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따뜻한 어머니 품속 같다. 그곳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갈 때면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다. 요즈음은 찻길이 잘 뚫려 고향 가는 길이 순조롭다. 또한 서울에서 광주를 거치지 않고 옥과로 가는 버스가 생겨서 편리하다. 광주를 들러간다 해도 승용차가 늘고 시외버스 터미널이 넓게 변모해서 예전에 내가 겪었던 그런 일은 없다.
1982년 2월, 광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게 되었다. 미대 진학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취업을 위해 서울행 야간 완행열차에 올랐다. 장거리라 의자에 기대어 내내 눈을 붙이고 있었다. 어스름 새벽녘 동트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목적지인 영등포역에 도착해서 인천 고모집으로 갔다. 방을 구할 형편이 안 되어서 기숙사 있는 직장을 선택했다. 일요일 없이 근무할 때가 많았고 여름휴가도 짧았다. 그나마 매달 적금 넣으러 은행가는 일이 보람이었다.
그 해, 한가위가 다가왔다. 처음으로 고향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봉투를 준비해서 가족들에게 줄 용돈을 정성껏 넣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손수 벌어서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계신 조부모님과 부모님, 웃고 있는 동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버스표는 미리 예매를 해두어야만 고향에 갈 수 있었다. 너른 광장으로 이른 아침에 나가 줄을 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들 눈꺼풀이 풀려 있거나 연신 하품을 해댔다. 표 예매 시작은 오후 두 시부터였다. 매진될 수 있기 때문에 일곱 시간 내지는 열 시간을 잠 설치며 나와 있는 것이다. 급한 볼 일이 생기면 바로 뒷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다녀왔다. 뙤약볕에 오래 있으니 현기증이 나고 지루하기만 했다. 부서져 내리는 한 줌 햇살에 실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노라니 위안이 되었다. 늦은 오후 어렵사리 표를 구해 기숙사로 돌아왔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고향 갈 생각에 마음은 뿌듯했다.
추석 전날, 기숙사를 뒤로 하고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짐은 작은 가방과 끈 달린 핸드백이 전부였다. 가방에는 옷과 책이, 핸드백 속에는 용돈과 소지품이 들어 있었다. 소지품은 즐겨 읽는 시가 적힌 수첩과 의료 보험증, 신분증, 지갑 등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여섯 시간을 차 안에서 보냈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감상하다가 책을 꺼내 읽었다. 재미있는 단편소설이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신문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오순도순 정다워 보였다. 버스 안, 선반 위에는 짐 가방과 선물 꾸러미들이 오밀조밀 놓여있었다. 평화로움이 꿈처럼 아득하게 흘러갔다.
드디어 광주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사방에서 온 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드문 시절이라 버스 이용객이 많았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옥과행 버스를 타기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이 가까워질수록 와글와글 소란스러웠다. 첫 귀향길이라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좁다란 터미널 안으로 섣불리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상황을 잘 살펴보고 움직여야 했었다. 이곳저곳에서 온 귀성객들이 모여드는 시간대였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몰랐기에 용감하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옥과행 버스 타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버스 타는 입구가 저만치서 보였다. 그런데 왠지 불길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진압용 방망이를 들고 서성이는 전경들이 눈에 띄었다. 얼마 못 가서 진흙땅을 밟은 듯 한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 시외버스 터미널 안은 너무 비좁았다. 꼼짝 못 하고 서 있는데 귀성객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속 나온 전경들이 진압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인파 속에 끼어 진땀을 뺐다. 두통이 오고 어지러웠다. 금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 어떤 남자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숨통이 트이는 순간 어깨에 멘 핸드백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과 몸 씨름을 하다가 끈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핸드백에 들어 있는 용돈이나 물건들이 아른거렸다. 그보다 차비마저 없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얗고 눈앞이 캄캄했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돈이 없으니 인천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스무 살인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법을 찾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이런 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부끄럼도 잊은 채 다가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두말 않고 차비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출발하려는 버스에 급히 올랐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보니 그분의 연락처를 묻지 못한 걸 알았다. 죄송한 마음에 얼른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주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마을 어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도 그리 곱던 쪽빛 하늘도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돌돌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정겹던 돌담도 외면한 채 어떻게 고향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동네 끝자락, 산 아래 있는 우리 집에 가려면 여러 어르신들을 뵙기 마련인데 기억조차 없었다. 나설 때만 해도 이처럼 힘든 귀향길이 될 줄 상상이나 했으랴.
