주인 노릇을 징벌하신다. 그리스도는 왕(하나님의 통치)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서신다.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불 앞에 밀(납)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누가 진짜 세상의 통치자신지 드러내신다. (욜2:11) ‘여호와의 날이 크고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② (4절~5절) “이는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은 분명하다. ‘야곱(사마리아)의 허물과 이스라엘 모든 족속의 죄악’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한마디로 ‘우상숭배’다.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은 단과 벧엘에 산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세우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너희 신이라고 섬겼다. (왕상12:28~33)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안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긴 것이다. 예배 안 드린 게 아니라 ‘잘못’ 예배한 것이다.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정통’, 다윗가문이라는 ‘적통’을 자부하던 남 유다도 우상숭배를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우상숭배를 자행했다. (마6:3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거나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거나 저를 경히 여김이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양다리 걸치기’ 신앙생활이다. 미가는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나 한 가지로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고발한다.
③ (6절~7절)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며’ 북이스라엘의 패망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이러므로 내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신 일이다. 앗수르는 사람막대기, 심판의 도구일 뿐이다.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손을 쌓은 업적을 허무셔서 ‘그 지대’ 삶의 기반이 어디에서 왔는지 밝히 드러내신다.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던 거짓 우상들을 척결하시고 우상숭배로 얻은 재물을 불사르고 가루가 되게 하신다. 주목할 구절은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다. 기생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좇은 영적인 음행을 가리킨다. 영적음행의 대표적인 인물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다. (호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 하도다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던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우상을 섬긴 까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삶의 비참한 최후다.
3. 선지자 미가의 눈물
① (8절)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여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 예레미야의 애가처럼 선지자 미가의 피 끓는 절규와 애타는 통곡이다. 선지자들은 ‘벗은 몸 & 맨발, 멍에 & 줄’과 같은 기행을 통해 포로가 되어 타향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각교육으로 전달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셨다. (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코로나사태로 인한 비대면 온라인예배가 지속되고, 최근 기독교의 탈을 쓴 극단적인 보수단체들의 추태로 인해 한국교회의 선교적인 미래가 어둡다는 우울한 전망을 한다. 예상보다 더 급속하게 추락할 것이다. 하지만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듯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신다. 하나님의 뜻은 부분적인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다. 옛 건물이 무너져야 새 건물이 세워지듯 옛 성전이 무너져야 비로소 새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눅19:45~46) ‘성전에 들어 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정화사건이다. (요2:19)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무너진 성전 위에 새롭게 지어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증거한다. 누가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렸나! 누가 성전 문을 닫았는가! 누가 예배당 문을 닫은 것인가! 주님께서 친히 성전을 정화하시듯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계신다. 문제는 ‘예배’가 아니라 다수가 모이는 ‘밀집’이고, 문제는 ‘교회’가 아니라 ‘마스크’를 쓰는 가장 핵심적인 예방수칙을 무시한 것이다.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인의 정치집회인데 한국교회 전체가 몰상식한 감염병 확산의 주범처럼 싸잡아 멸시와 조롱을 받는 현실이다. 억울하고 비통한 상황이지만, 매를 달게 맞아야 한다. 지금은 항변이나 저항이 아니라 예배당 문을 닫는 수치와 오욕을 주님의 징계로 여기며 견디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② (9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코로나19재난 앞에서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왜 이 재앙에서 우리를 고쳐주시지 않는지를 따져 묻는다. 주님께선 못 고칠 질병이 없고 주님 앞에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다만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끝까지 돌이켜 회개치 않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메뚜기, 전염병, 기근, 지진 등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재앙의 원인에 대해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해석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내리신 재난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결과다. 재앙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오늘의 문제는 성찰은 없고 비난만 난무하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되는 데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새롭게 고침을 받을 도리가 없다.
③ ‘그것이 유다까지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 남 유다는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인한 정통과 적통이라 여기며 북이스라엘을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단사이비라고 멸시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루살렘성전 안에서 우상숭배를 자행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행하는 우상숭배다. 겉으로는 선교와 행사, 봉사와 헌신을 하는 데 무늬만 주의 일이고 실상은 주의 일이 아니라 자기 영광, 자기 욕망, 자기 과시의 수단이었다. 감리교회의 감독선거는 ‘거룩한 이름으로 행하는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예다. 거룩한 직임 뒤에 물욕, 권력욕, 명예욕이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감리교회가 새롭게 되는 첫 번째 회개의 열매는 감독선거를 제비뽑기로 바꿔서 하나님의 결정권을 드리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 돈을 쓰지 않고는 당선될 수 없는, 불의한 선거방식에 대한 회개 없이 감리교회는 단 한 치도 새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세월, 세상법정에 포로(노예)가 돼버린 질곡이 이를 반증한다.
4. 한국교회 ‘성장주의, 물질주의, 공로주의’를 회개해야
▶ 미가의 예언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실상을 목도하면서 남 유다에 장차 닥칠 재난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너희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북이스라엘’ 다음은 ‘남 유다’였다. ‘이단사이비 신천지의 몰락’ 그 다음은 ‘정통을 자부하는 한국교회’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우한에서 창궐할 때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선교사를 핍박하는 중국공산당을 다루고 계신다(?) 대구신천지집단감염사태 때 하나님께서 코로나로 이단사이비신천지를 다루신다(?) 지난 5월 이태원게이클럽에 의한 N차 감염 때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를 심판하신다(?)고 주장했다. 그럼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한국교회를 다루고 계시는 것인가!>, 재난이 오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정죄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비겁하고 미성숙한 태도다.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8월25일자 질병관리본부가 전하는 오늘의 한마디는 <연대의 힘>이다. “코로나 19는 정치적 입장도, 종교의 종류도 이념과 믿음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연대의 힘을 발휘해 감염병 재난을 이겨내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비난은 자초한 일이다. (눅6:38)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재난에 대처하는 성숙한 자세는 타인에 대한 혐오나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고 겸비하는 회개다.
▶ 한국교회는, 그토록 경멸하는 이단사이비 신천지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와 이단 신천지의 근본교리와 신앙양태는 다르다. 하지만 ‘성장주의’(양적인 성장과 숫자놀음을 추구한다는 점), ‘물질주의’(왕과 제사장이 되서 세상적인 부와 권세를 추구한다는 점), ‘공로주의’(인간적인 공덕을 앞세우는 자력구원, 포교의 목적이 전도가 아니라 이기적인 수단)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정통이나 이단이나, 공히 세상풍조를 따라 물들어가는 ‘세속화(世俗化)’라는 우상숭배를 범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에서 성숙(거룩)으로’, ‘열복에서 청복으로’, ‘나의 공로에서 오직 주의 은혜로’ 근본적인 전환을 실천해야 한다. 전대미문의 코로나재난은 온 세상을 ‘조율(調律, tuning)’하시는 하나님의 강제적인 행정명령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로부터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전대미문의 재난, 우연 아닌 하나님의 조율” 미가1장 10절~16절
1. 하나님의 조율(調律)
① 예언자들은 왜 흥하는 성공담이 아니라 망하는 실패담을 자세히 기록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축복의 본보기인 ‘정면교사’로 부르셨지만 불행하게도 ‘반면교사’가 되고 말았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모든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미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도하며 장차 벌어질 남 유다의 몰락을 예고한다. 정통과 적통에 안주하는 예루살렘도 돌이키지 않으면 사마리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엄하게 경계하면서 근본적인 삶의 전환을 촉구한다.
② 북이스라엘이 오늘날 ‘신천지 같은 이단사이비’라면 남 유다는 ‘정통을 자처하는 한국교회’에 해당한다. 한국교회는 대구신천지집단감염사태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이단사이비신천지를 다루시는 것’이라고 비난과 조롱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결국, 일명 광화문보수집회로 인해 집단감염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수모를 겪고 신천지 같은 취급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집단감염확산의 원인과 대상은 이단이나 정통, 예배나 교회가 아니라 다수가 모이는 ‘밀집’이고 마스크착용으로 요약되는 ‘생활방역’을 준수하지 않은 까닭이다. 타산지석의 성찰과 회개 없이 비난과 정죄에만 급급한 결과다.
