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와 헌물.
1. 본문의 내용은, 출애굽기 40장에서 성막을 완성하고 봉헌하는 의식을 보충하면서, 각 족장들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출애굽 제 2년 첫 달 초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2. 그러므로 본문은 민수기가 시작하는 제 2년 이월 초일일 보다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민수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광야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군대와 성막 이동에 관한 일을 먼저 기술하고 나서, 지금 이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정확한 시점은 아마도 성막이 봉헌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 성막에 가득하게 된 광경을(출 40:34~35) 지켜본 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에 대하여 족장들과 백성들은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라는 영어 단어 worship은 가치를 인정한다는 영어단어 worth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며, 유일한 왕이시며, 지도자이시며, 인도자이시며, 보호자이심을 족장들의 예물드림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4. 예배에서 헌금이 드려지는 본질적 이유는 하나님께서 돈이 필요하거나 교회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체로 중요한 예배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의 고백임을 이 예물 드림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5. 드린 예물의 내용은 6개의 덮개 있는 수레와 소 열 두 마리였고(3), 이것은 성막 봉사에 사용되기 위하여 구별되었습니다(5). 이것은 각 레위 자손들에게 분배되었는데, 게르손 자손에게는 수레 둘과 소 넷,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 넷과 소 여덟이 배당되었고, 고핫 자손에게는 아무 것도 배당되지 않았습니다. 고핫 자손이 담당한 기구들은 모두 사람이 어깨에 직접 메야 하고, 절대로 만져서는 안 되었으며, 짐승에게 메우거나 수레에 실어 운반할 수 없도록 규정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민 4:15). 훗날 웃사는 이를 어김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삼하 6:1~11).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에 대해서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이 감독하였습니다(8).
6. 12일 동안 매일 족장이 한 사람씩 예물을 드렸고, 그 순서는 유다로부터 시작해서 동편 진영—남편—서편—북편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긴 내용이 12~83절까지 한 지파 당 6절씩 모두 72절이나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똑같은 반복으로 길게 쓰여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예물들을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드러내시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하나님께서는 예물과 헌신을 기쁘게 구별하여 받으시는 분입니다. 예물의 내용을 보면, 모두가 동일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지파가 숫자나 기타 빈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동일한 몫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드려 그 ‘은혜’에 참여함을 보여줍니다.
8. 우리는 본문에서 예물의 성격을 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물은 전부 자발적으로 드려졌습니다. 강요해서 된 것이 아니라, 성막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언약백성의 지도자는 족장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막이 세워지고 난 후, 족장들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았습니다. 레위인들이 성막의 기구들을 각각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민 3,4장). 운반해야 하는 양이 엄청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덮개 있는 수레와 소들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물도 역시 교회의 필요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왕이시며 지도자이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면서, 모두 자발적으로 드리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하나님 섬김이 이런 예물 드림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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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7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직후, 성막을 짓고 나서 성막을 거룩하게 구별한 날에 드렸던 봉헌예물에 대한 언급입니다. 출40장에 성막 봉헌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레위기를 지나 민수기로 넘어오면서 자칫 연대기적 흐름을 놓칠 수 있겠으나 여기에 나오는 사건은 출애굽 초기에 성막을 짓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였던 제물 봉헌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예표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 광야로 나아갈 때, 성막의 각 기둥과 널판지와 여러가지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데 사용될 수레 여섯대와 소 열두마리를 헌물하는 기록이 1절에서 10절까지 나옵니다. 이 수레와 소를 무거운 성물을 나르는 데 사용하고 가벼운 물건들은 직접 고핫자손이 어깨에 매고 나르게 됩니다. 둘째로 각 지파별로 제단 봉헌 제물을 드리는 내용이 11절에서 88절까지 나옵니다. 각 지파별로 드린 봉헌 제물은 동일한 것으로 동일한 양을 드렸는데 그 내용은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각 지파별로
130세겔의 은쟁반 한개,
70세겔의 은대접 한개, 은쟁반과 은대접에 담은 밀가루와 곡식제물,
10세겔의 금 그릇 한개와 거기에 담긴 향,
번제물로 드려지는 숫송아지1, 숫양1, 일년 된 새끼 숫양1,
속죄 제물로 드려진 숫염소1,
화목 제물로 드려진 황소2, 숫양5, 숫염소5, 일년 된 숫양5 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막을 완성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봉헌 제물로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노예 생활하면서 어디에서 은쟁반과 은대접 금잔이 생겼습니까? 그들이 노예 생활하면서 벌어서 구입한 것입니까? 하나도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로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때 애굽사람들이 자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애굽사람에 내리신 재앙으로 인해서 애굽사람들이 자진해서 자신의 금은 패물을 안겨주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제물로 드린 것은 사실 하나도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기적같은 도우심속에서 얻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람들가운데 거하시는 성막을 짓고 나서는 자신들의 진영안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 아낌없이 감사와 봉헌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능력의 하나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으로 아낌없이 감사와 봉헌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봉헌의 자세입니다.
