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일 2011년 신묘년 새해가 밝았다. 사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지 해가 바뀌었다고 변하거나 달라질 것도 없다. 6시에 인왕산으로 해맞이를 가려다가 영하 10도의 기온과 엊그제 내린 눈으로 엄두가 나지 않아 거실에서 새벽을 보냈다. 더구나 뉴스에서는 동해안과 남해안에 눈이 내리는 중이고 서울도 잔뜩 흐려있다는 예보가 나오는 터이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해가 보였지만 전국 각지에서 일출을 보려고 마음을 졸인 사람들은 소망이 간절한 새해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생이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눈 덮인 안산에 올랐는데 다니는 사람도 없고 바람만 쌩쌩 부는 새해 첫 날이었다. 겨울을 이기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를 걸어 정상에 올랐다가 날이 추워 한양아파트 방향으로 내려와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한적한 시내를 달려 학원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남영동으로 이동하여 영식이와 식사를 하며 정초를 보냈다. 밤에 하루를 마무리하면서는 희망찬 2011년을 다짐했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도 새로운 날들이 되기를 기원했다.
2일 오늘부터 논술교실에서 아들을 포함하여 고2 과정 오전반 4시간 오후반 4시간 연속 8시간 수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밤새 뒤척이면서 방까지 옮겨 다녀 아침에는 피곤함이 극에 달했고 결국 교회에 나가는 것도 포기하고 늦은 아침까지 누워서 보냈다. 연일 영하 10도의 맹추위가 계속되어 식사 후 중무장을 한 채로 논술교실에 올라가 오늘부터 2011년 첫 강의를 시작했다. 학년이 바뀌어서 그런지 수강생들은 평소보다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고 오전 4시간을 마치고 1시에 집으로 내려갔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올라가 오전반과 동일하게 수업을 했는데 아들은 다른 일정으로 2시간만 하고 먼저 강의실을 나갔다. 다음 시간부터는 오늘까지의 수업보다 더 다양하고 수준이 있는 강의를 할 것인데 무엇보다 아들이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논술교실에 카드결제기가 없다보니 수업을 마친 저녁에 성북동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수고를 했고 눈발이 날리는 밤에는 딸과 저녁을 함께 했다.
3일 눈을 뜨면 언제나 어스름 새벽으로 오늘도 딸은 아빠인 내 곁에서 쿨쿨 잠을 잔다. 7시가 되기도 전에 무악재 고개에는 차량들이 늘었고 2011년 첫 출근하는 날 사람들은 저마다 각오가 새로울 것이다. 학원에 가는 아들 때문에 요즈음 식사를 일찍 하게 되는데 방학 때마다 받았던 스트레스가 사라져 그나마 좋다. 오전에 운동을 하러 체육관으로 갔더니 오늘은 유난히 썰렁했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는 자신이 만들었다며 딸이 김밥을 자랑한다. 함께 점심은 해결했지만 평소에 방 정리도 제대로 못하는 딸이 오늘은 식탁 주변까지 어지럽혀 무질서가 말이 아니었다. 찬바람이 부는 오후에 차를 몰고 학원으로 나가서 사회선생과 학원운영에 관하여
토의를 하고 이후 교재를 보면서 자리를 지켰다. 저녁에 자신의 중학교 동창인 조원용 변호사가 금전문제로 고소장을 제출했다며 영식이한테 전화가 왔다. 원용이는 서울법대를 나온 변호사로 영식이하고 매우 가깝고 나하고도 잘 어울리는 사이인데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승산이 없는 사업에 영식이가 원용이 돈을 차용했고 약속한 날에 갚지를 않아 고소장을 제출한 것인데 금전적인 문제로 친구간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4일 어제 늦은 시간에 콩나물밥을 먹고 잤더니 아침까지 든든하다. 하지만 8시30분에는 어김없이 식탁에 앉았고 구수한 된장국에 계란말이 그리고 김까지 동원하여 식사를 했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딸에게도 아침을 독려했지만 일어날 기색이 없어 떠안다시피 들고 나와 식탁에 앉혔다. 오전 10시에 딸이 과외를 시작하고 나도 1시부터 수업이 있어 우선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점심을 먹는 중에는 조카 윤희의 생일이 인터넷에 올랐다고 딸이 알려와 전화로 축하를 해 주었다. 외롭게 커나가는 4명의 조카들이 있는데 먼저 간 형을 대신하여 이 기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형이 세상을 떠나기 10여일 전 불쑥 조카들을 부탁하여 어리둥절한 때가 있었고 그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엊그제 말레이시아에 계신 형수님한테 전화가 와서 형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만 반면 가족의 아픔이 다시 일기도 했었다. 오후에 논술교실로 올라가 수업을 시작하는 시간에는 엊그제 먼저 나간 아들이 들어왔고 그런데 오늘은 풀이 죽은 모습이다. 수업을 마치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딸과 영풍문고에 있다기에 상가에서 삼겹살을 구입하여 아들과 저녁으로 함께 먹었다.
