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달수의 한국학카페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배상지裵尙志(1351∼1413)| 묘갈명 병서墓碣銘 幷序 _ 권해權瑎∙
옛적에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벼슬하지 않은 이가 오직 야은冶隱 길재吉再나 장 령掌令을 지낸 서견徐甄 등의 몇몇 군자뿐만이 아니었다. 더러는 그만한 사람이 스스로 재주와 덕망을 숨기고 감추어 마침내 사라져 후대에 전하지 않게 되었는데, 나는 백죽당 栢竹堂 배상지裵尙志 선생에 대해서는 느끼는 바가 있다. 선생의 이름은 상지尙志요, 자字는 전하지 않는데, 고려 말에 벼슬이 사복시 판사에 이르렀다. 고려의 정국이 문란해짐을 보고 물러나서 영가永嘉(안동) 금계촌金溪村에 은거하 여 그 당호를 백죽栢竹이라고 지어 뜻을 드러내었고, 우리 조선이 흥기하자 마침내 문 을 닫아걸고 여생을 마쳤으니, 선생 같은 분은 절의가 어찌 길재나 서견 같은 군자보다 못하겠는가. 배씨裵氏의 본관은 곡강曲江(흥해興海)으로 검교장군 경분景分과 그 후손인 승동정 광고光 枯와 위위승 약경若卿과 보승별장 유손裕孫과 전리 판서 영지榮至와 첨의평리 전詮이 선 생 윗대의 여섯 분 선조이다. 도첨의사사 평리 전詮이 삼사 판사 손홍량孫洪亮의 따님에 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고, 선생의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아버지 희정希正은 영의 정에 증직되었다. 아들 권權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환桓은 관찰사를 지냈으며, 남楠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강杠은 이조 정랑을 지냈다. 대대로 훌륭한 자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7대손 관찰사 삼익三益과 그의 아들 예문관 검열 용길龍吉에 이르러 문호가
더욱 커졌고, 지금은 그 후손이 매우 번성하다.
안동부 북쪽 가수리嘉水里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묘비에는 단지 선생의 벼슬과 성
명 및 생몰 연월일만 새겨져 있고, 역임한 관직과 행적은 생략되어 조금도 보이지 않으
니 어찌 된 일인가? 어떤 이가 “선생이 나라가 망함에 따라 죽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
겨 스스로 후세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다.”라고 하니, 그 뜻이 또한 슬퍼할 만하
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미 200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이 선생의 풍모를 기리는 것이
쇠퇴해지지 않아 금계촌 굽이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숙종 16년(1690)에 많은 선
비의 청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됨으로써 그를 표창하였다.
선생의 시집이 있었지만 흩어지고 잃어버려서 전하지 않고, 주고받은 시 몇 편이 야은
집冶隱集에 있다.
서애 문충공 류성룡이 일찍이 선생을 기려서
서리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니, 위태로운 시기에 세속을 벗어났네.[霜淸玉潔 高蹈時危]”라고 하였으니, 이 말
은 백대百代의 뒤에라도 선생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소백산 우뚝이 솟아올랐고 白山峨峨
낙수는 가없이 넘실거리네 洛水洋洋
높다란 4척의 무덤 있으니 有崇四尺
진실로 고려의 백죽 선생 무덤일세 寔惟高麗栢竹先生之藏
숭정 갑신년(1644) 후 임오년(1702) 10월 아무 날에 세우다.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의금부 동지사 예문관 제학 권해權瑎가 짓고,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 겸 춘추관 기주관 김하세金夏世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