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과 밤의 사이에서
마경덕
해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데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저녁은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꽂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 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보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더듬더듬 길을 찾는 동안, 자정의 밤은 산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뻘밭에 빠져 달려드는 바다를 바라보던 망연한 그때처럼
일시에 몰려든 어둠으로 숲은 만조였다
썰물의 때를 기다려야한다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들도 한줌 체온을 껴안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외출이 신발을 신는 것으로 완성되듯이
신발 끈을 조이며 어둠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수척한 밤이 몇 번이나 나를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어둠의 이마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잠의 나라
마경덕
우리는 그 나라의 주민,
그곳에서 열 달을 지낸 흔적이 복부에 있고
지갑을 열면 그 나라를 빠져나온 날짜가 꽂혀있다
밤낮 숱하게 들락거린 그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마취처럼 깊은 잠을 깨는 순간, 잠의 탯줄이 끊어진다
배꼽을 보며 내 어미임을 곧이듣듯이
잠을 숭배하는 우리는 어딘가 잠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모래시계를 뒤집듯, 생각을 뒤집어도
검은 안대를 쓰고 수면잠옷과 양말을 신고 기다려도
말똥거리는 잠, 같은 침대에 누워
어깨를 맞댄 사람은 코를 골며 잠의 나라에 입국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 그 나라를 찾아야한다
알람이 울리면 서둘러 빠져나와야한다
가끔 길몽이나 악몽을 들고
환한 대낮으로 걸어 나와 복권을 사거나 부적을 쓴다
불면을 처방하고 잠을 파는 흰 가운들
한 알 한 알 구입한 수면,
출구를 놓치고 영영 잠에 갇힌 사람도 있다
과다복용은 잠의 나라에서 불법이다
어젯밤 어둠으로 귀가한 사람들이
정량의 잠을 복용하고 환한 아침으로 쏟아져 나온다
1급 연장
마경덕
인부들이 떼로 모여 드릴을 돌린다
밤낮이 없는 한철 공사
울음 끝이 뾰족하다
허공에 구멍이 나는 시간,
소리에 감전된 감나무가 툭툭 풋감을 떨어뜨린다
평생 울지 않는 암컷들은 어디에 있나
그악스레 울음을 돌려야 무덤덤한 암컷의 심장이 뛰리라
거침없이 달려와 사람의 가슴까지 뚫어버리는
저 1급 연장
지하에서 수년 갈고 닦은 매미기술자들, 몸이 연장이다
그늘 밑 낮잠까지 단숨에 통과해 어디론가 달려간다
공사 기일이 다급하다고 찬바람이 불기 전 마쳐야한다고
울음은 더욱 사나워진다
허공마저 출렁거리는 저 동력은 어디서 끌어오는 걸까
잠깐 퓨즈가 나간 사이 재빨리
구멍 난 자리를 복원하는 허공
점점 달아오른 공사에 감나무는 퍼렇게 질려 가는데
날을 갈아 끼운 수컷들, 또 드릴을 돌리기 시작한다
칼집
마경덕
저 집이 고요하다
노련한 주인은 바람의 목까지 벤 전적(前績)이 있다
팔을 휘두르던 무사(武士)는
끝내 집에 들지 못하고 칼만 제 집으로 돌아왔다
과업을 마치고 싸늘히 식은
침묵을 달아보니 사백년이다
저 잠을 깨우면 잠복한 살의(殺意)가 튀어나와
누군가의 목을 겨냥하리라
비명을 맛본 칼은 피맛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정확히 급소를 찾아낸 사내처럼
집이 열리면
단칼에 어둠의 목까지 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칼집도 제게 꼭 맞는 몸만 모신다
둘은 혈연의 관계,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처럼
빈 칼집은 불안하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미쳐 날뛰던 기운도 집에 들면 온순하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일력日曆
마경덕
시간의 곳간이다
그런데,
곳간 열쇠도 없는 쥐새끼가 벽에 걸린 시간을 물어 나른다
차곡차곡 쌓인 오늘 내일 모레 글피…한 장씩 줄어 이 빠지듯 헐렁해지는데
감자 캐는 날, 파종하는 날, 장날, 약 타러 가는 날
저녁 늦게 돌아와 파지처럼 부욱 찢어내던 벽에 걸린 하루는
습자지처럼 위태로웠다
그런 날은 치통이 도지고 파스냄새가 허리에 달라붙고 시오리 길에 발등이 부었다
알뜰히 꺼내먹은 곳간
동그라미에 갇힌 깨밭 콩밭도 빠져나가고 풀숲에 숨은 뱀딸기도 일력의 붉은 입술도 다 바랬다
