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의 거장
오태석
1963년 대학시절 동인제극단 회로무대(回路舞臺)를 창단한 이래 반세기 넘게 연극판을 누벼온 극단 ‘목화’의 오태석.
6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쓰고 연출해 온 한국의 대표적 연극인인 그에게 세계 연극계는 무한한 관심과 찬사를 보내왔다. 한국의 전통적 소재와 공연기법은 물론, 전세계의 연극적 요소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자적 연극세계를 구축해 온 오태석 선생. 평생을 두고 치열한 실험과 도전 속으로 자시 자신을 내몰며 연극계를 지켜온 오태석 선생의 인생을 만나보자.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으며 ‘현실’이란 불안한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연극은 ‘허구’라서 편안했고 되도록 오래 머물고 싶었죠. 저는 평생 연극이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셈이에요.“
Q. 선생님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78년 가을, 연출가 오태석이 국립극단 배우들과 함께 올린 <물보라>는 연극계에 충격을 주었다.
서구의 번역극이 주는 이국적인 맛에 매료되거나, 영웅과 투사를 극화한 역사극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분위기에서 연극
안에 풍물이 돌고 고풀이가 오르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1940년 충남 서천군 서천면 선암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셨고,
국내2기 변호사로 경무대 법무관이었어요. 6.25 전쟁이 터졌지만 어머니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3남1녀인
형제자매와 할머니까지 일가족은 피란을 가지 못했어요. 당시 저희 집은 남대문 5가에 있었어요.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몰려오더니 “야, 너희 아버지 잡혀간다!”하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집으로 달려갔죠. 그랬더니 집 앞에 군용 지프차 한 대가 서 있더라고요.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담벼락에 몰아 세우고 총을 들이대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봤죠.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제 나이 열 한 살, 어머니 나이가 겨우 서른을 갓 넘겼을 때의 일이에요.
저는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충남 서천으로 피란을 떠났어요. 한 달 넘게 걷고 걸어서 도착한 집성촌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을 보냈어요. 저는 시골에서 보낸 3년이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전쟁이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것을 봤지만 자연 속에 숨쉬면서 일상을 꾸려가면서 제 자신이 치유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Q. 어떤 경험이 그런 느낌을 주었나요?
거머리를 떼고 메뚜기를 잡으면서 자연이란 더 큰 것을 경험하게 된 셈이죠. 그때는 농약을 풀 때가 아니어서 논에 게나
개구리가 많았어요. 자연에서 개구리나 게를 잡다가 ‘누가 온다!’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논두렁으로 숨고요.
저 멀리서 탄이 터져 연기가 나면 논두렁에 엎드려서 그 광경을 구경했죠. 참담한 죽음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현란한 그
광경을 목격하면 두려우면서 재미있는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어요. 전쟁통이고 집안은 풍비박산 났지만 그걸 위로해주는
것들이 논바닥이나 개울가에 흩어져 있으니 거기서 치유를 받은 셈이죠..
Q. 아버지의 납치를 직접 목격하셨으니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요.
눈 앞의 모든 견고한 것들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경험을 한 거잖아요. 어린 나이였음에도 ‘삶이란 이런 거구나.
참으로 변덕스럽고 무서운 것이로구나, 맨얼굴로 사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가슴에 새기게 됐어요.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열한 살의 나이에 본 거잖아요. ‘세상은 맨살로 부딪힐 데가 아니다. 철가면을 쓰자.’ 결심했죠.
제 모습이 세상에 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강해지려고 노력했죠.
중고등학교 시절을 불량하게 보내기도 했어요. 아버지의 납북 사실과 전쟁 때 목격한 참상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제
자신을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 안 듣게 하려 노력하셨죠. 그래서 배재고등학교 1학년 때 스케이트를 사주셨는데, 그게 아이스하키 스케이트였어요. 겨울이면 덕수궁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니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아주 연로한 수위가 계셨는데, 제가 스케이트 타는 걸 알고 아펜젤러 교장에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교장선생님이 아마 학교 어디에 아이스하키 장비가 있을 거라고 찾아보라고 해서 구석구석을 뒤졌던 기억이 나요.