기진맥진해서 고향 마당에 들어서자 오빠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창백한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오빠가 이상했는지 뒤따라 들어왔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오빠의 눈빛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몇 날 며칠을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귀향길이던가. 어머니는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잃어버린 돈이나 소지품들은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명절을 보내고 착잡한 마음으로 인천에 돌아왔다. 열흘이 지나고 뜻밖에 신분증과 의료 보험증이 우편으로 왔다. 목포경찰서에서 복무하는 한 전경이 보내주었다. 수첩에 적어둔 내 주소를 본 모양이었다. 그가 쓴 친절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수습하는 과정에서 터미널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백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 발에 밟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을지 안 봐도 눈에 그려졌다. 수첩과 돈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돌려준다고 했다. 나는 주민등록증과 의료 보험증 보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답장을 보냈다. 며칠이 지난 뒤에 그의 두 번째 편지를 받았다. 자신을 소개한 내용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편지가 다소나마 악몽 같은 기억을 정화시켜주었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푸르기만 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추석 명절 준비를 하면서 까마득한 그날 일이 떠오른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준 그분들 생각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첫댓글 추억의 한 구석은 힘이 들었겠지만
기억의 파편은 아름다운 정서를 깨어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맞는 말씀입니다
힘들었던 기억도 지나고 보면
그 속에 아름다운 정서가
깔려있더군요.
유상천 시인님 감사합니다 ^^
심재순 작가님의 글이 인간적이고 따뜻합니다 ~~
시련을 겪은 작가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애시리게 느껴집니다 ~~
저도 20살, 21살에 서울 미아리에 있던 삼양라면 공장에 다닌 적이 있어요 ~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12시간 씩 노동하는 2교대 일을 한 적이 있어요 ~~^^
월급은 그때 돈으로 6~7만원이었던 것 같아요 ~~~
지금은 그랬었지 하면서 그 시절을 추억해요 ~~
그때는 첫 직장생활이라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게 때론
사회생활 하는데 자양분이
되더군요.
시인님도 고생 많으셨네요.
김현희 시인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전귀향길의 추억담은 하나씩 다 가졌을 겁니다. 언젠가는 저도 털어놔야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황당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죠. 또 차비를 선뜻 주신분이나 핸드백을 주워 보내주신 분의 온정이 참 고마워서도ᆢ근데, 그 소란의 정체는 혹시 오일팔의 일부였나요?
오일팔은 제가 여고 2학년 때
였답니다. 터미널 안은 좁고
명절이면 귀성객이 사방에서
몰려 들어서 생긴 일이랍니다.
그 뒤로는 관광버스를 이용해서
다녔는데 사람들이 덜 몰리는
시간대에 고향을 가곤 했지요.
작가님의 귀향담도 듣고 싶습니다.
늘 친절한 댓글 주신
정암 작가님 감사합니다 ^^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작가님 댓글 보고 글을 다시
읽어보니 퇴고할 부분이 보이더군요.
오일팔 오해 소지도
없앨 겸 연도를 밝혔습니다.
내용도 조금 수정했고요.
덕분입니다~~😊
@혜인 심재순 궁금해서 여쭈었더니...^^
감사합니다. 작가님.
20살의 어린 아가씨를 떠올리며 읽다가 눈씨울 적셔졌어요,
첫 명절귀향이니 얼마나 가슴은 부풀었을까, 가족들 하나하나 생각하며 준비했을 선물과 마음들
내가 다 속상했네요^^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
또 따뜻한 이 있어서 치유가 되었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담담했는데
수향 시인님 댓글에 나도 모르게
스무 살이 되어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울음을 참던 아이가
얼러주며 안아준 엄마 품에서
엉엉 우는 것처럼요 ㅋ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목젖이 아리고 눈물이 마구 흐르네요. 기억을 더듬으며 써 내려간 행간을 따라 마음 졸이다가
걱정하는 오빠 앞에서 왈칵 흘린 수필가님 눈물 때문에...
그 핸드백을 잊어버리고 얼마나 허망했을까
제가 다 온몸에 힘이 빠지네요.
스무 살에 나는 뭐 했나 돌아봅니다.
돈 벌어 미대 가겠다는 당찬 결심으로 부산 가기 전에
포항 인근 한 볼링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기억이 떠올라 희미하게 웃습니다.
코앞에 다가온 추석 명절.
어린 날처럼 행복하고 설레는 맘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저 또한 고향에 엄니 살아계시니 행복합니다.
수필가님의 글이 올라오니 참 좋군요.^^
비향 시인님의 여린 감성을
지극했나봅니다.
꿈도 비슷했고요. 여상 가서
은행에 취직하라는 거
미대가겠다고 우겨서 인문계를
선택했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어야 말이지요 ㅎ
요즘은 용돈도 계좌이체하니
잃어버릴 일도 없습니다.
정성어린 댓글에 감사합니다 ^^
아스라한 옛 순정 수필 잘 읽었습니다.
소년 같은 윤강 작가님은 숨겨져
있는 순정을 읽으셨군요 ㅎ
바쁘실텐데 긴글 읽고 댓글
달아주신 마음에 감사합니다 ^^
휴대폰으로 빼꼼 열어서
몇십년 전으로 돌아가
심시인님의 첫 귀향길
한 편의 영화처럼 잘 읽었습니다
쿵!
얼마나 힘든 귀향길이었으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울컥울컥 그려질까요
열심히 모은 돈으로
가족들 추석 용돈을 담아놓은
몇개의 봉투..
