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냉장고, 아니 김치만 넣어놓는 김치냉장고가 집집마다 따로 있어서 철철이 김치를 제가 좋아하는 정도껏 익혀서 오랫동안 두고 먹지만 예전에는 한 여름에는 이삼일 걸러 한번씩 김치를 담가대야했다. 하긴 요즘은 이런 기계의 편리함 때문에 김장철에 김치를 한꺼번에 담가놓고 일년 내내 먹는 집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 오히려 여러 가지 맛난 김치 맛을 모르고 산다고 해야 하나? 김치는 배추김치와 묵은지가 다 인줄 아는 것 같다.
여름에는 덥고 습기가 많으니 음식 재료들이 빨리 무루고 상해서 뭐든 한번 먹을 만큼만 만들어 얼른 먹고 다시 마련하곤 했다. 세 끼를 꼬박꼬박 새로 반찬을 만들고 상을 차렸다. 김치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돌이켜보니 여름에는 여름철에 나오는 여러 푸성귀들로 여름 김치를 골고루 담가 먹었다. 열무, 얼갈이는 물론이요, 오이, 고추, 양파, 양배추, 부추, 가지,
고구마줄기, 박, 깻잎 등속으로도 김치를 담가 먹었다. 김치를 그저 한 사나흘 먹을 적은 양으로 담가 그마저 쉴까봐 커다란 함지박에 찬물을 받아 김치 통을 담아 놓고 하루라도 더 먹으려고 했었다. 여름 푸성귀는 잎이 얇고 잘못 뒤척이면 풋내가 나니까 밀가루죽을 묽게 쒀서 김치를 담갔다. 할머니가 열무를 다듬는 동안 엄마는 내루식 연탄불을 꺼내 땀을 흘리면서 밀가루죽을 쒔다. 먼저 냄비에 물을 끓이다가 밀가루를 갠 물을 살살 부으면서 휘휘 저으면 금새 뿌우연 밀가루풀이 쒀진다. 그걸 냄비 째로 찬물에 담가 식히시곤 했다. 개구쟁이 막내 동생이 그 풀죽냄비를 엎기라도 하는 날엔 어머니 앙칼진 목소리가 담장을 타고 옆집 인호네까지 울려 퍼지면 인호할머니가 장독대로 냉큼 올라와서 뭔 일인가 우리집 마당을 들여다보며 막내가 장군감이라 그렇다고 두둔을 하셨다. 풀죽으로 뎁혀진 물은 우리들 목욕물이었지. 혹시 풀죽이 물에 홀라당 쏟아지면 그날은 또 베 이불 풀하는 날이었다. 열무김치를 식칼로 서너 번 뚝뚝 자르고 열무꽁댕이를 살살 긁어 애기 엉덩이 만지듯 조심스레 씻고 소금에 살풋 절여 놓는 사이에 어머니는 마당 꽃밭 한켠에 할머니가 심어놓은 작은 채마밭에서 잘 익은 붉은 고추를 따와서 돌확에 넣고 마늘과 생강 넣어 득득 갈았다. 물고추를 갈아 넣어야 김치가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지금도 어머니는 여름 김치 담글 때마다 이 것을 늘 강조하신다. 물고추를 갈아 넣어야 김치가 시원하고 맛있다고. 우리 외가집에서는 김치에 꼭 넣는 것이 있는데 돼지파다. 아마도 서산, 천안 쪽에서 쓰는 파의 한 종류로 마늘과 양파의 중간 쯤 되는데 이 돼지파를 넣어야 김치 맛이 시원하고 칼큼하다고 돼지파 없으면 김치를 못 담그시는 줄 아신다. 이 돼지파도 쾅쾅 찧어 넣으신다. 여름김치는 젓갈을 쓰지 않거나 넣어도 아주 조금 넣는다. 금새 시어지니 젓갈까지 넣으면 더 텁텁해지고 탁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고춧가루 팍팍 넣어 김치가 아주 붉다 못해 고춧가루 범벅이 되도록 김치를 담그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김치가 그리 고춧가루 떡칠이 아니었다. 그저 붉은 색이 돌 정도로만 적당히 고춧가루를 넣었다. 중부지방이기도 했지만 고춧가루가 귀하니 그리 많이 못 넣은 것도 있을 터이다. 돌확에 갈은 양념에 식힌 풀죽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물을 자박하게 잡아 절여놓은 열무를 넣고 살살 버무리면 열무김치가 다 담가졌다. 할머니도 한 입, 나도 한 입 간을 보다보면 동생들도 뛰어와 한 입 달라 조른다. 할머니는 그 입에 김치를 나눠 먹이며 꼭 제비새끼들 같다고 웃으신다. 어머니는 애들 앞에선 맹물도 못 마신다고 웃으신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하루가 다르게 맛이 달라진다. 첫날은 겉절이처럼 풋김치로 먹고, 이튿날은 딱 맞게 익어서 맛있게 먹는다. 사흘 나흘이 되면 시큼하게 익었으니 비벼먹고 말아먹고 나중엔 정 시어지면 김치찌개나 국이 되어 나온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열무김치가 최곤데 찬밥에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참기름 두어 방울 쳐서 쓱쓱 비벼먹으면 별 반찬이 필요 없고, 쫑쫑 썰어 비빔국수에 비벼먹어도 맛나다. 국물을 잘박하게 담아 냉면처럼 말아먹으면 시원하다. 그도 저도 안되면 푹 끓여서 김치찌개로 먹는데 김치찌개야말로 배추김치가 최고지. 열무김치찌개는 늘 뭔가 빠진 맛이다.