옛날에 6.25 전쟁 때는 천정을 뚫고 지붕 밑에 뭘 많이 숨겼었거든요. 그래서 교장실 천정을 올라가봤어요.
그랬더니 아이스하키 장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뭐 정말 스케이트도 제대로 못 타면서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었어요.
Q. 배재고등학교 아이스하키부가 그때 만들어진 거네요.
네. 그러니까 아이스하키에 미쳐서 지냈죠. 그래서 공부를 좀 소홀히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사람이 막 오는데 잠깐 부친을 본 것 같아요. 환상이죠, 납치 당하신 분을 어떻게 봤겠어요. 그런데,
그 분이 “너 뭐하고 있어?” 이러시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내가 뭐 하는 건가’ 생각하게 됐죠.
그래서 수덕사를 찾아 들어갔어요. ‘내 인생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지 안되겠다.’싶었죠. 절간에서 한 1년 반쯤 있었어요.
제 모친께서 ‘이 녀석을 대학교는 보내야지 나중에 부친을 만나더라도 면목이 서겠다.’ 싶었나봐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 몰래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원서를 넣으셨어요. 수석 입학을 했죠.
아들이 절간을 찾아갔으니 철학과가 적성에 맞겠지란 지레짐작에서였어요.
Q. 어머니 예상대로 철학이 적성에 맞으셨나요?
전혀요. 철학에는 뜻이 없었어요. 오히려 소설에 심취해서 지냈어요. 독학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설 뻔도 하고요. 대학 1학년 때 집이 어려워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가정교사로 1년을 보냈는데 그게 지겨워지던 참에 우연히 공연을 준비하던 연희극예술연구회 회원을 만나게 됐어요. 그때가 3월이었는데, 5월에 연극 발표가 있다고 연극 준비를 하더라고요. ‘저놈들한테 붙어서 지내면 라면하고 담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어 연희극회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게 연극의 입문이었죠.
Q. 연희극예술연구회 활동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처음에는 막잡이를 했어요. 그때 꼭두각시 인형극을 했어요. 꼭두각시 인형극이라는 게 무대 크기가 우리 팔로 해서 한
팔 반 정도, 높이도 한 1m 정도, 그런 조그마한 간이무대인데 거기서 골무만한 인형하고 얼굴이 바구니처럼 큰 박첨지하고 등장인물이 그렇게 한 20명, 30명 떼로 나오고, 후반에는 평안감사 모친이 돌아가신 장면에서 상여가 나가고 절까지
지어주는 그런 8장에서 12장까지 있는 꼭두각시 인형극인데 거기에 막을 열었다 닫았다 해야 되잖아요.
그때 오현경 선배가 무대 아래에서 인형들, 박첨지 소리배우를 하셨어요. 제가 옆에서 막을 열면 대사를 하고,
닫으면서 ‘쉿’하고 신호를 주고… 그런 인연이 있지요. 그렇게 연극을 시작해서 신인예술제를 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연출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회로무대라는 팀을 만들어서 하게 됐죠.
Q. 처음 쓴 희곡이 1962년 국립극장 장막극 당선작이 되셨다고요?
오태석 선생은 말을 곱게 전달하는 것이 연극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통해 모국어를 순수하고 생생하게 가꾸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오태석 선생의 연극 중엔 흉악한 장면은 더러 나오지만, 욕은 없다는 것이 그의 바람을 보여준다.
<영광>이라는 작품이에요. 어느 날 명동 찻집에서 고등학교 동문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이 엄청난 상금을
걸고 시민예술제를 연다는 거예요. 예술제에서 9개 단체를 뽑는다는데 작품만 갖고 선정한다고 하더군요.
상금이 엄청나다는 말에 혹해서 연세춘추 다니는 친구한테 원고지를 구해 하룻밤에 쓴 게 바로 <영광>이었어요.
상금이 탐이 나 지원했는데 덜컥 당선이 됐어요. 솔직히 당선될 줄은 몰랐지만 막상 되니까 극단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회로무대'라는 동인제 극단(단원들이 극단에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지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극단)을 만들고 시작했죠. 그런데 하루 아침에 배우를 어디서 구해오겠어요. 그런데, 제 고등학교 동창들이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많이 들어갔었어요. 그 친구들하고 이화여대 성악과에 마침 사촌이 한 명 있어서 같이 해보자고 권유했죠.