5일 어제 잠을 잘 때는 딸이 내 옆에 있었는데 새벽에 보니 아내와 함께 다른 방에서 자고 있다. 아침까지 누워서 보내다가 8시에 식사를 하고 아들을 학원에 보낸 뒤 나도 수업으로 논술교실로 향했다. 오늘은 영하 3도의 기온으로 며칠 전에 비하여 많이 올랐지만 밤부터 다시 추워진다니 하긴 대설을 코앞에 둔 한겨울이다. 11시경 수업을 마치고 체육관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성북동 학원에 가서 수업을 시작했다. 오후에 신설동으로 나가서 1천5백만 원 보증금에 월 1백10만 원으로 3층 계약서를 작성하고 방배동으로 가서 영식이를 만나보니 친구의 소송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결론도 없이 앉아만 있다가 11시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지만 해가 바뀌었어도 친구의 어려움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6일 날씨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남부지방은 눈까지 오고 있다는 예보인데 서울은 반대로 해가 쨍쨍이다. 어제 영식이 문제로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아프기는 했어도 시골의 소작문제를 해결하려고 12시경 터미널에 나가 고향으로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난 버스는 금방 고속도로에 진입하였고 안성을 지나 날리던 눈발은 천안 논산구간에서 설원을 만들었다. 오후 3시가 되어 도착한 고향은 한겨울의 날씨처럼 얼어 붙은 듯 적막했고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이 오히려 반가운 정도였다. 밖으로 나와 상희 형을 만나러 병원에 갔더니 2.3개월 전보다는 많이 호전된 상태였고 다만 양쪽 시력을 잃어 안타까웠다. 작년까지 소작한 것에 대하여 결산을 하고 새로운 소작인 선정까지 약속한 뒤에 근처 요양원에 있는 친구 아버지 병문안도 다녀왔다. 6시가 지나자 금방 날이 어두워졌고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소주 몇 잔에 저녁을 먹었더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늦은 시간 시내의 거리는 조용하기까지 했고 한참을 걸어 내려올 때마다 숙소처럼 이용하는 널찍한 찜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7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집을 나오면 역시 불편하고 환경까지 바뀌어 피로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영하 10도의 아침에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려고 일찍 나서 6시에 출발하는 고속버스에 올랐고 차 안에는 30여 명의 승객이 자리를 했다. 문제는 달리는 도중 히터가 고장이 나서 모두가 고생을 했다는 것인데 서울에 도착하여 바로 출근할 사람들이 많아 멈출 수도 없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마치 소설 속의 장면처럼 다녔는데 차에서 내렸더니 정신조차 몽롱했고 억울하다는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어제 못한 서류를 정리하려고 학원에 나갔다가 임대료 정산으로 신설동을 거쳐 4시에 논술교실로 돌아왔다. 어제부터 긴 거리를 다녀 피곤한데다 더구나 아침에 냉동인간으로 들어왔으니 수업을 하는 내내 졸리고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에 집으로 내려와 외출한 아들에게 식사를 하자고 문자를 했더니 11시 지나서 들어왔고 축구를 하다가 다친 발목은 아직도 부어 있다.