할머니는 텃밭에서 키우던 깻잎을 몽땅 따와서는 젓갈을 넣고 깻잎 김치를 담그셨다. 나는 할머니 곁에 앉아 다섯 장씩 깻잎을 간추려 주면 할머니는 미리 만들어놓은 깻잎양념장을 숟가락으로 반수저씩 올리시며 차곡차곡 김치를 담그셨다. 다음날은 그 깻잎이 살풋 익어서 밥상에 인기 반찬이 된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깻잎 김치. 하루는 오이로 오이소박이를 담그시고 양파도 뚝뚝 잘라 김치를 담고 텃밭에서 나는 푸성귀들로 김치를 담그셨는데 그땐 그게 김친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먹었다.
내가 가장 맛있게 먹은 김치는 효창동에 사시는 고모할머님댁에서 먹은 열무김치다. 제법 큰 사업을 하시던 고모할머님댁에는 아이스박스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게 신기하게도 얼음 몇 덩이 넣으면 그 안에 넣어둔 김치며 과일이 시원했다. 마술 상자와 같았다. 우리 집에서 먹던 뜨뜻미지근한 열무김치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열무김치를 먹고 또 퍼먹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어머니는 큰맘 먹고 오시는 길에 동네 얼음집에서 얼음 한 덩이를 끈에 묶어 사들고 오셨다. 얼음을 사오는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는데 그 얼음을 큰 쟁반 위에 놓고 얼음 위에 바늘을 꽂아 뺀찌 머리로 살살 두들기면 얼음이 작은 덩어리로 쫙쫙 쪼개진다. 우리 삼남매는 그걸 서로 주어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큰 스텐 국사발에 설탕물을 타서 얼음을 둥둥 띄워 먹느라 진저리를 쳤다. 혹시 아버지가 수박이라도 한 덩이 사들고 오면 수박화채를 만들어 옆집 앞집까지 돌리고 수박 한 덩이로 몇 집이 호강을 했다. 오랜만에 찬 것을 싫건 먹은 우리들은 밤새 뒷간을 들락거렸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며 우리들이 먹고 난 수박 껍질을 닳고 닳은 놋수저로 득득 긁어서 소금에 절여 꼭 짜서 고추장에 묻혀 반찬을 만드셨다.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에 누우면 할머니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흥부놀부 얘기를 들려주시고 우리들은 쪼란히 누워 여름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물배가 찬 불룩한 배를 두들기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방에서 신문을 보시던 할아버지도 더우신지 슬그머니 마당에 나오셔서 괜히 어슬렁거리시다가 커다란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해주시며 삼베이불로 배 깨를 덮어주셨다. 그렇게 온 가족이 담 안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함께 보냈다. 매일 같이 잠이 들었다.
*풋고추소박이
재료:풋고추400그램 부추100그램 무100그램 양파1/4개 쪽파50그램 고춧가루6큰술 액젓1큰술 다진마늘2큰술 다진생강1/2작은술 소금1작은술 매실청1큰술
만들기
1.풋고추는 씻어 꼭지를 따고 배를 갈라 소금물에 10분 정도 절인다.
2.무와 양파는 짧게 채 썰고 부추와 파는 잘게 썬다. 무와 부추, 파에 고춧가루와 마늘, 액젓과 매실청을 넣고 소를 만든다.
3.살짝 절인 고추 속에 버무린 소를 넣는다. 실온에서 하루 익혀 먹는다.
*여름김치를 절일 때는 물1리터당 소금1.5큰술의 소금물에 절이면 좋다.
*같은 방법으로 오이소박이, 가지소박이, 양파소박이, 피망소박이, 우엉, 연근 등의 김치를 담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