③ 미가서는 ‘코로나19사태를 해석하는 신학적인 모티브’를 제시한다. (3절)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리라” 인간의 탐욕과 오만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조율(調律)이다. 전대미문의 재난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면 대처하는 자세 곧 해법이 달라진다. 재난을 빨리 통제해서 하루빨리 과거의 모습으로 원상복귀를 바라기보다 재난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근본적인 삶의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겸허하게 수용할 때 진정한 해법이 열린다. ‘정직한 절망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인 까닭이다. 질병을 인정할 때 치유가 시작되고 무지를 인정할 때 배움이 시작되듯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참된 삶이 시작되고 죽음을 통해 영생이 시작되듯 타락한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져야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새워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회개가 정답’이다.
2. 명실상부에서 유명무실
① (10절~11절)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찌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찌어다 .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찌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 미가는 장차 벌어질 남 유다의 비참한 모습을 자세히 예고하면서 회개치 않은 이들이 당하게 될 삶의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찌어다’ 가드는 남 유다의 불구대천의 원수 블레셋을 가리키는데 멸망으로 인해 대적들에게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이어서 남 유다에 속한 열 개의 성읍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명실상부하던 도시들이 유명무실해질 것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베들레아브라’는 많은 거민들로 인해 먼지가 많은 성읍이란 뜻인데 한 줌의 재와 같은 존재, 먼지(티끌)처럼 될 것을 예고한다. ‘사빌’의 본뜻은 아름다운 성읍인데 벌거벗김(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아난’의 본뜻은 진군인데 고립(격리)이 될 것이며, ‘벧에셀’은 본래 쉼터, 휴게소라는 뜻인데 거리에 사람이 없는 고립무원의 지경이 될 것을 예고한다.
② (12절)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 ‘마롯 거민은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마롯은 쓰다는 뜻인데, 회복되길 바라지만 도리어 쓰디 쓴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을 예고한다. 코로나이전으로의 원상복귀는 부질없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재앙이기에 제아무리 기량을 펼쳐도 그 뜻을 다 이루실 때까지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면 축복이 임하고, 반대로 하나님을 멸시하여 거역하면 저주가 임한다. 성서가 전하는 시종일관, 시종여일한 메시지다. (신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예루살렘이나 한국교회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왕상9:6~7)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이 말씀이 성취된 것같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 저주로 끝나는 사람이 더 많다.
③ (13절~15절)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라기스 거민아’ (메시지성경) ‘전차 성에 사는 너희, 전차를 타고 모두 내뺀다. 너희는 시온의 딸들을 꾀어 하나님 대신 전차를 믿게 만들었다’ 죄의 근본과 허물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던 우상숭배다. 자신의 의지하던 것들과 함께 무너질 것을 예고한다. (14절)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찌어다” ‘가드 모레셋’은 가드의 예물이라는 뜻인데 애굽에게 예물로 받은 성읍을 앗수르에게 공물로 바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사람과 맺은 굳건한 동맹이 한낱 신기루가 될 것을 예고한다. (15절)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마레사는 상속이란 뜻인데 후손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예비한 것들이 이방 민족에게 상속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아둘람은 은신처, 피난처라는 뜻인데 매장되는 무덤이 될 것을 예고한다. 지금은 명실상부(名實相符, 이름과 실상이 일치)하지만 영광이 수치로 변하게 되어 그날에는 유명무실(有名無實,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해질 것을 예언한다. (계3:1)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처하는 삶의 비참한 결말이다. 남 유다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은 한마디로 우상숭배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공로로 얻은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주신 분께서 거두신다. 멸망과 실패가 주는 유익이 있다.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이걸 빨리 깨닫고 날마다 은혜로 사는 게 지혜다.
3. 문제는, 다음세대!
(16절)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 찌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찌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① ‘대머리’는 고대노예들의 대표적인 행색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남 유다의 죄악으로 인한 가장 무서운 결과는 ‘다음세대’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타향으로 끌려가는 사태다. 지금 우리가 기후위기에 대처하지 않으면 미래의 후손들이 그 폐해를 감수해야 하듯이 죄악의 결과는 당대에 그치지 않고 자손들에게로 이어진다. 지금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다음세대 기독교의 미래’는 암울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노년층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구성비가 줄어드는 심각한 역삼각형의 구조다. 한국교회의 주축은 선교초창기 ‘주일학교운동세대’(70~80대)이고 ‘베이부머세대(55년~63년생, 60대)’는 지금 한국교회를 떠 바치고 있는 마지막 보루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소위 ‘7080세대’와 90년대 출생한 일명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라 불리는 ‘포노 사피엔스’세대는 희귀한 존재가 돼버린 현실이다. 최근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의 추태로 인한 신뢰하락은 더 급속하게 진행돼서 쇠퇴를 앞당길 게 자명하다.
② 한국교회는 코로나사태의 위기를 도리어 교회의 본래적인 역할과 사명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기위해 전심전력해야 한다. 교회의 역할은 단지 ‘비대면온라인예배’로 방역에 협조하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방역’만큼 중요한 것은 ‘일상’이다. 우리는 ‘방역’과 ‘일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계속되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생활기반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해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코로나사태는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다. 감염력은 매우 높지만 치명률은 상대적으로 아주 낮다.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만이 능사가 아니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생활방역으로 전환해서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을 유지하는 길을 모색해야한다. 정부는 방역을 총괄하고, 병원은 위중한 감염자를 치료하고, 교회는 대다수의 비감염자들이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일상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두려움과 불안’이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인 까닭이다. 지금 교회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대면예배강행이나 정권심판’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정부의 방역정책에 적극 협조해서 누구보다 철저하게 마스크와 손 씻기로 대표되는 ‘생활방역’에 앞장서야 한다. 나아가서 ‘비감염자’들이 두려움과 불안을 담대하게 극복하고 일상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한가롭게 좌우이념대립을 일삼거나 알량한 집단이기주의를 내세울 때가 아니다. 이와 더불어 한국교회는 감염자와 감염지역에 대한 낙인과 혐오, 불필요한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전대미문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래야 산다.
③ 한국교회가 시대적 본분을 망각하고 거역하면 후손들이 칼에 삼키겠지만 반대로 오늘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면 내일 우리 자손들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시37:23~26)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그 실 예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삼하9:3~11)이다. (시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눅6:38) ‘(지금 주의 이름으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후손)에게 (내가 친히 갚아)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후손들) 에게 안겨 주리라’
“밭들과 집들을 탐하는 우상숭배” 미가2장 1절~5절
1. 우상숭배의 본질, 탐심
① 이스라엘의 죄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단지 금신상이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차원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탐심’이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다. (롬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물질은 소중하지만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물질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섬겨야지 물질을 섬기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을 더 사랑하는 격이다.
② 성경이 전하는 건전한 신앙은 세속적인 것을 타부시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선하게 여기는 ‘영지주의’가 아니다. 참된 신앙은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의 균형 잡힌 삶에 있다. (신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삶을 위해선 떡도 필요하다. 다만 떡보다 말씀에 우선순위를 강조할 뿐이다. 왜냐하면 삶(Life)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균형과 우선순위’라는 삶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거스틴이 역설했던 ‘사랑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신앙고백을 전제한다.
2.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① (1절)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 미가는 이스라엘이 탐심으로 밤낮을 쉬지 않고 저지르는 죄악 된 행실을 고발한다. 삶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삶을 바꾸려면 먼저 마음을 바꿔야 한다. (약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회심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과실치사’처럼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목적의식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행동에 옮긴 ‘일급살인’처럼 의도적인 것이다. ‘화 있을찐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하는 관용적인 문구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중심은 ‘목적과 동기’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고 그 중심을 심판하신다. 신앙의 목적은 ‘외모’를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중심을 날마다 반듯하게 세워나가는 데 있다.
