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인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없다!
1. 본문은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빠른 속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혼의 문제로 시험합니다(2). 이것은 신명기 24:1의 해석을 둘러싸고 바리새파의 샴마이 학파(보수적)와 힐렐 학파(진보적) 사이에 이견이 있던 문제였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을 성적 부정과 같은 행위로 해석했고, 힐렐 학파는 포괄적으로 남편이 수치스럽게 여길만한 모든 행동으로 규정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근거하는 모세 율법에서, 창세기의 첫 혼인의 자리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쓰고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인간의 완악함으로부터 여인들을 보호하려는 차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혼인에서 하나님은 남녀가 결혼으로 한 몸이 된 것을 누구도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혼불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후에 더 자세히 묻자, 주님은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고 새로 결혼하는 것은 전 배우자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율법을 악용한 인간의 죄된 본성을 돌이키시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셨습니다.
2. 어린 아이들의 일이, 결혼 문제에 이어서 등장합니다(13~16). 주님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교훈하십니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꾸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14). 어린 소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실족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9:42).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3. 한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가진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그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느끼고 슬픈 기색으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실족하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부자가 자기 의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요구는 부자로 하여금 그의 진정한 사랑이, 하나님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재물에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뭔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시기까지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사랑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21). 재물을 사랑하는 한,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부자가 떠나간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심으로써, 인간이 결코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7).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은 것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와 복음을 위하여 희생한 자는 이 세상에서 백배나 돌려받지만,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제자들이 착각하지 않도록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도는 보상을 위해서 감내하는 희생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부인을 요구하는데 부자 청년은 거기서 걸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틈이 나는 대로, 이 메시아 사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나중에 주님께서 왕권을 회복하실 때, 자기들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마음과 메시아 사역의 핵심을 깨닫지 못함을 잘 드러내는 부탁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냐고 물으시지만, 이것이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두 사람은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가 제자들 사이에 불화를 가져온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르치십니다. 주님 자신도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 이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도가 우리 눈에 밝히 보이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세상 것들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삶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6. 눈이 먼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치유 기사입니다. 주님께서 여리고에 이르시자 길가에 있던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조용히 시키려고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소리를 질러 결국 주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주님은 그를 고쳐주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주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을 우리 안에 먼저 만들어주십니다.
7. 주님은 줄곧 사람의 마음, 그 중심을 주목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보다는 자신의 행위만 드러내거나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실패하는 부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당한 이혼의 경우를 주장하고 싶어 했지만, 주님은 인간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에서 결혼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보다 어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유리하다는 생각, 율법을 행하는 부자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주님은 부인하십니다. 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속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은 섬기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며 세상적인 관점에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더 깊이 우리의 내면, 우리의 중심, 그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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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1)
마가복음 10장의 시작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증거합니다.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는'거기서' 떠나셨습니다. '거기'는 9장 33절의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인 가버나움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셨고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에 도착하셨습니다. '요단 강 건너편'은 요단강 동쪽, 베레아 지역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예수님께서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고 계신 것과 예수님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가까워졌음을 지명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최북단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막 8:31), 그분의 발걸음은 고난과 죽음, 부활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남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에 도착하시자 다시 무리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셨습니다. '전례대로'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익숙하다, 습관이다'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늘 하시는 대로'라고 번역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습관적으로, 늘 하시는 대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 중 하나인 가르치시는 사역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치시는 사역의 주 대상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함께 걸어가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처럼, 지금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 된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례대로', '늘 하시는 대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실 뿐만 아니라 전례대로 가르치시는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귀울여 보십시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받아들이를 소망합니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2-5)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의견을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이혼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아내를 버리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성의 위치, 특히 결혼한 여성의 위치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더욱 이 질문 속에는 자기 아내와 이혼할 남자의 권리만을 묘사합니다. 유대교의 법과 관습에는 여자가 자기 남편과 이혼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단순히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의견을 묻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요단 강 건너편인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있는 곳으로,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헤롯 가문에게 이혼은 민감한 주제였고 세례 요한의 생명을 취한 것처럼 예수님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만들고자 한 질문이었습니다.
(3-4)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흉한 질문에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바리새인들의 대답에서 사용되는 흥미로운 동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령'에 대해서 물으시지만, 바리새인들은 '허락'이라는 용어로 대답합니다. 지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같은 성경구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4:1~4)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이혼 증서만 써주면 이혼을 할 수 있다는 이혼의 '허용' 근거 구절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같은 구절인 신명기 24장 1~4절을 허용이 아닌 '명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세는 이혼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야 한다는 명령을 함으로 이혼을 당한 여성에게 당면할 어려움을 최소화 시켜주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같은 성경 구절을 생각하면서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책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싶은 권리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면책을 추구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바라본 이러한 관점은 결국 사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으로 무시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바라볼 때 책임이 아닌 권리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슬픔과 어려움을 결코 술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위로와 은혜를 간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술 취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을 통해 취할 정도만 마시지 않으면 되니 술을 마셔도 문제없다는 허용의 구절로 바라봅니다.