어쨌든 무대에 올린 공연도 좋은 점수를 받아서 2등을 했고 주인공을 맡았던 철학과 동기는 연기상도 받았어요.
상금을 타기 위해 창작열을 불태웠던 경험은 또 있어요. 연세대에서 입학·졸업식 등 주요 행사에서 자주 불리는 '연세찬가'도 교내 가사 공모에서 상금이 탐이 나 급하게 쓴 노랫말이예요. 당시에 공연을 무대에 올려야 했는데, 제작비가
부족하더라고요. 그런데 학교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학교 찬가 공모를 한 거예요. 상금이 한 학기 등록금보다
많아서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도 돈이 남았을 정도였죠. 당시 연세대 교가는 백낙준 선생님이 지으셨는데 가사가 장편소설 수준으로 어려웠어요. 학생들이 따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연세대학교가 미션스쿨임을 활용해서
가사를 다시 썼어요. 그게 당선이 되어서 상금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연극을 올리고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나눠줬죠.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연극은 4할 정도만 전달하면 나머지 6할은 관객이 채우는 거예요.
일상에서 머리가 바빠서 쓰지 못하는 상상력을 연극을 보면서 동원하고,
각자의 머릿속에서 스스로 완성시키는 거예요.“
Q. 선생님께서는 우리 전통극 양식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오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오태석 선생은 독특한 자신의 연극세계를 펼쳐오며 화제를 일으켰다. 그 중 한 작품이 1995년 올린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오 선생은 원작의 대사를 모두 3,4조 혹은 4,4조의 우리말 운율로 바꾸었고, 원작과는 달리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고 난 뒤에도 두 집안이 화해하지 않는 결말을 통해 분단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은유하기도 했다.
국립극장에서 <물보라>라는 작품을 하고 났을 때 ‘이건 아니다’ 생각이 들더군요. 연극이라는 물건이 결국 서양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가 하는 것이 ‘흉내내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지, 심한 회의에 빠졌어요. 연극을 향한 뜻을 꺾어버릴
정도였죠. 그때 문예진흥원을 통해 미국에 가게 됐어요.
7개월 동안 미국의 브로드웨이에만 있었어요. 거기서 연극은 서양 것이라는 선입견을 이겨냈죠.
폴란드라든가 헝가리에서 온 연극들을 보고 제4의 벽, 훔쳐볼 수 있는 것이 연극이라는 서양적인 연극관이 다 무너진 것이죠. 관객을 보면서 연기를 하고, 관객과 같이 하는 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그래, 이런 게 연극이라면 내가
진짜 부자다!’라는 심정으로 브로드웨이 뒷골목에서 라마마 극장의 앨런 스튜어트의 도움을 받아서 열흘 동안 공연을
올렸어요. 경사진 객석에 경사진 무대를 가진 재미있는 공간이었는데, 그곳에서 <춘풍의 처>를 올렸어요.
제가 미싱질을 해서 ‘극단 뉴욕’, 하고 한글로 내리닫이 만장처럼 현수막을 내걸었어요. 그때 배우 안은숙 씨가 뉴욕에
있었는데, 차를 타고 거리를 들어서다가 한글로 큼지막하게 현수막이 내려진 걸 보고 울컥했다고 해요.
그때 미국사람들 반응이 ‘<춘풍의 처>라는 물건이 민속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왜 이리 모던하냐.
죽은 사람이면 유령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냐. 그런데 그게 왜 자연스러우냐.’ 설왕설래 하면서 이런 걸 왜 이제야 가지고 욌는지, 중국, 일본이 양식적으로 참 비슷하다면 한국 것은 다르다고 평가를 했어요.
가장 방황했던 시기, 연극에 대해 오해를 품고 있었던 시절에 연극을 이해하는 변화가 있었던 거죠.