② (2절 전반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 이스라엘이 행한 탐심의 대상은 ‘땅과 주택’ 곧 ‘부동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천지창조의 메시지이며 구약성서의 대전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오늘날 ‘토지공개념제도(土地公槪念)’ 속에 그 정신이 담겨있다. 토지의 개인적 소유권은 인정하되 이용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자는 취지인데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다. 안타깝게도 1990년 제정되었으나 1998년 헌법불일치로 위헌판결로 소멸되었다. 부동산은 주거용이지 투기용이 되어선 안 된다. 하나님께 필요를 구해야지 탐욕을 구하면 안 된다.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를 구하는 기도다. (대상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필요를 구하는 아굴의 기도에서 잘 드러난다. (잠언30:8~9)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③ (2절 후반부)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 하도다”
▶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만물에 통치권을 위임하신 뜻은, 학대와 폭정을 일삼는 폭군 같은 왕 노릇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만물을 돌보고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로 부르셨다.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시는 기준은 ‘생명 책’(Book of Life)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기록된 책’이다. 나에게 허락하신 생명과 물질, 시간과 재능을 가지고 이 땅을 사는 동안 학대를 일삼았는지, 거룩한 청지기로 선용하며 살았는지 그날에 판가름하신다.
3. 재앙을 내리신 목적
① (3절)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 앞서 살펴본바 대로 재앙의 원인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탐심’이고 탐심의 수단은 ‘부동산’이었다. 필요를 넘어 탐심(욕심)을 추구하는 것이다. ‘필요’와 ‘욕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필요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복), 식(품), 주(택)’ 등의 필수적인 요소를 가리킨다. 이와 달리 욕심은 ‘필요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탐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다. 탐욕을 채우는 것은 사단의 영역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탐욕스런 인간들의 욕심을 다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기아와 빈곤, 전쟁과 착취가 만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요를 추구하며 살도록 지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인간들의 지나친 탐욕 때문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를 꿈꾸는 ‘부동산 투기’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하면 안 되는 짓이다. ‘부동산 투기하면 지옥에 간다!’ 아니 지옥을 맛보며 살게 된다. 부동산에 대한 탐심은 결코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무저갱(無低坑,Abyss)’인 까닭이다.
▶ ‘이는 재앙의 때임이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창조하신 세상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뭘까? 재앙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무너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지금까지 신실한 청지기를 세우셔서 간접적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직접적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수단이 ‘재앙’이다.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히 다니지 못할 것이라’ 재앙의 첫 번째 대상은 본분을 망각한 채 주인 노릇하는 오만한 청지기들이다. 재앙의 때에 주인이 누구인지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세상의 통치자와 삶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어리석은 짓이 있다. 돈 자랑, 건강자랑, 힘자랑, 지식자랑, 자식자랑, 업적자랑 등이다. 물질과 건강, 힘과 지식, 자녀와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너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② (4절) “그 때에 너희에게 대하여 풍사를 지으며 슬픈 애가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 도다 하리니”
▶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경고와 책망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다. (메시지성경) ‘너희를 조롱하는 노래가 지어져 퍼지고, 너희 자신은 서러운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 망했다. 집과 땅은 모두 경매에 넘어가고,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최고가를 부르는 입찰자에게 모두 팔려 넘어갔다’ 착취를 일삼으며 악착같이 모았던 부동산들이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복이 변하여 독이 되었고 축복으로 시작해서 저주로 마치게 되었다.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이 아름답지 못한 용두사미 같은 인생이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망각한 삶의 결과다.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부디 그 치욕스런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랄 뿐이다.
③ (5절)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하신 부동산을 탐심으로 투기한 군상들의 당할 비참한 최후를 기록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제비를 뽑아 줄을 띠워’ 각 지파별로 분배하셨다. ‘여호와의 회중에서...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땅을,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 회수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우리의 인생을 마치는 그날에도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찾으신다. (신8:11~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19~20) ‘내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킨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마침내 미가의 시대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밭들과 집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돌이켜 회개치 않으면 미가의 예언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성취될 것이다.
“그런 설교 하지 마라!” 미가2장 6절~13절
1. 예언하지 말라
① (6절)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 도다”
▶ 미가서는 예언자 미가가 행한 세 편의 설교다. 밭들과 집들에 대한 탐심을 책망하는 미가의 예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다. ‘너희는’ 동 시대의 예언자 4인방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를 적시한다. ‘예언하지 말라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한마디로 부동산 투기는 예언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관여할 바가 아니기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다. 예언은 성전에서 제사지내는 일에만 해당될 뿐 일상의 삶은 예언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에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 곧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삶을 감찰하신다. 신앙의 목적은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는, 믿음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생활화’다.
② (7절)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 ‘너희 야곱의 족속아’ 미가는 ‘청중들을 향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편급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성급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인자가 한이 없으시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공의롭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탓하는 적반하장의 완악함을 고발한다. 예언자의 책망에 귀 기울여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타인을 넘어 하나님까지 비난하는 완고함이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책망의 목적은 비난(저주, 죽음, 멸망)이 아니라 유익(축복, 생명, 지속)에 있다. 책망은 귀로 듣기에는 불편하지만 중심으로 받아들이면(영접, 수용)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책망을 잘 받아들이면 삶의 유익이 된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책망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다.
▶ (메시지성경) “그런 설교하지 마라. 우리에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어떻게 야곱 가문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화를 터뜨리신다니? 그분이 그러실 분이냐?” 오늘날의 청중들도 부동산 투기 같은 듣기 거북한 소리를 싫어한다. 축복과 번영, 성공과 건강에 관한 설교 듣기를 좋아한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징계)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핵심은 ‘모든 성경’이다. 모든 성경에는 책망과 징계도 포함된다. 쉽고 편한 말씀만 편식하는 요절신앙을 극복해야 된다. 어렵고 불편한 강해주석을 병행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징계)’가 사라지고 ‘젖먹이 신앙(고전3:1)’에 안주하는 데 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교회가 온전한 일을 감당치 못한다.
2. 난민배척, 여성차별, 아동학대의 죄악
① (8절~9절)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 도다”
▶ 부동산 투기에 이은 또 하나의 구체적인 죄악을 폭로한다. ‘근래에 내 백성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삶을 가리킨다. 도움이 필요한 피난민(난민)의 외투를 갈취하고 여성과 아동의 인권을 유린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대한민국은 직장 내 여성 차별 최고, OECD 유리천장 지수 꼴찌다. 아동학대는 안타깝고 슬픈 자화상이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삶이 기반을 잃어버린 사회적인 약자를 통칭한다. 그들을 선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들을 박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일임을 증거한다.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한 관계다. (마25:45)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② (10절)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찌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 (메시지성경) ‘여기서 나가라, 너희 떼거리여, 여기는 너희 있을 곳이 아니다! 너희는 이곳을 오염시켰고, 이제 너희가 오염되었다. 몰락했다!’ 택하신 선민을 예루살렘성전에서 쫓아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내어 쫓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본래적인 사명을 잃어버리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선용하라고 맡긴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청지기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이와 달리 주님이 맡긴 사명을 잘 감당했던 신실한 청지기의 또 다른 운명을 전한다. (마25:23)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은 위대한 사명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보잘것없이 작은 일이지만 위임받은 ‘청지기의 사명’로서의 사명을 잘 완수했는지에 대해 물으신다.
③ (11절)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 (메시지성경) ‘너희는, 미소 띤 얼굴과 기름칠한 혀를 가진 자가 나타나서, 아침부터 밤까지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더 많은 돈과 최고의 포도주를 하나님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법을 설교해 주겠다고 하면, 너희는 그 자리에서 그를 설교자로 고용한다!’ 포도주는 즐거움을, 독주는 쾌락을 가리키는 은유다. 한마디로 듣기 좋은, 듣고 싶은 예언을 해주는 거짓선지자의 행태다. 남 유다가 멸망한 진짜 이유는 참된 예언자를 배척 당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지 분별력이 없었다. 본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아니라 내 멋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좇아 말씀대로가 아니라 탐심을 좇아 욕심대로 사는 것이 죄다.