하나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사 빈손으로 온 인생에 많은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주께서 주신 재물, 주님이 주신 재능, 주님이 주신 시간과 정성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누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많은 재물과 재산을 가진 사람도 목숨하나 살 수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것 보다도 귀한 생명을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이생에서의 유한한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게 하셨는데 이것은 결코 돈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손에 쥐어진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우리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때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봉헌 제물을 기뻐 받으시고 성막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봉헌 또한 기뻐 받으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일상의 우리의 삶에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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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속건제와 화목제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에서 제사장의 몫과 그 제물을 먹는 규례입니다. 특히 제사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 세밀한 부분까지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본문은 인구 조사가 끝난 출애굽 제 2년 1월 1일로부터 있었던 성막 봉헌식에 대한 내용인데,특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첫째는, 예물에 기름을 발라 구별했습니다.
기름은 특별히 성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세울 때s나 제사장을 세울때는 반드시 기름 뿔을 취하여 그 머리 위에 붓고 선지자가 기도하고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막 안에 있는 단이나 모든 기물들도 기름을 발라 성별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거룩하게 구별해 드려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거룩한 존재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자원함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각 종족의 감독들 곧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그 지파의 지휘관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드릴 때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전9: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예물을 받으시겠고 하시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물과 함께 바쳐진 사람의 마음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하나님과 참다운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지정된 방법으로 드렸습니다.
본문 11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내 임의대로 드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으로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예물의 종류와 방법 및 절기에 따라 지시하신대로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실 정도로 광대하시지만 또한 우리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감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가 오늘날 주님 앞에 예물드릴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린다 한들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단순히 물질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시간, 지식, 건강 등 모두 예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된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일에도 봉사를 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자를 기뻐하시는데 나는 과연 자원함이 있는가? 아니면 억지로 하는가?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민7:15-17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구약에서의 번제는 헌신에 해당되는 제물이고, 화목제는 감사의 예물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것은 헌신을 다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지 말 것을 다짐하고 상기시키는 제사였습니다.
행복은 감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많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신을 섬기는 피조물은 인간 뿐이요, 신께 감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입니다.
죄악된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은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굳어져서 감사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셨으나 감사로 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째로, 작은 것에 감사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6:11)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해결해야하는 오천명이라는 사람에 비해서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남자만 오천명이 먹고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나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감사는 크고 놀라운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셨습니다.
“돌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믿는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도 불러내어 살리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7)
예수님께서 잡히시기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면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최고의 감사를 드린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감사처럼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감사는 기적을 불러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적과, 죽음 앞에서의 기도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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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배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장막이 완성된 날입니다. 출애굽기 40장17절은 장막이 출애굽 제 2년 1월 1일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날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하고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 역사적인 날에 장막의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 드린 헌물과 그 방법 (1-9)
(1-2)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분하시는 성물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는 이 물건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에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인준하는 행위였습니다. 이와 연결하여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의 직분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분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스어인 ‘그리스도’와 히브리어인 ‘메시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표현인 그리스도와 메시아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성경에 나오는 기름을 붓는 성물들과 왕과 제사장, 선지자 직분의 원형이자 완성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을 바른 성물로 가득 차 있는 장막의 원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막의 원형이자 완성이십니다. 또한 기름을 붓는 직분이 왕과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것은 그 직분들의 역할의 완성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왕으로써 우리의 참된 통치자 되시며,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로서 참된 말씀되시며, 예수님은 진정한 제사장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는 참된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님 승천 이후 신약의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것이 구별됩니다. 사람의 경우 성령의 직접적 내주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직접 기름을 바른 장막 안의 기구들만이 거룩한 것이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교회 안에서 쓰는 기구들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여지는 기구들과 사람들이 모두 다 거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디모데전서 4장4-5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이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오늘 우리의 예배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이 가능해진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해주셔서 특별히 허락된 은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3절입니다.