Q. 우리 고유의 연극문법을 찾는 동안 힘이 돼주었던 분들은 누구인가요?
심우성 선생을 들 수 있죠. 그 분 덕분에 산대 극본을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산대놀이꾼들이 인간문화재라고 불리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 퀴퀴한 체취, 넉살, 말의 힘 등이 살아있는 그대로를 만날 수 있던 게 심우성 선생이 해온 작업 덕이었거든요. 작품 <초분>도 그분에게 처음 들은 말이었어요.
시신을 매장하는 게 아니라 햇빛에 말린다는 것. 냄새 나고 피바다인 것이 죽음인 줄로만 알았던 제게 죽음이 ‘건한 것’일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해주었어요. 그리고, 이야기 장사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분을 통해서 알았어요.
명동 카페 떼아뜨르 시절에 막걸리를 얻어먹으려고 기웃거렸는데 심우성 선생이 술을 사주면서 여러 재담을 들려주었어요. 그때 다 흡수한 것이죠.
동랑 유치진 선생도 계세요. 서른 살 무렵 저를 불러들여 남산 드라마센터 공간을 5년 동안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줬어요. 우리말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계기도 그 분 덕분이었죠. 몰리에르 탄생 300주년 기념공연으로 <스카팽의 간계>를 올리는데 이 작품을 번안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 식으로 만들라고요. 그래서 판소리도 뒤져보게 됐고 그러면서 우리 말 재미를 느끼게 됐죠.
Q. 그런데, ‘오태석 연극은 어렵다’는 평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판소리 무대를 보면 부채랑 침 닦는 수건, 단 두 가지만으로 9시간 동안 소리를 해요. 부채로 몽룡도 만들고,
방자도 만들고 별의별 짓을 다 하죠. 그런 무대를 즐긴 게 우리 조상입니다. 전 연극도 무대 위가 4할,
관객석이 6할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관객에게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남겨둬야 합니다.
생략된 부분을 채우고, 비약을 이으며 머리를 왕성하게 굴리고 상상하는 것, 그게 진짜 재미있는 거죠.
음식으로 친다면 연극 만드는 사람의 역할은 재료 깨끗이 손질해 차려놓는 것까지예요. 어떻게 요리해 먹을지는 관객이
결정하죠. 생략과 비약이 만들어놓은 틈으로 관객들이 들어와 마음대로 상상하고 해석하면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누구나 자신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꿰고 완성해낼 수 있어요. 저는 관객의 그 능력을 믿고 지금껏 작품을 만들었어요.
저는 우리 단원들에게 논어에 나오는 ‘거경이행간(居敬而行簡)’을 강조해요.
남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언행을 간결하게 하라는 뜻이죠. 관객을 믿을수록 대사가 짧아져요.
Q. 선생님께서 이끌고계신 극단 ‘목화’는 보기 드문 '동인제 극단'입니다.
‘동인제’를 고집하시는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배우 25명, 상임스태프 12명 정도 해서 약 40명이 활동 중이에요. 우리말, 우리몸짓, 우리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죠.
전국의 사투리를 채집하고 이를 연극언어로 발전시키는 작업과 전통춤,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 훈련을 병행하고 있어요.
목화는 아마 국내 유일의 동인제일 겁니다. 단원들이 식구와 같죠. 이 식구들이 현실에서 같이 밥을 먹고,
허구 속에서 자신을 축적해요. 그를 기반으로 확대시키고, 깊이 파고 들고 하는 거죠.
지금 단원들은 짧으면 7년 길게 15년을 함께한 이들이에요. 많을 때는 40명이나 됐죠. 그 숫자에서 들어오고 나갑니다.
연극 한 편을 올리기 위해 매일 8시간 이상 수개월을 연습해요. 동인제 극단이 갖는 힘이 뭐겠어요.
하루 종일 연극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연극은 허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연극쟁이는 그 허구 속에 최대한 많은 시간 머물러 있어야 해요. 그게 가능한 것이 동인제 극단이죠.
Q. 왜 ‘목화’라는 이름을 선택하셨나요?
껍데기는 딱딱하지만 속은 무엇보다 부드러운 목화, 겉과 속이 끊임없이 갈등하는 목화의 성질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도 닮았어요.
그래서 '목화'의 작품은 우리 전통극의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죠.