3.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
① (12절)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앙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 남 유다가 범한 죄악의 실체는 ‘땅과 이웃’, 곧 ‘부동산과 사회적인 약자’에게 행한 죄다. 그 죄로 인한 결과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남 유다의 멸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에 있었다.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다. (마25: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드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 그날에 두 부류로 구분하신다. 첫 번째 부류는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땅과 이웃’에게 죄악을 저지른 염소 같은 무리들이다.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보스라는 모압의 대표적인 성읍인데 하나님을 거역한 모압의 교만을 은유적으로 가리킨다. (렘48:24, 29) ‘그리욧과 보스라와 모압 땅 원근 모든 성에로다 모압의 뿔이 찍혔고 그 팔이 부러졌도다...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두 번째 부류는 ‘정녕히 이스라엘에 남은 자를 모으고’ 극심한 심판 중에도 다니엘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그루터기 같이 남겨 두신다. 남은 자들을 통해서 무너진 나라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 회복시키신다.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극심한 환란 중에서 ‘남은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출해내신다. 재난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재난 중에도 자신의 백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켜내신다.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모래위에 지은 집인지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② (13절)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 구원과 회복의 역사적인 장면을 기록한다. ‘길을 여는 자’는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세례요한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스룹바벨은 총독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출생’이란 뜻인데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로 유다 왕위 계승자였다(대상 3:17~19). 왕족으로 포로귀환과 성전재건을 이끈 스룹바벨은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왕)를 예표 한다.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심판과 멸망이 끝이 아니라 마침내 구원과 회복을 이루신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서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통해 절망이지만 끝이 아니다. 재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마침내 남은 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과 교회를 새롭게 회복시키길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와 재난 자체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은 과연 ‘반석 위에 지은 집’인지 ‘모래 위에 지은 집’인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지혜가 요구될 뿐이다.
“공동체의 명운은 리더십에 달려있다” 미가3장 1절~12절
1.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
① (1절)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 미가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또 하나의 원인을 고발한다. ‘두령들과 치리자들’은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지도자들 때문이었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청지기로서의 섭정이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지도자들에게 달려있다. 지도자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국가구성원 전체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지도자의 중요성은 모든 공동체에 해당된다. 어떤 ‘리더십’을 세우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명운이 결정된다.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을 선출 방식은 혈통에 의한 세습(봉건제)이나 다수결에 의한 선거(민주제) 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제비뽑기가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다.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결정권을 직접 묻는 유일무이한 방식인 까닭이다.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 것이 지도자를 세운 목적인데 그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했다. 백성을 선대해야할 지도자의 책무를 망각하고 백성에게 악행을 일삼았다. 모든 지도자들은 잠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② (2절~3절)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 도다”
▶ (메시지성경) ‘너희는 산채로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 너희는 그 뼈를 부수고 살을 썰어서 그릇에 던져 놓고 국을 끓여 먹는 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생명을 유린하고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창9:4~6)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형제이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레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신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피는 생명을 뜻하는 은유다.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③ (4절)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 타인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사명을 망각한 지도자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심’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죄악 가운데 행하도록 ‘내버려두심’이다. 더 이상 징계와 책망하지 않으시고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교만의 결과는 패망이다. 교만하게 내버려둬서 멸망을 자초해서 자업자득으로 자멸하게 하신다.
2.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
① (5절)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스라엘의 멸망의 또 다른 주범은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한 선지자들, 곧 길 잃은 목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다. (메시지성경) ‘내 백성을 속이는 설교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사례금을 두둑이 받고 배불리 대접받을 때면, 예언자들은 이렇게 설교한다. 인생은 아름답도다!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나 사례금을 받지 못하거나 인기를 끌지 못하면.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를!로 돌변 한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삯꾼목자다. 선지자는 종교지도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권력을 견제하는 사명을 맡은 ‘언론’에 해당한다. 위임받은 왕권을 견제해야할 예언자들이 오늘날 권력자들과 광고주들의 눈치를 보며 진실을 왜곡하는 ‘정언유착’을 일삼는 일명 기래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② (6절~7절)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였나니 이 선지자 위에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 하심이어니와”
▶ 어둠은 빛의 부재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진다. 선지자의 사명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은 존재다. ‘점치지 못하리라’ 빛을 잃은 선지자들은 더 이상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길 잃은 목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본래적인 사명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손가락질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마5:13~16)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교회는 세상에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본래적인 사명은 어두운 세상의 빛이며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 같은 역할이다.
③ (8절)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길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소신 있게 나갈 것을 선언한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예언자는 타락한 지도자들로 인해 어두워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둠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다. 이 천년 교회사 속에서 교회가 빛을 잃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사람들을 일으켜서 교회를 새롭게 하셨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그리스도(쯔빙글리)’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회복해야할 ‘프로테스탄트’정신이다. 존 웨슬리의 감리교회 운동은 18세기 타락한 영국성공회를 새롭게 하는 갱신운동이었다. "나는 감리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감리교가 종교의 형식만 남은 채 능력 없는, 죽은 교파가 되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감리교회는 존 웨슬리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3. 리더십과 팔로우십(Leadership & Followship)
① (9절~11절) “야곱의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한 정치 지도자들, 사리사욕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외침이다. 지도자들이 저지른 죄악의 실상을 거듭 강조한다. ‘뇌물을 위하여 재판, 삯을 위하여 교훈, 돈을 위하여 예언’했다.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 하냐,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이다.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언행불일치의 외식하는 신앙이다. 외식하는 신앙의 정체는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에 만천하에 드러난다.
② (12절)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 이스라엘이 몰락한 이유는 자명하다. ‘너희로 인하여’ 본분을 망각한 지도자들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추락을 가속화 시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원인은 타락한 지도자들의 문제다. 한국감리교회의 선교적인 침체의 근본 원흉은 ‘타락한 감독선거’다. 사실은 타락한 정치지도자, 길 잃은 제사장들, 거짓선지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주종하고 참된 예언자들의 소리에 청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무분별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예언자들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추앙하며 뒤따랐을까? 참된 선지자들을 박대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을까? 분별하지 못한 게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백성들도 그들과 똑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목회자의 수준을 넘지 못하듯이 동시에 목회자도 평신도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격언처럼 지도자가 백성들을 이끌지만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학습을 위해서 좋은 교사의 역량과 동일한 무게로 좋은 학생의 역량이 요구된다. 앞에서 이끄는 힘인 ‘리더십(Leadership)’ 만큼이나 뒤에서 따르고 세우는 힘인 ‘팔로우십(Followship)’이 중요한 까닭이다.
③ (롬13:1~3)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 지도자에 대한 탄핵요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로마서 13장은 결코 타락한 권력의 면피용 성구가 아니다. 도리어 준엄한 심판을 전하고 있다. '위에 있는 권세'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다"고 명시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위에 있는 권세'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이와 달리 교회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고,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있다. 그래서 교회의 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결정을 묻고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감리교회의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감독선거에서 ‘제비뽑기’를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 특히 감리교회의 선거의 문제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결정을 묻지 않고 사람의 머릿수에 의해 다수결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소송전과 끊임없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결정권을 돌려드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천국,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 미가4장 1절~13절
0. 메시아, 그리스도, 왕
① 미가서는 세 편의 설교다. 1장~3장까지 첫 번째 설교를 마치고 이제 4장부터 미가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된다. 두 번째 설교의 주제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다. 구약의 예언서들이 전하는 대망이다. 히브리어의 ‘메시아(Masiah)’는 헬라어로 ‘그리스도(Christos)’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뜻한다. 메시아왕국의 도래는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복음은 죽음이후에 아버지의 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ㅊ천국임을 믿으며(1930년 교리적 선언)’를 포함한다. 장차 들어갈 ‘천국에 대한 소망’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맛보고 삶에서 누리는 ‘경험하는 천국’이다. 임박한 종말론과 지연된 종말론의 양극단을 경계해야 하듯 내세만을 강조하는 피안주의와 세속적인 현세주의 사이에 균형 잡힌 신앙을 요구한다. 이상과 현실의 균형, 마지막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삶, 지상에서 천상에 속한 자로 사는 삶이다.
