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관한 시모음 28)
11월의 붉은 기도 /권순진
태풍은 비켜가고 격랑은 멈췄습니다. 저마다의 소출로 셈을 마치고 전은 둘둘 말렸습니다. 몇은 지전을 세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바르는데 나는 줄 그으진 빈 종이만 만지작거립니다 그럼에도 그대의 은총에 무릎을 꿇습니다
한 해의 끄트머리 한 발 앞에서야 퍼득이지 않아도 될 많은 근심의 날개쭉지들 조바심으로 서성거리고 동동거렸음을 고백하며 부끄러이 여깁니다.
새 달력을 걸고 새해를 받아들었을 때 시작과 끝이 한결같기를 기도했건만 밭고랑의 물은 비쩍비쩍 말라 가고 노을은 파다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의 열매 몇, 붉게 물들기는 이제 걸렀나 봅니다. 다시 시간의 유령 앞에 섭니다 마음은 급했으나 질질 끌려 다닌 시간들 주먹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 뒤끝입니다
마른 이파리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쇠잔한 시간의 소리를 쓸쓸히 듣습니다. 다시 안간 힘 다하여 무릎의 관절을 세웁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무늘보의 미련한 몸짓으로 두레박을 내려 물 한 동이 길어 올립니다
11월 /박형준
의자에 다 타버린 연탄이 놓여 있는 줄 알았다. 골목에 쌓인 상자처럼 무뚝뚝하다. 문 닫힌 연탄가게 앞을 지날 때면 주름살에 가린 쑥 들어간 눈 언제나 거리의 사람들을 쫓는 늙은 여인.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린 채 앉아 있다. 늙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사람을 쬔다. 아침의 부신 빛에 다 타버린 연탄 하얗게 허물어져내린다.
11월 첫날의 기도 /정연복
바람이 데려갈 곳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버릴 것 다 버리고 언제라도 떠날 준비
되어 있는 민들레 홀씨같이. 앞으로 나의 인생살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비워야 할 것들 비워냄으로
몸도 마음도 가벼이 오늘을 살게 하소서.
딱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하루하루
비움의 미학을 깨달아가는 소중한 시간 되게 하소서
11월 최의상
으스스한 오후 바람은 퇴락하는 마지막 잎을 조용히 흔들어 준다. 오색 단풍의 영광은 사라지고 차디찬 대지에 낙엽으로 남는다. 사랑이 아직도 남은 심장소리를 쓸쓸한 인적이 밟고 가며 듣는다. 사랑을 노래한다. 인생이 쓸쓸하다. 가을이 아름다우나 슬프기만 하다. 낙엽을 밟으며 이 아름다운 시간에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 삭정이 끝 멀리 파란 하늘 바라보며 십일월 만추의 바람결이 가슴으로 깃들며 심령을 흔든다. 지나온 세월을 문득 생각하니 감사가 마음에서 싹튼다. 기도 하고 싶은 계절이다. 2019.11.12
11월은 /신성호
황금빛 넓은 들녁 어느새 비어있고 뭇 새들 노래하던 나무들 황량하니 십일월 짧은 하루가 가을 끝에 매었네
풍성한 가을걷이 모두가 기쁨 가득 거둔 것 노적하니 긴 겨울 행복노래 엄동의 긴긴세월을 사랑으로 꽃피리
십일월의 데생 /이규봉
계절이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
마른 수초가 듬성듬성한 마른 연못엔 시월이 동전처럼 가라앉아 있고 십일월이 둥둥 떠 있다
분수는 분수도 모른 채 춤을 추고 비단잉어가 물 위에 떠 있는 십일월의 노란 잎사귀를 물어뜯는다
제 어미의 죽음이 새 어미의 플러그와 아무 접속이 없는데도 비단잉어는 가시 지느러미를 곧추세운다 그녀는 문장 끝 물음표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지평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 담담히 제 빛깔로 걸어가고 있다
붉은 단풍이 초록 잎에 눈길 주지 않듯이
11월, 서시 /이영춘
한 풍경이 걸어 나가고 또 한 풍경이 걸어 들어온다 거대한 회전문이 오체투지로 지구를 밀어 올린다 “주여, 지난 계절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지구 저 반대 편 시인이 한 계절을 닫고 또 한 계절을 노래하였듯이 이 땅에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청춘들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듯이 또 다른 회전문이 열리고 닫힐 것이다 가을 이파리 떨어지듯 갈꽃 여자의 머리카락은 수북이 쌓이고 별들은 아직 이빨이 돋아나지 않은 아기 웃음소리로 반짝반짝 계절을 알릴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지상에는 신의 전령 같은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그 눈雪 속에서 더러워진 입술과 탐욕을 버려야 할 것이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나의 계절이 이 땅에서 풍성한 열매와 구름떼 같은 羊의 들판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마지막 숨 몰아쉬는 시간의 햇살을 사흘만 더 쏟아 부워 주옵소서 내 몸이 다 비워지고 가벼워지면 나는 깃털처럼 이 지상을 떠날 것입니다.