8일 오늘 수업이 없는 날이라 한가할 줄 알았는데 교재와 사설정리 등 나름 일이 많은 날이다. 아침에 식사를 하는 중에 아내와 아들 딸이 모두 각자의 방문을 열어 두어 소리를 높여 지적을 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난방의 효율성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매사에 뒤처리를 하지 못하는 평소의 잘못된 습관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화를 냈더니 스트레스가 쌓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집을 나서 체육관으로 향하여 운동을 시작했다. 낮에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왔더니 현관과 거실을 잇는 중간문이 또 열려 있어 방에서 나오는 딸에게 아침처럼 심하게 꾸중을 하였다. 밥 먹는 것도 포기하고 학원으로 나갔고 오후에는 지난 12월 여의도 술값을 개인별로 분배하자는 우현이 문자가 왔다. 술을 마실 때 큰소리를 치면서 한 친구가 계산을 하더니 나중에 후회가 되었던지 각출을 부탁했던 것이다. 웃음도 나왔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고 50만원의 술값을 모두가 나누어 부담하니 개인당 4만 원이다. 내일 수업할 교재를 연구하는 중에 아침부터 소리를 높여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여 쓰러질 듯 했고 순간 한 쪽 청력이 사라지는 어지러움이 생겼다. 50대에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가장 큰 적이라더니 그것도 아침과 낮에 두 번씩이나 화를 냈으니 아마 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대로 장애인이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누워 있으니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9일 어제부터 왼쪽 귀가 안 들려 TV를 보는 것마저도 불편하다. 이명증인가 중이염인가 아니면 다른 신체부위에 문제가 생겼는지 나대로 진단을 하며 새벽에 일어나 오늘 수업을 준비했다. 이른 시간에 교회에 나가려니 아내가 김치찌개를 만들었고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갑갑함으로 그대로 집을 나왔다. 차를 몰고 나서는 중에 이제는 몸에 균형이 생기지 않아 운전이 힘들었고 결국 교회를 포기하고 논술교실로 돌아왔다. 수업을 하는 중에도 귀가 들리지 않아 혼자서만 중얼거렸는데 지금까지 이런 최악의 강의는 없었고 오후반 수업도 무엇을 읽었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저녁에 수업을 한다는 아내가 올라와서 집으로 내려갔지만 내일 아침까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병원에 갈 것으로 바람 소리마저 그리운 지금의 시간이다.
10일 잠을 잘 잤다. 8시가 되도록 한쪽 귀는 여전히 먹먹했고 오늘은 오른쪽 귀만 사용하는 장애인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서울 기온이 영하 11도라니 어제보다 더 추워졌고 오전에 운동을 나갔다가는 먼저 홍제역 근처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간단한 청력테스트를 하더니 돌발성 난청이 왔다고 듣는 것도 처음인 나와는 반대로 의사는 태연하게 말을 한다. 결론은 현재 귀머거리 상태가 되었고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하면 70%는 호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치료는 15일 술 담배는 물론 운동도 삼가라는 것이다. 약간의 불신과 불만이 생겨 학원으로 가는 중에 날마다 지나치는 서울대병원 이비인후과에 들어가 예약을 했더니 5일 후에 나오라 한다. 오후에 시간을 보내면서 돌발성 난청을 컴퓨터에서 검색했더니 홍제동에서 듣던 대로였고 분당과 중곡동에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까지 있었다. 오로지 귀만 치료하는 병원이라는데 이렇게 전문적인 곳이 있다는 것은 살면서 듣는 것도 처음이다. 홍제동에서 이미 약을 구입했으니 오늘이나 내일까지 경과를 보면서 옮겨볼 생각으로 오늘은 친구와의 약속도 미룬 채 집으로 왔다. 병원에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니 어쩔 수가 없었는데 저녁에 학원에서 돌아온 아내와 아들도 걱정을 하며 머리맡에 앉았다.
11일 새벽 5시에 일어나니 한겨울 창밖은 어둠에 쌓였다. 어제 11시경 잠이 들었으니 6시간 수면을 한 상태로 교재를 연구하는 중에 딸과 자던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어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청각의 느낌이 좋았고 아침에 김치찌개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체육관도 가지 않고 쉬는 오전에 딸이 과외를 한다고 부산하고 일찍 학원에 갔던 아들은 겨우 1시간이 지나서 돌아왔다.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수업한 시간이 거의 없는데 무엇을 배우고 왔는지 모르겠고 딸을 지도하는 과외선생은 우리 집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12시에 논술교실 수업을 나서면서 청각장애로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감각의 불균형으로 지루하고 산만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외모가 멀쩡하니 나의 상황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고 저녁에 성북동 학원으로 나갔다가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12일 조용하게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대화를 하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확실히 왼쪽 귀가 울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일찍 일어나 가족이 식사를 했는데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함께하는 몇 십년의 시간도 지나고 나면 찰나의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집을 나서면서 아내를 논술교실 앞에 내려준 뒤 체육관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걷기와 샤워를 하고 12시경 밖으로 나왔다.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수업을 한 뒤에는 전문적으로 귀를 치료한다는 군자동에 신설동과 장안평을 거쳐 도착했다. 병원 입구에는 여러 형태의 귀가 그려져 있고 안쪽으로는 다양한 청각테스트 기계가 놓여 있어 동네 이비인후과와 분위기부터 달랐다. 테스트를 마치고 원장과 함께 그래프를 확인하니 왼쪽이 확실히 떨어진 청력으로 돌발성 난청이 분명했다. 이번 주에 약을 먹고 다음 주에 주사약을 투여한다며 70%는 회복될 수 있다는 처방을 하는데 홍제동 진료와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중에 동대문 블랙야크 매장에 들러 물품을 구입했고 저녁에는 홍제역으로 나가 아내와 황태탕을 사 먹었다. 밤에 오손도손 모여 있는 아들과 딸에게 치킨을 시켜주었는데 얼마나 잘 먹던지 바라보는 내가 배가 부를 정도로 흐뭇했다.