② (미1:3)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미가는 만물의 창조주,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간접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새롭게 전환될 것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통치방식은 택하신 선민에게 왕권을 위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귀한 은총을 저버리고 본분을 망각한 불의한 청지기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제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청지기의 권한을 박탈하시고 성전 안에서 밖으로 나오셔서 친히 세상을 다스리신다. 마침내 하나님의 조율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조율하시는 방법이 ‘전대미문의 재난’이다.
③ 미가는 이스라엘역사 속에서 벌어진 최대의 사건이었던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 예루살렘성전의 파괴’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과정(통과의례)이라고 명쾌하게 해석한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창조적 파괴’, 곧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무너뜨리신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적용하면 ‘생명, 건강, 물질 등’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청지기일 뿐이다. 영원하지 않고 끝나는 날이 있다. 청지기임을 자각하고 선용하지 않으면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는 준엄한 주님의 경고다. 미가의 예언은 이스라엘민족과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와 공간을 넘어 모든 나라와 공동체,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미가는 놀라운 대반전을 선포한다. 멸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메시아, 그리스도, 왕’이 오셔서 새 성전과 새 나라를 세우시고 친히 다스리신다는 비전이다.
1. 메시아왕국의 도래
① (1절)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 갈 것이라”
▶ ‘말일에’ 멸망 이후에 벌어질 메시아왕국의 도래에 대한 미가의 비전이다. 메시아왕국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다. 이스라엘나라와 유대민족을 넘어 온 세상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이다. (메시지성경) ‘그러나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나고 나면, 산 위에는 하나님이 성전이 설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전이다. 타락한 옛 성전이 철저하게 무너져야 거룩한 새 성전이 새워진다. 지금의 멸망은 장차 벌어질 구원, 즉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다. 새롭게 지어지는 ‘여호와의 전’ 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킨다. (요2:20)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니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② (2절)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메시지성경) ‘사람들이 그리로 흘러들고, 많은 민족들이 그리고 향하며 말할 것이다. 가자, 하나님의 산에 오르자 야곱의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자, 그분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배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의 ‘민족종교’에서 예수그리스도(메시아)를 통해 온 인류를 위한 ‘세계종교’로 확장될 것을 예언한다.(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독교인들만을 구원이 아니다. 온 인류가 평화와 공존으로 사는 생명의 길, 온 세상을 위한 구원임을 증거 한다. 본래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을 세워 ‘축복의 본보기’(정면교사)로 선택하셨는데 솔로몬 이후 자행된 우상숭배로 인해 ‘저주의 본보기’(반면교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바나 초원에 수많은 동물들이 물가로 몰려들 듯 생명력이 있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찾아 몰려들기 마련이다. 문제는 ‘생명력’이다. 한국교회가 거룩하게 변화되어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때 모든 나라와 열방들이 다시 주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가 생명력의 원천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입술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정작 삶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왕)로 섬기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통치의 실현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왕 노릇 하던 우상들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척결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 다’고 하는데 성경도, 기독교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사는 종교다. ‘죽어야 산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죽음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2. 천국, 하나님의 통치
① (3절)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 메시아왕국은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Kingdom of God)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영생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삶에서 누리는 천국까지 포함한다. 세상의 왕들이 통치하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새 세상의 비전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은 물질과 폭력에 의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에 의한 평화와 공존의 세상이다. <1930년 한국감리교회 교리적 선언>에 잘 드러난다.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 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② (4절)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직 예수님만을 ‘그리스도(메시아, 왕)’로 모시는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 이전에 상황과 형편을 따라 살던 삶에서 이제는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소유에서 향유로, 탐욕에서 자족으로, 수탈과 착취에서 나눔과 섬김으로의 삶의 전환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주기도문)’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과 평화, 정의와 공평을 구현하는 삶이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새찬송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동행은 준행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뜻대로 사는 삶이다.
③ (5절)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 ‘빙자하다’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누구 ‘덕분에(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을 의지하며 산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린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힘과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산다.
3. 하나님 나라의 백성
① (6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 하나님 나라의 백성, 새 나라의 동량은 세상 나라의 관료를 선정하는 기준과 다르다. 총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저는 자, 쫓겨난 자’다. 상처받고 집을 잃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새 나라의 주인공을 삼으신다. 특히 ‘내가 환난을 받게 한 자를 모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삶에서 체득한 사람들이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② (7절)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소수정예로 줄이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임을 온전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삿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쫓은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③ (8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 (메시지성경) ‘그리고 너, 예루살렘 주위를 배회하며 초라한 판자촌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너는, 네 과거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딸이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다’ 딸은 사회적인 약자를 가리키는 은유다. 망대와 산은 높은 곳에 위치한 광고판 같은 본보기를 의미한다. 돌이켜 회개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 뉘우친 자들을 다시 회복시키셔서 구원의 본보기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다.
4.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까지(최후승리를 얻기까지)
① (9절~10절) “이제 내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하느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 미가의 ‘말일에’ 관한 예언은 다시 역사적인 현실로 돌아온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한 멸망과 예루살렘성전의 파괴에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새롭게 하시기 위한 구원의 과정일 뿐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면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재난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환란은 ‘해산을 위한 고통’일 따름이다. 해산의 고통을 감수하면 마침내 출산의 기쁨이 찾아 올 것을 약속하신다.
② (11절~12절)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쳐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 (메시지성경)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떼를 지어 너를 치고 있다. 이방 민족들이 말하기를, “그녀가 쓰러지면 발로 걷어차라! 그녀를 짓밟아라! 시온이 땅바닥에 기는 꼴을 보고 싶다”한다. 저 신성모독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분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고, 그분의 밀을 타작 중이시며, 그분의 금을 정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을 모른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비난과 급격한 추락은 ‘기독교의 종말’의 전조현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한국교회를 불순물을 재련해서 정금 같게 하시는 연단의 과정이다.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중이다. 환란이 찾아오면 ‘무엇을 의지하는지 무엇을 믿고 사는지’ 중심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모래 위에 지은 화려한 집은 무너지고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은 진짜 믿음, 진짜 교회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③ (13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 (메시지성경) ‘딸 시온아, 발로 서라! 타작을 받아 쭉정이를 털어 버리고, 정련을 받아 불순물을 빼어 버려라. 나는 지금 너를 아무도 범할 수 없는 민족으로, 사악한 민족들을 쳐부수는 하나님의 불전차로 다시 만드는 중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무나 그냥 쓰시는 법이 없다. 새롭게 고쳐 쓰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치시는 매를 아프지만 달게 맞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쳐서 온전케 하시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물질을 섬기던 삶에서 물질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한다.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것을 단언한다. 마침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의 회복이다. 인생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날에’ 모든 사람이 비로소 알게 되고 확실히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날에’ 깨달으면 너무 늦는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사는 것이 지혜다. 그래야 날마다 은혜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왕의 귀환” 미가5장 1절~15절
1. 고난 받는 여인
① (1절)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빰을 치리로다”
▶ 미가의 두 번째 설교의 주제는 ‘메시아왕국의 도래’(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통치)다.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찌어다’ 미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남은 자’의 정체를 가리켜 ‘딸 군대’라고 지칭한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원제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으로 고통 받는 우리민족을 ‘고난 받는 여인’에 비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딸 시온, 딸 군대’는 단순한 성별의 구분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약한 자)’를 가리킨다. 강대국의 침략에 짓밟히던 약소국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묘사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마른 뼈가 강한 군대’로 일어난 것처럼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대반전을 증거 한다. 이어서 미가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과정으로써 ‘고난을 통한 연단’을 예고한다.