(2-3)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2절에 나타나는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은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 이 지도자들은 두 지파당 덮개가 있는 수레 하나씩, 또 한 지파당 소 한마리씩 이라는 동일한 예물을 여호와께 헌물로 드렸습니다. 각 지파마다 경제적 규모와 다양한 상황의 차이가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지파에게 동일한 헌물을 바치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하게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상황에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한 예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았을 때 적절한 해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성전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과경제적 규모에 맞는 성전 제사 예물을 다양하게 열어두셨으며,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것을 보시다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에게 지금까지 헌금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열두지파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의 동일함은 단순히 물질적인 동일함을 의미하기보다,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순수성과 바른 중심으로 나와야 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파라는 조직의 구분상 이들의 마음이 나눠지고,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기 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각 지파들에게 처음 허락하신 동일한 은혜를 기억하며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나님께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분량의 예물을 드리는 일을 하며, 어느 정도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9절입니다.
(4-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이어지는 본문은 이렇게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 동일하게 바친 예물인 소 12마리와 덮개가 있는 6대를 어떻게 레위인들에게 분배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레위지파 중 게르손 자손들은 천이나 가죽 종류로 이루어진 장막의 외형을 이루는 기물들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므라리 자손들이 운반해야 하는 기물들보다는 더 가벼운 것들이었으므로 므라리 자손들이 받은 것의 1/2에 해당하는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므라리 자손들은 성막의 도구 중 가장 무거운 장막의 골격을 형성하는 목재류를 다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르손 자손들이 받았던 운반도구에 두 배에 해당되는 소 여덟 마리와 수레 네 대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핫 자손은 장막 내에 있던 중요한 성물들 및 성막 뜰에 있었던 번제단과 같이 하나님의 향한 제사의식에 직접 사용되는 성물의 운반을 담당하였고, 그것을 장대에 꿰어 자신들의 어깨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수레와 소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고핫 자손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접근해서 봉사하였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바, 게르손과 므라리, 고핫 자손 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고핫 자손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힘든 일을 했던 게르손 자손이나 므라리 자손이 불만이 많이 생겨 반항을 하며, 여러 일에 반기를 들었을 거 같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자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감당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불만과, 실수가 나왔습니다. 이는 고핫 자손이 특별히 거룩하게 여겨지는 기구들을 직접 담당하였기에 영적인 교만에 빠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교만은 광야 생활 중에 모세의 리더십에 직접 반기를 들게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하였으며,또 후대에는 하나님의 성물을 가까이에서 섬겼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영적인 교만이 생겨 어깨로 메고 가야하는 법궤를 훗날 다윗의 시대에 수레로 운반하려다가 수레가 덜컹거리는 순간 떨어지려는 법궤를 만지는 바람에 죽게 된 웃사를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동일한 자세와 태도를 강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과 권위의 질서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물을 다루거나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집례하면 그 자체로 어떠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이기에 우리는 이 영적인 교만을 경계하고,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교만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나타나기 쉽고, 교회의 직원이나, 오랜 시간 봉사한 봉사자에게도 언제든지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러한 모습을 갖지 않기 위하여 매일, 매순간 깨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비춰보고 깨어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0-17절입니다.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는 지파별 순서 (10-47)
