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 5일 첫 직장에 출근한 날이다. 꼽아보니 35년이나 된다. 참 오랜 기간이다. 첫 직장인 대전시 중구 목동 목원대학 입구 하숙방에 짐을 풀었을 때 작은 트렁크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게 시작한 살림살이가 작년 3월 부천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18평 아파트에 가득했다. 혼자 사는 살림살이지만 혼자 사는 살림이나 둘이 사는 살림이나 살림살이란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은 내 경우는 책과 그릇과 옷이 좀 많았다.
책은 이미 수년 전에 5천 권 정도를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지만, 이후로도 책이 많이 늘었다. 책 산 돈으로 집을 샀으면 30평 아파트 몇 채는 샀을 것이다. 다음이 그릇이다. 한때, 나는 도자기 만드는 취미를 가졌었다. 작은 전기 가마도 있어 직접 굽기도 했고 일 년에 한두 차례 판매도 했다. 그리고 예쁜 찻잔이나 도자기를 보면 처음에는 그냥 달라고 애교를 부리다가 거절당하면 저렴한 가격으로도 구매도 했다.
마지막이 옷이다. 난 옷을 잘 입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비싼 고가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깨끗하게 입고 격식이나 장소에 맞게 잘 갖춰 입는 편이다. 한때는 개량한복에 넋이 나가 줄기차게 한복을 사들여서 입은 적도 있다. 개량한복을 입게 된 개기는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나는 체격이 작아 기성복 입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인사동에서 우연히 개량한복을 입어봤는데 작은 체구에도 맞는 옷이 있었고 다소 작고 마른 체형의 내 몸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었다. 그래서 개량한복을 입기 시작했고 직접 입어보니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많은 책과 그릇들 그리고 옷까지, 이것만으로도 내 살림살이는 혼자 사는 사람치고는 양이 많았다. 거기다 각종 인형과 옷과 함께 따라다니는 모자 신발 벨트 머플러 가방까지 멋 내기에 들어가는 소품들의 양도 장난 아니게 많았다.
올 3월, 다시 서울로 이사하기로 하고많은 고민을 했다. 종로 한옥으로는 이사를 할 상황은 못 되었고 작은 아파트라도 집값은 생각보다 비싸고, 그러다 관심을 둔 곳이 원룸이었다. 그렇게 원룸으로 이사하기로 하고 몇 곳을 돌아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 원룸이란 곳이 생각보다 편리해 보였다. 달랑 몸만 와도 살 수 있게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전자제품을 물론 침대며 책상 하다못해 텔레비전과 컴퓨터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편한 것은 전기나 수도, 인터넷 등, 내가 새로 신고하고 관리받아야 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가진 많은 살림살이였지만 더는 고민하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 버려야 하는 것들인데 이젠 살림살이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었다. 각종 전자제품은 중고품 전문 매장에 팔고 가구는 옆집과 이웃집 할머니들께 드렸고 책은 주민센터에 기증하고 옷은 재활용 의류 전문매장에 무료로 드렸다. 나머지 그릇들과 자질구레한 용품들은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드렸다.
18평 아파트, 방 두 곳과 거실. 베란다에 가득한 살림살이를 채 열 평도 안 되는 원룸에 맞게 다 정리했다. 원룸이라곤 하지만 작은 옷 방도 따로 있고 복층으로 되어 잠자리도 따로 있고,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다소 힘들었던 것은 내가 사용하던 내 물건이 아니라 내게 맞게 새로 초기화하고 청소하고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집이 줄고 이삿짐이 줄어드니 가장 먼저 청소 시간이 줄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나는 청소와 정리 정돈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도 받았었다. 다음은 공간이 줄어드니 마구 사들이던 물건 사기가 줄어들었다. 무엇을 새로 사들일 때도 그 물건을 둘 공간과 그 물건의 마지막 폐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더러 ‘그 물건을 왜 버렸지, 지금 딱 필요한데’ 이럴 때도 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작은 집, 작은 살림살이에 익숙해지고 적응해가는 모양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좁은 집에 살면서 새로 생긴 좋은 습관들도 있다. 수십 년 동안 몸에 길들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난 여전히 서점을 자주 가고 서점에 가면 책을 안사고는 못 견딘다. 하지만 예전처럼 읽은 책이 아까워 신줏단지 모시든 책장에 꽃아 두지는 않는다. 읽고 난 책은 몇 권씩 동네 작은 도서관이나 지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가격이 비싸거나 참고용 도서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신간이나 희귀서적은 도서관에서 사 나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다음은 옷이다. 봄. 여름. 가을 옷은 중저가 사표의 의류를 사고 한 계절 입고는 버린다. 나는 일본 수입의류도 입는데 일본 수입의류를 입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에서다, 일본 남성들이 좀 작아서인지 우리나라 의류에서는 없는 작은 치수의 옷이 있기 때문이다. 새 옷 사서 수선해서 입었는데 수선하지 않고도 내 몸에 맞는 옷이 있으니 편리하다. 겨울용 의류나 침구류는 장기 보관이 가능한 세탁소를 이용하고 압축이 가능한 용기에 넣어 숨겨진 자투리 공간에 보관한다.
