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가 갖고 있는 덕목들
이승하 교수
▣ 계간평을 죽 써오면서 제가 느낀 아쉬움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 {미주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는 시인들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부족하구나 하는 점입니다.
- 연세도 대개 높고, 새로운 자극을 받을 기회도 적고, 한국 현대시의 동향에 대해서도 어둡고, 남들보다 뛰어난 시를 써야겠다는 경쟁의식도 적고, 미국에서 살기에 신간 시집이나 문예지를 사서 보기도 쉽지 않고…….
- 뭐 이런 이유들로 고국에 있을 때 보았던 그 시풍으로 지금껏 쓰고 계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한국인의 애송시며 명시는 아직도 1920∼30년대의 시입니다.
- 만해와 미당, 소월과 영랑, 백석과 상화, 윤동주와 이육사, 청록파 3인 등.
- 그런데 우리 시단에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확실히 받은 김수영과 김춘수가 있었고
- '후반기' 동인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들도 있었고,
◦ 80년대의 해체시가 있었습니다.
- 해체시는 실험시, 포스트모더니즘 시, 형태파괴시 등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80년대를 풍미하였고 90년대에도 적지 않은 작품이 씌어졌습니다.
- 천재시인 이상(李箱) 이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뭇 시인이 시 창작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 그런데 미주한국문인협회의 일원으로 시를 쓰고 계시는 여러분은 과거의 시 창작 방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날로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과거로 도피하거나 현재에 안주한다면 여러분의 시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 {미주문학}이 동인지의 성격에 머물지 않고 한국 시단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어야만 그 값어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충격'을 주는 시
▣ 시가 지향하는 것에는 '감동', '충격', '깨달음' 같은 것이 있을진대 우선 '충격'에 무게중심을 둔 것을 몇 편 살펴보겠습니다.
◦ 고국의 일간지 가운데 중앙일보는 여름에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하는데, 지난해에 당선작으로 뽑힌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얼음을 주세요 [전문]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 저는 이 시가 수천 편이 투고된다는 신춘문예에 당당히 당선될 만큼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시, 혹은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 하지만 방황하는 젊은이의 내면세계를 다룬 시로서, 신세대적인 감각과 문체, 발랄한 어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무척 신선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 "생리혈을 손에 묻혀/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만큼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기는 하지만 성욕은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운 본능입니다.
◦ 그런데 성 담론을 하면서 박연준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떳떳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시인의 자기독백체의 어투에는 당당함과 아울러 반항기도 배어 있습니다.
- 기성세대를 향한, 기성시인을 향한 반항기 말입니다.
- 따뜻한 차 대신에 얼음을 달라고 하는 신세대의 어법 속에는 분명히 도발적인 것이 있습니다.
- 심사위원은 이런 도발과 반항기를 높이 샀을 것입니다.
- 이번에는 문예지 당선작을 보겠습니다.
바기날 플라워 [전문]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잎잎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울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 줄기 꽃대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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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새벽이 오기까지는 / 정희성
40. 진달래 / 정희성
진달래는 1975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해 할복한 서울농대생 김상진씨로 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또한 노래로도 즐겨 부르는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