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편은 하나님에 대해, 상심한 자, 하찮은 자, 잃어버린 자를 보살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분입니다(2).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고, 저들의 상처를 싸매시면서 예루살렘을 세우십니다(3). 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세시고, 그 별들을 각각 이름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4). 그러니 그 크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생각하고 돌보시며 그들을 위해 예루살렘을 세워주시는 은혜를 누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신다는 말은 신약 성도들에게는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목사나 유력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7~9). 전능하신 창조주는 아무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을 의지하면서, 잘난 체하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1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들, 말의 힘(군사력)이나 사람의 다리(사람의 능력)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11). 하나님은 피조물의 능력이 아니라 피조물의 연약함과 필요를 주목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12~20).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니 아무도 넘보거나 해할 수 없습니다(13a). 외적 위협에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안으로는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자녀들로 평안하게 하십니다(13b~14a). 또 아름다운 밀로 배불리심으로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십니다(14b). 과거에 왕들은 자기 명령이 온 나라 안에 신속하게 전달되게 하려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만, 이제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 말씀이 속히 달려 온 땅에 이르게 되는 모습을 시인은 묘사합니다(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체 없이 신속히 전달되고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때에만 역사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데에도 현저하게 역사하시며 섭리하십니다(16~20). 이 구절들은 자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세상은 되는대로 되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간섭과 돌봄 아래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20).
146편과 147편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세상을 자기 힘이나 누군가의 힘을 빌려 살아보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를 세우시며, 우리 인생을 세우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분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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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시키는 하나님(1-6절)
시편 146-150편까지의 5편의 시를 ‘제3 할렐시’라 부르기도 하고, 시작하는 단어와 마치는 단어가 ‘할렐루야’이어서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시편 146편은 그 내용이 개인적인 감사를 드리는 예배시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146:2)”라고 노래하는데 ‘나의’와 ‘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반면에 147-150편은 공동체적 감사 예배시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47:1)”라며 ‘우리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표제어가 없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떤 사건을 기록하였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절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와 13절의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의 표현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한 내용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유다 자손들이 성전 건축과 성벽 재건을 하는데,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다 자손들은 그 이듬해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반대자들의 집요한 방해로 무려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재건을 재개한 지 4년 만에 마침내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와중에 반대자들의 방해 등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이 탄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있은 후, 약 72년이 지나고서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예루살렘 성벽이 52일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 일에도 많은 방해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시인이 나라가 안정된 후에, 그렇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송하며 이 시편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인데 명령형입니다. 이 구절에서 왜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지를 3가지로 말합니다. 그것이 ‘선하기 때문’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며,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 높이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유익하며,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울리는 것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2-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예루살렘을 세우시며’는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한 일입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서에서 살폈듯이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의 방해는 참 집요했습니다. 거짓된 소문을 퍼트리고,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며, 심지어 거짓 선지자까지 동원해서 방해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한 손에는 농기구를 잡고 또 한 손에는 무기를 잡고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파수(경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지도 않았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무기를 들고서 갔습니다. 그들은 조각난 예루살렘 성벽을 마침내 52일 만에 완공했습니다.
하나님은 조각난 성벽 완성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상심한’의 문자적인 뜻은 ‘마음이 깨져서 조각난’입니다. 하나님은 찢어지고 조각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인생을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과 인생이 찢어질 대로 찢어져서 아무리 많이 조각난 상태로 있을지라도 맞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면, 우리의 조각난 인생도 맞추어져 갑니다. 그렇게 조각난 우리의 인생을 맞추어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기에 필요충분조건이 되시고도 영원히 남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왜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를 또 이렇게 밝힙니다.
(4-5)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아담이 각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 동물들을 각각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숫자를 세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하십니다.
