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사
<대경국보문학>> 제3집을 발간하며
옷깃을 스치며
가을이 연락 없이 다가오네요.
소리 없이 찾아오는 귀뚜라미의 노랫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을 이고, 살랑거리는 코스모스가 미소 지으며
진료실에 앉아 있는 나의 하얀 가운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창간호를 발행하던 일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코로나 블루는 아직도 우리 곁을 서성이고 있지만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서
벌써 3회째의 << 대경 국보 문학 >> 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더 가깝게 절친의 문우로 만들었고, 우리 국보 문학에 대한 여러분의 변치 않는 애정과 관심은, 식고 차가워진 제 가슴속 한구석을 매일매일 뜨겁게 달구어 옴을 느낍니다.
올해도 대구와 경상북도 곳곳에서 몰려든 감동적인 작품들은 멋진 또 한 권의 작품집을 배출해내었습니다.
항상 우리들의 멋진 스승으로 수고해주신 김 전 고문님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 임원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수필과 시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과 상처받는 사람들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들까지도 자신을 치유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대경 국보 문학 가족 여러분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작은 충격에도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남의 생명조차도 경시하는 우울한 현실 속에서, 그 옛날 릴케가 아닌, 바로 현재, 지금 우리 국보 가족 여러분이 부르는 생명 사랑의 마중물이 되는 <사랑의 노래> 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 있다는 그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작가와 작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을 아름답게 할
사랑의 꽃다발에, 축하의 풍선을 달아서 띄워드립니다.
2023년 9월 12일 늦은 밤에
발행인 박언휘
<달밤>
박언휘
내고향 울릉도를 닮은 반달
안으로만 차오르던 그리움이 있어
너를 바라본다
달빛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환하고 밝은 소리가
내가슴을 적셔 오네
이 그리움,
차마 혼자 간직할수 없어
그대 잠든 한밤에
달빛 파도되어 그대가슴으로
밤새 홀로 철썩이다가
그대 눈뜨는 아침이면
다시
나홀로 저물어 가리라.
행복한 여백
박언휘
바람을 차고 오르는 솔개 깃처럼
찬란한 아침을 맞는 우리
순백한 맥놀이에
전율하는 하늘을 담아본다
가끔 구름사이로 내민
꿈일 것 같은 부적을 거머쥐고
지저귀는 새소리
그 날개위로 마음껏 누벼본다
유채꽃 피고 노랑나비 춤추던
언덕배기 채마밭 고랑으로
얼굴하나 묻어둔 그 씨앗 같은 희망을 토닥이며
메마른 흙 갈피를 열어본다
거기 앳된 밤하늘 별들은
눈썹을 닫고 잠들어 있는데
손끝에 잡힐듯 걸린 꿈 조각들만
등불을 켜고 눈썰매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아름답게 채색해가는
아침의 창밖에
밤새 다듬질한 모시 저고리처럼
오롯이 내 가슴에 걸린 풍경으로 설레인다
출생지..경북 울릉도
등단: 2010년 국보문학(신춘문예 ,시및 수필등단),2019년 문학청춘 시로 재등단
2013년 한국 의사 시인협회 창립 멤버및 부회장
한국의사 수필가협회 고문
한국PEN 문학 홍보이사
대구 여성문인협회 회장
전>이상화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정회원
시계간지 <시인시대> 발행인
▲저서 <박언휘 원장의 건강이야기>,
<선한 리더십> < 안티에이징의 비밀>< 청춘과 치매><세상을 바꾼 여성 리더십>< 시집.울릉도>그 외 다수 .
박언휘종합내과원장
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박언휘.슈바이쳐 나눔재단 이사장
<시작 노트>
저는
어린 유년의 시절을
울릉도라는
갇힘의 장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직도
갇힘의 공포는
섬의 트라우마로
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쑥불쑥
마그마 되어 저를 꿈틀거리게 합니다.
육지의 딸을 그리며
차마 눈감지 못하던
어머니의
치마폭에서는
내 내
바다 내음이 묻어나오는데
울릉도는
나의 꿈이고
사랑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저의 사랑과
열정과
꿈, 그리고 아픔까지도
그 누군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2023년 2월 마지막 날밤 박던 휘두름
수필
<아버지, 살아보니 아버지가 모두 옳았습니다.>
경주의 작은 마을 산래.
가을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푸른 초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가, 새로 단장한 문중의 산소들과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우리 집안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나는 경주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고, 어쩌면 의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우리 가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일제강 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긴 뒤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당시 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한 인물이 손병희 선생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반역’ 활동이 발각되면서 우리 가문은 경주에서 울릉도로 터를 옮겼다. 일종의 유배였다.