(5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4장 1~4절의 명령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서 ‘마음이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완악한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마음이 완악한 남편이 책임이 아닌 권리를 추구하여 아내를 버리기에, 모세는 부득이하게 이혼 증서를 써서 보내라는 명령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악함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지금 예수님께 질문한 바리새인들 또한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완악한 마음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며 책임지려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으로 욕망과 자기 권리를 채우려는 죄악 된 마음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쓰고 있는 율법이라는 마스크 뒤에 숨겨져 있는 죄악 된 마음을 폭로하십니다.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12)
(6-9)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통한 명령이 있기 전에, 더 나아가 사람이 완악한 마음을 갖기 전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명령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창조 목적은 결혼입니다. '둘이 아니요 이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결혼은 결국 부부가 연합을 이루는 것이며 분리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단 하나의 '몸'이라는 형상은 결혼을 단순한 서로의 편익을 위한 만남이 아닌 한 존재가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한 몸, 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혼은 허락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며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부부는 서로를 바라볼 때 완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심으로 이혼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0~12)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어떤 사유에서든지 이혼은 결국 상대에게 간음을 행함이기에 이혼은 결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라는 표현을 하심으로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함을 드러내시며 여성의 위치를 상승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여성이 남편에게 버림받는 이혼에 대한 주제에서 즉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만져주심을 바라며 어린아이를 데려왔습니다. 16절에 예수님께서 이들을 안고 안수하신 것으로보아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께서 팔로 안아주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아이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어린 아이들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부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9장 37절에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4-15)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의 분노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고 금하였던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노하셨던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막아세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아닌 세속적인 관점에서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두 번이나 말씀하심으로 지금 제자들의 행동이 하나님 나라와 얼마나 무관한 행동이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곧, 어린 아이들과 같이 소외되고 외면받아 하나님의 손을 힘입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한 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나타내십니다. 더 나아가 어린 아이가 가진 특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을 신뢰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이 제공하는 것을 받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연약함으로 인해 잘 받아들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작은 어린 아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어린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심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섬기며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대상을 용납하지 못하고 수단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리는 사순절입니다. 완악한 우리를 용납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이제 용납받은 자로서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완악했던 전반전의 삶을 정리하고 우리 인생의 감독 되시는 주님께 순종함으로 역전의 후반전, 승리의 연장전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영생함을 뜻합니다. 영생은 이 땅에서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꿇어 앉아 묻자오되(17-20절)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인생의 유한함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된 평안을 누리기 쉽지 않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최대한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 인생이 끝이 아니며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 달려가 꿇어앉은 사람은 절박한 마음으로 영생을 위한 답을 얻기 원하였습니다. 17절의 ‘한 사람’은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으로,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원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젊고 재물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영생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좀 퉁명스러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선함을 부정하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자의 질문의 의도를 아시고 영생의 조건이 선행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선(善)이 영생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읽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무리 선하더라도 그 선함으로 영생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십계명 중 사람에게 지켜야 할 6가지 계명입니다. 이를 들은 질문자의 답변입니다.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답변으로 보아 그 사람은 아마도 바리새인의 가문이나 그에 준하는 가정에서 철저히 부모로부터 계명과 율법에 대해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가 보완해야 할 부족한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21-22절)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젊고 재물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부족함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많은 것들 중에 유일하게 하나를 가리킨다기보다 매우 중요한 한 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에게는 100에 99의 비율을 차지할 정도의 중요한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2가지를 생각해 보면, 첫째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미전도 종족에 복음전파 사역을 할 때에 그들과 함께 그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막혔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나눠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빼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도저히 양심이 찔려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 말씀을 번역하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되었고 막혔던 전도사역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21절의 예수님 말씀을 ‘강조법’으로 여기고 해석해 본다면, 자신의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들을 제외한 과잉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일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선행 소식을 듣습니다. 기부자 역시 최소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정도는 남겨둡니다. 그럼에도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뉴스를 가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22절에 예수님께서는 질문자가 재산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 해석이든 강조법적 해석이든 어떤 경우라도 그 말씀을 실천하기에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를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기부천사들을 보면, 사회가 큰 어려움을 당할 때 큰돈을 기부하거나 평소에 구호단체나 어려운 기관에 정기적으로 매달 수 십 만원에서 수 백 만원을 기부합니다. 나눔은 자신의 소유에 비례해서 이루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물질의 소유가 많지 않더라도 성심껏 기부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왜 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가 입니다. 유한한 이 세상에서 영생을 원한다면 선하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족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주님을 따르는데 불필요한 것을 정리한 후 주님을 따라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재물 또는 불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주님을 따르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히 어렵도다(23-27절)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재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근심하며 가자 예수님께서는 재물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들은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더 놀란 이유는 예수님께서 낙타와 바늘귀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낙타와 바늘귀 비유에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27절로 말씀하셨습니다.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물질 소유의 정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때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물 많은 사람에게는 재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재물이든 죄든 무엇이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 어떤 것도 우선이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비단 물질의 부자에게만 천국 문이 낙타가 통과해야 할 바늘귀가 아님을 베드로의 고백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28-31절)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물질의 부자만이 구원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은 충분히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에게 구원은 재물만을 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셨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보다 그 어떤 것도 우선시하지 않으면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영생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영생은 물질과 가족과 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아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자신의 가족만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의 소유를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난 순서대로 육체가 성장합니다. 형이나 언니가 동생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태어난 사람은 순서대로 믿음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먼저 믿었으나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뒤처질 수 있습니다. 재물 많은 사람이 먼저 믿었으나 나중에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뒤처졌을 것이고 제자들 역시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었으나 주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따르지 않았다면 믿음이 후퇴하였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태어나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재물 많은 사람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십시다.
