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현재의 어려움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와(1~11),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백성이 누리는 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2~15).
2.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를 때 반석은 힘을 상징합니다(1). 다윗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 전쟁에서 잘 싸우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주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골리앗과 싸운 이래, 지금까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다양한 단어로 송축합니다. 나의 사랑(헤세드),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를 건지는 이, 나의 방패, 나의 피할 곳 그리고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시는 자라고 고백합니다(2).
3. 그의 마지막 고백은 의미심장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힘과 권력 때문에 복종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셨기에 그들이 복종한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위는 자기 힘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라는, 청지기 의식, 모든 권력과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동안만, 책임과 함께 주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지켜주는 끈입니다. 아무리 작은 권력도 마땅히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3~4).
4. 다윗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대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이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실 이유나 채무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다윗은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는 듯합니다(5~6). 이 하나님이 모든 이방인의 손에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7~11).
5. 12절부터 주제가 전환됩니다. 12~15절에서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누리는 놀라운 축복을 말합니다. 자식들은 그 집의 힘입니다. 어린 아들들이 어느덧 장성한 나무처럼 우뚝 서 있고, 어린 딸들은 어느덧 궁전의 용도에 맞추어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처럼 곱습니다(12). 자식들은 부모의 낯을 영화롭게 할 만큼 잘 자랐습니다. 곡식 창고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양은 천천만만을 헤아릴 만큼 번성하고 가득합니다(13). 힘을 상징하는 수소는 그 풍성하고 많은 것들을 실어 나를 만큼 부족함이 없습니다(14).
6. 하나님께서 지키시기에 누가 쳐들어올까 방비해야 할 염려도 없습니다. 거리에는 억울해하고 원통해하며 슬피 우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이런 백성은 얼마나 복됩니까? 왕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꿈꿉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가져야 하는 꿈입니다. 자녀들이 자라나 힘을 발휘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온갖 것들로 채워주심으로 풍성함을 누리고,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함을 누리고 살며, 한 사람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만나지 않는 나라, 이것이 우리가 꿈꿀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는 왕(1-11절)
오늘 본문은 시편 138-145편까지에 있는 다윗의 마지막 시편 8편 가운데 7번째입니다. 그리고 표제어에는 어떤 곡조나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다윗의 시>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성경(LXX)’과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성경(Vulgate)’에는 표제어에 ‘골리앗에 관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시편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후에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 다윗은 10대의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후반부는 임금이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들은 이 시편의 배경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사무엘하 10장에 나오는 암몬과 아람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 그 전쟁을 앞에 두고서 쓴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왕이었던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위에 오르자, 다윗은 조문단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가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은총이 어떤 내용인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암몬 왕 하눈의 신하들은 그에게 바르지 않은 조언을 했습니다. “다윗왕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아버지 나하스를 공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성을 엿보고, 함락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눈은 그 조언을 그대로 수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눈은 다윗의 조문단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조문단의 수염(위엄과 명예의 상징)을 강제로 깎아버렸습니다. 그것도 절반만 깎아 수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중동볼기까지(양쪽 엉덩이가 보이기까지) 자름으로 극도의 모멸감을 주었습니다.
다윗왕은 그 사실을 알고서 조문단에게 여리고(암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수염이 다 자란 후에 오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에 두려움은 느낀 하눈왕은 아람 사람과 소바 사람 20000명, 마아가 사람 1000명, 돕 사람 12000명 등 총 3만3000명이나 용병을 고용했습니다. 조문단을 모욕한 대가는 몹시도 컸습니다. 이스라엘과 암몬-아람의 연합군은 2번의 전쟁을 벌였는데 모두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큰 전쟁을 목전에 두고서 고백합니다.
(1)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략과 전술을 잘 짰기 때문이거나,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월등히 컸기 때문이거나, 이스라엘 군인들이 용맹하여 전투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손을 훈련시켜주셔서 전쟁에 익숙하게 해 주셨고, 손가락도 단련시켜 주셔서 전투에 익숙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자신이 싸울 싸움이 단지 복수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성전(holy war)이기에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손은 물론 손가락에까지 훈련시켜 주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랑’이 되신다고 가장 먼저 고백합니다. ‘사랑(헤세드)’은 ‘계약기간이 무한대인 사랑’,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새’는 ‘접근하기 힘든 장소’이기에 안전한 곳임을 강조하고, ‘산성’도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역시 쉽게 다가갈 수 없어서 안전한 곳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방패’도 작은 것이 아니라 전신을 가리는 큰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7가지(사랑, 요새, 산성, 건지시는 분, 방패, 피난처, 복종하게 하시는 분)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부족함이 없는 완벽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7가지의 고백이 전부 ‘나의, 내’ 등으로 표현되는 ‘1인칭’ 고백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까지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깊고 풍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책임을 져 주시는 것이 그에게 어떤 자격이나 가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3-4)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3절의 말씀은 역시 다윗이 기록한 시편 8편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8:4)” 다윗은 우주를 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정말 작습니다. 온 우주가 축구장 크기라면 지구는 그 안에 있는 좁쌀의 크기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미미합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생각하여 주시고, 돌봐 주시며 알아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작고 연약하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시편 8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사람이 ‘헛 것(텅 빔)’과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허상)’과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 8편에서는 최상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최하의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편 8편이 하나님을 높여서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오늘 본문은 인간을 낮추어서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지를 잘 묘사합니다.