우주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주 안에는 약 1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은하계 안에 별들이 약 1천억 개 씩 있다고 합니다. 즉 우주는 한계를 가진 사람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숫자도 아시고 다 이름대로 부르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로 무더기로 부르시지 않으시고, 각각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부르시고, 복을 주셔서 창성하게 해 주셨다(사 51:2 참조)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든지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든지 간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각각 불러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지 않는 가정이나 가문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믿는 가정, 믿는 가문에도 그 구성원의 100%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언제나 개별적입니다. 그래서 감사이고 감격입니다. 그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자기 자신의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혹 우리가 성공한 자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에 있다할지라도 교만할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우리보다 총명하고, 우리보다 더 열심히 살고, 우리보다 더 선한 삶을 삶에도 우리가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은 정직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이루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7-11절)
1-6절도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7-11절도 동일하게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7-9)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심과 그리고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풀’은 아침에 자라서 저녁에 지고 마는,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을 상징합니다. 즉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풀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덮어주시고, 비를 내려주셔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짐승’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야생동물’을 의미하고, ‘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까마귀는 새끼를 낳자마자 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 새끼’는 아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하다고 여겨 꺼림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어미에게까지도 버림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위해서도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산에 자라는 풀과 들짐승, 까마귀 새끼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키우시는 분이시라면, 사람들 특히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지 않으시겠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10-11)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말의 힘’은 ‘군사력’을, ‘사람의 다리’는 ‘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군사력과 같은 힘을 숭배하고,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소망하는 사람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말의 힘이나 자신의 다리를 기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지 항상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고스란히 남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12-20절)
12-20절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12-14)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시인은 예루살렘이 찬송을 해야 하는 것은 ‘문빗장을 견고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대의 전쟁은 성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을 빼앗는 방법이 크게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빼앗으려는 성의 높이와 같은 성을 나무로 만들어서 그것을 성벽에 붙여서 성안으로 들어가 점령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아주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높은 성을 만든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또 그것을 이동하고 성에 붙이는 일은 더 어려웠습니다. 둘째는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성 위에서 뜨거운 기름이나 물을 붓거나 돌을 던지면 고스란히 당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가장 많이 선호되었는데,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성문과 빗장을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빗장을 강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보호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시 최상의 곡물이었던 아름다운(최고급) 밀까지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찬양함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15-18)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세 가지 자연현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고,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모두 겨울(추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것들을 다 녹이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아무리 눈, 서리, 우박과 같은 것이 쏟아지고, 휘몰아쳐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들을 녹이기에 충분히 따뜻하고 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언제나 춥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으면 언제나 따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19-20)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야곱 한 사람에게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율례와 규례(하나님의 말씀)’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민족이 이스라엘 밖에 없었지만, 그 말씀이 흐르고 흘러 우리들에게까지 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 단어가 ‘할렐루야_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전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목적으로 살면 실망하기 쉽고, 신앙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을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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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는 권유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1절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권유이든지 명령이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좋은 일, 아름다운 일, 마땅한 일 – 즉 우리 인생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와 본분을 망각하면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 많으신 어른들께서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 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친 다음, 시간이 흘렀을 때라고 합니다. 사랑해야할 그 때에, 마음을 표현했어야할 그 시기를 놓치고, 떠난 후에 후회와 아쉬움만이 크게 남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라는 고백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 이유들을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것처럼, 그래서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돌봐주시는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합니다.
육신의 부모는 때로 우리를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고 심지어, 아픔과 절망에 빠지게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이끄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초라했던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를 더하시며, 흩어졌던 우리를 불러 모으시고, 성도들의 교제(communion) 속으로 다시 이끌어 주시고,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상처를 보듬어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가 주님께 안기며, 감사의 고백으로 찬송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4-5절입니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무한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수많은 별들의 빛이 빠른 속도로 지구로 오고 있는데 아직도 그 빛이 도달하지 않아서 확인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그래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면, 그 별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합니다. 수천 년 전 이미 시편 기자는 “별의 수효를 세시며, 그 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이미 깨달았고, 그 엄청남을 상상하면서 우리에게 함께 찬양을 올리자고 권면합니다.
제게 가까운 사람 중에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는데, 천체 물리학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우주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깨닫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겸손하게 되며, 하나님을 뼈 속에서부터 감사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하시며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8-9절입니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생각해보면 빈손으로 태어난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입히시고 먹이셨습니다만, 여전히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넓은 평원이 있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수십키로미터를 탁 트인 들판만 있는 대지에 파란 하늘만 있습니다. 저 푸른 하늘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하얀 구름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견딜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며 지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줄기 구름과 비는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내리는 비로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목격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혹독한 건기를 지나더라도, 구름을 준비하시고, 비를 내려 생명을 소생하게 하시며,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 11절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
오늘 날 세속 사회에서 돈의 위력이 대단한 것처럼, 그 옛날 전쟁터에서는 말의 힘과 보병들의 다리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당연히 군마와 군인들의 능력은 모두에게 기쁨과 안전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속적인 힘을 소중하게 보지 않으시고, 사람의 중심, 영혼의 순결함, 모든 힘과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을 경외하며 변덕부리지 않고 한 결 같이 그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147편 후반부인 12절부터 20절까지는 각 개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12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예루살렘과 시온은 신앙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즉 예배가 있고,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와 기관을 의미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교회에 대해 염려하고 안타까움을 표현합니다. 그 점은 많은 부분에서 사실이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다하고,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힘쓰는 주님의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든든히 세우시며, 왕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예루살렘과 시온의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안전하게 보호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믿음으로 양육하는 자녀들을 복 주시며, 풍요롭게 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특히 14절을 주목하십시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기관장이 되어 보면 책임이 무엇보다도 중하고, 24시간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경내를 평안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는 양화진 경내에 있어서 이 말씀이 더 가슴에 다가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안을 베풀어 주십니까? 주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공동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5절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 도다.” 라는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주님이 이 땅에 명령만 내리시면, 그 말씀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말씀에 갈급한 영혼들은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많고, 생명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찬송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더운 지방인 유다와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낯선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과 서리, 우박과 얼음의 현상. 그러나 더운 지방에서 갑작스런 추위와 변화무쌍한 날씨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16절-18절입니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인생에도 화창한 날씨처럼 평탄한 시절이 있는가하면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와 서리, 우박과 같은 돌풍과 시련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그것을 녹이시고 푸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18절입니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주목할 것은 한파를 녹이는 것은 “말씀을 보내사”,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야곱에게 보이시는 도다” 말씀이 왔을 때, 얼어붙은 것이 녹고, 막혀 흐르지 않던 것들이 흐르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씀을 깨닫기까지 한파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보내심으로 우리 영혼 속에서 회심이 일어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해빙과 변화도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을 깨달음으로 온 맘으로 찬양 드리며,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가 속해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