②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빰을 치리로다’
▶ ‘에워싼 막대기’는 앗수르와 바벨론 등과 같이 이스라엘을 침탈했던 고대열강들을 통칭한다. 그들이 칼과 창으로 약속의 땅을 짓밟고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마치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빰을 후려친 것과 같은 오만방자한 행위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잠시 허용하신 징계의 도구이며 이스라엘을 정금같이 새롭게 하시기 위한 ’막대기‘일 뿐이다. 따라서 삶에서 만나는 위기와 재난, 막대기를 두려워할 게 아니라 막대기를 들고 계신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재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더 크신 ‘섭리’를 발견해야 한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 (롬5:3)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뜻으로 읽는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나무가 흔들려서 뿌리가 깊어지듯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데서만 깊어진다!’고 역설한다. 오랜 인내와 기다림으로 더 간절해지고, 그 속에 담긴 뜻이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난은 장차 받게 될 승리의 영광으로 나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신다. ‘오늘’ 눈물로 씨를 뿌리는 수고를 감당해야 비로소 ‘내일’ 기쁨으로 단을 거두며 돌아오게 된다. 고난과 절망의 십자가를 지나야 비로소 영광과 승리가 넘치는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고난의 신비’다. 참된 신앙은 고난이 없는 만사형통이 아니라 고난 속에 감춰진 보배를 발견하는 지혜다. (롬8:18)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도 없다. 진정한 회개 없이 단 한 치도 새로워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
①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네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미가서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다. (마2:4~6)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미가의 예언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실 메시아, 왕의 귀환이다. 이스라엘을 이끄실 선한 목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선언한다. ‘베들레헴’은 ‘떡집’이고 ‘에브라다’는 ‘열매’다. 생명의 양식되신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오심을 의미한다. ‘작지 아니 하도다’ 그리스도는 대도시인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시골 베들레헴에 나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자를 들어서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나실 왕,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비하신 분임을 증거 한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본체(빌2:6)’시다. ‘독생자(獨生子, the One and Only)’는 단순히 외아들로 번역할게 아니라 헬라어 ‘모노-게누스(하나의 염색체, 동일한 유전자, 동일본질, ὁμοούσιος)’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아버지를 완벽하게 빼닮으신 ‘참 아들’이란 뜻이다. 아들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을 보는 것과 똑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완전하게’ 삶으로 구현해 내셨다.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가 전하는 신앙고백의 요체다.
② (3절~4절)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 미가는 오랜 포로기를 지나 약 700년 후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될 것을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비로소 열릴 것을 예언한다. 역사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이후, 세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主前,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주님 이후(主後, Anno Domini 그리스도 원년)’로 구분된다. ‘A.D’와 ‘B.C’는 단순한 시대구분이 아니다. 고대열강들, 폭력과 물질이 왕 노릇하던 세상이 끝장나고, 사랑과 평화가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 세상의 시작을 선포한다. 미가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힘과 권력으로 통치하던 폭력과 야만의 시대가 끝나고, 마침내 은혜와 사랑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성될 것을 선포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미가의 그리스도 예언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 미가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주인공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다.
③ (5절~6절)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 그리스도(메시아)는 ‘평화의 왕’이다. 왕에게 부여된 최고의 책무는 적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평화의 수호자다.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사람을 친히 일으키셔서 지키고 보호하신다. ‘일곱 목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엘리야, 사무엘과 다윗 같은 모든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여덟 군왕’은 ‘일곱 목자’에 추가된 하나님의 플러스알파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선발된 이방인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포로귀환을 명했던 바사 왕 고레스(Cyrus)다. (사44:28~45:2)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 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이사야의 말대로 고레스는 하나님이 지명하고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다. 고레스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왕중왕(王中王)’이라 칭송받던 고레스를 통해 포로 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만왕의 왕(the King of Kings)’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완수하실 것을 예언한다.
3. 그리스도인의 정체-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에 속한 자로 사는 삶
① (7절~9절)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 ‘야곱의 남은 자’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루터기처럼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니리’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역군으로 사용하신다. ‘야곱의 남은 자’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다수결로 선출되는 지도자가 아니다.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이나 단비처럼’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시고 준비시켜 세우신다.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남은 자를 짐승의 왕 사자 같이 용맹스럽게 하신다.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② (10절~1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 ‘그 날에 이르러는’ 메시아, 그리스도, 왕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언약이 성취되는 날이다. 그날에 ‘말과 병거(전차), 성읍과 성’을 무너뜨리신다. 강력한 전차와 견고한 성들은 사람들이 의지하던 대상을 통칭한다. 새 예배당 건축하려면 먼저 낡은 옛 건물을 철거해야 하듯 사람과 물질, 힘과 기술처럼 이전에 내가 의지하던 것들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야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③ (12절~15절)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너의 중에서 빼어 버리고 너의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내가 또 진노와 분한으로 청종치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 우상은 ‘거짓신화’다. 우상의 정체는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 노릇하는 ‘가짜 하나님’이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 진짜 왕이 귀환할 때 왕 노릇하던 가짜들은 사라진다. ‘네가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 섬기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헛된 교만(권력욕), 헛된 자랑(명예욕), 헛된 영광은 무너져 내린다. 선지자 미가의 ‘메시아왕국의 도래(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언은,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내 삶의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었고, 이 땅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고 ‘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미가, 하나님의 재판정에 소송을 걸다!” 미가6장 1절~8절
1. 하나님의 재판정
① (1~2)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미가의 세 번째 설교는 마치 법정에서 벌이는 소송처럼 쟁변과 변론을 통해 심판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재판관은 하나님이시다. 죄를 고발하는 원고는 ‘미가’이며 죄를 지은 피고는 ‘이스라엘’이다.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은 재판정의 방청객을 가리킨다. 단순한 방청객이 아니라 마치 판결에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여호와께서 쟁변하시고 변론하시는’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는 것은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에게까지 판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그릇된 전철을 밟지 않고 이제라도 돌이켜 회개하길 원하시는 까닭이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금은 배심원이지만 언젠간 우리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 서게 된다. 사람의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의 판단은 변하고 부정확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한결같고 다림줄처럼 정확하다.
② (3절~4절)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항변은 하나님의 탄식이다. 출애굽사건의 기억을 소환하신다. 출애굽은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속량이다. 속량(贖良, redemption)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신 구속의 은혜’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류를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신 대속의 은혜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원망하고 거역했으며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해서 타락시켰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앞세워 반역을 꾀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배은망덕과 물에서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의 적반하장을 일삼았다. 긍휼 베푸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③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 ‘모압왕 발락이 꾀한 것’은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을 훼방하기 위해 발람에게 저주를 요청했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대적자다. 민수기 22장~24장을 살펴보면 ‘브올의 아들 발람의 답변’은 한마디로 그들의 저주와 방해가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사술로 막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핵심은, 이 사실을 이방인 적대자 발락과 거짓선지자 발람은 알았는데 정작 이스라엘백성들은 몰랐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거라사의 군대귀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 알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다.
▶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 싯딤은 요단강 동편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머문 곳이고 길갈은 요단강 서편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 초입이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은 요단강도하의 기적(수3장~4장)을 가리킨다.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이스라엘백성들과 이방족속들이 ‘다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요단강도하 직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은 길갈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다시 할례’를 행했다. (수5:9)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는 몸의 중심이 부서지고 쪼개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그 은혜’와 ‘그 언약’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미가는 이스라엘의 죄악, 곧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단 한마디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가는 국가나 교회, 가정이나 개인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모든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2. 참된 예배의 조건(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① (6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 ‘예배’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예배의 문제였다. 예배의 본질은 ‘경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일이다. ‘일 년 된 송아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경배는 없었다. 자기부인의 예배가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했고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외식하는 신앙생활로 변질됐다.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자기자랑으로, 감사로 드리는 예물을 의무감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섬김을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으로 드렸다. 이스라엘 예배의 문제는 신앙의 형식은 유지했지만 신앙의 본질(정신)은 잃어버렸다.
② (7절)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가? (시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기뻐하시고 원하신다. (삼상15:21~23)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신 까닭은 잘못된 예배 때문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예배자들이 사울 왕과 같은 오류를 범한다.