(5-7)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산들을 건드려 연기가 나게 하시고, 번개를 보내시어 적들을 흩어주시고, 화살을 쏘아 적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윗은 적군을 ‘큰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래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사 43:2)”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적이 서두에 말씀드린,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이라면 아람의 연합군(용병)의 숫자만 해도 3만30000명입니다. 쉽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숫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음은, 물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인데, 다윗은 하늘을 ‘주의 하늘’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물이 적에게 속한 공간이라면 하늘은 하나님께 속한 공간이라고 고백합니다. 물이 아무리 두려움의 대상이어도 물이 닫지 않는 곳은 많지만, 하늘 아래가 아닌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은 이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8)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의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법정에서 선서를 할 때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와 같은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서는 대부분 오른손을 들고서 합니다. 왼손잡이여도 오른손을 들고 합니다.
다윗은 대적들이 오른손을 들고서 진실하겠다고 맹세를 하고서도 거짓된 것만 말한다고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실이 아닌 찌라시(낱장광고지) 정보와 거짓투성이 소문을 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거짓된 것으로 소문을 퍼뜨릴지라도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9-10)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다윗은 지금까지 대적들에게 향하고 있었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며, 새 노래로 찬양하며, 당시 최고의 악기 중에 하나인 열 줄짜리 비파로 찬양을 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구원하시는 분,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 칼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셔야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순신 장군(제독)이 12척으로 133척의 일본군을 물리친 명량해전은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도 길이 남을 해전(海戰)입니다. 거기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의 지휘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2척으로 133척을 물리치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이 끝나고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명량> 영화 포스터에도 그 말이 카피되어 있는데,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천행’, 문자 그대로 ‘하늘이 준 큰 행운’입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그 승리는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의 고백이 이러하다면,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백성의 복을 비는 왕(12-15절)
12-15절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그 백성이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지를 노래합니다.
(12)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자녀들이 받는 복입니다. 아들들은 어린 나무에서 튼튼하게 자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어릴 때 마을에 심은 나무가 그 때는 아주 작았지만, 3-40년 후에 가서 보게 되면 우람하게 자라 있을 것입니다. 아들들이 장성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보다 더 뛰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소원일 것입니다.
그리고 딸들은 모퉁잇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집을 짓는데 모서리에 위치하는 모퉁잇돌은 건축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그리고 궁전을 짓는데 모퉁이돌이니 가장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장성한 나무와 궁전의 모퉁잇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평강을 누리를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3)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풍성한 결실로 받는 복입니다. 백곡이 가득하다는 것은 심는 것마다 다 좋은 결실을 맺었다는 의미이고, 양이 천배와 만배로 불어났다고 하는 것은 목축업이 왕성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당시는 지금처럼 짐승을 기를 때에 사료를 먹이지 않았습니다. 들에 비가 때를 맞추어 내려서 짐승이 먹을 풀이 풍성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4)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수소는 무겁게 실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출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외적이 침입하는 일이 없었기에 수탈당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은총을 받음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마지막 절이 잘 밝혀 줍니다.
(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앞부분은 감탄문입니다. “이런 백성은 얼마나 복이 있는지요!”
사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녀가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어서 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이미 복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하나님’입니다. 즉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님이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던 자신을 찾아와 주신 주님, 그런 자신을 사도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면,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복된 인생입니다.
다윗이 암몬과 아람 연합군과의 큰 전쟁과 같은 일을 앞에 두고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이 뜻보다 훨씬 높고 큼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 자기 백성들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의 뜻과 계획보다 훨씬 높고,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게 됩니다.
--------------------------------------------------------------------------------------
주의 백성들이 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목사님도 이 세상을 삼국지와 같은 세상이라 표현해 주셨지만 정말 강한 자가 살아남고 교활한 자가 살아남는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성실하고 의롭게 살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믿음으로 세상에 부딪치며 시류에 맞서 거슬러 살기로 작정하면서도 때로 낙담하고 좌절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크리스챤이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이 일상의 삶속에서 수없이 펼쳐 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실생활의 삶에서 맞게되는 도전, 특히 도저히 해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의 벽앞에서 때로 당황 하기도하고 절망 하기도 합니다.