(10-17)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그의 헌물은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본문에서와 같이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봉헌을 헌물을 가져다가 제단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헌물을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읽어본 12-17절에는 첫째날 드리는 예물로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8-23절에서는 잇사갈의 지휘관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둘째날에 하나님께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다시 다 읽어 보지는 않겠으나 그렇게 드려지는 예물들은 본문에서 드리는 지파의 이름만 달라질 뿐 그 예물의 양과 내용이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24-29절에서는 스불론 자손의 지휘관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셋째날에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30-35절에서는 르우벤 자손의 지휘관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넷째날에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36-41절에서는 시므온 자손의 지휘관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 다섯째날에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42-47절에서는 갓 자손의 지휘관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 여섯째날에 나아와 동일한 양의 소제물과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여러차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바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릴 때와 그 섬김의 방식에 있어 정해진 규모와 질서를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데, 지금 살펴보는 본문에서 지파별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순서가, 민수기 2장에서 나타나는 지파 별로 이동할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동 순서가 같다는 점입니다. 이는 장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들에게 정해진 위치가 있으며 이 지파가 이동을 할 때 동남서북, 이라는 지파의 순서로 이동을 하도록 명령을 하셨고, 이와 같은 순서로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전투를 하고, 이동을 하는 그 질서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봉헌을 하는 예배의 질서를 동일한 순서로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예배의 질서는 그 중심이 동일하게 움직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는 본래 악한 일을 하는 부정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니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쉽게 자신의 삶과 예배를 분리 시키지 않습니다. 과거 마태의 손에 들려진 펜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여 사람들을 죽게 하는 도구였으나, 하나님으로 인해 거룩함을 입은 마태의 펜은 이제 복음서를 기록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7장은 시편 119편에 이어 성경에서 두 번째로 긴 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별로 드린 헌물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을 때 시간의 흐름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민수기 1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고 합니다. 즉 민수기 1장은 출애굽한지 1년 1개월이 지난 시점을 말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민수기 7장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7장 1절을 보면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이라고 합니다. 어제도 다루었지만, 출애굽기 40장 17절을 보면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증거합니다. 즉 애굽을 떠난 후 1년 되는 날에 성막을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7장 1절에서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일은 민수기 1장 1절보다 앞선 사건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7장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는 계속해서 이 시점을 다루고 민수기 10장 11절에 와서야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간에 다른 이야기들을 배치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군대로서 계수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레위기와 함께 조화롭게 읽어 보겠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 즉 둘째 해 첫째 달 첫째 날에 성막과 그 기구에 기름을 바르고 각 지휘관들에게 헌물을 받기 시작합니다. 레위기 8장 10절-12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고 그렇다면 제사장 위임식 역시 같은 날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9장을 보면 여덟째 날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와 위임식을 완수합니다. 즉 각 지파에서 헌물을 드리는 동시에 제사장 위임식을 함께 거행했던 것입니다. 성막이 세워지고, 제사장이 세워지고, 각 지파에서 헌물을 드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이 순간 12일에 걸쳐 즐거이 제사를 드리고 곧이어 유월절까지 지켰습니다. 가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허니문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48-53) 일곱째 날에는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헌물을 드렸으니 그의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 쟁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의 헌물이었더라
한 지파가 헌물을 드리면 그것을 취하여 그날에 제사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총 12일이 걸리는 행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일곱째 날 에브라임 자손의 지휘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의 헌물로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었지만, 헌물을 드리는 일은 지속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특별히 성실하게 이 기록을 남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내용은 한 번만 기록하고 이하동문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를 영어로 하면 Numbers인데 사람 계수뿐 아니라 헌물 계수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 행렬은 일종의 일람표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성전에 보관해 놓는 예물 등을 그 크기, 성격, 값어치 등에 따라 기록하는 문서 작성 요령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성소의 세겔을 약 12그램 정도로 본다면 그들이 드린 기물은 소제물을 드리기 위한 1.5kg 정도의 은쟁반과 800g 정도의 은대접, 향을 담는 120g 정도의 금잔입니다. 그리고 번제물을 위한 수송아지 하나, 숫양 하나, 일년 된 어린 숫 양 하나, 속죄제물을 위한 숫염소 하나, 화목제물을 위한 소 둘, 숫양 다섯, 숫염소 다섯,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을 헌물로 바쳤는데, 물품을 값어치 순으로 정리한 것처럼 동물들의 경우에도 덩치가 큰 짐승부터 시작해서 점점 작은 짐승 순으로 제시합니다.
