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최재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어려서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했다. 방학이란 방학은 깡그리 고향 강릉에서 보냈다. 여름이면 사흘이 멀다하고 동해 바다에서 바지락이며 성게를 잡으며 놀았다. 피부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온종일 땡볕에 나가 놀다 보면 살갗이 타서 감귤 속껍질처럼 얇게 벗겨지곤 했다. 어느 해 여름에는 두 번이나 허물을 벗었다. 강릉의 옛이름이 임영(臨瀛), 말 그대로 '바닷가'다.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첫날 꼭두새벽 나는 어김없이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원주를 지나 제천·영주·도계를 거쳐 묵호에 이르면 열 시간도 넘게 달려온 기차는 지친 듯 쉰 목소리를 낸다. 묵호에서 잠시 쉬고 무거운 몸을 추슬러 다시 달리기 시작한 기차가 터널로 들어서면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 사이 출입구 난간에 매달린다. 석탄 가루 흩날리는 터널을 빠져나가며 저만치 앞선 기관차는 회심의 멱따는 소리를 질러댄다. 이때부터 내 가슴은 이윽고 펼쳐질 광경을 그리며 방망이질하기 시작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라고 읊었지만, 내 경우에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바다였다. 묵호에서 출발한 기차가 터널을 지나면 망상 해수욕장의 너른 모래밭이 펼쳐진다. 이 순간 나는 비록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지만 눈만 감으면 하릴없이 되돌아가던 고향 품에 안긴다. 그리고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아, 바다다."
영어권 사람들은 기껏해야 "오, 시(Oh, sea)"라고 부르짖는다. 독일인은 "미어(Meer)", 프랑스인은 "메흐(Mer )"라 읊조리고, 중국인은 "하이(海)", 일본인은 "우미(うみ)"라 응얼거린다. 그 탁 트인 광활함 앞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처럼 무미건조한 단어들을 떠올렸을까? 가슴을 펴고 "아~ 바다~"라 부르면 그 검푸른 파도가 그대로 내 영혼 속으로 밀려든다. 새벽 바다라면 자욱한 해미가 내 온몸을 감쌀 것이다. 바다는 모름지기 "바다~~"라고 불러야 한다.
첫댓글 한편의 시같은 고백.
'뼛속까지 문과'였다던 최재천 교수님.
바다 ⛱️ 바다 ⛱️ 바ㄹㆍ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