오늘 시편144편을 기록한 다윗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들에서 양들을 돌보는 양치기로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목동으로 살아갈 때와는 다른 도전이 펼쳐졌는데 그것은 그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양치기로서 살아가던 그가 마주치게 된 새로운 도전은 전장터에서 상대 적군의 최강의 군사인 거인 골리앗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해도 양을 치던 목동이, 한번도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다윗이 당시 이스라엘의 골치거리였던 블레셋족속의 거인 골리앗 이라는 장수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3미터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행을 일삼으며 이스라엘에 전투를 걸어오는 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아무도 그에게 맞서 싸우겠다고 자원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적군의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농락하며 싸움을 걸어 오는 날 수가 40여일이나 지났는 데도 이 거인을 대항할 만한 이스라엘 군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골리앗의 호령앞에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만 있을 때 군대에 간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기 위해 전장에 들어간 다윗은 한번도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골리앗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다윗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기적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골리앗과의 전투를 기점으로 해서 다윗은 전쟁터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용맹한 군사로 변모하게 됩니다. 일개 목동에서 거인 용장 골리앗을 죽인 용사로, 그리고 훗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전쟁터의 지도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한 다윗이 드린 고백이 오늘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
하나님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의 현장에서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적자생존의 처절한 전장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지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주의 강한 용사로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약한 분이거나 겁장이가 아니시기에 오늘 우리가 직면한 도전앞에서 우리가 피하거나 숨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나를 용감한 군사로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나약하다고 내가 겁이 많다고 하나님마저 겁쟁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두렵다고 하나님마저 은둔의 하나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산속의 하나님, 사막의 하나님, 동굴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전쟁터와 같은 현장의 하나님이요, 전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목동 다윗을 용장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훈련은 보통 군인이 받게되는 정규 군사 프로그램은 아니였지만 다윗이 머물던 양치기 현장에서 다윗을 단련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완벽한 프로그램이였습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는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프로그램에 의해 훈련되었습니다. 밤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야생동물들로부터 양들을 되찾고 지키는 훈련, 밤마다 졸리운 눈을 참으며 곰이나 이리의 공격에서 양을 보호하는 훈련, 변변한 무기 하나 없었지만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흔한 돌맹이와 돌을 던지는 도구인 제구를 무기로 사용해서 짐승을 쫓는 방법을 하나 하나 배워 갔습니다. 다윗은 바로 자기가 살아가는 그 현장에서 훈련받고 성장해 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나를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시키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해보면 하찮아 보이는 곳이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의미없어 보이는 순간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나를 훈련시키십니다. '오랜 시간 내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무의미한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할까', '왜 내 인생이 낭비되고 있을 까'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삶을 절대로 헛되게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며 보내신 시간이 하나님에게는 절대로 그저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무명의 삶을 살아간 시간이 절대로 낭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시간이 절대로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시키십니다. 그 훈련의 장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내가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나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나를 용사로 만드시는 신병 훈련소입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용맹한 군사로 훈련시키시고 단련시키십니다. 전쟁터에서 도망가거나 숨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싸움터에서 피하여 숨는 겁쟁이가 아니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에서 용맹무쌍하게 싸우는 주의 용사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내가 책임지겠으니 겁내지 말고 돌격하라'는 하나님의 진격 명령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목동이였던 다윗도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목동으로서 블레셋과의 전투와 무관하였던 다윗도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의 골리앗에 맞서 거룩한 분노를 품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믿음의 사람 다윗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용사로 훈련시키시고 단련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재의 상황과 환경에서 우리 자신이 무력해 보이고 나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이끌어가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고 싶고 숨고 싶은 순간이 많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켜 주의 용사로 키워가십니다.
때로 치열한 전투속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5-6절: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번개를 번쩍이사 원수들을 흩으시며 주의 화살을 쏘아 그들을 무찌르소서'
또한 위험한 순간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2절: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러나 빛발치는 전투의 현장에서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용맹한 주의 군사로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전투의 현장을 거치고 난 자가 이제 누리게 되는 분복이 12절 이하에 이렇게 나옵니다.
12-15절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는 자는 바로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주의 승리를 경험한 자들입니다. 치열한 전장에 참여하는 주의 용사들은 십자가로 모든 권세와 사탄을 무장해제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개선행진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골2:15). 하나님은 우리를 주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켜 세우시며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15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