13일 잠을 자다가 일어나니 아내는 딸과 자고 있어 조용한 공간에서 교재를 2시간이나 연구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약을 먹었어도 귀는 여전하고 안쪽 달팽이관 신경이 손상되었다니 치료가 잘 될지 모르겠는데 다음 주 월요일쯤 귀 안쪽을 마취하는 과정이 남았다. 어느 상황이든 담담하게 수용하고 주어지는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다지 여유가 있거나 편한 마음이 아니다. 아내는 오늘 아침부터 오후 7시까지 수업이라니 힘들겠고 집에서 공부하는 딸과 달리 일찍 학원에 간 아들은 11시도 되기 전에 돌아왔다. 요즘 귀가 안 들린다니 가족의 걱정이 나에게 쏠리는 느낌인데 잃으면 얻는 것도 있는지 청각이 사라진 후 관심이 돌아왔다.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 수업을 하는 중 귀가 걱정이 되는지 친구들한테 문자가 많이 왔고 나도 잘 치료하겠다는 답장을 일일이 보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사과를 먹는 시간에 정성을 다해 가급적 얇게 깍으라고 했더니 아내는 잔소리가 심하다며 중얼거린다.
14일 새벽에 일어나 교재 준비를 하고 아침을 맞이하는데 아직까지 귀가 먹먹하여 심난하기만 했다. 9시에 식사를 하는 중에는 다른 방학 때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아들이 앉았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모습과 위치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는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가 일희일비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들과 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사는 날까지 모두가 탈 없이 지내다가 마지막에 아름답게 이별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저마다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어와 숙어를 열심히 암기하고 있는 딸을 두고 오전에 도시락까지 준비하여 학원으로 갔다가 일정을 정리하고 교재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낮 기온이 영상까지 올랐고 하지만 내일 다시 영하로 곤두박질친다니 변덕이 심한 1월의 중순이 아닐 수 없다. 오후에 논술교실로 돌아와 예비고1 수업을 하는 중에 갑자기 머리와 눈이 맑아지더니 신기하게도 난청이 사라지는 듯 하였다. 안개가 걷히듯이 왼쪽 귀의 무거움이 없어졌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고 정신도 움직인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치료를 한 덕분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는 우현이의 정성인지는 알 수 없어도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녁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삼겹살로 저녁을 먹었고 밤에는 아시안컵 호주와 한국과의 축구경기를 늦은 시간까지 아들과 시청했다.
15일 오늘 아침은 영하 10도의 날씨로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가 더 내려가 있고 새벽부터 공부를 했더니 어느 새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일찍 김치찌개로 식사를 마치고 안방에서 쉬는 중에 청각을 염려한 아내가 들어왔고 묻기도 전에 거의 나았다고 했더니 뜻밖이라며 놀란다. 서울대병원 예약을 취소하고 기도해 준 우현이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의 은총이라는 답장이 왔다. 운동을 하러 체육관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렇게 추운 날 안방부터 아들이 쓰는 방까지 온통 방문이 열려 있고 설상가상 아내는 결명자 차를 태워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에는 평소에 뒷정리나 마무리를 못하는 아들에게 지난 번 딸처럼 훈계를 했는데 듯는 둥 마는 둥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학원에 간다는 아들을 태워주고 도심을 통과하여 성북동에 갔다가 점심을 먹은 후 논술교실 수업을 준비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식사하는 아들을 보니 한창 자랄 때라 그런지 먹는 양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나의 보람이다. 밤이 깊어가면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더 내려갔는데 어머니와 군고구마를 먹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1월의 중순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