스무살 처녀의
속 깊은 마음 씀씀이에
읽는 내내 뭉클했습니다
그래도
해피 반전이 있어서 다행이예요
돈을 빌려주신 아주머니
가방 찾아 연락주신 경찰관
복 받으셨을거예요
첫눈, 첫사랑처럼 특별했던
첫 귀향길이라 어제 일인듯
또렷하게 기억이 나나봅니다.
글 속에 담긴 제 마음을
헤아려주고 진심어린 댓글에
감동입니다.
김은희 시인님 감사합니다 ^^
작가님 수필을 읽으니
울 큰언니 생각이 많이나는데
수필이 너무 재밌다고 함
안될까요? ㅎ
아릿하게 아파오는 글들 속
손 내밀어준 아주머니,전경님..
저도 이십대때 직장을 잠깐 다녔는데
어음 심부름으로 문래동 은행문
닫기전까지 가야하는데 늦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까
어떤분이 자가용을 턔워 은행까지
데려다 주신 기억이나요^^
절묘한 타이밍에 누군가의 도움은
평생 잊지 못할듯합니다.
글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독자들이 읽는 거라서 그 말이
반가운데요 ㅎ
이 글이 시인님 추억 하나를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군요.
공감해주는 고운 마음에
감사합니다 ^^
1982년도...저는 초등 5학년이었는데요..
'한가위'라고 하면 친구들이랑 뛰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학창시절에는 교우관계가 좋았거든요......
혜인 선생님의 추억 속에서 동생들 돌보느라 고생했던 언니가 떠오릅니다. 울 언니도 참 고생많으셨는데...
현장에 있는 듯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는 되게 힘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고생이라는
생각이 안듭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동생들을 돌보는
입장도 아니고 제 앞가림하는 정도
였거든요.
친구들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았던 고운 추억도 있답니다 ㅎ
긴글 읽고 관심 댓글 주신 작가님
감사합니다 ^^
진짜 고생담이 그려집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첫 귀향길에 예기치 못한 일로 얼마나 마음고생 하셨을지 짐작이 가네요
그래도 글거리 하나 장만한 샘이 되어 밑진장사는 아닌듯 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후, 처음
귀향길이라 설렘이 컸던만큼
실망도 크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밑진 장사가 아니라는 말씀에
공감하며 웃음이 납니다 ㅎ
예인 작가님 감사합니다 ^^
그래도 돌려 받을 수 있었으니 ..그 정화된 기분을 알 것 같아요..한 시대의 단면을 잘도 그려내셨네요
늘 건필하소서..^^
수첩과 돈은 받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온정을 받았기에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힘이 되는 발행인님 댓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선생님의 마음이 아름답기에
어려운 난관속에서도
아름다운 복을 받으셨네요.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필은 길어서 읽기
지루하셨을텐데 청초 시인님
감사합니다 ^^
지금은 광주도 많이 발전하였지요.
옥과에 바로 가는 버스가 생긴
이후, 광주를 못 간 것 같아요
@혜인 심재순 네! 선생님!
지금은 광주공용터미널이
우리나라에서 1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되었답니다.
환절기 건강유념하세요. 선생님!
@청초 양춘자
와아! 기분 좋은데요 ㅎ
소식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님도 항상 건강하시길요
제가 답글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일일까요? 암만 찾아봐도 없네요 ㅠ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때가 추석쯤이였네요 제가 바빠서
잠깐 글을 읽고 답글 써야지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나 봅니다ㅠ
변명을 이리 주저리~주저리 ㅋㅋ
용서해 주실꺼쥬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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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님 시를 읽으니
저도 그 시절 콩나물 시루 열차에 실려서
고향을 오갔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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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이던 첫 귀향길에 엄청난 일을 겪으셨군요ㅠ
생각만해도 정말 아찔합니다
그래도 맘씨 좋으신 아주머니 덕분에
구사일생 하셨다니 정말 다행이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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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예전에 차비 없다는분들 돈 여러번 줬었는데
어떤분이 저사람들 사기라고 주지말라고 하더라구요 ㅠ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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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님은 누가봐도 진심인거 알았겠지요
집에가서 눈물 터뜨렸을 20살 어린 혜인님을
생각하니 넘 안쓰러워요
전경이 편지와 함께 보내온것은
또 다른 선물이였을듯요
아름답고 넉넉한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좀 더 살만한것 같아요~^^
혜인님의 식겁했던 추억 덕분에
이렇게 좋은 수필도 탄생했으니 성공입니다~^^
아련했던 그 시절로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
다시 한번 9월의 카페상 당선 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
용서라니요 ㅎㅎ
댓글 안 다셔도 안 서운합니다.
수필은 길어서 바쁘다보면 놓칠 수도 있더군요.
늦게 다신만큼 정성 가득 담은
긴 댓글에 고운 마음이 느껴져
감동입니다.
초향 시인님, 즐거운 휴일
보내시고 축하도 감사합니다 ^^
"첫 귀향길"을 잘 읽었습니다.
저가 겪었던 비슷한 추억이 소환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고마운 분들이
있어서 살만 합니다.
내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 분들 어찌 잊겠습니까!
김명화 작가님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베풀어주신 따뜻한 정은 잊을 수 없더군요 ^^