대형 냉장고를 사용할 때는 무조건 눈에 띄면 사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상해서 버린 음식물이 많았는데 냉장고가 작아지니 먹거리 구매도 줄어들었다.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소형 포장만 사게 된다. 이러다 보니 상해서 버리는 음식이나 재료들도 없어졌다. 당연히 신선한 채소나 과일만 먹게 되고.
부끄러운 과거지만 나는 과일이나 채소를 사면 늘 흠집이 있거나 상한 것들부터 먹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버리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상한 것을 먹는 사이에 싱싱한 것들도 서서히 시들어가고 결국 나는 새것 사서 늘 시들고 상한 것들만 먹고살았다 미련하게도. 이젠 상한 것이 보여도 싱싱하고 좋은 것부터 먹는다. 어차피 상한 것은 다시 싱싱해지지 않으니까.
가톨릭 수도자나 불교의 승려들은 거처를 옮길 때 작은 가방 하나만 챙겨야 한다. 아무리 개인 돈으로 구입한 물건이라도 그곳을 떠날 때는 있던 곳에 두고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수도자가 챙겨야 할 짐이 많다는 것은 많은 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가진 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어찌 영혼이 자유롭기를 바라겠는가.
첫댓글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지금은 부천의 18평 아파트에서 삽니다. 장농. 쇼파. 침대 등 가구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삽니다. 남들이 보면 초라하고 불편해 보이겠지만 충분히 넉넉하고 편안합니다. 가장 비싼 물건은 작년에 들인 에어컨입니다. 지금까지 선풍기로 살았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홀라당 벗으니 시원하고 씻으니 시원하고....속옷만 입으니 시원하고.....에어컨이 없었는데. 가끔 방문하는 형제들을 위해 하나 샀습니다. 컴퓨터 하나. 전자 피아노 하나. 작은 텔레비젼 하나...제가 가진 짐의 전부입니다. 가볍게 사니......가벼워서 좋습니다.
심플 라이프, 간소한 생활......좋습니다
집착을 버리면 다 가벼워져서 자유로울듯하네요
그런데, 읽다가^^ 인형도 좋아하시나봐요, 옷 그따라 모자 벨트 신발
도자기 그릇도...
작가님 취향을 존중합니다
인형도 다 버렸어요. 곰돌이들. ㅋ
@[수길] 윤강 반려동물 유긴디유.. ㅎ
마음도 비우면 더 편안해진다고...ㅎㅎ
작가님의 심플 라이프 응원합니다. ^^
언제 통영서뵈요
버리느라 수고하셨습니다 ㅎ
제 마음도 따라 홀가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안고 살아도 좋지만 버리면서 살아도 역시 좋더군요..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생각납니다. 버린다는게 참 힘든데 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마도 학술서적인 듯 하지만, 서적이 대단히 많았군요. 그 정도면 보존하시기도 쉽지 않았겠습니다.
젊은 날 이후 줄곧 홀로 사셨나 봐요. 특별한 목표를 갖고 살아오셨나 봅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비움 또한 쉽지 않은 일이지요. 마치 법정의 말씀을 실천하시는 듯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살고 싶을 뿐이지요.......언제나 가볍게..
그래요 비움으로서 오는 해방감..ㅎㅎㅎ..다 버리고 갈 것인데..님의 문향에 푹 빠졌다 갑니다..^^
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늘 생각하고 고쳐나며 사는 거지요 형편과 시대에 맞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내 사정에 맞게 내 형편에 맞게...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버리기에
익숙해 지더라구요. 이번에 또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애들에게 다 맡겨버리니 홀가분 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수필에 관심이 많아서 유심히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걸 버리셨지만, 내면에 많은 걸 가지고 계시네요
자신의 내면보다 너무 큰 집은,
집에 눌린 채 살아간다고 하더군요,
" 책을 읽기가 놀이이고 쉼이다.." 라고 하신 어느 작가님 생각이 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것은 행운이지요.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샘의 살림을 나눠주기전에 그곳으로 이사갈껄 그랬습니다.
저도 아프고 난다음 비우기를 하고 있네요. 충동구매도 줄었구요.
아쉽습니다.ㅋ
이론으로는 알아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 비우기더군요
대단하십니다
저도 한 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우선 올 여름에 한 번도 안 입은 옷부터 버려야겠습니다~~
짝짝짝.....시작은 미약합니다......언제나..
나도 버려야 될 것들이 많은데....
아직도 집착과 애착이 많아서 버리지 못하는 갓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다 버릴 수 있을까나.................
에효 ~~~~~~~~~
님의 결단이 부럽습니다. ^^*
할 수 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