할머니가 기록된
파리똥만 남은 여남은 장의 시간
초록초록 마늘밭 싹 트는 소리 들리는데,
아직도 12월 6일이다
일력은 저곳에서 할머니를 놓쳤다
매트의 공식
마경덕
욕실 앞 직사각형 매트
할머니는 깔개, 엄마는 발닦개, 언니는 매트라고 부른다
두 가지 기능으로 활짝 몸을 펼친 깔개와 닦개
매트라 부르면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서 뒤룩뒤룩 늙어가는 언니처럼
깔개는 늘 바닥을 편들고, 닦개는 사람 편만 든다
저 인간,
사람으로부터 퇴화 중인 언니의 이름이다
우리 집 소파 위로 반송된 인간은
꼬리표를 달고 와 재활용도 쉽지 않다
조건만 보고 등 떠민 할머니가 전용 리모컨이다
까딱거리는 손가락 하나에 홈쇼핑도 달려온다
엄마의 잔소리에 짓밟혀도
카드를 훔쳐 무료함을 외상으로 긁어대는 마흔 살은
그때 TV속으로 스며들어 젖은 눈을 화면에 닦고 있었다
이것은 나만 아는 사실,
군데군데 외로움이 찍힌, 돌아온 싱글은 모서리가 많다
딱풀
마경덕
나사를 죄는 방향과
나사를 푸는 방향이 있다
오른쪽과 왼쪽은 노동, 또는 휴식
초록 옷에 노란 모자를 쓴 아모스*
한 바퀴 돌아 어딘가에 제 몸을 뭉개고 집으로 드는 날
딱, 반으로 키가 줄었다
문방구에 매달린 물체주머니
조개껍데기 나무토막 유리구슬 자석 조약돌 플라스틱조각들
물체의 대표들은 주머니로 들어가고
애매한 이것을 주머니는 밀어냈다
성분은 종種을 만들고
혈족은 혈족끼리 어울리지만,
짧은 스틱에 갇힌 흰 살점은
種이 다른
종이와 근친이다
백지만 보면 지분거리는 버릇은
누가 봐도
딱, 풀이다
*상품명
매달린 방
마경덕
몸이 빠져나간 헐렁한 몸짓들
매달리는 형식으로 한곳에 모였다
감을 따듯 긴 장대가 다녀간다 늘 같은 방식으로
나무는 가지에 열매를 매달고
사람들은 나무의 키보다 긴 팔을 발견했다
그때 나무에게 베껴온 것들, 허공과 장대만 있으면
우리는 나무보다 더 많이 매달 수 있었다
고개를 젖히면 옷봉에 다닥다닥 열린 어깨와 어깨들
사계절이 뒤섞여 늘 풍년이다
찌든 체취를 지우고 비닐에 갇힌 시간, 태그를 달고
호명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껍데기들
무게를 잡고 그럴싸한 각을 세워야한다
잃어버린 각도는 사람의 몸에 있었다
임대료에 비해 좁은 평수, 머리 위에 계산된 여백이 있다
결국 나무가 제 몸을 꺾어 장대가 되었듯이
우리는 정해진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좁은 방에 생계를 걸어둔다
먼지 낀 기다림을 골라내고 틈을 채워 넣는
빽빽한 세탁소 천장들
집단사육장
마경덕
아침은 저녁에게 사육되었다
조련사가 채찍을 휘둘러 새벽을 몰고 오듯, 우리는 아침에 길들여졌다
어지러운 침대에 졸음을 묻어두고 비누거품이 묻은 일곱 시를 드라이어로 말린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흩어진 매무새를 정리한다
단추가 떨어진 지난밤처럼 우리는 물렁한 체질, 칼라믹스처럼 손자국이 나는 체질
한번의 손짓에도 쉬 휘어진다
전철 손잡이에 매달려가는 아침
환승역에서 발을 밟히고 사육장으로 출근하면
두 손에 당근과 채찍을 든 노련한 조련사가 기다리고 있다
어서 묘기를 부려봐! 뒷짐을 진 여유 앞에
다급하게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
명령은 코앞이고 정답은 저편에 있다
퇴근 후 몰려간 어학원
졸음이 덮치고 혀가 꼬인다 멀고 먼 나라가 입안에서 빙빙 돈다
반드시 체질을 바꾸고 말거야
조련사를 꿈꾸지만 오답에 익숙한 우리들, 뒷골목에서 술잔이나 주고받으며 늙어간다
저녁이 내일을 조련하는 시간, 오늘도 야근이다
폭언과 서류뭉치를 면상에 던져도 사표를 쓰지 않는 사육하기 좋은 체질들,
의자와 책상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파의 휴식
마경덕
담장에 기대어 볕을 쬐는 낡은 소파
팔걸이로 바닥을 딛고 물구나무섰다
저것은 소파의 휴식,
가장 편한 자세로 서서 누워있는 것
늘 거실에 앉아있던 4인용 소파는 그동안
육중한 체중을 들고 짧은 다리로 서 있었던 것
처진 엉덩이를 드러내고 허공으로 번쩍 발이 들리는 순간
소파의 휴식은 시작된다
가로가 아닌 세로의 형식은 어떤 무게도 거부하겠다는 완강한 포즈
쿵쿵 뛰는 아이를 받아 안고 휴일마다 늘어진 낮잠을 등에 업고
척추가 내려앉은 저 거구巨軀,
네 개의 다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노동은 다시 재현될 것이다
몇 개의 나뭇조각과 스프링, 스펀지가 전부인 내부
안락한 쿠션에 그의 부실한 골격은 묻혀버렸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한 그가
가장 먼저 버린 것은 탄력이다
식구들이 잠든 한밤중에도 빈둥빈둥 지치도록 일하다가
짓눌린 발자국만 두고 왔다
휴식이란 제 몸의 무게를 바닥에 놓아버리는 것
몸을 따라 마음도 함께 따라 눕는 것
저 세로의 잠이 모처럼 편안하다
들고 온 통증을 내려놓고
고물상 담장에 몸을 눕힌 기다란 소파
그 곁에 지친 마음도 누워있다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신발論』『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