▶ ‘내 허물을 위하여 맏아들을’ 가나안의 우상 몰록숭배에서 행해지던 인신공양(人身供養)을 가리킨다. 자기를 희생에서 타인을 살리는 ‘자기희생’과 정반대의 경우다. 자신이 지는 죄는 자기 자신이 죄 값을 치러야지 어찌 자신의 허물을 맏아들에게 전가시킨다는 말인가! 타인이나 약자를 희생양 삼으면 안 되고 내가 저지른 죄 값은 내가 치르는 것이 마땅하다. 미가는 이기적인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불의한 신앙행태를 고발한다.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내 몸의 열매로 내 영혼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주의 공로(은혜와 긍휼)로 용서받는 것이지 나의 공로(공덕)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이 아니라 ‘타력구원’의 종교다. 구원을 나의 열심이나 헌신, 나의 수고와 공적에 의해 스스로 쟁취하는 것으로 여기는 ‘공로주의’를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숭배 하듯 세속적인 방식으로 섬기는 그릇된 신앙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
①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메시지성경) ‘아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말씀해 주셨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간단하다.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면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다. 신앙의 형식을 준수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의 생활화를 요구하신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 가지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첫째 ‘오직 공의를 행하며’ 공의는 단순히 사회정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삶의 우선순위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웃 사랑이다. 끝으로 셋째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은 신앙의 가장 높은 차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준행’이다. 한마디로 ‘동행’은 ‘준행’이다. 준행은 ‘순종’이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높고 더 좋은 것을 알면 순종하게 된다. 겸손하면 순종하지만 교만하면 절대 순종이 안 된다. 살인, 도적질만 죄가 아니라 내 뜻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죄’의 본질이다. 이와 달리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말씀과 성령에 이끌려 사는 것이 ‘의’다.(죄인 VS 의인)
▶ 성경이 전하는 삶의 원리는 아주 심플하다. ‘욕심-죄(인)-사망’ VS ‘말씀-의(인)-생명’이다. 미가는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이스라엘이 욕심에 이끌려 죄로 인해 결국 ‘사망(멸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남 얘기할게 아니라, 미가는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지금은 ‘배심원’의 자리에 있지만 나중에는 ‘피고’의 자리에 서게 될 우리들에게, 무엇에 이끌려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보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속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형선고 받은 이스라엘이 살길은?” 미가6장9절~16절
1. 두 가지 죄악
① (9절)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 미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대’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최종판결을 ‘선고(언도)’한다. (* 선고(宣告)-재판정에서 재판장이 판결을 공포하는 행위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기며 판결문 원본을 낭독하고 판결사유에 대한 요지를 설명)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듯이 이스라엘의 죄목을 두 가지로 열거한다.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죄악은 ‘경외(존중)’해야 할 하나님을 ‘멸시(무시)’한 것이다. 요즘말로 바꾸면 하나님을 깔보고 우습게 여겼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경외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의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데 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지켜야할 마땅한 도리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Free Will, 自由意志)’는, 최고의 사랑과 존중이기에 그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한다. (삼상2:31)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사랑과 존중으로 자발성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시는 이유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실낙원’과 일맥상통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전10: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가 전하는 균형 잡힌 인생의 지혜다. (고전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자유롭게 방종하기보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지혜다.
② (10절~12절)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 하도다”
▶ 첫 번째 죄목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이어지는 두 번째 죄목은 이웃과의 관계다. (메시지성경) ‘너희는 내가, 속이고 빼앗아 부자가 된 너희를 그냥 좌시하리라고 생각했느냐?’ 가증한 ‘에바’(바구니라는 뜻의 곡물을 측정하는 단위), ‘부정한 저울과 거짓 저울추’ 오경과 예언서에 누누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바다. ‘부자들의 강포’는 기득권으로 횡포를 저지르는 ‘갑질’이다. 더불어 간사한 속임수로 이웃을 속이는 거짓과 험담이다. 주목할 점은 심판의 기준이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경제생활’에 주목하신다. 물질이 신앙의 척도인 까닭이다. (마6:21)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살피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눅16:10~1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전하는 바 ‘보이는 물질’에도 불의한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리 만무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격언대로 ‘온전하고 의로운 제사’가 아니라 ‘눈먼 것 저는 것’을 드린다. 내 손에 든 물질이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하나님의 은혜냐, 나 자신의 공로냐!’ 만일 주의 은혜라고 여겼다면 주께 감사하며 기꺼이 선용했겠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덕이라 여겨 과시하고 악착같이 축적했다.
2. 하나님의 처벌
① (13절~14절)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중히 상하게 하였으며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 (메시지성경) ‘마지막 한 푼까지, 너희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배고프고 허기지고, 마음도 허기질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내세울 것 하나 없게 될 것이다. 삶도 파산하고 영혼도 황폐해지리라’ 마치 아담이 범죄 함으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죄로 인해 삶에 내려지는 무서운 형벌이다. 지옥의 별칭인 ‘무저갱無低坑, Abyss)’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한다. 탐욕에 는 만족이 없고 만족이 없기에 행복할 수 없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좀비와 드라큘라처럼 갈증과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 대표적인 거짓신화다. 광야에서 내린 ‘만나’는 ‘필요를 구하는 삶’의 방식을 증거 한다. 쌓아두면 벌레가 나고 썩어버리는 만나처럼 ‘필요이상의 것’을 구하고 축적하면 반드시 부패한다. 프랑스격언대로 ‘집을 두 채 가진 자 이성을 잃고 두 여인을 가진 자 영혼을 잃는다.’ 그래서 ‘과잉’은 축복이 아닌 저주다. ‘필요이상의 것’을 주시는 이유는 나눔과 섬김으로 선용하는 데 있다. 날마다 감사로 넘치는 삶의 비결이 필요를 추구하는 ‘아굴의 기도’다. (잠30:8~9)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나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그렇치 않으면 내가 배가 불러서 주를 저버리고 여호와가 누구냐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가난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하여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③ (15절)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진실을 체험학습을 통해 몸으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에 있다. (말2: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시대는 십일조를 안 드린 게 아니다. 문제는 ‘눈먼 것, 저는 것’으로 드린 것이다. 말라기의 핵심 메시지는 ‘온전한 십일조’다. ‘온전한’에 초점이 있다. ‘십일조’의 형식을 넘어 ‘온전한’이란 단어 속에 담겨진 정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이 아니라 도리어 독이 된다.
3. 여로보암의 죽는 길’ VS 다윗의 살길
① (16절)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는 나로 너희를 황무케 하며 그 거민으로 사람의 치솟 거리를 만들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오므리는 사마리아에 도읍을 세운 왕이고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이다. 오므리와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왕가를 대표한다. (왕상16:25~26)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왕상16: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오므리와 아합의 공통점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함의 길’로 행했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왕들의 행보는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로 구분된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이와 달리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여로보암의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왕상13:25~33’에 기록된 대로 금송아지우상으로 하나님을 대신했고, 자기 멋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했다. 중요한 점은 여로보암은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라 잘못 드린 것이고, 하나님을 안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사실이다. 왕이라고 모두 똑같은 왕이 아니다. 지도자라고 모두 똑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거룩한 직분을 맡았다고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앞에 서 있다고 모두 선배가 아니다. 정면교사와 반면교사를 구별하는 ‘분별력’이 요구되는 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축복의 본보기 다윗이 아니라 저주의 본보기 여로보암을 좇았다.
▶ 미가는 피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을 이스라엘에 선고한다.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법정최고형인 ‘사형선고’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멸망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신다. 그 구원의 비전이 메시아(그리스도)왕국의 도래 곧 하나님의 통치다.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이들에게도 ‘살길’을 열어주셨다. 다윗의 자손, 예수를 ‘그리스도(왕)’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다. 미가서가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기독, 그리스도, 메시아)이다. (요1: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람에 대한 절망, 하나님을 향한 희망” 미가7장 1절~7절
1. 미가의 절망
① (1절)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 ‘재앙이로다, 나여’ 미가의 깊은 절망이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선포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와 같은 절망이다. 나라가 멸망하는데 미가가 이토록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와 교회, 가정은 운명공동체다. 공동체의 멸망은 개인의 멸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열매를 다 거둔 앙상한 나무 가지’는 더 이상 아무 희망도 남지 않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형편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석과불식(碩果不食)’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한 씨앗조차 사라져 버린 현실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과실나무에 달린 가장 큰 과일을 따먹지 않고 두어 다시 종자로 쓴다는 뜻인데 아무리 궁색해도 남겨두어야 할 소중한 것을 의미하는데 내일에 대한 희망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일컫는다. 미가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이유를 계속해서 기록한다.