수난 예고, 제3차(32-34절)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본문 32-34절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46절에 ‘여리고’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일행은 여리고 근처에 이른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고도가 약 800m 정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해발이 약 –250m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올라간다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 어느 곳에 살든, 그곳이 산꼭대기일지라도, 서울을 갈 때 ‘서울에 올라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 근처에 머무르고 계신다면, 예루살렘과는 25-30km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4개의 동사로 말씀하셨습니다. ‘능욕하다’, ‘침 뱉다’, ‘채찍질하다’, ‘죽이다’입니다. 이 동사를 모두 ‘그리고(카이_kai)’라는 접속사와 ‘미래시제’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이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3번째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실 것을 처음 말씀하신 것이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은 바르게 했을지라도, 아직도 주님이 왜 오셨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실 것을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데,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두려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버나움에서 누가 크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지라도, 제자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로 수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번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단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굉장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정말 제대로 알아듣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와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찾아와 말하길,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등극하시면, 자신들을 요직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의 우편과 좌편에(35-45절)
35-45절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찾아와서 부당 청탁한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기독교의 핵심인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하심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자기들이 할 말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요청했다고 증거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차례대로 말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가는 두 아들이 이야기한 것을, 마태는 어머니가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도 예수님이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것은 두 제자가 물을 것을 몰라서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함에 답답하고, 어이없음에 질문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답변이 이러하였습니다.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는 ‘주의 영광 중에서’라고 표현하지만, 마태는 ‘주의 나라에서’라고 표현합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메시아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재상이 3명 있었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순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오른쪽이 더 상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우편과 좌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당신이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면, 우리를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해 주십시오. 물론 영의정을 시켜 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이러하였습니다.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잔’과 ‘세례’는 모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너희는 내가 받는 고난과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는 “너희는 결코 동참할 수 없다. 그 고난과 죽음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둘은 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참 신비하게도 12제자 중에서 야고보는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이 땅의 ‘메시아 왕국’에서 우편이나 좌편에 앉지 못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자리에 앉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는 모두 초대교회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아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자연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요한 역시 그들이 그린 이 땅의 메시아 왕국에서는 우편이나 좌편에 앉지 못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말을 들은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나머지 열 제자의 반응은 화를 내는 것, 특히 격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자기가 가지고 또 자기가 누려야 하는데 상대가 가져감으로 자신이 가지거나 누리지 못할 때에 내는 화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께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형제가 먼저 말함으로 자기들이 말하지 못해서, 그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되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즉 열두 제자의 생각이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마가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세상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큰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 곳이고, 꼴등은 기억하지 않고 1등만 기억하는, 아니 2등도 잘 기억하지 않고 1등만 기억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이 섬길수록, 많은 사람을 섬길수록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과 당시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과 또 앞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갈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섬기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히 크신 분이십니다.
바디매오 눈을 뜨다(46-52절)
46-52절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종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종려나무 성읍’이라 불렸고, 겨울에 따뜻하고, 봄에 꽃들이 만발해서 헤롯대왕의 겨울 별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그곳과 대조적인 사람, 시각장애인이자 거지인 바디매오가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의 아버지는 ‘디매오’였습니다. 헬라어로 ‘바(bar)’는 ‘아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죄수 ‘바라바’는 ‘사람의 아들’이고,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온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매오는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당시까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있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더 정확하게 알 때가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외침을 그저 눈먼 사람의 소음으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49-5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단지 외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그의 전 재산이었고, 자신을 보호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이상 그는 이전의 삶에 집착해서 살지 않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바디매오는 주저함이 없이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에게 앞을 보는 것은 꿈에서라도 원하는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앞을 보게 하는 일은 메시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디매오의 요청은 자신이 다시 볼 수 있게 됨을 원하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려옵니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가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보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앞을 보게 된 것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만난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것이고, 부활하실 것을 3번씩이나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후반전과 죽음 이후인 연장전을 책임져 주시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메시아왕국에서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세상적인 것이 갖추어지면, 자신의 인생 후반전과 연장전을 보장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랐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 후반전과 연장전을 책임져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남은 생은 물론, 죽음 이후까지 책임져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