울릉도에서는 살길이 막막했다.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다시피 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그때 울릉도에 살고 있던 명망이 높은 어른 한 분이 할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분은 고향인 해주를 떠나, 중국에서 학교를 다닌인텔리로, 지성과 어진 품성으로 울릉도에서 두루 명망을 얻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몇몇 분과 함께 울릉도의 작은 마을에 학교를 세우셨다. 두 어른이 가깝게 지내다 보니, 자녀들도 친해졌다. 할아버지의 아들과 어르신의 딸이 결국 웨딩마치를 울렸다. 두 분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어머니는 섬 소녀답지 않게 야망이 컸다. 뭍으로 나가 세상에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었다고 했다. 그 꿈을 접게 만든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키가 189cm였다.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의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가수를 꿈꿨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꿈을 접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18번 곡은 엄정행의 ‘목련화’였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과년한 처녀들이 혼절”을 했다고 했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목소리와 준수한 외모를 떠올려보면 거짓말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훔친 결정적인 요소는 다른 데 있었다. 내 할머니는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마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신이 ‘목련화’ 다음으로 즐겨 불렀던 곡이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을 언제 넘느냐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 초 신세
오늘 밤도 불러본다 어머님의 노래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면서 저 노래를 불렀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짱하다. 어머니도 그랬던 모양이다.
“왠지 측은해 보이더라. 곁을 지키면서 돌봐주고 싶었어. 뭍으로 나가 세상을 훨훨 날고 싶은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지.”
어머니의 고백이다. 어머니는 날개를 접고 섬에 남아 평생 아버지의 애인이자, 아내, 엄마로 살았다. 그러나 초야에 묻히셨으면서도 젊은 시절처럼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영어와 일본어를 독학어로 공부하셨다. 그 덕에 어머니에게선 늘 다양한 지식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나는 어머니의 얘기에 흠뻑 빠져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그 조그만 섬에서 무슨 사업"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울릉도에 꽤 많은 주민이 있었다. 초등학교만 8개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오징어 등이 잘 잡혀서 부자가 많았다. 한 마을에 텔레비전 한 대 있기 힘든 시절에도 울릉도는 가가호호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빨간 가죽가방과 신데렐라의 구두보다 더 예쁘던 빨간 구두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업을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늘 뿌리를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내게 종종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떤 집안인지를 잊으면 안 된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러니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답게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늘 베풀며 사셨다. 베푸는 방법도 참 지혜로우셨다.
추석이 다가오면 아버지는 소를 한 마리 잡았다. 어머니는 고기를 자른 다음 자식들에게 고기를 배달시켰다. 대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늘 “사람 있는가 보고 없으면 마루에다 살짝 놓고 오너라.”고 시켰다. 혹시나 고기를 받는 사람이 계면쩍어하지나 않을까 배려한 것이었다.
때로는 베푸는 것을 넘어서 과하게 돈을 쓸 때가 있었다. 집을 담보로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한때는 파산의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고, 의과대학 시절 4명의 동생을 위해 휴학까지 해야만 한 적도 있었다. 2등을 허락하지 않던 자존심 강한 섬 소녀에게는 아픔이었다. 눈물 나는 아픈 기억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얼굴 번듯하고 남한테 잘 주는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아야지’ 하는,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베풀며 사신 당신답게 아버지는 늘 “오로지 돈을 벌려고 어떤 직업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내가 의사가 된 것도 아버지의 권유였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사는 데는 의사만 한 직업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살아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섬은 의료 시설이 열악하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방학이 끝나고 나면 꼭 친구 한둘이 보이지 않았다. 방학 사이에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큰 병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축구를 하다가 다치거나 복막염 같은 가벼운 병이 큰 병으로 깊어져 죽음을 맞았다. 모두 의료 시설이 변변찮은 까닭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의사만큼 필요한 직업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된 후 꼬박꼬박 고향 울릉도와 같은 의료의 사각지대로 무료 진료를 다니고 있다. 그것은 학창 시절 의사가 부족하고, 약이 없어서 죽어간 내 친구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한 가장 작은 헌신이다.
아버지는 2002년 우리 곁을 떠났다. 돌아가실 때도 아버지답게 세상을 뜨셨다. 복지 사업을 하시는 삼촌을 도우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셨다. 그해 복지관 지붕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일을 도우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서 떨어지셨다. 남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서신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친가, 외가 어른들 모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던 분들이다. 직업을 선택할 때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늘 다른 이들과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셨다.
독립운동이나 애국이란 것도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말 거대하고 큰일이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가문이 세운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란 자연스럽게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직업이다. 그래, 그런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녀가는데도 그분들의 면면이 다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이 잘 나는지 나 스스로 신기할 정도다.
돌이켜 보면 고맙고 감사한 일들뿐이다. 아버지에게 세상을 보람되게 사는 법을 배웠고, 어머니에게는 실용적인 지식과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덕에 부모님이 숙제로 남기신 삶의 목표를 원만하게 이루어냈다. 내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일이 있다면 그건 모두 부모님의 은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사과드릴 일이 있다. “잘생기고 잘 퍼주는 남자와 결혼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 외모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오래전에 철회했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삶이 없다. 아버지가 백번 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