간혹 몇몇 병원 로비 벽면을 보면 후원자의 이름과 그 금액을 기록해 놓은 모습을 봅니다.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라야 뭘 저런 걸 해놨나 싶을 수도 있지만, 당사자나 그 가족이 보면 의미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막을 완성하고 그 필요한 기물을 공급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두어 후손들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로 한 그날을 기리며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12일간 이어지는 각 지파의 헌물과 제사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알았을 것이고, 이후 두 번째 지키는 유월절과 첫 인구 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군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아마도 지하철 역사를 다니시면서 연예인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주 앳된 연예인들 사진과 더불어 누구누구야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마워 등등의 문구를 보면서 생소함을 느낍니다. 몇 백만 원에 달하는 그런 광고를 기꺼이 내는 이유는 그 사람이 보고 기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알리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연예인들에게 소위 조공이라고 해서 값비싼 선물을 줄지어 보내는 팬들도 있습니다. 사실 연예인이 팬들보다 일반적으로 돈도 많고 좋은 물건을 접할 기회가 많을텐데도 굳이 그렇게 합니다. 저는 이런 문화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나라 팀을 승리로 이끌어 주면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 지휘관이 드린 헌물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모가 뛰어나거나 노래나 연기를 잘하기만 해도, 그리고 그들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따뜻한 말을 던져도 그들을 동경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 돈을 모아 생일 축하 광고를 하고 또 비싼 선물을 보냅니다. 연예인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줌으로써 더 그 대상에게 충성심을 품고 그 대상을 더 기뻐하게 됩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는 예수님 말씀처럼 마음이 있기에 보물을 두고, 보물을 두기에 마음이 가는 법입니다. 연예인들은 그들과 함께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보물을 두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영원히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며 또 이루어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찾아오셔서 거주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하였고, 자신의 것을 드림으로 그 감사함을 표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이러한 감사의 마음이 있는지, 하나님께 기꺼이 보물을 드릴 용의가 있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봉헌물의 총합과 회막에 들어간 모세(84-89)
84절부터 88절까지는 그 헌물과 제물로 드린 짐승의 총합을 기록합니다. 따라서 날마다 드린 양의 열 두 배에 해당합니다. 이 통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를 후원하는 일에 모두 균등하게 책임을 져야 함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큰 지파라고 많은 부분을 감당하지도 않고, 작은 지파라고 적은 부분을 감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 자로서 동등하게 그 책임을 다하여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고 할 때 그 절대적인 분량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과연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하는 감격에 겨워 자진하여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미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백성이 예물을 드릴 때 너무 많이 가져와 쓰기에 남음이 있어 가져오지 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드리고 싶어 하였습니다. 드림이 기쁨입니다. 사랑하면 주고도 또 주고 싶습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고봉밥을 퍼주는 마음, 고향집에 가면 바리바리 넘치게 싸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에 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드리고도 또 더 드리고 싶은 이 마음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둡니다. 그리고 드리면 모자를 것 같지만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할 수 있게 도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며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이러한 봉헌물은 그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어떠한 절차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생활의 예배화를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생활화 역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예배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말씀에 의거하여 우리의 예배 태도 역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새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모세는, 주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으로 갔다. 그 때마다 모세는, 증거궤와 속죄판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곤 하였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모세는 회막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증거궤란 증거 즉, 두 개의 십계명 판을 담은 용기를 말합니다. 또 속죄소는 증거궤 덮개 위에 깔린 평판으로서 그 위에 그룹이라고 하는 천사의 형상 두 개가 있었습니다.
사실 성막의 가장 큰 의의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곳에 붙잡아 두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기보다는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었습니다. 장막의 가장 큰 특징은 이동성에 있습니다. 장막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성막 역시 정해진 제의 양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저기 있다는 위안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전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귀중한 부르심을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여, 고개를 들지 말라고 우리의 뒤통수를 때리며 이 세상에 눈 박고 코 박고 살라는 세상을 이기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심 삼고, 마태처럼 이 나를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진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