② (2절~3절)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 (메시지성경) ‘반듯한 사람,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씨가 말랐다’ (롬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도 바울이 시편14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시대나 진리다. ‘군장과 재판자’는 관료와 법관 같은 고위공직자들이다. 그들은 위임받은 권력으로 뇌물을 받고 부정축제를 일삼았다. ‘대인’은 기업가와 학자 같은 사회의 지도층들이다. 그들도 힘을 모아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사람들이 추앙하고 세운 지도자(정치인, 종교인)들은 의지할 대상(그리스도, 메시아)이 아니라는 뜻이다. 새 대통령을 뽑는 다고 나라가 새로워지거나 새 감독(회장)을 선출했다고 감리교회가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미가의 절망은 사람에 대한 깊은 절망이다. 역설적으로 사람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출발점이 된다. “희망은 헛된 희망을 버리는 것, 희망은 거짓 희망에 맞서는 것,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눈물어린 저항이 희망의 시작이다” (박노해의 ‘거짓희망’ 중에서)
③ (4절) “그들의 가장 선한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이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 (메시지성경) ‘가장 좋다는 것이 엉겅퀴다. 가장 낫다는 것이 잡초들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 시험 기간이 왔다. 망신을 당하고 꽁무니를 빼는 저 꼴을 보아라!’ 의인을 자처하고 지도자로 위세를 떨치던 이들의 악행은 그 정체가 드러나고 반드시 끝나는 날이 온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이라는 말처럼 붉고 화려한 꽃도 언젠간 시들듯이 제 아무리 큰 권세도 영원할 순 없다. 악한 자들의 종말은 새 희망의 시작이다. 타락한 홈니와 비느하스의 시대가 끝나야 신실한 사무엘의 새 시대가 열리고 타락한 옛 성전이 무너져야 거룩한 새 성전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2.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① (5절~6절)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찌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이리로다”
▶ 얼핏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속세의 인연을 끊거나 불효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그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야 하는 ‘제자도’를 증거 한다.
(수24:14~15)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을 요구한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떠나갈 찌라도 ‘너는’ 주님만 따라 살라는 말씀이다.
② (눅12:51~53) ‘네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왔다는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도 미가의 예언과 동일하다. 인간적인 분쟁이 아니라 영적인 분쟁,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분쟁을 가리킨다. ‘형벌의 날’은 위기의 순간이다. 곧 마지막 때를 사는 삶의 자세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안 된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더 이상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기에 사람에게 희망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위기의 순간은 무엇을 의지하는 지 중심이 드러나는 선택의 순간이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다수결이 옳은 길이 아니라 옳은 것이 옳은 길이다. 사람들의 머릿수를 좇아서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혼자 가더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가야 한다.
③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이 말씀의 핵심은 ‘말세’가 아니라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데 있다. 말세(위기의 순간)에 벌어지는 세상풍조를 좇아 살지 말고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뜻이다. 죽은 물고기처럼 시류에 편승해서 살지 말고 물결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해서 살라는 것이다. 가족이나 지인, 선배나 동료, 전통이나 관습, 여론이나 다수결을 좇아 상황 따라 형편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비타협적인 삶의 방식을 전한다.
3. 절망 중에 희망, 예수 그리스도
① (7절)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 이스라엘나라의 멸망은 법정최고형인 ‘사형선고’와 같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살리시고 회복시키신다. 미가는 ‘절망 중에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찾는다. 미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메시아(그리스도)왕국의 도래, 곧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사건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다시 사는 유일한 구원의 길도 이와 동일하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미가서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이고 동시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그리스도교) 복음의 진수(眞髓)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실한 것이다. 다른 것(사람)이 ‘그리스도(메시아)’ 행세를 하며 ‘헛된 희망’을 선전한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거짓 희망’을 버리고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왕)’로 믿고 따르는 데 달려있다. 그 외에 다른 살길은 없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근거” 미가7장 7절~20절
1. 절망을 이기는 힘, 부활신앙
① (7절)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 7장은 미가의 깊은 절망으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희망으로 끝마친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개인의 죽음에 해당되는 절망이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곧 ‘욕심에서 죄로, 죄에서 사망으로’ 귀결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미가의 절망은 희망으로 전환된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사도요한의 바라본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의 비전이다. 믿음은 시선(안목)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라는 시구처럼 나의 노력과 수고가 끝장나는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자각할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시작된다. 그래서 절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출발점이다.
② (8절)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 믿음의 길은 만사형통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도 넘어지고 깊은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엎드러지고 절망 가운데 빠져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키신다.
(시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다윗의 체험적인 고백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절망 중에도 소망을 품고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간다. 부활신앙의 메시지는 절망을 이기는 힘,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희망’이다.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일상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 가운데서도 일상을 빼앗기지 않고 삶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다.
③ (9절)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나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 ‘내가 범죄하였으나’ 죄를 자백하는 회개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된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심판이 끝이 아니고 신원하신다. 징계의 목적은 온전케 하시기 위함이다. (히12:6~13)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욥을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시킨 것은 ‘고난’이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징계와 고난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고 마침내 그의 의를 보게 하시는’ 연단과 성숙의 과정이다. 환난 중에 이 사실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부활신앙’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죽음 같은 절망 중에 있는 ‘나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기꺼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힘’이 부활신앙이다.
2. 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나님
① (10절~11절)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여)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 (메시지성경) ‘내 원수도 그것을 깨달아, 망신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 너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있느냐? 고 나를 놀려대던 원수가, 시궁창에 쳐 박혀 뒹구는 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참된 믿음은 덮어놓고 믿는 맹신이 아니다. 체험을 통한 생생한 신앙고백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여자’는 엘리야를 핍박하던 대적 이세벨을 가리킨다.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과 여호와 가운데 누가 진짜 하나님이신지 쌓아 놓은 번제물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만천하에 드러난 것처럼 판가름 날 것을 선언한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무너진 성전이 재건되는 영광과 승리의 날이다. 이 땅에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가름 나는 날, 하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손을 들어주신다.
② (12절~13절)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 대적들뿐만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다 알게 될 것을 예고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스라엘은 회복되겠지만 이와 반대로 ‘그 땅은’ 땅과 사람, 물질과 환경을 더 의지했던 이들은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엇갈린 운명이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이 비극적인 삶이 아니라 끝이 아름다운 인생, 최후의 웃는 얼굴이 되어야 한다.
3. 미가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① (14절~15절)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산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 미가의 기도다.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로 엘리아를 먹이신 것처럼, 갈멜산 제단에 불을 내려서 누가 참신인지 나타내신 것처럼 다시 구원의 역사가 재현되기를 간구한다. 미가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 같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누가 진짜 하나님이신지 나타내시는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다.
② (16절~17절)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 하나님은 교만한 입술을 미워하시고 말대로 심판하신다. (마12:36~37)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니라’ 심판의 기준이 말이다. 위기의 순간에 말로 우리의 중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말로 드러난다. (삼상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자나 깨나 말조심해야할 이유다. 대적 사단은 사람을 통해 말로 역사한다. 신앙의 성숙은 말의 변화다. 오만한 말을 하던 자들을 뱀이나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비천한 존재로 낮추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대적하던 자들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을 선포한다.
③ (18절~20절)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하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하나님은 누구신가?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인애(은혜)’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단, 회개치 않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긍휼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반드시 죄를 드러나게 하셔서 회개케 하신다. 그러나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기억조차 않으신다. 죄를 자백하면 기억하지 않으신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셔서 마침내 인애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증거 한다.
▶ (20절)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야곱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라’ 인애(仁愛)는 히브리어 ‘헤세드’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 인애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바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은혜’였다. 멸망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인애’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은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다. 극심한 절망 가운데 있는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알량한 대책이나 인간적인 수단이 아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 외에 다른 살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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