Q. 손병호, 황정민, 유해진, 성지루 등 목화 출신의 유명한 배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극단의 대표로서 무대에서 활약하시던 단원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나가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오태석 선생의 극단 ‘목화’는 거쳐간 단원들의 이름만으로도 빛난다. 오 선생은 단원들에게 '현실과 부딪히는 시간은
최소로, 연습실에 틀어박혀 허구에만 빠져 있으라'고 주문한다.
어차피 연극은 기초예술이에요. 모든 것이 무대예술을 파생시킬 수 있는 일종의 종자니까 여기서 대체로 한 10년 지내면
서른다섯 이후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정말 돈이 필요한 나이가 되죠. 그런데 동인제 연극으로서는 그것을 감당하기 힘드니까 떠나게 되죠. 실제로 서른 다섯에서 마흔 사이의 단원들이 많이 떠나게 돼요. 아쉽지만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죠.
Q. 선생님만의 연출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인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 짐짓 아는 척, 있는 척 꾸미는 것에 대해선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무대 위에선 연기자가 모두 맨발이어야 하는 것도 저만의 연출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죠.
사람이 제대로 힘을 주려면 맨발이어야 해요. 또, 계속 땀을 흘리는데 어떻게 분장을 하겠어요.
관객을 향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판소리나 탈춤 등 우리 전통 공연에서 따온 것이고요.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말을 곱게 전달하는 게 연극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생생하게 가꾸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Q. 선생님에게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태석 선생은 2006년 세계 최고의 극장으로 꼽히는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에 올려 현지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진정한 마스터’, ‘마법사'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후 바비칸왕립학교의 연극학도를 상대로 워크숍을 가졌다. 서양의 연극인들은 처음 보는 한국 연극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오태석 감독의 지휘에 열광하기도 했다.
차를 타고 가다 건널목에서 차단기가 내려오면 '머물러야 한다'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과 만나게 되죠.
이 때 '여름은 죽었고, 가을이 오는구나. 벼 이삭이 고개를 숙였구나' 등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제 안에 있는 것을 잠깐 알 수 있는 차단기 역할을 하는 게 연극과 예술이예요.
정신 없이 살아가다가 전혀 뜻밖의 사건을 만날 때. 이 때,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유턴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인생의 길에서 잠깐 멈춰 사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연극 아닐까요.
또, 연극은 필름처럼 간직할 수 없어요. 그저 흘러가는 것을 볼 뿐이죠.
Q.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가장 중점에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세계 최고의 공연문화 무대로 꼽히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개막작으로 초청받은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the Tempest)>가 2011년 8월 13일 에든버러 킹스시어터 무대에 올랐다. 객석을 메운 900여 명의 관객들은
연출가 오태석의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를 즐기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저는 관객의 입장에 있어요. 관객이 무대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짐작해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 애쓰죠.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품은 자타가 공인하는 연극이에요. 기원전에는 소포클레스가 있었고,
500년 전엔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연극의 틀을 제대로 이용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 할아버지죠. 그 얘기가 인간의 정체성이나 존재에 침착해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희곡을 만들었어요. 500년 전 그가 생각한 것을 저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매번 이 작품이 어떻게 관객과 가까워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죠.
Q. 젊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필독서는 무엇인가요?
일단 우리나라 5대 판소리는 꼭 봤으면 좋겠어요. 골계나 해학, 너스레, 우리 말 흐름의 만만함, 거침없음 등 이런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우리의 숨이 다 그 안에 있다는 의미죠.
우리 고유의 긴 숨이 있으니까 한 번쯤은 꼭 보길 추천하고 싶어요.
Q. 그 외에 젊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도 전해주세요.
저는 요즘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젊은이들 세계에 나가보면 그 어떤 나라 젊은이들보다 더 위대해요. 가장 빠르고, 가장 슬기롭고, 가장 대담하고, 가장 총명하죠.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현실이 힘들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자기 자신을 폄하하지 말고 꿈을 갖고 희망을 갖고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Q. 이 시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대학로의 미화원이요. 누군가가 버리고 간 것들을 주워 모아서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은 깨끗하게 정돈해서 다시 쓰게 하고, 누군가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대학로에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