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로티가 크게 성공한 것은 또한 자유로운 상상력,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탁월한 홍보력 덕분이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이 항상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다. 파바로티는 즉흥적인 것, 예상치 못한 것을 분출시키는 스타일이어서, 너무 정확하고 교과서적인 지휘자를 만나면 몹시 힘들어했다. 에토레 그라치스, 프란체스코 몰리나리 프라델리가 그런 종류의 대표적인 지휘자였는데, 그러나 그들과의 마찰로 인해 파바로티의 음악은 더욱 성숙해졌다. 그는 드디어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했고, 1968년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데뷔하여 1971년부터는 고정적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파바로티는 국내외에서 오페라 공연뿐만 아니라 개인 콘서트와 음반을 통해, 그리고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통해 열정적인 팬들을 광범위하게 확보했다. 특히 1990년에 시작한 쓰리테너 콘서트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수많은 대중스타와 함께한 대형 자선 공연 ‘파바로티와 친구들’도 파바로티를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오페라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파바로티의 배역으로는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 역, <청교도>의 아르투로 역, <아이다>의 라다메스 역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 외에도 수많은 역을 소화하여 파바로티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는 파바로티에게 ‘하이 C의 제왕’(King of the high C's)이라는 영광의 별명을 안겨주었다. ‘하이 C’는 달리 ‘가슴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도’ 음이라 불린다. 그것은 정상적으로는,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음이었다. 전성기의 파바로티는 이 음을 탁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고, 토니오 역을 맡은 파바로티의 노래에 대해 언론은 ‘가슴에서 나오는 도’에서 더 나아가 ‘레로 가는 음’이라고 극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