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큰일이라고
우산을 쓰고 산을 올랐다. 한 걸음씩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이 미끄덩거렸다. 발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들이 바지 단을 타고 신발 속으로 들어왔다. 아들들은 할아버지 발뒤꿈치만 바라보며 촘촘히 따라 걷고, 그 뒤를 남편이 따른다. 남편 등에 매달린 울룩불룩한 가방 모서리에는 명태포 꼬리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아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질퍽한 발소리와 우산을 스치는 빗방울 소리만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것저것 놓기 시작했다. 대추와 밤, 사과와 배. 명태포와 오징어. 소주병을 흔들어 잔에 부었다. 그리고는 봉분 아래 길게 자리를 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우산도 한쪽으로 밀어둔 채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머리 등, 무릎까지도 빗물이 흠뻑 젖어 들었다. 젖은 오징어에서 좀 전보다 더 비릿한 냄새가 올라와 주위의 냄새를 묻히게 했다.
난 얼굴도 모르고 누구의 묘인지도 모를 곳에 절을 했다. 줄곧 축축함과 찝찝함이 내 마음을 더 번잡스럽게 했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비 오는 날에도 성묘를 해야 하는 아버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어제는 종일 찌짐을 굽고, 열 명의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뒤치다꺼리도 내 몫이었다.
그것은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 하나 그 고단함을 알아준들 어떻게 바뀌는 일이 될까. 젊은이들이 비혼을 하겠다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는 누가 하려고 할까. 난 산소를 내려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남편은 일찌감치 내 편이 아니기에 단념했다. 어머님이라면 이제 좀 달라져야 함을 아셔야 하지 않을까. 어제는 잠자코 있던 내 말문이 틔였다.
“어머님, 우리도 이제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인다는 것에 의미를 두면 안될까요? 차례 지낼 것도 아닌데 찌짐 굽지말고 맛난거 해먹어요 어머님.”
“뭣이 그리 큰일이라고. 나 때는 가마솥에 기름 두르고 종일 찌짐 굽고, 밤새도록 술상 보는게 일이었어. 요즘 명절은 명절도 아니야. 뭐 큰일이라고.”
“어머님에게는 그 일이 큰일이었다면 제게는 지금 있는 일이 큰일인데요. 옛날하고 비교하지 마시고 한번 생각해주셔요. 대체 누굴 위한 일인지요.”
어머님은 아무 말 없으셨다. 지금껏 어머님이 살아온 삶에 비하면 요즘 세상은 정말 편하다는 것이다. 편한 줄도 모르고 자식도 낳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어머님은 도리어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일까. 어머님 말씀처럼 사람이 하루 밥 세 끼 먹고 사는 것은 다 똑같은 일인데 말이다.
큰일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옛날에 먹고 사는 일이 큰일이었다면, 지금은 먹고 사는 일 외에 나 자신의 행복 추구가 더 큰 일이 된 것이다. 구태여 힘들게 음식을 장만하지 않고도 포장, 배달된 음식만으로 끼니를 떼울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대신해 줄 무언가가 넘친다. 굳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자식을 키우고, 죽을 때까지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할 의무도 없어졌다. 말 그대로 의무가 없고 의미만이 남은 것이다.
산을 내려오며 줄곧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는 요즘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지 말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요즘 세상이란 말에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여전히 의무와 의미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온전히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정작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아주 단편적이며 보편적인 삶이었다. 대개 아주 잠깐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이나 만족 추구가 대부분이다. 행복이란 이름의 깊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사람은 뭣이 큰일이어야 잘 사는 삶일까.
- 임지영 -
첫댓글 매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옛날엔 먹고 사는 게 큰일이었는데 요즘엔 뭣이 큰일일까
세월이 가면서 큰일의 의미도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
대체 사람은 뭣이 큰일이어야 잘 사는 삶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나이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
70대가 되니 일상생활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나가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