오늘은 햇살 맑은 오후, 당신의 품 안에서 무르익는 풍성한 열매이고 싶습니다
*릴케의 싯구 인용 및 변용함
11월에서 /복효근
먼 길 가는 적막함을 알았는지 나무들은 벌써 허전한 어깨들 기대고 길 떠나고 있다
골짜기 물은 제 아는 것들의 이름을 외우며 두런두런 길을 챙기고 산 하나가 물위에 제 그림자를 싣는구나
남아있는, 혹은 남아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의 귀싸대기 후려치며 바람은 몰려오고
그 때마다 숲은 추억 쪽으로 몇 잎 뿌려주며 어서 가라고 어서 가자고 손 흔들어주고 있다
이윽고 긴 밤이 오리라 나도 어서 손 흔들자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11월 /김옥경
계절이 다시 내린다 세탁소에 걸린 묵은 옷으로 지난겨울 먹다 버린 사랑이 서리로 차갑게 나를 적시며 낙엽도 눈도 비도 없는 빈 들녘 바람에 묻혀온 눈물은 돌 틈 사이 씨앗을 몰래 가두고 황급히 사라지는데 밀회를 꿈꾸는 새 한 마리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대 사랑
루오, 1948년 11월 5일 /강인한
머리가 언제부터 벗겨졌는지 몰라 백색 중절모를 눌러쓴 그가 벽난로 속에 집어던진다 던지고 또 던진다 필생의 누추한 허물이며 칠 벗겨진 명예를 불쌍히 여기소서 배가 고프다고 시뻘겋게 소리치는 아궁이 그 속에 먹이를 던지고 또 던진다 은제 십자가를 닦다가 해진 마른걸레 같은 것들 활활 타오르는 저 검은 아궁이는 배가 고프다 작업을, 앞으로 남은 짧은 햇빛으로는 도저히 끝마칠 수 없는 미완의 작품을 이렇게 포기하느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백… 이백… 삼백 점을 넘어서도 일흔 일곱의 노인은 쌓아둔 오랜 증오를 헐어내듯 페인트와 기름 냄새 밴 캔버스 쪼가리들 그 미련을 미련 없이 불구덩이 속에 조르주 루오는 처넣고 있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벚나무 갈색 이파리들이 손바닥을 비비며 날려서 떨어지는 늦가을 저녁 검정 테를 두른 높다란 십자가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수염 텁수룩한 사내 하나가 서쪽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11월의 나팔꽃 /김점희
뉘라서 알 까 베란다 한 켠 여름내 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쓸모없는 화분이 피워낸 진보라 나팔꽃을 뉘라서 알 까 입동 지나 첫 눈 내린 늦은 11월 임 맞는 시악시 수줍음으로 찬바람이 비워낸 빈 가슴에 진보랏빛 유혹으로 다가온 것을 아픔이어라 가느다란 생명줄 따라 솟아난 잎의 겨드랑이마다 기어이 고통의 나래편 야들한 꽃송이 아쉽다 기댈 곳 없어 뻗지 못한 줄기 되돌아와 제 몸 감고 뒤틀어진 외로움으로 피워낸 눈물꽃이여 빛나라, 11월의 햇살이여 깊게 파인 통꽃 설움의 눈물샘 말려 버리게...
11월의 정거장 /유가형
시면트 담 너머에 오래 전 말라버린 마른 나무껍질 같은 낡은 고물이 쌓여 앉았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머리 잡초들의 무성한 이야기에 11월의 된서리가 내린다 추억조차 모두 발라먹은 빈 가슴엔 모시 바람 하얗게 사리고 있다 비 맞은 골판지처럼 납작해진 늙은이들 수직으로 때 묻은 슬픔만 켜켜이 쌓인다
무리로 모여 눈 비바람에 지난 날 퍼러럭 털고 있다 귀 안 윙윙거리던 퇴색된 꿈 후벼내고 서로 엉켜 앉아 내 마음의 먼 아우스비치로 가는 기차 기다리고 있다
11월의 단상 /한경희
버들무지 냇가엔 차가운 물결이 있다 맑갛게 입술을 다문 하얀 돌 찰랑찰랑 외로움을 엮는다 향기로운 꽃잎이 바람에 불려가다 빨간 색깔 하나 툭 떨구어준다 조금은 퇴색한 가을의 소리 그 황량한 목덜미에 노을이 길게 주저 앉는다 11월은 맑은 영혼이 깃드는 달 탱글거리는 하늘가 눈물은 새뜻한 이별의 멜로디 은은한 가곡 한 곡 어떠세요? 부르는 이는, 허전한 잎새의 모난 조각들 고요히 귀담아 들어주는 이는, 바람 따라 술렁이는 으슬한 여운 표표히 멀어지는 가을 발자국
11월에는 /이희숙
붉은 가을이 그대 웃음에 걸려 서성이는 동안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영접하고 떨어짐마저 기쁘게 허락하는 나무의 삶을 배우자
찬란한 가을이 그대 이마에 앉아 꿈꾸는 동안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밤을 배웅하고 인디언처럼 춤추고 노래하자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걸 미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달 11월에는 꿈을 노래하고 희망을 이야기하자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김상미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나는 언제나 그 거리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마시던 커피, 쓰디쓴 소주, 꼬들꼬들했던 갈매기살, 바벨탑처럼 높이 솟아 있던 부 산타워……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고개를 돌려야 했던 그 거리를 함께 걸었던 희망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들은 이미 시들고 11월의 찬바람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 시든 꽃다발들을 꽃다발들의 파편까지도 모두 휩쓸어가 버렸지만
용두산 40계단을 오르며 보았던 어디로 가는지 모를 비행기 한 대 내가 상상한 꿈의 모습으로 높이 날아오르던 비행기 한 대 그 생생한 질주 아래 보름달처럼 꽉 차 있던 내 시선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부산우체국 전화 부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누군가의 우애와 경쾌한 중앙성당의 아침 종소리 더 멀리 보이는 부둣가, 이제 막 먼 길 떠나는 젊은 근육들의 뱃고동소리 그때의 나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그 미치광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했던 희망만은 잃지 않으려 날마다 웃으며 매일같이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미치광이
밥은 먹지 않아도 무수한 단어들로 꽉꽉 채워진 메모지만으로도 행복했던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내 젊은 날의 놀이터
언제나 내 나이 속에서만 존재하고 언제나 내 나이만큼만 변해가는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를 다시 걸으며 나는 내 안에서 꿈틀대며 바스락거리는 그 추억의 트렁크를 열어젖히고
그 옛날처럼 가장 가까운 선술집으로 뛰어 들어가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서 혼자를 향해 건배!를 외친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이 거리에 다 쏟아내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내 생에 깜짝 놀란 듯 다시 환호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